A Fortune-telling Princess RAW novel - Chapter (118)
“너 혹시 알고 있었어?”
그라시아 제국으로 떠나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 루비 반지도 갖고 가시는 게 어때요? 아가씨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데.’
‘나야 뭐든 잘 어울리지.’
‘혹시 모르잖아요?’
‘뭐가?’
‘이 반지가 아가씨께 새로운 만남을 선물할 수도 있지요.’
‘뭐래?’
여행 물품을 담을 때 유독 루비 반지를 강조하며 챙기던 녀석의 말이 현 상황과 맞물려 이상하게 거슬린다.
새로운 만남… 그게 저 인간이었어?
“진짜 알고 있었던 거야?”
“전 늘 아가씨의 행복을 바란답니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
“하!”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영혼을 직접 관리했던 놈인 만큼, 제 친부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아가씨, 그분과의 만남은 어떠…….”
“도르만.”
“네.”
“5초 줄게.”
“예?”
“5초가 지나도 네가 내 눈앞에 있다면 제노가 내 몸에 들어올 거야. 그리고 널 죽기 전까지 두들겨 팰 거야.”
“흐억!”
“하나, 둘…….”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오오!”
도르만이 후다닥 뛰쳐나가자 옆에 서 있던 제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카밀라의 입에서 다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이런 건 미리 말해 줘야 할 거 아냐.”
라비와 내 친부가 살아 있,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붉은 눈… 에스크라가의 피를 이은 자의 특징이다.’
“…라비는 붉은 눈이 아니잖아.”
에스크라 공작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럼 라비는? 그가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대체 뭐야?
‘설마 라비가…….’
우웅- 우우웅-
그때 마침 침대 옆에 놓아둔 통신 구슬이 시끄럽게 울어 댔다.
카밀라는 조금은 멍해진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통신을 연결했다.
─ 야! 뭐 한다고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라비.
─ 내가 몇 번이나 연락한 줄 알아! 대체 어디 있……!
“오라비.”
─ …뭐야?
제 연락을 바로 받지 않은 이유가 뭐냐며 화를 내던 그가 멈칫했다.
─ 목소리가 또 왜 그 모양이야? 무슨 일 있어?
“…….”
─ 무슨 일이냐니까! 또 뭐야?
아무런 대꾸도 못 하자 그의 목소리에 걱정 어린 기색이 담겼다. 신기하게도 그 목소리에 경직되었던 몸이 스르륵 풀렸다.
미쳤구나, 정말. 저 인간 목소리에 이런 기분이 들다니.
“그냥… 하…….”
─ 야.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자 라비의 음성이 더욱 심각해졌다.
─ 너 왜 그래?
“그냥…….”
─ 그냥 뭐?
“그냥… 갑자기 오라비가 보고 싶네.”
─ …….
통신 구슬이 조용해졌다. 만약 지금 얼굴이 보였다면 아주 황당해하는 라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저게 죽다 살아나더니 정말 맛이 갔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 기다려. 데리러 갈 테니까.
“뭐?”
그런데 이어진 그의 말은 무척 뜻밖이었다.
─ 아버지와 형이 너 데리러 간다고 준비 중이야. 이번 일 벌인 배후 찾으면 바로 출발할 거라고 하셨어. 나도 갈 테니까 기다려.
“…안 바빠?”
─ 안 바빠.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루가 왜 24시간밖에 안 되는 거냐며 늘 짜증을 내던 인간이.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다시 터져 버렸다.
─ 지금 웃음이 나오냐! 이게 죽을 뻔한 주제에 뭐가 좋아서 자꾸 웃어!
“그러게.”
왜 자꾸 이리 웃음이 날까? 저 발끝에서부터 뭔가 따듯한 것이 올라와 웃음을 자꾸 자극했다.
─ 카밀라.
“……!”
그때 통신 구슬에서 아주 익숙한 다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카밀라는 그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버지.”
─ 괜찮니?
자신의 안부를 묻는 짧은 한마디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 카밀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지?
이상하게 저분 앞에서 자꾸 우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 같았다. 미쳤나 봐, 진짜.
─ 카밀라.
“괜찮아요, 아버지.”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소르펠 공작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 자신의 감정을 읽은 듯했다.
─ 곧 데리러 가마.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 카밀라.
“마무리, 마무리는 하고 가야죠.”
그래, 마무리.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평생 찜찜할 것 같다. 원치 않아도 그가, 친아버지라는 존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 테니까.
─ 야! 너 지금 사업이 중요해? 그런 일까지 당한 주제에 계속 거기 붙어 있겠다고? 정신 차려!
라비가 다시 끼어들었다. 마무리, 그 단어를 그라시아 제국과의 사업으로 오해한 그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 당장 돌아올 준비해!
“걱정 마. 자주 연락할게.”
─ 너……!
“끊는다.”
─ 카밀……!
통신 구슬을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카밀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알아봐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라비…….”
그와 자신의 눈 색깔이 왜 다른 것인지.
다시금 밀려드는 갑갑함에 그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연신 흘러나왔다.
* * *
“흐음.”
이른 아침,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 밖으로 나온 집사 루브는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택 앞에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발 빨리 발견해 달라는 듯 정문 앞 중앙에 놓여 있는 상자에 가까이 다가간 그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피 냄새.
상자에서 아주 익숙한 향이 풍겨 왔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루브는 주변을 잠시 살폈다.
밤새 보초를 돌던 이들이 있었을 텐데, 이 상자가 지금 자신의 눈에 발견되었다는 건…….
주변에 별다른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루브는 상자를 바로 열었다.
“…….”
상자 안을 본 그의 얼굴이 살며시 굳어졌다. 피가 묻은 상자 안에는 그도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가브엘 후작.
상자 안에는 글씨도 적혀 있었다.
그가 배후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무엇에 대한 배후를 말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가브엘 후작을 죽인 뒤, 그를 상자에 실어 소르펠 공작저로 보낸 게 누구인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쯧.”
짧게 혀를 찬 그는 바로 상자를 닫은 후 그걸 들고 소르펠 공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브엘 후작이?”
“아무래도 카밀라 님께 쌓인 게 많았나 봅니다.”
“쌓인 거라니?”
“마력석 사업도 그렇고, 딸의 치부까지 밝혀내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하였으니까요.”
“고작 그깟 일로 사람을 죽이려 했단 말인가!”
“원래 뒤끝이 긴 분이지 않습니까.”
루브는 가볍게 첨언했다.
가브엘 후작에 반하다 사라지거나 죽은 자가 수두룩하다. 증거가 없어 그를 벌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소행임을 다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그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지만 말이다.
“이자가 정말 배후였단 말이지…….”
소르펠 공작은 이미 죽어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가브엘 후작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손으로 찾아 죽이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아쉬웠다.
“가브엘 후작을 죽인 건 아무래도 그들이겠군.”
“아마도요.”
암살 집단 ‘칸’.
최근 소르펠 공작가와 황실에서 페이블러 제국 내 칸 지부를 하나하나 찾아 처리하는 중이었다. 아마 꼬리를 자를 목적으로 배후를 직접 갖다 바친 것 같았다.
“더 이상 자신들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뜻이겠죠.”
“우리와 황실을 동시에 상대하느니 가브엘 후작 한 명을 처리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나 보군.”
“의뢰인들에게 신용 점수는 완전히 떨어지겠네요.”
의뢰자를 죽이다니. 평소의 칸 조직답지 않은 행동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의뢰자를 보호하는 게 그들의 철칙이었는데 말이지.
“어쩌면 이놈이 먼저 지레 겁을 먹고 움직였을지도 모르고.”
소르펠 공작의 말에 루브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에도 그럴 가능성이 무척 커 보였다.
“어쨌든 빠른 판단이군. 끝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자신도 그렇지만 황실에서도, 특히 에드센 황태자가 이번 일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절대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실에 보고해.”
“알겠습니다.”
집사 루브는 가브엘 후작의 머리가 담긴 상자를 닫아 한쪽으로 치웠다. 그래도 나름 제국 안에서 권력 꽤나 쓰던 이인데 끝이 너무 초라했다.
자업자득이지 뭐. 루브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그나저나 아가씨께선 어떠십니까?”
“좀 더 거기에 있겠다는군.”
“그런 일을 겪으시고도 말입니까?”
“그 녀석 고집을 누가 꺾겠나.”
카밀라를 떠올린 소르펠 공작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데리고 왔으면 좋겠거늘.
“왜 계속 거기에 있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사람을 붙일까요?”
“그러는 게 좋겠어.”
호위 기사로 만족할 게 아니라 애초에 은밀히 사람을 붙여 둘 것을 그랬다. 설마 그라시아 제국에서 그런 일을 겪게 될 거라곤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의 안일함에 소르펠 공작은 연신 혀를 찼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던 카밀라의 목소리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혹 자신이 모르는 뭔가 다른 일이 또 있는 걸까?
“최대한 빨리.”
“네.”
명을 내리는 소르펠 공작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기억 상실이요?”
“네.”
“하…….”
예전에야 너무도 흔한 소재였지만, 이제는 드라마에 나오는 순간 시청자들의 온갖 쌍욕과 식상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그 기억 상실?
자신을 찾아온 알트온 백작의 설명에 카밀라는 한동안 말없이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네.
“사고가 있었습니다.”
“무슨 사고요?”
“오래전에, 그러니까 18년 전이죠. 업무상 페이블러 제국을 방문한 카이스 님을 공격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무리가 에스크라 공작의 친동생이었다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에스크라가의 후계자로 내정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동생 쪽에서 카이스가 타지로 떠난 틈을 타 그를 공격했고, 결국 성공한 것이다.
“당시 그분을 수행하던 기사에게 카이스 님이 머리 쪽을 심하게 다치셨다는 연락이 온 걸 끝으로 소식이 끊겼는데…….”
이후 카이스와 동행했던 이들은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카이스 에스크라의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희망을 품은 이들이 오랫동안 그를 찾아다녔지만 큰 소득이 없었다.
그라시아 제국이었다면 몰라도 타국에서 그의 행적을 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동생 쪽이 먼저 카이스를 찾게 되는 걸 막기 위해 더욱 은밀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그분이 스스로 돌아오셨습니다.”
카이스가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