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actor who brings misfortune RAW novel - Chapter (390)
‘아틀라스 딜레마’ 촬영은 경기도에 있는 한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에 있는 스튜디오와 최대한 비슷한 병실을 찾느라 스태프들이 꽤 고생했다고 들었다.
내가 미국에 가면 한 번에 해결될 문제인데,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찝찝했다.
‘뭐, 후회하진 않지만.’
주변 풍경이 익숙하다는 건 생각보다 큰 복지였다.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다가 잠시 밖으로 나왔을 때, 골목 너머로 한국어가 들려오면 그렇게 안정감이 들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촬영이 끝난 후였다.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집에 있다는 걸 아니까.
‘보고 싶다.’
소파에 늘어져 있을 정현이 형과 한하람을 생각하며 웃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달려갈 곳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구나.
“(연재 씨, 옷 다 갈아입었어요?)”
칸막이 위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네. 지금 나갈게요.)”
서둘러 환자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럼 오늘 촬영도 알차게 해 보자.
* * *
“(짠! 다 됐어요.)”
의상 스태프가 내 오른발에 깁스를 대고 온갖 붕대를 매 주었다.
“(너무 조이거나 불편하면 말해요. 느슨하게 해 줄게요.)”
“(괜찮은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어휴, 뭘요.)”
의상 스태프가 떠남과 동시에 메이크업 스태프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연재 씨, 최대한 빨리 끝날 테니까 움직이지 말아 줘요.)”
“(네.)”
스태프가 긴장한 얼굴로 내 얼굴에 붓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지난주에 찍었던 사진을 옆에 둔 상태로 하나하나 신중하게 점을 찍었다.
“(방금 그린 거 위치 틀렸어.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아, 씨. 다시 그릴게요.)”
스태프들이 내 옆에 옹기종기 모여 점을 찍는 것에 열중했다.
‘힘들겠다.’
이번에 내가 연기할 캐릭터 ‘에단’의 외적인 특징은 주근깨였다.
미국의 쨍한 햇살을 받으며 자랐다는 걸 알려 주는 용도였다.
촬영 때마다 주근깨의 위치가 달라지면 안 됐기에, 스태프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나도 덩달아 숨을 참은 채 화장이 끝나길 기다렸다.
“(으아, 다 됐다.)”
“(이렇게 보니까 색다르네.)”
“(약간 말괄량이 느낌 나지 않아요? 너무 귀엽다.)”
미국인들도 띄워 주는 건 똑같구나.
빈말일 게 분명한 여러 칭찬에 머쓱하게 웃었다.
“(아, 거울 줄게. 여기.)”
“(감사합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꽤 낯설었다.
‘신기하네.’
주근깨만 그린 것뿐인데 이렇게 느낌이 달라질 수 있구나.
코와 볼 주변에 옅은 점들이 빼곡했다.
거울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
거울 속엔 에단이 있었다.
편안하게 늘어진 미소, 반듯한 분위기.
그는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라 달려온 부모님을 달랜다.
발목이 완전히 뒤틀릴 정도의 큰 부상이었음에도 에단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한다.
놀라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웃는 모습은 태연하기까지 했다.
“…….”
난 에단을 가만히 바라봤다.
거울 속 그는 부드럽고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감춰지지 않는 그의 절규가 눈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안 돼.’
재빨리 거울을 내렸다.
그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드러날까 다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에단을 안타깝게 여겨선 안 됐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곧 슛 들어갑니다!)”
스태프의 외침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에단에 대한 감정과 생각을 꾹꾹 눌러 구석 끝으로 옮겨 놓았다.
지금 필요한 건 에단을 가여워하는 이연재가 아니었으니까.
‘후.’
여러 번의 심호흡을 하고 난 후에야 눈을 떴다.
“(연재 씨, 슛 들어가도 될까요?)”
PD의 말에 차분하게 답했다.
“(네. 준비됐어요.)”
지옥으로 들어갈 준비가 됐다고.
* * *
“(앞으로 진짜 조심할게요. 저도 이렇게 다칠지 몰랐다니까요. 정말 실수였어요.)”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건네자, 부모님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소식 듣고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조심해야지. 안 그래도 연약한 애가.)”
걱정과 놀람이 가득했던 얼굴이 점차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바라봤다.
부모님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X 같다, 진짜….’
가슴 속에서 분노가 요동쳤다.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으나 내가 제대로 웃고 있는 건지 감도 안 왔다.
그만큼 화가 났고, 분노가 끓어 넘쳤다.
분노의 대상은 다름이 아닌 나였다.
‘X신 새끼.’
확실하게 머리부터 떨어졌어야 했는데.
멍청이도 아니고, 좋은 기회를 놓쳐도 제대로 놓쳤다.
스스로에 대한 환멸감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내 손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더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야. 어디 더 아픈 곳은 없고?)”
“(저야 늘 똑같죠. 다 아파요.)”
“(농담하지 말고, 이 녀석아.)”
“(하하.)”
농담 아닌데.
간신히 웃음을 짓고 있자, 문 쪽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들어가도 될까요?)”
“(아, 선생님.)”
처음 보는 의사였다.
부모님이 벌떡 일어나자, 의사는 앉아 계시라며 천천히 다가왔다.
“(수술은 잘됐습니다. 뼈가 완전히 붙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나저나 차트를 확인해 봤는데….)”
차트를 쓱 훑어보던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재작년에 뇌 동정맥 기형(AVM) 진단을 받으셨네요? 관련 치료는 계속 받고 계신가요?)”
날 바라보는 눈빛엔 여타 다른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은 반응에 몸이 느슨해졌다.
‘하.’
예상치 못했던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부모님이 슬픈 표정으로 답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네. 일단 약물 치료만요.)”
“(크면서 자연스럽게 나아질 확률도 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슬픔에 잠긴 목소리를 듣고 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난 부모님을 따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을 하자.’
난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아픈 아이’로 유명했다.
난 조금만 찬 바람을 쐐도 감기에 걸렸고, 물만 마셔도 체했으며, 약간의 스트레스만 받아도 몸에 열이 올라 쓰러졌다.
하루 종일 뇌를 갉아먹는 듯한 편두통과 어지러움이 나를 지배했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조퇴하는 하루가 반복됐고 끝없이 병원을 들락날락했다.
사소한 증상들이 계속돼 발작으로 이어졌고, 재작년에 다음과 같은 질환을 진단받았다.
‘뇌 동정맥 기형(AVM).’
혈관이 꼬여서 피가 부풀어 올라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
간단히 말해 내 뇌에 있어선 안 될 기형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이 기형이 내 목숨을 앗아 가기 전에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머리 뚜껑을 열어 제거하는 개두술, 그리고 코안에 작은 관을 삽입하여 제거하는 방법.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보다 훨씬 안전하고 부작용도 적었다. 문제는….
‘돈이지.’
부모님이 내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내 병원비를 수납하느라 부모님의 지갑은 얇아진 지 오래였다.
우린 보험 적용도 안 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치료 방법이 있는 질환이더라도 돈이 없으면 그건 난치병을 앓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즉, 부모님과 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이 파산하기 전에 내 치료비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기를.
꼬인 혈관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죽으면 돼.’
내가 가장 바라는 방법이기도 했다.
난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슬픈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지난날의 기억은 내게 슬프지 않았다.
난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그저 지겨웠지.
죽음을 통해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긴커녕 행복하기만 했다.
‘기회를 찾아보자.’
이번처럼 어설프게 떨어져서 다리만 부러지고 끝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괜히 돈만 쓰고 몸도 아프고 이게 뭐야.
‘다음엔 꼭….’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환하게 웃었다.
* * *
스태프들이 작게 수군거렸다.
“(봤어?)”
“(와….)”
그들 나름대로 목소리를 조절한 거였지만, 모든 스태프가 입을 여니 촬영장이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끝엔 이연재가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소름 돋네.’
조명을 들고 있던 스태프가 팔에 돋은 닭살을 느꼈다.
이연재의 연기를 직접 보고 나니, 감독이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었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됐다.
‘무슨 애가 연기를 저렇게 하냐.’
방금 찍은 장면은 앞으로 찍어야 할 신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어찌 됐든 드라마의 주인공은 의사를 연기하는 데이비드였고, 장면의 전체적인 중심도 그에게 쏠렸다.
에단의 질환에 대한 설명도 데이비드의 독백으로 첨부될 예정이었다.
즉, 방금 장면에서 이연재가 한 건 부모님과의 대화 몇 마디와 미소를 짓는 것 외엔 없었다.
대사 역시 부모님 역할의 배우와 데이비드한테 몰린 상태였는데,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배우에게 쏠렸다.
그건 무척 신비로운 일이었다.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느슨하게 풀어졌다 이내 유쾌한 미소를 짓는 배우의 모습은 묘한 살벌함을 풍겼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생 동물을 겨우 앉혀 놓은 듯한 불길함이라고 해야 될까.
묘한 기분은 다음 촬영 때 더욱 강렬해졌다.
“(에단, 간호사 선생님한테 옥상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물었다며?)”
의사가 에단의 시선에 맞춰 몸을 기울였다.
평소의 냉정하고 차분한 표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상대가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자세만 바꾼 상태였다.
“(왜 그랬는지 알려 줄 수 있겠니?)”
꽤 다정한 목소리에도 에단은 그저 웃었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선생님. 상쾌한 공기를 쐬고 싶어서 그랬죠.)”
“(에단, 굳이 빙빙 돌아가지 말자. 난 네가 다친 게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알아.)”
“(그래요?)”
에단의 미소가 한껏 짙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꿈틀거릴 때마다 주근깨도 따라 움직였다.
사랑스러운 주근깨가 의사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의사가 미묘하게 인상을 찌푸리자, 에단은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듯 작게 속삭였다.
“(선생님.)”
Doctor.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지은 에단이 말했다.
“(선생님은 막을 수 없을 거예요.)”
“(…….)”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예요. 당신이 무슨 수를 쓰든 간에, 결국 그 일을 막을 순 없을 거라는 거요.)”
에단이 햇살처럼 웃었다.
반면 의사를 향한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간 물어뜯고 말겠다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동물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고.
“(컷!)”
그렇게 첫날의 촬영이 끝났다.
“(미치겠네, 진짜!)”
데이비드가 옷을 거칠게 내던졌다.
촬영하는 동안 쌓였던 여러 감정이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터진 것이다.
그가 두툼한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짜증나!!!)”
마치 어린애가 신경질 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매니저가 영 낯설다는 얼굴로 물었다.
“(……데이비드, 괜찮아?)”
데이비드를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그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비드는 여전히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나도 안 괜찮아! 걔 때문에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끓어오르는 감정의 원인은 단 하나였다.
그의 상대 배우, 이연재.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야.’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음에도 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말이 쉽지. 그걸 실제로 표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연재의 연기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던 걸 떠올리자 창피함이 밀려왔다.
‘말도 안 돼.’
자신은 프로였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도중에는 절대 방심하지 않는 프로.
그런 자신이 상대 배우의 연기에 압도당해, 대본에 적혀 있지도 않는 액션을 취했다.
그런데 그 상대 배우가 자신보다 20살은 어린 꼬맹이라니.
‘악마랑 영혼 계약이라도 한 거 아니야?!’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