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actor who brings misfortune RAW novel - Chapter (123)
불행을 몰고 오는 천재 배우 (123)
“네. 여기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놀라긴 했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죽어라 바닥만 바라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긴장을 해서.”
“아니에요. 저도 사실 긴장했거든요. 동지 만나서 반갑네요.”
“…….”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는데, 상대방 얼굴이 더 딱딱해졌다.
내가 뭐 실수했나.
눈동자만 돌리고 있자, 진배 형이 웃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저번에 말했던 거 잊으신 거 아니죠?”
“…?”
“배우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는 거요. 회장님이 그러신 것 같네요.”
아하.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을 피하는 게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팬이라서 그렇다는 거지.
사실 여전히 이해는 안 되는 감정이었지만, 최인준 가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네?”
“저 오늘 일정이 없어서 시간 많아요. 괜찮으니까 진정되시면 말해 주세요. 그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게요.”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팬이라서.”
여자가 머뭇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겨우 눈만 보일 정도로 애매하게 들어 올린 얼굴을 보자, 묘한 기시감이 스쳐 갔다.
“혹시 한 달 전에 사인회 오셨어요?”
“헉, 네.”
“성함이… 인아 누나?”
성이 뭐였지. 내 기억력이 이 정도로 하찮았나.
아득한 기억을 헤집는 사이, 여자의 얼굴이 급격히 환해졌다.
“맞아요! 권인아입니다. 어떻게 기억하세요?! 사람도 정말 많았는데!”
“그때 꽃으로 장식된 사슴 머리띠 주셨잖아요.”
“네! 맞아요. 우와, 기억력 진짜 좋으시네요. 감사해요!”
감사는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입장이 바뀐 듯한 말에 떨떠름해졌지만, 여자의 표정이 풀렸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저 그럼 이제 가까이 가도 될까요?”
“어흑, 네. 죄송해요! 제가 아직 배우님 얼굴에 면역이 안 생겨서.”
회장은 부끄럽다는 얼굴로 더 부끄러운 말을 꺼냈다.
그 뒤로 몇 번 대화를 더 나누다 보니, 어색한 분위기는 풀렸다.
“처음에 보이스 피싱인 줄 알았어요! 그동안 매니저님이랑도 메일로만 소통해서요.”
“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급한 건이라서 바로 연락드리고 싶었어요.”
“아뇨! 전 좋았, 아니, 괜찮았어요. 그래서 배우님 생일에 첫 팬 미팅을 열고 싶으시다는 거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 노비혁과 대화한 뒤로 내내 생각했다.
선물을 받지 않는 걸로 팬이 서운하다면, 그걸 풀어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이참에 정식으로 팬 미팅을 하는 건 어떠냐는 정현이 형의 조언에 따라, 회사에서 업무용 폰을 빌려 연락을 했었다.
“팬분들이 따로 돈을 쓰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싶어요. 대관료나 행사 진행 비용은 회사 측에서 부담하는 걸로 얘기도 끝났고요.”
“그럼 무작위 추첨으로 진행해야겠네요. 팬 카페에 가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입장이 가능한 인원수만큼 뽑으면 될 것 같아요.”
회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야무진 사람이었다.
언제 내 눈을 피했냐는 듯, 날 똑바로 바라보며 회의에 몰입했다.
“노트북 화면 좀 봐 주실래요? 최근 팬 카페 가입 통계 수치인데요. ‘안녕, 나의 썸머’ 때부터 그러긴 했는데, 룩크 광고 때문에 외국 팬 유입이 엄청 늘어났어요.”
“룩크 광고 때문에요?”
“네. 배우님 댄스 챌린지 영상 찍었던 거요. 그게 틱☓에서 워낙 대박 쳤잖아요.”
아, 홍보 팀한테 지나가듯 들었던 것 같다.
짧은 동영상이 주 컨텐츠인 앱에서 해당 영상이 많이 재생됐다고.
외국 인플루언서들이 똑같은 안무로 챌린지에 참여하면서, 관심이 더 쏠렸다고 회장이 설명했다.
“그때 팬 미팅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외국 팬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씀드린 거예요. 물론 팬 미팅까지 참여할 정도면 어느 정도 한국어는 할 수 있는 사람이겠지만.”
“아하.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모르니까 영어를 더 공부하긴 해야겠네.
이후로도 회장이 건네는 말을 뇌에 깊게 새겨 두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
“어떻게 이런 걸 전부 아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제가 오타쿠, 아니, 덕질 경험이 많아서요….”
“인아 누나한테 연락드리기 잘한 것 같아요. 감사해요.”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회장이 얼굴을 푹 숙였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이렇게 중대한 일을 상의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워낙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운영진들과도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네. 편하게 연락 주세요.”
“그리고… 배우님. 저한테 이름 대신 회장님이라고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기분 나빴나.
급하게 사과하려는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회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야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친근감 들고 당연히 이백 배, 이천 배는 더 좋은데요. 원래 연예인이랑 팬이라는 관계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서로한테 좋아서요. 진짜 이런 말 드리기 너무 슬프지만… 솔직히 다시 말 주워 삼키고 싶을 정도지만….”
회장은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는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특별 대우 한다는 말도 있을 수 있으니까, 저는 딱 팬클럽 회장 정도로만 대해 주시면 돼요. 특히 다른 팬들 있는 곳에서는 더욱 더요.”
팬클럽 회장이라는 것 자체가 특별 대우 해도 되는 위치인 거 아닌가?
합리적으로 따졌을 때 이해가 안 됐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는 분야인 만큼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게 알찬 대화로 구성된 2시간이 훅 지났다.
* * *
“연재야…! 일찍 왔네?”
“안녕.”
본격적인 운동 전 몸을 천천히 풀고 있는데, 성이준이 다가왔다.
“이렇게 매일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
“나도 좋아.”
수줍게 웃는 성이준은 운동하기도 전인데도 이미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저 성격으로 어떻게 연예인을 했지. 진짜 봐도 봐도 신기하네.
“이사 와서 불편한 건 없어? 내가 도와줄 건?”
“응. 괜찮아. 원래 조깅할 때 모자랑 마스크 써야 해서 조금 답답했거든. 이렇게 헬스장 따로 다니니까 편해.”
얼마 전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그래도 1년 가까이 지낸 집이라 나름 정도 들었고, 굳이 이사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장 대표가 직접 지시한 내용이라니까 군말 없이 따랐다.
집이 과할 정도로 넓어져서 당황스럽긴 한데, 입주민 전용 피트니스가 있어서 운동하기 더 수월했다. 역시 돈이 다긴 하구나.
“여긴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다들 마주쳐도 말 안 걸 거야! 너랑 이웃사촌 될지 몰랐는데 너무 기뻐…!”
그리고 이사 온 아파트에는 성이준이 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방방 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건지.
저 얼굴을 한 안개를 하도 봐서 그런지, 쓸데없는 정만 붙었다.
“나도 기뻐. 이제 나 슬슬 런닝 시작하려고 하는데.”
“앗. 그래! 잘해! 혹시 오늘….”
“응. 오늘도 점심 같이 먹자.”
내 무심한 답에도 성이준은 웃음기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마주 봤다.
그렇게 한 시간을 꽉 채워 운동한 후 밖으로 나왔다.
“연재야. 지금 따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없어?”
“응. 그냥 대본 보고 연습만 하고 있어. 형은?”
“나는 곧 드라마 들어가게 될 것 같아!”
사뿐사뿐 공기 위를 밟는 듯한 목소리에 무슨 드라마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답을 듣고,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내가 따로 작가님한테도….”
“…….”
“연재야…? 갑자기 왜 그래?”
당혹스러움에 빠진 얼굴을 보고 표정 관리를 했다.
“아니야. 나도 얼마 전에 그 드라마 대본 읽었거든. 재밌더라.”
“맞아! 읽고 너무 재밌어서 하고 싶다고 우리 대표님한테 바로 졸랐다니까.”
“형이 맡은 역할은 뭐야?”
뭘 물어. 당연히 한승민이겠지.
“한승민! 안 되면 어떡하지 하고 먼저 연락드렸는데 바로 확정됐어. 곧 촬영 들어가기로 했는데 너무 기대돼!”
“형은 잘할 거야.”
입꼬리를 올렸다. 성이준이 밝게 웃었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되게 묘한 기분이다. 무력감? 아니지, 그럼 이렇게 낯설 리가 없을 텐데.
원래 내 자리였던 것도 아니었으니 부당함도 당연히 아닐 거고.
소속사의 의견은 충분히 납득 가능했고, 합리적인 이유였다.
그러니까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던 건데….
“왜….”
“응?”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까.
물끄러미 성이준을 바라봤다. 묘한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겠다고 버텼어야 했나.’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아주 살짝 후회됐다.
동시에 올라오는 익숙한 감정에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하아.”
자기혐오는 그만하자. 도움도 안 되는걸.
“연재야…? 화난 거 있어? 혹시 내가 말 뭐 잘못―.”
“형.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속이 좁아서 그래.”
“응??”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니, 지금 느끼는 감정이 더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일이냐.
“사실 나도 그 드라마 하고 싶었거든. 한승민 역할로.”
“아….”
“소속사에서 반대해서 말았던 건데, 형 말 듣고 나니까 많이 아쉽네. 생각보다 내가 더 그 역할이 탐났었나 봐.”
“그, 그럴 수 있지…. 미안해. 내가 눈치 없이.”
“형 잘못 아니라니까. 기회를 놓친 건 나야. 형은 기회를 잘 잡은 거고. 그게 멋있고, 질투가 난다고 말하는 거야.”
“…….”
동시에 한 가지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다음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소속사를 설득시켜 봐야지.’
끈질기게 버티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미련 없이 임해야겠다고.
물론 난 여전히 소속사의 상품이고, 소속사에서 원하는 일을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아쉽다 못해 아까워 죽을 것 같은 심정을 느껴 보니,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뜻대로 안 풀릴 가능성이 크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고.
“……너 생각보다 되게 솔직하다. 질투한다고 말하기 쉽지 않잖아.”
“그냥 속 좁은 거지, 뭘. 그래도 잘할 거라는 말은 진심이야. 형은 분명 잘할 테니까.”
그럴 만한 실력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고.
성이준이 고맙다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성이준이 연기하는 한승민을 상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울렸다.
“궁금하다. 형이 연기하는 한승민.”
“그래…?”
“응. 기본적으로 독기 있는 캐릭터인데 생각보다 연약한 부분이 있잖아. 형이 그 부분을 잘 살릴 것 같아.”
“아, 나도 그 부분을 중심으로 연습하고 있긴 했어!”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던 성이준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성이준의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는 동안 내내 한승민에 대해 얘기했다.
서로 해석한 캐릭터가 미묘하게 달라서, 대화가 더 재밌었다.
“너랑 대화하니까 어떻게 연습하면 되는지 감이 왔어. 고마워…!”
“나도 얘기하니까 좋았어. 재밌었다.”
“너무 나만 도움받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미안할 것도 많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도, 성이준은 강아지처럼 낑낑댔다.
“아! 너 요즘 외국어 공부한다고 하지 않았어?”
“응. 영어 위주로 공부하고 있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팬 미팅이 주목적은 아니었다.
외국어가 며칠 공부한다고 능숙해지는 영역도 아니고.
진짜 목적은 이제 4개월 남은 칸 영화제를 위한 대비였다.
“그, 그럼 내가 영어 공부하는 거 도와줄까?”
괜찮다고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성이준….
‘얘 미국인이었지.’
이게 웬 굴러온 호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