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세상 밖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다
“왜…요?
나도 모르게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설적인 벤처캐피탈리스트 피에르 로번이 자의로 와준다는데 받들어 모시진 못할망정 반문이라니.
하지만 궁금한 걸 어떡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질 않은가.
저런 엄청난 거물이 왜 타국의 영세한 벤처캐피탈로 오겠다는 건지.
모르긴 몰라도 피에르 로번의 네임밸류라면 그 어떤 벤처캐피탈에서도 모시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텐데.
“껄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군요.”
“로번 정도면 와달라고 하는 곳이 널리고 널렸을텐데요? 더구나 은퇴하셨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번.
“물론 젊은 시절처럼 최전선에서 활동은 하지 못합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거든요. 가족들도 만류하고 있고요. 그래서 딜런만 괜찮다면 고문으로 들어가겠는 겁니다.”
아···. 건강이 안 좋으시구나.
어쩐지 깡마른 체구 하며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벤처캐피탈의 ‘고문’은 전문적인 조언과 지원을 제공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미국에서 벤처캐피탈의 명성은 절대적 요소입니다. 조건이 좋지 않더라도 명성이 드높은 벤처캐피탈이면 일단 투자부터 받은 스타트업도 적지 않죠. 딜런의 투자 목록에 있는 스타트업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입니다.”
그 부분은 지금껏 절절하게 느껴왔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왜 제가 더구나 미국도 아닌, 타국의, 그것도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벤처캐피탈의 고문을 자처하는지 궁금할 테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으니까요.”
“심장이요?”
“자그마치 40년입니다.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죠. 가족까지 등진 채 말이죠. 정신없이 달리다 뒤돌아보니 남은 건 허울뿐인 명성과 망가진 몸, 그리고 상처받은 가족들밖에 없더군요. 그제야 처음 번아웃이라는게 왔습니다. 심장이 고장 난 듯, 더는 예전과 같은 열정이 생기지 않더군요. 결심이 서자 바로 은퇴를 결정했고 이후에는 온전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제야 행복이라는 게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더군요.”
아무렴. 왜 안 그렇겠는가.
나는 없어서 못 하고 있지만, 만약 나에게도 가족이 생긴다면···.
그때는 무조건 일보단 가족을 위해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 돈은 부차적인 가치.
돈 버는 행위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휘발성이 강했고, 어느 임계점을 돌파하면 그마저도 뜨뜻미지근해진다.
이후에는 김빠진 사이다처럼 행복했던 감정은 조금씩 증발하고 결국엔 성취감만 남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건강도 제법 좋아지고, 가족들의 웃음도 잦아졌죠. 그러자 다시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란 놈은 이 업에서 벗어날 순 없겠다고 말이죠. 물론 그렇다고 다시 VC로 복귀할 생각은 없습니다. 딜런도 잘 아시겠지만, VC는 현장직에 가깝다 보니 체력이 따라가질 못할 걸 잘 알거든요.”
맞는 말이었다.
북산벤처스 인턴 때부터 느꼈지만 VC는 사실상 취재 기자와 일상 패턴이 유사했다.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창업자와 업계 관계자를 만나야 했고, 투자를 성사시키기 위해 수도 없는 미팅을 치러야 했다.
이는 체력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중노동이었다.
“그래서 멘토링이라는 명분으로 후배 VC들에게 어쭙잖은 조언하는 정도로 욕망을 달래야 했죠.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후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종류의 성취감을 느끼게 했거든요. 껄껄껄. 사실 오늘도 그런 느낌으로 딜런을 만나러 왔습니다. 친우인 앤드류가 그러더군요. 한국에서 온 언더독(Underdog)이 있는데 무조건 만나보라고.”
유약해 보이던 로번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며 나를 응시했다.
“오늘 만나본 딜런은 이전까지 제가 만나왔던 VC들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아직 서툴고 어색한 부분도 눈에 들어오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VC들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런 기분은. 마치 미지의 장소를 탐험하는 모험가가 된 듯한 기분이랄까? 하하하. 늙어서 주책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면전 앞에서 이토록 금칠을 해주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의 혜안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종의 거래라고 생각하시죠. 딜런은 저의 명성을 이용하면 되는 거고, 저는 딜런이 뿌려놓은 씨앗을 관리하는 정원사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겠군요.”
지분을 넣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직원으로 입사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서로에게 상부상조할 수 있는 구조.
드르르륵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난 나는 로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로번 고문님.”
“새 시대를 개척할 대표님의 행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게 나는 졸지에 업계 전설이라 불리는 대선배님을 회사 고문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내 생각보다 빠르게 체감할 수 있었다.
***
“반갑습니다. 맵스(Maps) 대표 윌리엄입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스프라우트 인베스트먼트 딜런이라고 합니다.”
정말 어렵사리 만남이 성사된 별표 다섯 개짜리 스타트업 Maps의 대표 윌리엄이었다.
글로벌 위치추적 시스템(Global Positioning System, GPS)를 활용한 실시간 3D 내비게이션 기술 개발 업체이기도 했다.
30대의 나이로 보이는 구릿빛 피부의 인도계 윌리엄이 살짝 떨떠름한 기색으로 내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
“지난번 해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미국 현지에 있는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받을 생각입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우리 회사에 관심 갖고 찾아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타국의 벤처캐피탈에게 투자를 받는다는 건 솔직히 현지 스타트업 입장에서 부담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허들은 역시 인프라입니다. 자율주행차량, 운송 서비스 제공업체, 건축설계, 관광업체, 게임 및 엔터테인먼트 업체 등등, 3D 내비게이션이라는 산업 특성상 타분야와 협업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벤처캐피탈을 통한 네트워크 활용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죠. 당장만 해도 자율주행 개발 업체와 협업 미팅이 필요한데 그쪽에서 저희에게 주선이 가능하겠습니까?”
“흐음···.”
안타깝게도 미국 내에서 이들이 원하는 정도의 네트워크를 당장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뿐 아닙니다. 이런 말까지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저는 과거에 해외 벤처캐피탈로부터 투자를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만 덜컥 넣어주고는 마치 감시하듯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죠. 그들은 시장의 특수성과 문화적인 측면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런, 최악의 상황이다.
어쩐지 시종일관 꺼리는 기색이 역력하더라니.
대화가 이어질수록 여긴 힘들겠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먹구름처럼 드리워졌다.
“죄송합니다. 과거의 울분을 그 쪽에게 쏟아부은 꼴이 됐네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살짝 다혈질처럼 보이긴 했으나 경우 없는 사람 같진 않았다.
“아닙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들과 저희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과거의 그런 경험이 대표님께 상처로 남아있을 순 있겠지만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도 대표님께 마냥 좋진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변화는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투자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떤 곳에서 투자 제의가 들어왔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파운더스 펀드, 제네럴 캐피탈, 그리고 엑셀파트너스 입니다.”
또 당신입니까? 스테파니?
사실은 그녀도 황금빛을 볼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닐까?”
더구나 나머지 곳들도 미국을 대표하는 대형 벤처캐피탈이었다.
“대단한 곳들이군요. 그만큼 ‘맵스’의 장래성이 유망하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요.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판을 뒤흔들기 위해선 초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류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건···?”
“전화로는 자세히 설명 못 드렸지만 저희 스프라우트 인베스트먼트가 근본 없는 회사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희에게 투자받은 스타트업 ‘전부’가 3년이 지난 시점으로 1,000% 이상의 매출 성장을 보이고 있죠. 물론 사우디 국부펀드에 매각된 사례도 있습니다.”
“저, 전부요···?”
경악한 윌리엄 대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류를 훑어봤다.
어쩐지 약 팔러온 약장수가 된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앞뒤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필 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어필하여 전세를 뒤집어야 했다.
“놀···. 랍군요.”
입질 왔다!
아까완 다르게 살짝 떨리는 동공과 말끝을 흐리는 윌리엄 대표.
“그만큼 저희는 ‘될법한 스타트업’에게만 투자 제안을 합니다. 보통의 벤처캐피탈이 수백 개의 투자를 집행해서 한두 개씩 건지는 것는 전혀 다르죠.”
듣는 대표 고막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접대성 멘트의 향연.
“크흠···.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군요.”
분명 효과는 있었다. 윌리엄의 입꼬리가 연신 실룩거리는 걸 보니.
“그 밑에 서류도 봐주시겠습니까? 저희 스프라우트 인베스트먼트에서 제안드리는 텀시트입니다.”
“텀시트를 벌써···?”
회사소개서는 잠깐 내려놓은 윌리엄 대표가 텀시트를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이내 점점 커져가는 그의 동공.
“허···. 정말 이 조건으로 투자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윌리엄 대표가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만족하십니까?”
우선은 현재 맵스가 가진 밸류보다 살짝 높은 시장가치를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의 강점인 빠른 투자금 지급 조항도 어필했다.
엑시트에 있어서도 메리트를 부여했는데 특정 시기 이전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어차피 대표가 내놓은 주식은 내가 사면 그만이었으니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맵스’라는 스타트업이 3D 네비게이션 업체 중에 상위 티어라고 볼 순 없었다.
말 그대로 아직은 저평가되어있다는 말이었고, 윌리엄 대표가 언급했던 대형 벤처캐피탈에서 그리 좋은 조건을 내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파고든 것이었다.
“일단···. 생각 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나 역시 오늘 당장 담판 지을 생각은 없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현명한 선택 하시길 바랍니다.”
소파에서 자리를 일으킨 나는 윌리엄 대표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내보일 수 있는 패는 모조리 던졌다.
그럼에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건물을 빠져나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택시를 타고 묶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확실히 쉽지 않네.”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미국에서의 벤처 투자는 생각보다 많은 허들이 존재했고, 이것을 혼자 헤쳐나가긴 역시나 쉽지 않았다.
호텔방으로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졸라게 고독하구만···.”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맥주캔을 따려던 때쯤.
띠리리링
“이 양반이 벌써?”
방금까지 미팅을 했던 맵스의 윌리엄 대표의 전화였다.
“네 대표님. 전화 받았습니다.”
“저···. 딜런. 혹시 피에르 로번이 그쪽 회사의 고문으로 들어갔다는 게 사실입니까?”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그게 사실입니까? 허! 세상에···. 설마 했는데. 방금 기사가 떠서 알았습니다.”
“기사요?”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피에르 로번이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