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actor who brings misfortune RAW novel - Chapter (85)
불행을 몰고 오는 천재 배우 (85)
저녁에 찍을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클라이맥스였다.
극 중 시간 순서대로 찍으면 몰입은 잘 되겠지만 현장 스케줄 때문에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사건을 껑충 뛰어넘어 절정을 연기해야 하는 만큼 긴장할 수밖에 없는 컷이었다.
남인후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할지 수없이 얘기해 왔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대충 해. 어차피 난 안 나오잖아.”
“뭐?”
뭐라는 거야.
“형, 지금 무슨 말 한 건지 알아?”
“…….”
울적한 기색은 저녁이 되자 늪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이쯤 되면 알아서 풀겠지, 하고 넘길 일이 아니었다.
준비는 다 됐냐고 해맑게 온 윤 감독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후, 남인후와 천막으로 들어왔다.
“형 기분이 왜 안 좋은 건지 말 안 해 주면 난 몰라. 내가 잘못해서 기분이 상한 거면 말해 줘. 사과할게.”
차라리 그냥 내가 싫은 거면 이해라도 가지.
내내 잘 지내다가 뜬금없이 이러면 이상하지 않나.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럼 왜 그렇게 말한 거야?”
“어차피 난 안 나가는 거 사실이잖아. 그래서 그냥….”
남인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밀려오는 한숨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대충 감은 왔다.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연기했는데 정작 최종본에 나오지 않는다면 힘 빠질 수밖에 없지.
당연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형 연기하러 여기 왔다며.”
“…….”
“영화에 나오든 안 나오든 연기는 연기잖아. 무슨 이유든 연기 대충 하는 사람이랑은 나도 같이 하기 싫은데.”
형 마음은 이해가 된다, 등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러닝 타임 내내 얼굴을 비출 내가 무슨 말을 꺼내도 남인후 입장에선 반감만 들 테니까.
“연기에 대한 숭고함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어. 우린 이걸 해서 돈을 받잖아. 돈 받는 일을 대충 하면 어떡해.”
대수롭지 않은 일을 대하듯 일부러 밋밋한 어조로 말했다.
할 말은 더 많았지만 잔소리로 느껴질 것 같아 꾹 참았고, 그렇게 침묵만이 이어졌다.
혼자 있는 시간을 주는 게 나을까 싶어 천막을 나가려는 순간, 조그마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너처럼 연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뭐?”
“알지. 너 연습 많이 하는 거. 모를 수가 없지.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연습 많이 하면 돼? 나도 연습하면 너처럼 연기할 수 있을까?”
남인후의 눈가는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보다 천천히 답했다.
“그건 모르지, 나도.”
“…….”
실망감에 빠르게 젖어 드는 눈을 보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지금도 형 연기 좋아.”
“그렇게 말하는 게 더 비참하거든?”
“진짠데. 처음부터 좋았어. 형 뽑자고 말한 것도 나야.”
“…? 네가?”
축축 가라앉던 목소리가 휙 튀었다.
“응. 형이 가장 좋던데.”
“…….”
“연기 잘하는 사람은 많지. 형보다, 그리고 나보다 연기 잘하는 사람도 넘쳐 날걸. 그래도… 그냥 좋으면 좋은 거잖아.”
놀란 듯 커진 눈동자를 덤덤히 마주했다.
“오디션 때도 충분히 좋았는데, 지금은 더 안정적이야. 형도 스스로 연기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
“난 형 연기 잘하고, 좋다고 생각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조급해하지 마.”
생각에 빠진 얼굴을 보며 “대충 하는 건 더 하지 말고.”라고 덧붙이자,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졌다.
수치심으로 잔뜩 물든 채 사과하는 걸 괜찮다고 달랬다.
“혹시 더 대화하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없어.”
“그래. 밖에 들어오세요!”
내가 밖을 향해 크게 외치자 남인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참 전부터 밖에서 서성이던 발걸음의 주인공이 머쓱하게 들어왔다.
“방해해서 미안. 어떻게… 대화는 잘했어?”
“저희 안 싸웠어요.”
“누가 뭐라고 했냐.”
남인후와 날 번갈아 보는 눈에서 이미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였다.
윤 감독은 정곡을 찔린 얼굴로 준비됐으면 나오라고 말한 후 먼저 나갔다.
순순히 따라나서는데 누가 소매를 잡았다.
“오늘 잘 찍자. 최선을 다할게.”
또렷하게 뜨인 두 눈은 과할 정도로 비장해 보였다.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최선을 다할게.”
“너는… 조금만 해.”
?
* * *
강태일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거세게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긴 했지만, 떨림의 원인은 추움이 아니었다.
강태일은 화가 났다.
그는 배신당했다.
“야, 이, 시☓ 새끼야!”
강둑에 홀로 앉아 있는 인영을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도 같은 이유였다.
허겁지겁 강둑을 올라가다 미끄러졌지만 강태일은 누운 상태로 손을 들어 앉아 있던 인영을 끌어 내렸다.
덕분에 비에 젖었을 뿐 멀쩡하던 이진우의 옷이 흙탕물로 더러워졌다.
“이 개☓끼, 너 다 알았지. 다 알고 그런 거지.”
“…….”
“너 때문에 다 망했어. 다 ☓ 됐다고. 행복해?”
강태일이 이진우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거칠게 내려쳤다.
이진우는 종이 인형처럼 반항 한번 하지 않고 흔들렸다.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강태일은 화가 나 보였고, 표정 없이 입을 다문 이진우는 무료해 보였다.
다른 표정을 한 두 사람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비참했고, 무기력했다.
“시☓, 뭐라고 좀 지껄여 봐….”
강태일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길 잃은 아이 같은 음성에 이진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나 좀 그냥 죽여 줄래?”
“……뭐?”
“시도는 해 봤는데 도저히 자살은 못 하겠더라고. 어머니한테 원하시는 대로 하셔라 했더니 못 하시겠다네. 하하, 시☓…. 그동안 왜 그 지랄을 떤 건지.”
강태일은 이진우 입에서 나오는 욕설이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멍하니 마주하는 두 눈이 흐릿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래도 형제 손에 죽는 건 나름 드라마 같지 않나.”
“이 미친 새끼가!”
강태일은 눈알이 지나치게 뜨겁다고 생각했다.
누가 기름을 부은 듯 안에서 절절 끓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눈을 찡그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눈이 뜨거워서.
“그렇게 원하면 해 줄게.”
다섯 갈래로 나눠진 손이 부드러운 목을 감쌌다.
강태일은 좁히는 대로 좁혀지는 소름 끼치는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네가 내 가족일 리가 없어. 소름 끼치는 말 하지 마.”
“윽―.”
이진우가 숨을 턱턱 들이마셨다.
무의식적으로 비트는 몸을 위에서 더 압박하며 강태일은 손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이진우의 눈에 실핏줄이 섰다. 바둥거리던 몸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다.
“……내 가족은 따로 있어.”
“…….”
“네가 오늘 죽인 사람들이… 시☓, 내 진짜 가족이라고.”
흔들리던 목소리에 결국 울음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살인자의 목을 조르며, 강태일은 애처럼 울었다.
“컷!”
윤 감독이 컷 소리를 냄과 동시에 살수차에서 거세게 나오던 비가 멈췄다.
스태프들이 엉켜 있는 두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커헉, 컥.”
한 스태프가 빠르게 남인후를 일으켜 수건을 덮어 줬다.
몇 번 기침하던 그는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수건으로 얼굴을 몇 번 닦은 후 주위를 둘러보자, 안진배가 무언가를 안고 있는 게 보였다.
“얘들아, 괜찮니?”
“네. 저는 괜찮은데….”
이연재는 안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할 새도 없이 윤 감독의 시선도 한곳에 고정됐다.
담요로 덮여 있는 이연재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안진배는 덜덜 떨리는 담요 안으로 괜찮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윤 감독과 스태프는 눈치껏 물러서고,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남인후는 괜히 목을 매만졌다.
‘목 졸린 건 난데….’
그렇다고 민망한 마음을 가질 수도 없었다.
강태일이 된 이연재가 마지막에 지었던 표정은 지금 떠올려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눈에서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비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표정은 훌륭하다고 표현하기도 부족했다.
필름을 거치지 않고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리 깊게 몰입해도 몇 초 후에는 정신을 차리던 이연재는 1분이 지나고 나서야 담요를 빠져나왔다.
윤 감독은 잔뜩 지쳐 있는 배우의 표정을 보고 괜스레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괜찮아? 시간 많으니까 더 필요하면 말해.”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형, 괜찮아? 내가 힘 조절 못 한 것 같은데.”
“아냐. 연습했던 대로 잘했어.”
막판에 조금 세지긴 했으나, 여전히 과한 힘은 아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이연재와 남인후는 ‘목을 졸리고 있는 사람’을 흉내 내는 방법을 고민해 왔다.
이연재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 기간이기도 했다.
이연재는 준비 과정 없이 순식간에 관자놀이에 핏줄을 세우고, 과하지 않게 두 눈을 뒤집어 까며 숨이 턱턱 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
안타깝게도 남인후에겐 별로 와닿는 방법은 아니었다.
목에 조금이라도 압박이 가해져야 몰입할 수 있다는 남인후의 입장을 고려하여, 이연재는 위험해지지 않을 선에서의 힘을 꾸준히 체크하고 연습해 왔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전혀 안 과했어. 그나저나 너 미끄러져서 헉했다. 괜찮아?”
강태일이 강둑을 올라오다 미끄러지는 건 대본에 없었다.
젖은 흙 때문에 미끄러져 생긴 실수였는데, 윤 감독이 NG를 외치기도 전에 이연재가 남인후를 끌어 내렸다.
이를 악문 채 곧바로 손을 뻗는 이연재의 눈빛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순간 숨을 삼킬 정도로 강렬했다.
강둑에 올라와 이진우를 밀치는 원래 동선과 다르게, 두 사람이 진흙에 뒹굴게 되며 더욱 처절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윤 감독은 망설임 없이 원래 동선을 폐기했다.
“촬영 미룰까? 어차피 살수차는 이틀 더 쓸 수 있어. 내일로 미뤄도 돼.”
윤 감독의 말에 이연재는 잔뜩 피곤한 얼굴을 하면서도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럴 거라는 걸 이곳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행히 컷이 반복될수록 이연재는 더 쉽게 몰입에서 빠져나왔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결과물은 고생한 만큼 나왔다.
촬영본을 확인한 두 배우도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안진배가 이연재를 거의 안다시피 차에 데려가는 걸 보던 윤 감독은 조용히 남인후를 불렀다.
“인후야. 고생 많았다.”
“네? 아, 네! 감독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윤 감독이 먼저 대화를 건 적이 몇 번 없어, 남인후는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사회성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이를 손쉽게 무너뜨렸다.
“오늘 네 연기 정말 훌륭했어. 이걸 최종본에 못 쓴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
“너 나오는 버전으로 감독판 내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내가 제작사 측이랑 한번 얘기해 볼게. 아! 그래도 일단 기대는 하지 말고.”
윤 감독은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괴상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인후를 보고 굳었다.
멈칫하는 윤 감독을 보고 남인후도 열심히 참았지만 끝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둥지둥 대는 윤 감독 뒤로 왜 애를 울리냐며 스태프들이 야유하는 소리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그날의 소란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