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ortune-telling Princess RAW novel - Chapter (168)
Chapter. 풍요의 축제
“…제이너?”
“응,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긴 뭐가 오랜만이야! 우리 얼마 전에도 봤잖아!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면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가 왜 저기에 앉아 있는 걸까? 그것도 저리 당당히?
“저쪽에서 보고 처음이지?”
“아……!”
칸의 주인으로 와 있는 게 아니구나.
이어진 그의 인사에 아차 싶었다.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에스크라 공작의 아들, 그 가문의 장남으로 이곳에 온 거라는 말인 거지?
“아버지가 가 보라고 하셔서.”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제이너의 입에서 에스크라 공작이 언급됐다.
“쯧.”
에스크라 공작, 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이곳의 주인으로서 손님을 접대하고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르펠 공작의 미간이 습관처럼 찌푸려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1도 없던 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면서 말이다.
“설마 그대도 내 딸을 데려가려고 온 건가?”
“동생을 옆에서 잘 지키라는 명만 받았습니다.”
“동생?”
“아, 혹시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조금은 처연한 미소로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네자 냉랭했던 소르펠 공작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이미 카밀라는 제게 소중한 동생인지라, 기분 나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말에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끝까지 동생이라는 말은 거두지 않겠다는 건가?
그래도 아비 되는 자보다는 예의가 무척 바른 듯하다. 그건 마음에 드는군.
‘속지 마세요!’
저거 다 연기라고요! 와, 저 인간이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건 진작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저러다 울겠네.
‘배우 해도 되겠어.’
세상 가장 선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너를 보며 카밀라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머물겠다는 건가.”
“동생 옆에 있으면 안 될까요?”
제이너가 다시 가련한 표정을 짓는다.
“한 놈이 갔다 했더니.”
그놈이 누군지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짧게 혀를 찬 소르펠 공작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옆에 시립해 있는 집사 루브를 바라보며 간단히 명을 내렸다.
“방을 내주게.”
“네, 가주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쫓아낼 수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카밀라를 찾아온 손님이지 않은가.
“그래도 아비보다는 나은 것 같군.”
아버지! 속지 마시라고요!
“감사합니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선 제이너는 끝까지 예의 바른 모습으로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곧 지내실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집사 루브도 곧바로 응접실을 나섰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자 카밀라는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쩐 일이야?”
에스크라 공작도 그러더니 이 무슨 갑작스러운 등장이란 말인가! 지금 돌아가면서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흐음.”
의자에 몸을 푹 파묻으며 나른한 미소를 짓는 제이너를 보며 카밀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예의 바른 귀족가의 영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암살 집단 칸의 주인이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주 난리를 쳤던데?”
“난리? 누가? 내가?”
“제이빌런가에서 말이야.”
“그건…….”
“그 일을 직접 그렇게 나서서 처리할 줄은 몰랐는걸.”
재미있다는 듯 연신 키득거리는 그를 보며 카밀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가 저 모습을 꼭 보셨어야 하는데!
“넌 참 매번 예상을 벗어난단 말이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일로 여전히 제이빌런 공작은 자신만 보면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호의 검을 어찌해야 할지 아직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자니 아깝고, 안 주자니 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거겠지. 그런데…….
‘내 의견은? 왜 내 의견은 안 듣는 건데!’
누가 달래? 왜 고민을 하는 거냐고!
필요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제이빌런 공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야?”
“아버지가 아무 말씀 안 하셨어?”
“뭘?”
“네가 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런 위험한 일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들으시곤 신경을 많이 쓰셨거든.”
“그 사람이?”
그런 내색은 전혀 없었는데? 여기에 있는 동안 제이빌런가의 일을 그가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
‘아, 그래서 그랬나?’
소르펠 공작을 만나러 집으로 찾아온 제이빌런 공작과 가볍게 시비가 붙은 적이 있긴 했다.
제이빌런 공작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를 유독 마뜩잖은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결국 말다툼이 일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소?’
‘무슨 보답을 했나 해서.’
‘보답이라니?’
‘어린아이가 목숨을 걸고 도와줬는데 어떤 보답을 했나 궁금하군. 설마 뻔뻔하게 입 싹 닦은 건 아니겠지?’
‘뻐, 뻔뻔?!’
주변에서 말리는 바람에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었다.
그때 왜 쓸데없이 시비를 거냐고 눈총을 마구 쏘아 줬었는데, 설마 제이빌런가의 사건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나라도 네 옆에 있어야 안심을 하시겠다더라.”
그제야 카밀라는 그가 떠나기 전에 언뜻 흘린 ‘그 녀석’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때 이미 결정이 내려진 후였나 보다.
“그러니까 잠시가 아니라 길게 이 집에 붙어 있을 거라는 말이지?”
“아버지가 네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하셨으니까.”
“하.”
“앞으로 잘 부탁해.”
카밀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는 그의 모습이 그리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숙박비라도 엄청 받아 낼까?
“안 그래도 이쪽 지역에서 의뢰가 하나 들어와서 말이지. 매번 마법진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잘됐어.”
“의뢰?”
네가 받는 의뢰라면…….
“걱정 마.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니니까.”
“누군가가 죽기는 한다는 거네.”
카밀라의 물음에 제이너의 눈가가 아주 곱게 접혔다.
“나쁜 놈 좀 찾아서 응징해 달라는 거거든.”
“들키지나 마.”
카밀라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칸의 수장이 공작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그날로 난리 나는 거지, 뭐.’
제발 그가 큰 사고 치지 않고 그냥 얌전히 있다가 자기 집으로 조용히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하긴.’
조금 전 반듯한 귀족가 영식 연기를 하는 걸 보니 쉽게 들키지는 않을 것 같긴 하다.
그때 마침 방이 준비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쪽도 오랜만이네.”
제이너의 인사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도르만이 움찔했다.
“짐 좀 들어 주지?”
“넵!”
스스로도 자기가 지은 죄를 아주 잘 아는 듯, 제이너의 한마디에 도르만은 바로 그에게 조르륵 달려갔다.
행동이 아주 빠릿빠릿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카밀라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암살당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자기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라는 걸 그나마 잘 알고 있는 그가 나름 기특했다.
* * *
“여기서 하는 거야?”
풍요의 축제가 열리는 당일. 카밀라는 크리스와 함께 기원제에 참석했다.
그런데 식이 진행되는 곳으로 안내받은 카밀라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당이 아니네?”
보통 그런 곳에서 하지 않나?
신전에서 열리는 식이다 보니 당연히 경건한 분위기가 충만한 대예배당 같은 곳에서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이 진행되는 곳은 신전 뒤에 자리한 넓디넓은 정원이었다.
“왜 이런 곳에서 하는 거야?”
신전이 관리하는 곳답게 정원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척 깔끔하면서도 확실히 웅장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해서 마치 울창한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저 나무 때문입니다.”
“나무?”
크리스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저거 죽은 나무 아냐?”
어른 몇은 팔을 쭉 뻗어야 나무 전체를 다 두를 정도로 큰 크기를 자랑하는 나무는 잎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잎이 무성한 주변 나무와 달리 메마른 가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눈에 띄었다.
“주신의 나무입니다.”
“주신의 나무?”
요즘 다들 왜 이렇게 이름들이 거창해?
‘신전에서 파는 목걸이는 영원한 안식을 준다고 하더니.’
이젠 나무에까지 주신의 호칭이 붙어?
“이러다 길에 굴러다니는 돌도 신의 성물이라고 하겠네.”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카밀라도 그렇고 자신 또한 신전 쪽에 전혀 관심이 없다 보니 딱히 아는 게 없었다.
당연히 이런 신전 행사에 초대받거나 참석한 적도 없었고, ‘주신의 나무’라는 것도 오늘 처음 보고 듣는 거다.
“오셨군요.”
그때 신관 다니엘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초대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오늘 의미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카밀라의 시선이 이내 한곳으로 향했다. 순간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며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교단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교황의 등장이었다.
‘음?’
카밀라 역시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뭐야? 저건?’
그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천천히 걸어오는 교황 옆을 서성거리고 있는 한 존재가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 교황의 옆에서 연신 혀를 차고 있었다.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소리까지는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저건 좀 아니지 않나?’
귀신도 양심이 좀 있어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신전에, 그것도 교황 옆에 딱 붙어 저리 알짱거리는 게 말이 돼?
‘복장을 보니까 고위급 사제였던 것 같은데.’
무슨 사제가 죽어서 귀신이 되고 난리야? 자기들이 매번 주장하듯이 심판받고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했어야지.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교황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제 귀신의 모습도 더 뚜렷하게 보였다.
“하아.”
카밀라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거리가 가까워진 사제 귀신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 아이도 글렀네, 글렀어.]아이? 지금 교황보고 아이라고 한 거야?
카밀라는 사제 귀신의 말에 새삼 교황의 얼굴을 바라봤다. 족히 예순은 넘은 노인에게 아이라니.
조금 더 살펴본 뒤에야 사제 귀신이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둘러보는 교황의 목에 붉은빛이 유독 반짝이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자신이 받았던 그 성물 목걸이였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