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actor who brings misfortune RAW novel - Chapter (46)
불행을 몰고 오는 천재 배우 (46)
“차가우니까 한 번에 많이 드시지 마세요.”
“네. 감사해요.”
내 앞에 잔이 놓임과 동시에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잔을 들어 한 입 마시자 단맛 없는 시원한 레모네이드 맛이 느껴졌다.
안진배 매니저는 내가 마시는 걸 확인한 후에야 자기 몫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너무 시지는 않나요?”
“딱 좋아요. 시중에 파는 것보다 안 달아서 더 좋네요. 만드는 거 귀찮으셨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별로 안 어려웠습니다. 입에 맞다니 다행이에요.”
할 말이 있다던 안진배 매니저는 일단 집으로 올라가자더니, 막상 집에 도착하자 씻고 오라고 했다.
단호한 얼굴에 뭐라 답하기도 어려워 얌전히 씻고 나왔는데, 눈에 보인 모습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었다.
안진배 매니저가 자기 팔뚝만 한 커다란 통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성적으로 생각한 일은 아니고 그냥 몸이 움직였다.
하필 눈이 보이지 않는 자세라 더 살벌해 보였던 탓도 있었다.
‘배우님?’
안진배 매니저가 부르지 않았으면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갈 뻔했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레몬청이었다.
그것도 레몬이 정성스럽게 탑처럼 쌓여 있는 청.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간 빨간색이나 불길한 덩어리는 당연히 없었다.
괜히 미안했다. 역시 이미지는 무시 못 하는 건가.
“감사히 마실게요. 그런데 다음에는 그냥 푹 쉬세요. 아니면 제가 직접 만들어서 마실게요.”
“…….”
알고 보니 이번에 본가에 잠깐 다녀온 이틀 동안 손수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푹 쉬어도 부족할 시간에 나 때문에 궂은일을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을 꺼내 봤지만 별다른 답이 없었다.
아까랑 똑같은 반응에 의아해질 무렵이었다.
내내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있던 안진배 매니저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배우님. 저 많이 섭섭합니다.”
“……네?”
당황스러운 말에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나한테도 느껴졌다.
“솔직히 아까 차에서도 너무 섭섭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
“……죄송해요. 혹시―.”
뭐 때문에 섭섭하다는 건지 알려 줄 수 있냐는 말을 하려는데,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본인 이마를 내려치더라.
“배우님, 뭐가 그렇게 항상 죄송하세요.”
“……형이, 섭섭하다고 하셔서.”
“제가 섭섭하다고 해서 배우님이 잘못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섭섭함은 감정입니다, 배우님. 누군가 잘못해야만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요.”
윽박지르는 것도 아닌데 말린 어깨는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사과가 아니면 뭐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런 날 지켜보던 안진배 매니저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제가 아까 차에서 섭섭했던 부분은, 일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배우님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전혀 간섭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
“그건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그 부분 역시 제가 챙겨야 할 부분인걸요. 매니저로서요.”
잔에 맺힌 이슬이 또르르 흘렀다.
그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한결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직종이라면 모를까, 연기하는 배우는 더욱 별개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개인적인 문제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매니저로서 업무를 하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네. 이해했어요.”
이제야 납득이 가는 대화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런 레몬청…,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왜 이렇게까지 하나 의아해할 수도 있죠. 배우님이 지금 이렇게 불편해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 같고요.”
“…….”
“하지만 저는 이런 것이 제 업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우님에게 특별히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담당 배우가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게 매니저가 할 일이니까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구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이런 것 역시 매니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업무이니까 부담스러워하거나 불편해하지 말라는 건가.
그런데 그거랑 섭섭한 건 뭔 상관이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답답함이 밀려오는데, 혼자 괴로워하지 말라는 듯 바로 해답지가 내려왔다.
“물론 이런 부분 때문에 섭섭하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섭섭한 건 배우님이 아니라 이 상황입니다. 궁금한 게 많은데 못 물어보는 이 상황이요.”
“…….”
“매니저고 업무고 그런 거랑 상관없이 배우님이 궁금해요. 괜찮으신지 궁금하고, 무슨 생각 하시는 건지도 궁금합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말문이 턱 막힌 상태로 눈앞의 얼굴만 바라봤다.
“배우님이 따로 말해 주실 때까지 재촉할 생각은 없습니다. 상담이나 치료 같은 얘기를 쉽게 던질 생각도 없고요. 그래도 궁금합니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궁금하다고 제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바꿔 말해 저한테 얘기를 안 한다고 해서 배우님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요.”
그 부분은 꼭 아셔야 한다며 진지한 눈이 날 바라봤다.
“부담 가지실까 봐 고민했는데… 제가 정말 궁금하다는 걸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말을 안 하시는 거면 괜찮은데, 제가 듣기 싫어하거나 귀찮아할까 봐 망설이는 거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셨죠?”
“네. 알겠어요.”
“섭섭하다는 것도 상황에 그렇다는 거지, 배우님한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에요. 그러니 죄송하다고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톱니바퀴가 딱 들어맞듯 완전히 이해된 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나를 보던 안진배 매니저도 미소를 지었다.
안진배 매니저가 다 녹은 레모네이드를 버리고 두 번째 잔을 만들어 준 뒤에는 조금 더 편한 대화가 오갔다.
“배우님, 빠르게 숨 쉬셨던 거 혹시 그때가 처음이셨나요?”
“아뇨. 저번에도 한 번 있었어요.”
“그렇군요…. 혹시 검진받아 보는 건 어떠신가요?”
“검진이요? 정신과 상담 말씀하시는 거예요?”
방금 전에 상담 얘기 안 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안진배 매니저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말한 건 신체적인 검진입니다. 기저 질환으로 과호흡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들어서요.”
“아, 제가 질환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요.”
“질환이라는 게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거니까요. 예방차 한번 받아 보시고, 만약 그런 부분이 원인이라면 늦기 전에 치료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나중에 한번 받아 볼게요.”
“예약은 제가 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상담은… 배우님 편하실 때 하세요.”
온순한 눈동자가 편안한 분위기에도 눈치를 보듯 천천히 움직였다.
“저도 그렇고 이 배우님도 그렇고, 처음에는 상담을 받아 보시는 게 어떤가 싶었습니다만… 배우님이 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억지로 받는 것도 그리 좋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긴 하지. 안개의 얘기를 꺼낼 수 없으니 상담을 받아 봤자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도 안진배 매니저가 권하면 성의를 봐서라도 한두 번은 받아 볼 예정이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한번 검색해 봤다가 상담비 보고 놀라서 휴대폰을 내려놨던 기억이 스쳐 갔다.
“그렇게 할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오늘 교육받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네―, 저, 형.”
유리잔을 들고 일어나던 안진배 매니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살짝 뻘쭘하긴 했지만…, 먼저 솔직하게 말해 준 상대한테 나도 이 정도는 말해야겠지.
“오늘 얘기하신 거 그렇게 부담되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데… 궁금해하시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전부 다 말씀드리긴 어려울 거예요.”
“그렇군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답할 수 있는 건 답할게요. 웬만한 건 답할 테니까 음, 편하게 물어보셔도 돼요. 아니, 일단 제가 더 많이 말해 볼게요.”
안개 얘기 외에는 딱히 숨기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저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 안 했을 뿐, 꽁꽁 묵혀 놓을 정도로 의미 있는 일도 없다.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하긴 했다. 뭐가 궁금한 건지도 감이 안 왔고.
그래도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도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정리가 안 돼서 그런지 말이 횡설수설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설픈 말에도 앞에 있는 얼굴은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다는 거다.
“네. 그러겠습니다. 배우님.”
여전히 격식을 차린 존댓말이었으나 부드럽게 풀어지는 얼굴은 편안하게 느껴졌다.
* * *
“누나, 오랜만이야.”
“응. 오랜만―, 어머?”
내 말에 뒤를 돌던 한세영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안 그래도 큰 눈인데 거기서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에 내가 더 놀랐다.
“뭐야. 왜 그렇게 꾸미고 왔어. 당황스럽게.”
“왜? 별로야?”
“일부러 물어보는 거야? 잘생겼다는 말 들으려고?”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는 모습에 순간 몸에 들어갔던 긴장이 확 풀렸다.
깜짝이야. 안 그래도 조금 오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라 진심으로 후회할 뻔했다.
오늘은 드라마 첫 방영 전 작품에 대해 공식적으로 소개하는 제작 발표회 날이다.
학교 빠지니까 행복하냐고, 나 안 보고 싶냐며 질척이는 노비혁의 문자에 대충 답한 후 호텔에 들어왔다.
대기실은 발표회가 열리는 콘퍼런스 룸보다 한 층 위에 있었다.
숍에서 한 머리가 굉장히 어색해서 자꾸 손이 올라가려는 걸 힘들게 참았다.
“이렇게 머리에 웨이브 주니까 완전 다른 느낌이네. 잘 어울린다.”
“고마워. 누나도 예뻐.”
“얘는. 입 아프게 굳이.”
입 아프다는 표현이 원래 이럴 때 쓰이는 건가 싶었지만 그냥 웃었다.
한세영에게는 가벼운 비누 향이 났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으나 그전의 무거웠던 향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누나한테 이 향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향? 나 향수 안 뿌렸는데?”
“그래?”
그럼 진짜 비누 향인 건가.
따로 향수를 뿌린 게 아닌데 이렇게 기분 좋게 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까이 댔다가 살짝 굳어진 얼굴을 확인하고 급하게 떨어졌다.
“미안, 놀랐지.”
“……적당히 해라. 요놈아. 귀엽긴 한데 자꾸 그러면 역효과 난다.”
“어?”
역효과?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서 되물었더니 아니라며 싱겁게 고개를 젓는다.
남은 화장을 받겠다며 다시 자리에 앉는 걸 보다가 영 마음에 걸려 다가갔다.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자 어이없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어쩌지. 진짜 불쾌했나 보네.
“너는 진짜….”
“미안해. 앞으로 조심할게. 고의는 아니었어.”
재차 사과하자 잠시 날 바라보더니 알겠다며 실컷 조심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약간 퉁명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예 가까이 있질 말아야겠다.’
편안함에 너무 풀어졌나 보다. 앞으로 같은 일 없게 해야지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