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ortune-telling Princess RAW novel - Chapter (158)
“앉게.”
“네, 폐하.”
속마음과 달리 카밀라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이미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름을 모른다는 거지?’
그녀의 시선이 힐끔 다시 황제의 뒤에 줄지어 서 있는 귀신들에게 향했다.
며칠 전에 저들의 수를 계산해 카밀라는 황실 족보를 차근차근 되짚어 갔다. 이러면 제일 처음 자식의 몸을 뺏은 미친 황제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알베르토 드 페이블러. 이 이름 아냐?’
‘아니다.’
‘아니라고? 죽은 자의 수대로라면 이자가 맞는데?’
‘누군가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르길래 혹시나 하여 불러 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더군.’
‘그럼 뭐야? 저 몸에 들어간 건 대체 누군데?’
‘애초에 황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혹시나 싶어 앞뒤로 황제의 이름을 몇 개 더 적어 보여 줬지만, 다 아니라는 하벨의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황실 사람도 아닌 게 황제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네?’
더 끔찍하다. 황가의 핏줄도 아닌 것이 육신만 빌려 저리 황제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잖아.
“차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향이 너무 좋네요. 잘 마시겠습니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머릿속과 달리 카밀라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긴장감이 오를수록 피어오르는 연기력! 칭찬해!
“얼마 전부터 자네 주변이 시끌시끌하더군.”
페이블러 황제 역시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라니아라고 했던가? 아주 기이한 현상을 보이며 죽었다던데.”
기이하긴 했지. 온몸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가 완전히 부서져 죽었으니까. 그 현상이라면 네가 더 잘 알지 않냐? 그 여자, 너랑 한패였잖아.
“자네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후에 그렇게 됐다고 들었네.”
카밀라는 마른침이 삼켜지는 걸 애써 참았다. 순간적으로 보인 그의 눈빛이 너무도 매서웠기 때문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황제가 이렇게 자신을 따로 불러낸 이유를 말이다.
‘지금 떠보는 거지?’
뭔가 눈치라도 챈 건가?
사냥터부터 시작해 이번 수호의 검까지. 저 때문에 틀어진 일들이 수두룩했다.
저쪽에서 봤을 때 자신이 얼마나 눈엣가시 같을까? 그렇다고 설마 이 자리에서 바로 쓱싹- 해치우려는 건 아니겠지?
“신수를 보더니 갑자기 그리되었답니다.”
“신수?”
“네, 저희 가문의 신수가 크게 한 번 울었는데 갑자기 주저앉더니 몸이 빠르게 썩어 가더군요.”
카밀라는 하벨에게 진명을 들어 라니아를 없앤 사실을 철저히 숨기며 대신 신수를 들먹였다.
“허허, 신수라…….”
페이블러 황제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수의 능력으로 그게 가능한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밀라는 애써 태연한 척 빙그레 웃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런 연기야 식은 죽 먹기지.
“수호의 검은…….”
“요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프답니다.”
카밀라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말로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이빌런가의 시녀장이 검을 훔치려 드는 걸 보고 급히 검을 뺏어 들었는데 갑자기 빛이 나지 뭐예요.”
이건 뭐, 거짓은 아니지.
“이후로는 기억이 나질 않아요. 다른 이들은 제가 적들을 쓰러트렸다고 하는데, 글쎄요. 그보다는 검이 꼭 절 조종한 것처럼…….”
이것도 진실. 제노에 대한 얘기가 쏘옥 빠졌지만, 그때의 일이 선명하지 않은 건 정말로 사실이다.
“그래서 그날의 일에 대해선 말씀드릴 게 별로 없답니다.”
방실방실.
“…….”
황제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카밀라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런 카밀라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혔다.
‘와, 씨.’
싸늘하다. 미소를 지운 황제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인자함이나 푸근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에 대해 아는 건?”
“네?”
“딱히 없나?”
아뇨. 아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죠. 카밀라는 툭 던진 그의 질문에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표정만은 덤덤함을 어떻게든 유지했다.
역시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건 나를 떠보기 위한 거였나?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는데?
“폐하의 업적이야 제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저 또한 그중 하나이고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나긋나긋한 말투에 초롱초롱한 눈빛은 덤이다. 진심으로 그를 존경한다는 듯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이번에도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
황제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헤헤 웃어 댔다.
‘제노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자신이 오늘 이 시간에 이곳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황실 안에서 뭔 짓을 하겠나 싶었다.
‘그런데 저 인간의 기세가 영 심상치가 않은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도 그렇고, 수틀리면 진짜 나 여기서 죽는 거 아냐? 궁 안에서 황제가 시체 하나 처리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숨 막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본능을 카밀라는 간신히 눌렀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페이블러 황제의 시선에 점점 태연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덜컹.
“실례.”
그때였다. 누군가 의자를 빼내며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에 풀썩 앉았다.
“저도 차 한잔 주시겠습니까.”
바로 에스크라 공작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눈이 커졌던 페이블러 황제의 미간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에스크라 공작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응시할 뿐이었다.
“아니면, 벌써 티파티가 끝났나요? 그렇다면…….”
애초에 차 따윈 마실 생각도 없었던 듯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는 페이블러 황제의 모습에 그는 옳다구나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따님은 그만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페이블러 황제의 허락 따윈 듣지도 않았다. 카밀라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환장하겠네.’
이 인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 앞에서도 이러는 거야? 겁은 예전에 상실한 건 알고 있었지만, 사신으로 와서 이래도 되는 거냐고.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카밀라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카이스 공.”
“네, 폐하.”
그제야 페이블러 황제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를 초대한 기억은 없네만.”
“다행히 기억력은 멀쩡하시군요.”
카밀라는 다시 뜨악한 표정으로 에스크라 공작을 바라봤다.
“전 또 제 따님을 데려다 놓고 살기를 팍팍 뿌리시기에 노망이라도 나신 줄 알았습니다.”
헉! 노망이라니! 지금 황제한테 노망난 인간이라고 대놓고 말한 거야?
“그대야말로 몸이 어디 아픈 건가? 정신이 없는 것 같군.”
오! 너도 정신줄 놓은 거냐고 돌려 말하기?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어쩌나? 타격감은 완전 제로네. 에스크라 공작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인 후 그대로 카밀라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니, 진짜 이래도 돼?’
그를 따라나서며 카밀라는 뒤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뒤통수가 뜨끈뜨끈한 것이 황제가 지금 어떤 표정일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내가 애초에 깽판 쳐 준다고 할 때 들을 것이지.”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무슨 생각이라니?”
그렇게 온실을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후에야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저분이 누군지 몰라요?”
“알지. 우리 따님께서 그다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던 놈.”
놈? 지금 놈이라고 한 거야? 카밀라는 굳어진 얼굴로 급히 주변을 살폈다. 혹여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봐.
“진짜 감옥에라도 갇히면 어쩌려고 그래요?”
“누가? 내가?”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에스크라 공작은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감히 누가 날?”
이어진 그의 말에 카밀라는 입을 멍하니 벌렸다.
‘감히’라는 단어가 저리 잘 어울리는 인간이 또 있을까? 도도함의 끝을 달리는 그의 모습에 카밀라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 걱정해 준 건가?”
순간 에스크라 공작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전쟁 날까 봐 그래요. 전쟁!”
“나라고 해.”
“네에?”
“안 그래도 손보고 싶은 것들이 이곳에 좀 많아서 말이야. 전쟁 나면 오히려 나야 좋지.”
…혹시 그 손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소르펠 가문 사람은 아니겠죠?
“그나저나 우리 따님께선 오늘 할 일과는 다 끝나셨나? 그럼 나와 차나 한잔할까?”
“바빠요.”
“…너만 바쁜 게 아니라 나도 바빠. 그래도 널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려고…….”
“안 내셔도 돼요. 우리 각자 볼일 봅시다.”
“너무하네.”
투덜거리는 에스크라 공작을 뒤로한 채 카밀라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궁을 벗어났다.
정말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 * *
“드디어 만들어진 거야?”
“네, 조금 전에 마탑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오.”
궁을 나와 바로 고스트 상회를 찾은 카밀라는 제 앞에 놓인 작은 기계를 보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에 영상석을 넣으면?”
“그림이 나오지요.”
크리스의 대답을 들으며 카밀라는 서랍에 넣어 둔 영상석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킹과 어린 리오가 함께 노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정원에서 과일을 나눠 먹는 모습이 귀여워 찍어 뒀었다.
“여기, 이거야.”
리오가 마지막 남은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물자 킹이 그걸 점프해 뺏어 먹는다고 입을 갖다 대는 장면.
원하는 게 나오자 카밀라가 스톱 버튼을 눌렀다. 사과 하나를 두고 싸우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우우웅-
영상이 멈추자 기계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천천히 그림… 아니, 사진이 뽑혀 나왔다. 두 녀석이 사과 하나를 양쪽에서 물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진짜 되네.”
영상 속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