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광복의 날이다.
이날이 오기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수많은 독립유공자의 희생이 있어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손들은 가혹한 빈곤에 시달리며 비참한 삶을 영위해나가야 했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가진 모든 재산을 독립을 위해 헌납했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느라 가정을 돌볼 여유 따윈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 아래 수명이 길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의 자손들이 가난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것은 어찌 보면 정해진 운명일 수 있었다.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사(津寬寺)
“한국의 천년 고찰 진관사에 방문해 주신 독립유공자 후손분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북한산 자락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진관사는 일제 강점기 비밀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진관사 출신이신 백초월 스님은 불교계의 대표적 독립 운동가 중 일인으로서,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습니다. 진관사를 거점으로 거센 항일 운동을 펼쳤으며,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만주행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새기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광복 1년을 앞두고 그만 순국하시고 말았습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진관사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那迦院) 등을 돌고 있었다.
그 앞에는 노년의 스님이 그들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진관사의 주지 법률 스님이었다.
“이 건물의 이름은 칠성각으로 바로 이곳에서 백초월 스님이 숨겨놓으셨던 태극기가······.”
스님의 설명을 유심히 듣고 있는 이들은 청년부터 노년까지 나이대가 다양했고, 혼혈로 보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의 귀에는 이어폰이 끼워져있었는데,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주최 측의 배려였다.
“직접 와보시니 어떠십니까? 딱히 별건 없지요?”
신기백 소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가···.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는 조촐하네요.”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지요. 그나마 이것도 어느 정도 모금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거지, 아니었으면 아예 개최조차 못 했을 겁니다.”
신기백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은 사찰 내 강당 같은 곳으로 들어갔는데 오늘 방문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각자의 소감을 밝히는 자리였다.
시작은 혼혈로 보이는 갈색 피부의 중년 여성이었다.
“어···. 음. 안녕하세요. 저는 오임하? 지사의 후손, 바날레스 멜리아 입니다. 멕시코에서 왔고···. 이곳에 온 곳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임하 지사는 미국에서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한인 비행사 양성 교관으로 비행사를 양성했으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된 인물이었다.
그 밖에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선우완 지사의 딸, 탑동 독립 만세시위 운동 당시 안국동 거사 책임자로 활동한 장종건의 손녀까지.
먼 타국만리에서 찾아준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차례대로 한국을 찾은 소감을 밝혔다.
“해외에서 사시는 분들이 많네요?”
“그게 의아하신가 보군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있고, 한국에 있다가 환멸을 느끼고 해외로 이민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참···. 안타까운 경우지요.”
“아···. 그렇습니까?”
왜 내가 낯부끄러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단출했던 행사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갔는데, 신기백 소장이 반가운 기색으로 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깡마른 체격과 거멓게 핀 검버섯이 연로한 나이를 짐작게 했다.
“어르신 잘 지내셨습니까? 어째 안색이 더 안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신기백을 쳐다보던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아는 체하나 했더니 신 소장이로구먼. 끌끌끌. 곧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 안색이야 뻔하지 뭘 새삼스럽게 그러나.”
“어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르신.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셔야지요.”
“끌끌.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말게나.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뜨고 싶은 노인네한테는 듣기 고약한 말이야.”
노인에게선 무척이나 염세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옆에 있는 청년은 새로 온 신입직원인가?”
노인의 물음에 신기백 소장이 나를 소개했다.
“그런 건 아니고. 아주 유명한 사업가 청년입니다.”
“끌끌끌. 그런가? 젊은 나이에 대단하구만. 그런데 젊은 양반이 이런 고리타분한 곳엔 어쩐일인가?”
“사실 이분이 중국에서 이회영 선생의 비밀 일기장을 구해다가 재단에 기증을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부릅떠졌다.
“저, 정말인가? 우당 선생의 일기장을? 오오, 세상에.”
노인이 감격에 찬 눈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정말 큰 일을 했어. 우당의 일기장이라니. 아니, 대체 그건 어디서 구한겐가?”
“아···. 그게 사업차 우연히 중국에 들렀다가 경매장을 가게 됐는데 거기서 구했습니다. 사실 처음 낙찰받았을 때는 일기장이 아니고, 그냥 낙서장이었는데 이게···. 물에 닿으니 숨겨진 글씨가 드러나더군요.”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쳤다.
“옳거니! 당시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게 글을 썼지. 용케도 그걸 찾아냈구만! 대단허이. 대단해.”
“아니···. 뭐 저도 알고 낙찰받은 건 아니라서···.”
세상 시니컬해보이던 할아버지가 이제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니 살짝 부담스러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돈이 만만치 않게 들었을 텐데 어떻게 그걸 살 생각을 했나? 대체 돈을 얼마나 쓴게야?”
“얼마 안 썼습니다. 1억 5천 정도밖에···. 아! 그렇다고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바치신 분 아닙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오. 세상에···.”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진 노인이 연신 내 어깨와 손을 쓰다듬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이런 청년이 있었구만···. 순국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켜온 이 나라에 이런 장한 청년이 있었어.”
뭔가 나를 굉장히 높게 사주시는 듯하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애국이니 뭐니 이런 감정보다는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의 유품이었고, 내 입장에서 그 정도 지출은 그냥 해외 나가서 기념품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에 큰 부담도 없었다.
“여기 이 어르신은 광복회 군자금을 모았던 독립 운동가 한태석 선생의 손자이신 한명회 어르신입니다.”
“아···. 저는 송대운이라고 합니다.”
“고맙네 대운 군. 정말 고마워.”
“제가 딱히 뭘 한 건 없는데···.”
“그래도 고맙네.”
계속 나를 붙잡고 고맙다는 말만 하는 한명회 어르신 때문에 난처함이 들어 신기백 소장에게 구호의 눈빛을 보냈다.
다행히 눈치가 있었던 신기백이 한명회 어르신의 손을 붙잡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생활은 어떠십니까? 요즘도 끼니 거르시는 건 아니지요?”
“끌끌끌. 가끔 여흥 삼아 폐지도 줍고, 보훈급여 가지고 어찌어찌 질긴 목숨 연명을 하고 있다네. 그나마 나는 보훈급여라도 받는다 치지만 대다수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그렇지도 못해. 그놈에 법이 뭔지 후손 1명으로만 지급 대상을 제한하고, 독립 운동가의 사망 시점이 광복 전이냐 후냐에 따라 차별까지 두다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이말이야. 독립운동이면 다 같은 독립운동이지 지들이 뭔데 그런 기준을 나눠! 에잉···.”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명회 어르신이 혀를 쯧쯧 찼고, 이에 신기백 소장이 거들듯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습니다. 국가의 지원을 제대로 받는 후손은 10%에 미만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생계도 유지하기 빠듯한 실정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 역시 처음 안 사실이었다.
단순히 독립유공자 후손들이면 무조건 지원금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런 차등이 있을 줄이야.
“저기 보이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그나마의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 해외 망명지에서 외로이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하지 못했을 뿐인데 이제는 아예 국적까지 사라져 버렸지. 우리나라는 저들을 그리 대해선 안 돼. 프랑스는 나치 정권에 부역한 사람들을 아직도 잡아들여 처벌하고 있고, 레지스탕스(프랑스 지하 독립 운동조직) 운동에 몸담았던 후손들을 지금도 지극히 예우하고 있어.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거야.”
어르신의 한 서린 넋두리에 나는 붕어처럼 그저 입만 벙긋거릴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건 시위라도 해서 바로잡아야 하지 않나요?”
그나마 짜낸 질문에 한명회 어르신은 힘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 입장에서는 케케묵은 과거를 다시 언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조심스럽다네. 혹시나 국민들이 우리를 잊었을까 봐 두려운게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자긍심은 있지만, 누추한 삶은 부끄럽고 서러울 때가 많을게야. 끌끌끌. 통탄할 노릇이지.”
어르신의 주름진 눈에 서글픔이 묻어나왔다.
“그러면 안 되지만···. 어쩔 때는 조부님께 원망이 들 때도 있다네. 독립운동만 안 했으면 땅도 있었을 것이고, 재산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말이야. 끌끌끌. 그야말로 불효막심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나라 팔아 먹은 놈들은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지금에 와서는 크게 의미도 없지만 말이야.”
“어르신···.”
신기백 소장이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처연한 웃음을 터트린 어르신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그랬다는 얘기야. 어찌 됐건 나라가 독립을 했고, 지금은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지 않은가? 이렇게 반듯한 청년이 타국에서도 독립 운동가들을 잊지 않고 유품까지 거둬주고 말이지. 힘들다가도 이런 청년을 보면 또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네. 크헐헐.”
나는 애써 웃는 한명회 어르신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물었다.
“정말 없으십니까?”
“응?”
“정말 이제는 삶에 미련이 없으신 겁니까?”
“어허. 대운씨 그런 말은···.”
신기백 소장이 난처한 얼굴로 내 소매를 붙잡았지만 무례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어르신께 묻는 이유가 있었다.
노회한 눈동자 저편에 숨어있는 그 어떤 미련의 편린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미련이라···.”
진관사의 전경을 눈으로 한번 훑은 한명회가 속에 묻은 얘기를 조금씩 꺼내 보였다.
“벌써 내 나이 80이 넘었어. 삶에 미련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그나마 꿈꾸는 게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떵떵거리고 사는 친일 기업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서 큰 고통을 줬던 수요미씨 같은 전범 기업들···. 내 생에 그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겠지. 끌끌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어. 이미 그들의 악행은 너무 희미해져서 보이지도 않는 수준이 되었고, 이제는 누구도 그자들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권력과 금력을 손에 쥐었어. 이미 때를 놓친게지.”
“아뇨.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으응?”
“어르신이 염원하시던 것···.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건강 잘 챙기시고 계세요.”
너무 오바하는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내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속 얘기를 꺼내는 그 시점부터 한명회 어르신 육신(肉身)에서 ‘푸른빛’의 광채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