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여난(女難)
한영대학교 왕십리 캠퍼스.
선선한 바람에 나뭇잎이 한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계절.
오늘은 한영대 가을 학위 수여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설렘이 가득해야 할 졸업식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캠퍼스 내에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했다.
‘취업 빙하기’라고 불릴 정도의 극심한 취업난이 졸업식 풍경까지 바꿔놨기 때문이었다.
과거처럼 졸업식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게 되니 참석자는 자연스레 줄어갔고 참석한 졸업생들의 얼굴도 마냥 밝진 않았다.
그나마 학위수여식이 열리는 대강당 앞 잔디 광장에는 학사 가운을 입은 졸업생과 가족, 지인들로 북적였고 공연단의 축하 공연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흘렀다.
캠퍼스 곳곳에는 학사가운에 학사모를 뒤집어쓴 졸업자들이 저마다 지인들과 사진을 찍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자! 누른다? 다들 준비하고 있어!”
온갖 깨방정을 떨어대던 유진이가 바위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고는 후다닥 뛰어왔다.
“5,4,3,2,1, 지금!”
맞춰놓은 타이머에 맞춰 포즈를 취한 뒤 후다닥 달려가 휴대폰을 회수해온 유진이.
“아 대운 오빠! 사진 처음 찍어?”
“왜? 뭐? 시키는 대로 잘 했구만.”
“무슨 영정사진도 아니고 혼자 심각한 얼굴로 이게 뭐야?”
“왜? 어떻게 나왔는데?”
우르르 몰려온 나머지 동기들이 유진이의 휴대폰을 보고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형 어디 파병가요?”
“푸하핫. 학사가운이 아니라 군복 입혀놨으면 볼만했겠다.”
“이 오빠는 가만보면 사진 찍을 때 항상 저 표정이더라. 누가보면 로봇인 줄.”
“어색한 걸 어쩌라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극한의 갈굼에 결국엔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나저나 우리 동기 중에 최고령자이면서 졸업도 오빠가 제일 늦게 하네. 오빠가 꼴등맞지?”
주희의 말에 주변에서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운이 형이 꼴찌 맞어. 올해 초에 다 졸업했으니깐.”
부득이하게 졸업을 계속 미뤄오다 보니 동기 중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고맙게도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있는 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 졸업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렇게 와주었다.
“하아···. 시간 진짜 빠르다. 편입 합격하고 소리 질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니깐. 빨라도 너무 빨라. 내가 취업하고 나서 제일 후회하는 게 뭔지 아냐? CC 한번 못해본 게 천추의 한이다. 직장 생활에서는 그런 낭만 따윈 없어. 그냥 일, 집, 일, 집, 이게 다야.”
“완전 공감. 그리고 소개팅을 해도 예전 같은 순수함이 없다고나 할까? 상대방 직장은 어딘지, 연봉은 얼만지, 차는 뭐 타는지 이런 거부터 관심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동기들끼리 푸념하는 소리를 들은 가행이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흉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흐흐. 그러니깐 이 형님처럼 대학생활 열심히 하면서 사랑도 쟁취했었어야지.”
“너도 CC라고 쳐야 하나?”
“그럼 CC지! 유진이를 대학에서 만났는데.”
“근데 너네 둘은 어째 CC느낌이 하나도 안드냐. 그냥 불알친구끼리 만나는듯한···.”
“뭔 개소리야. 우리 커플이 얼마나 달달한데. 안 그래 유진아?”
가행이가 세상 스윗한 말투로 지금은 여자친구가 된 유진이를 불렀다.
“가행아···.”
“응?”
“제발 좀 다물고 있어. 주접떨지 말고.”
“응!”
유진이의 한마디에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행이의 모습에 동기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이상하게 저 커플은 봐도 부럽다는 생각이 안 든다?”
“야! 너도?”
무의식적으로 나도 동조할 뻔했다.
“그나저나 형은 대학생활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서 어째 CC 한번을 못 해봤어요?”
“그러게. 이 형도 신세가 참 처량하네. 어째 졸업식에 여자가 하나도 안 보이네. 그려”
“갑자기 동지애가 물씬 샘솟네. 힘내요 형.”
“왜 갑자기 타겟이 나야?”
동기 녀석들의 뼈아픈 공격에 항변하려던 찰나.
살랑살랑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며 싱그러운 자스민 향이 코끝을 스쳐 갔다.
“졸업 축하해요.”
“어?”
시끌벅적하던 동기 녀석들의 얼굴이 멍해지며 갑자기 등장한 낯선 여인에게 이목이 쏠렸다.
“너 오늘 못 온다며?”
얼떨결에 꽃다발을 받아든 나는 놀란 얼굴로 눈앞에 서 있는 이지원을 쳐다봤다.
하늘하늘 거리는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색 플럼 스커트로 한껏 꾸민 이지원이 말없이 미소를 짓자 순간 주변 모든 남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대부분 부러움과 시기가 묻어나는 살기 어린 눈빛들이었다.
“반차 쓰고 왔어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어쨌든 와줘서 고맙다.”
이지원이 얼마나 치열하게 회사 생활하고 있는지 잘 아는 입장으로서 고마움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당연히 와야죠. 우리가 보통 사이는 아니잖아요.”
이지원의 그 말 한마디에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헐···. 미친.”
“보통 사이가 아니면 무슨 사이야?”
“저분···. 한영대 여신 아니냐? SNS에서 한참 핫 했던?”
“맞네! 와···. 졸업하고 더 이뻐지셨네.”
“설마 대운이 형이랑 여신이랑 사귀는 거야 그럼?”
“와···. 배신자! 동지인 줄 알았는데···.”
당황한 나는 옹기종기 모여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보는 동기 녀석들에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 그런 거 아냐 자식들아!”
물론 스쳐 지나가는 지인의 범주는 훨씬 넘은 이지원이었지만 방금 저 멘트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크흠···. 그나저나 올 거면 회장님하고 같이 오지.”
“시간대가 안 맞아서요. 할아버지는 전경련 모임 끝나고 따로 오실 거에요.”
“바쁘시면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할아버지도 오늘만 기다리고 계시던데요? 오죽했으면 전경련 모임 시간도 앞당겼을까요.”
“헐. 진짜? 뭘 그렇게까지···.”
별 일정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하신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빚을 만들어놔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방금 걱정은 취소다.
그런 사특한 속내를 숨기고 계셨다니.
“안녕하세요 언니. 저 유진이에요.”
“저 기억나시죠 언니? 주희에요.”
이지원과는 안면이 있던 유진이와 주희가 우리쪽으로 다가와 정겹게 인사를 건넸다.
두 녀석의 인사에 이지원이 곱게 눈매를 접으며 악수를 건넸다.
“물론이죠. 오랜만이에요.”
“어쩜···. 언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뻐지는 거예요?”
“그러니까요. 비결이 뭐에요?”
예쁘장한 여자 둘과 압도적으로 이쁜 여자 하나가 한데 모여있으니 남자들의 시선이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는 대운 오빠랑 자주 봐요?”
“그러고 싶은데···. 제가 보자고 해도 잘 안 만나주네요. 오빠가.”
“헐···. 세상에···.“
”미친 거 아님?“
그 말 한마디에 무섭게 내리꽂히는 날 선 시선들.
나는 억울함에 그저 입만 벙긋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언제?
“원체 인기가 많으셔서 저한테 쓸 시간은 별로 없나 봐요.”
“에엑? 인기가 많다고요? 저는 저 오빠 승려인 줄 알았잖아요. 여자한테는 통 관심이 없어서.”
“맞아요. 맨날 집에만 박혀서 고양이랑만 노는 오빠가 인기는 무슨 인기에요. 아마 여기 있는 사람 말고는 만나는 사람도 없을걸요?”
이게 내 흉을 보는 걸까? 단순 팩트 전달인 걸까?
“야! 나 그 정도는 아니······.”
끼이익
하지만 내 목소리는 도로 갓길에 세워진 검은색 밴 차량의 엔진 소리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드르르륵
거대한 차 문이 옆으로 스윽 열렸고 뾰족한 고성과 함께 웬 여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오빠아아아!!”
“대우니상!!!”
“자기야! 내 왔데이!!”
갑작스럽게 달려든 네 소녀를 얼떨결에 안는 형세가 되었다.
웅성웅성
“이건 또 뭐야?”
“저 남자 도대체 뭐야? 카사노바야?”
“숭늉만 먹게 생겨 가지고는 세상에나.”
숭늉만 먹게 생긴 건 대체 어떻게 생긴 겁니까 아줌마?
그러다가 한 남자가 소녀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리스 아냐?”
“어? 마, 맞는 거 같은데?”
“에이. 설마···. 아이리스가 여길 왜 와?”
“그런가···?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은데.”
긴가민가한 얼굴로 소녀들을 살피던 사람들이 이내 경악성을 내뱉었다.
“맞네! 아이리스 유라, 다영, 나비, 채린!”
“지, 진짜네? 뭐야? 쟤들이 왜 여기에 있어?”
“그, 그러게?”
벙찐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고 편입 동기들도 입을 벌리고 나만 쳐다봤다.
“아니···. 오빠?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아, 아니야!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얘들은 그냥 내 동생들이야!”
극도로 당황한 나는 자꾸 들러붙은 아이리스 멤버들을 억지로 떼어 내고는 다급히 상황설명을 했다.
“어머. 대운 오빠 친구분들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저는 오빠 동생 유라라고 해요.”
“다영이에요.”
“저는 막내 채린입니다아!”
“나는 나비에요. 대우니 짱은 내 샌드배꾸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네 샌드백이었니 나비야.
갑자기 들이닥친 아이리스 애들 때문에 머리가 백지장이 되며 뇌 정지가 와버렸다.
“대운 오빠랑···. 친하신가 봐요?”
이지원의 물음에 아이리스 애들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고 못 사는 사이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죠.”
“법적으로 묶인 사이기도 해요.”
“저는 대운짱 없으면 살아갈 낙이 없어요 히히.”
그렇게 오해를 더 증폭시키는 폭탄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녀석들을 자제시키느라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얘들아? 스탑?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다들 입 좀 다물어줄래?”
“흐에엥. 몇 개월 만에 봐놓곤 처음 하는 말이 우리보고 입 닥치래 흑흑.”
“너무해 오니상!”
아오! 정신없어.
별안간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무튼, 졸업 축하해 오빠.”
유라가 건넨 꽃다발을 보고선 금세 헤벌쭉해진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반항기 가득한 불량청소년 같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큰 것인지 대견함이 들었다.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맙다.”
“헤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빠 졸업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그때 내 옆으로 이지원이 쓱 다가왔다.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응? 아! 여긴 내 동생 유라고 요즘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 아이리스의 리더이기도 해. 서로 인사해.”
“안녕하세요. 고유라라고 해요.”
“반가워요. 이지원이에요.”
“언니도 혹시 연예인이에요?”
“아뇨.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이지원을 평범한 직장이라고 하기엔 좀 괴리가 있지 않나?
“언니는 우리 오빠 어떻게 생각해요?”
“꽤 좋게 생각하고 있어요.”
“흐음···. 그렇구나. 앞으로 우리 오빠 잘 부탁드려요. 지원 언니.”
“저도 잘 부탁드려요 유라 동생.”
이게 무슨 대화의 흐름이란 말인가.
왜 내 존재를 지원이에게 부탁하는 건데?
이게 말로만 듣던 여자어 뭐 그런 건가?
어느새 내 주변에는 여자들로 북적였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형 도대체 정체가 뭐에요? 한영대 여신은 그렇다 치고 아이리스는 왜 온 건데?”
혼란 가득한 동기 녀석의 물음에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제 인생의 롤모델은 앞으로 형이에요.”
“형처럼 인생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내가 뭐? 왜? 뭘 했다고?”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여자가 없는 게 아니고 숨겨둔 거였네. 그것도 엄청 많이.”
“얘들아? 이건 그냥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생긴 해프닝일 뿐이야. 오해는 말아주렴.”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딱히 설득력은 없어보였다.
“설마 이분들 말고 또 있는 건 아니죠?”
“없어. 없다고! 내가 무슨 여자밖에 없는 줄 아나.”
“그건 맞지. 아무리 형이 여미새라도 한계가······.”
부와아아아앙
하지만 녀석의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우렁찬 자동차 엔진음에 안개처럼 사라져갔다.
“헐. 페라리?”
조금씩 가까워지는 새빨간 스포츠카에 모든 이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고.
끼이이익
멈춰선 스포츠카의 문이 날개 펼쳐지듯 위로 열리며 누군가가 차에서 내렸다.
많은 사람이 모인 잔디 광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적막.
또각또각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내게 다가오는 한 여인.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슈퍼스타 홍슬기의 등장에 사람들의 얼굴이 무엇에 홀린듯 몽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