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286)
286화 결심
“시퍼런 빛이라···.”
처음 보는 빛깔의 출현에 종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황금과 검정말고 다른 색은 없을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푸른 빛이라니.
대체 이 빛은 어떤 인연의 흐름을 말하는 걸까?
“못 먹어도 고 해야겠지?”
색이 주는 느낌 때문일까?
검은빛처럼 불길하다거나, 찝찝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황금빛을 마주했을 때의 황홀함과 경이로움과는 달리 푸른빛은 청아하고 깨끗한?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이놈의 빛은 어째 파도 파도 끝이 없네.”
물론 빛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 무슨 빛깔이 나와도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엔 물건에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이제는 난생 처음 보는 푸른빛까지.
나만 볼 수 있는 이 신비한 빛의 끝은 대체 어디에 닿아있는 건지 가늠도 되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생각하면 뭐하냐.”
나는 지나가는 연탄이를 낚아채 시계추처럼 요리조리 흔들었다.
“너는 정답을 알고 있니? 대체 이 빛은 뭐니? 뭔데 보이는 거고,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냐아아앙!”
개소리 말고 당장 내려놓으라는 거친 포효에 나는 다소곳이 연탄이를 바닥에 내려놨다.
“성질머리하고는. 너도 이제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좀 나긋나긋해질 생각은 없니?”
“미야아옹.”
‘응. 없어’라는 뉘앙스의 울음을 내뱉은 연탄이가 내 시야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보다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아···. 일단 저질러는 놨으니 어떻게든 해봐야지.”
푸른빛을 봤기 때문도 있지만,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 뭔가 느낀 점도 많았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결심이 선 결정적인 이유는.
“할 수 있을 것도 같단 말이지.”
남들이 들었다면 미친놈 소리가 단번에 튀어 나왔을 것이다.
우리나라 친일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일본의 수미요씨 그룹은 그야말로 일본 경제를 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초거대 그룹이었다. 아니, 하나의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제 아무리 무서운 맹수라도 천적은 있는 법이었다.
“거대한 덩치와 무서운 이빨을 지녔어도 독 가시에 찔리면 뒈지는 거지.”
‘아메리카포큐파인’이라는 동물을 아는가?
일명 ‘산미치광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설치류는 호저과에 속하며 몸뚱이가 창과 같이 변화된 가시털로 뒤덮여있다.
최대 크기가 90cm 정도에 불과했지만, 밀림의 왕 사자도 두려워하는 어마어마한 녀석이었다.
이 녀석의 가시에 한 번 찔리면 극한의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후엔 아무리 굶주린 맹수라도 산미치광이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가시는 미늘 같은 돌기가 있어 뽑기도 힘들고 뽑으려 할수록 오히려 살 속을 더 파고드는 악독한 특성을 가졌다.
“동물계에 산미치광이가 있다면, 재계에는 그냥 미치광이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애초에 체급이 안되기에 정면승부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상대를 먼저 자극해서 준비해놓은 가시에 찔리도록 하는 게 상책이었다.
애초에 다윗과 골리앗식 싸움은 내가 줄곧 해왔던 패턴이기에 어색할 것도 없었다.
“일단···. 정보부터 좀 얻자.”
일단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유효타라도 먹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양질의 정보를 잘 아는 분은···.”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를 끝낸 나는 서둘러 외출 준비에 나섰다.
***
서울 북산타워 회장 집무실.
탁!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장내에는 장기알이 놓이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번엔 또 미국에서 엉뚱한 놈을 주워왔다지?”
“음? 아! 블루어스요? 하하하. 어쩌다 보니 인연이 돼서 투자하게 됐습니다.”
“괜찮겠느냐? 농업 기업은 리스크가 만만치 않아.”
“언제 제가 리스크 따져가면서 투자하는 거 봤습니까?”
탁!
호쾌하게 장기알을 내려놓은 이 회장님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이제껏 네놈이 저지른 짓거리에 비하면 양반이긴 하구나. 그래 이번엔 또 어떤 포인트에서 꽂힌 게냐?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젊은 농부인데 참 성실하더라고요. 농사에 미친 인간이기도 하고, 아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농사에 대한 철학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농업 기술로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싶다나?”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투자했다고?”
“뭐···. 많은 요소가 있지만 일일이 설명하긴 힘드네요.”
“끌끌끌 약은 놈 같으니라고. 그래도 농업 기업은 잘만 터지면 정말 든든한 무기가 될 수 있을 게다.”
“어째서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잖느냐. 그만큼 먹을게 중요하다는 뜻이지. 이 세상의 격변은 결국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홍차 때문에 벌어졌던 보스턴 차 사건이나, 후추와 향신료를 얻기 위해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처럼 말이지. 더구나 지금 세계는 식량 위기에 봉착해있어. 기후 변화로 농작물 생산 시기 예측이 힘들어졌고, 가뭄이나 홍수로 농사를 망치는 일도 빈번해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재(天災)뿐 아니라 인재(人災)까지도 문제야.”
“인재(人災)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곡물 가격이 급등했고, 그 여파로 다른 식자재 가격까지 모조리 치솟아 버렸어. 식량 무역 통로가 막혀버리니 수입에 의존하던 국가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게지. 이미 비상사태에 들어간 국가도 있고 말이야. 앞으로 상황은 더 심각해질게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네가 투자한 그 회사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아마 전 세계가 들썩이겠지. 특히나 중국은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 할게다. 언론에 알려지진 않고 있지만, 거긴 지금 식량난 문제가 심각하거든.”
탁!
“어···?”
“끌끌끌. 드디어 네놈을 한번 이겨보는구나.”
마지막 수를 둔 이 회장님의 눈에 희열이 번졌다.
“와···. 이게 이렇게 되네요.”
나는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 졸로 차포 잡을 생각에 혈안이 되어있더구나.”
“그게 보였어요?”
“그것도 못 보면 당장 장기 때려쳐야지. 그나저나 무슨 고민 있는게냐? 오늘따라 유독 조급해 보이는구나.”
역시 귀신의 눈은 속여도 이 회장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사실 요즘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좀 심란했나 봅니다. 방금 상황에선 어떻게 했어야 제가 이겼을까요?”
“흐음···. 차포 보다는 마상 발목을 잡아 공격을 차단하고, 포가 공격할 수 있게 징검다리를 놔줬어야지. 너무 무리수를 뒀어.”
“역시 그런가요?”
물끄러미 나를 보던 이 회장님이 넌지시 물었다.
“이제 털어놓아 봐. 뭐가 또 그리 심란해서 나를 찾아왔을꼬?”
“에이. 제가 무슨 고민 있을 때만 회장님 찾는 줄 아십니까? 그냥 오랜만에 인사도 드리고, 장기도 두려고 온 거죠.”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이놈아. 장기 두는 것만 봐도 나 고민 있소 읍소를 하고 있구만 어디서 입바른 소리 소리야?”
“크흠···. 그래요? 티가 났구나···. 사실 이 회장님께 상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긴 한데.”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늙은이 심장 떨리게 하지 말고 적당히 순화해서 말하거라.”
“그런 게 아니라···. 사실 얼마 전에······.”
나는 이 회장님께 중국에서 가져온 이회영 선생의 낙서장에 얽힌 비밀과 한명회 어르신과 만남에 대해 설명했다.
이 회장님은 세상 재밌는 얘기를 듣는다는 듯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경청했다.
“그것참 묘한 인연이로고···. 그 노트에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어찌 됐건 큰일을 했구나. 우당 선생이라면 존경받아 마땅한 양반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 많은 재산을 독립을 위해 쓴다는 건 정말 엄청난 용기와 사명감이 필요한 일인게야. 대운이 너라면 할 수 있겠느냐?”
“그 상황이 안되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인간이란게 원래 그런게야. 가진 것을 조금 내놓는 건 할 수 있겠지만, 모든 걸 내놓는다는 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쉽지 않은게지. 그나저나···.”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는 이 회장님.
“나는 좀 의아하구나? 네가 그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한 놈인 줄은 미처 몰랐다만?”
괜히 뜨끔한 마음에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큼···. 그분들이 없었으면 지금 이 나라가 없었을 수도 있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무 관심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보니 괜히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요. 한명회 어르신의 염원이 가시처럼 계속 마음에 남기도 했고···. 뭐, 그래서 그냥 알아나 보는거에요.”
푸른빛의 정체에 대해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충 그럴싸하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끌끌끌. 또 무슨 시커먼 속내가 있나 보구만. 뭐 좋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지. 흐음···. 친일기업이라…친일 기업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딱 세 곳이다. 선무 그룹과 오양 그룹 그리고 명동 사채시장 큰손 백선생. 이렇게 셋이다.”
“둘은 어디서 들어봤는데 나머지 하나는 처음 들어보네요.”
“그럴만도 하지. 명동 사채시장은 음지에서 움직이는 족속들이니. 하지만 그 영향력은 절대 무시하지 못해. 개인이나 기업을 쥐락펴락할 뿐 아니라, 국가 경제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더구나 철저한 피라미드형 점조직으로 되어있어서, 시장을 주도하는 이가 누군지, 정확한 사업규모가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원래 보이지 않는 칼날이 더 무서운 법이듯 기업인들 대부분은 백선생이란 인물을 상당히 두려워하지. 아무튼, 백선생이란 인물의 집안이 뼛속까지 친일이란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으니 일단은 넘어가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지 백 선생이라는 인물과는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될 거라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우선 선무 그룹 창업주인 최양후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어. 일본 자본과 결탁하여 자국민의 이익을 억압하는 매판 상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지. 이토 히로부미가 제일 은행의 일본인 지점장을 움직여 최양후를 도와주라 지시했을 정도면 당시 그의 영향력이 어땠는지 짐작이 가지? 정치적 의미에서 친일의 족적이 크진 않은 인물이지만, 경제부문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는 걸 부인할 이는 없을게다.”
“해방되고 그걸 그냥 넘어갔어요?”
“끌끌끌. 당시 정치와 법조계 쪽에 열심히 떡값을 돌린 게 돈값을 한게지. 기업 활동을 위해 일본 자본과의 관계는 불가피한 일이었고, 오히려 민족 자본 형성에 기여했다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더구나.”
“아···.”
“그리고 오양의 김삼용은···. 전쟁 지원을 위한 대한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총독부 산하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인물이다. 조선총독부로부터 네 차례나 포장을 받은 진짜배기 친일이지.”
“근데 당시엔 반민특위 재판이란게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재판은 받았으나 역시나 풀려났어. 머리를 잘 쓴 게 순순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깊이 속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역시나 일제의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둘러댔지. 통렬한 대국민 사과는 물론, 지속적인 사회 공헌 활동으로 어느 정도 죄를 면죄 받은 부분이 있지. 선무 그룹이 창업주의 친일 행각을 전면 부인한 것에 비해, 오양은 정면돌파라는 수를 택한게야. 그 수는 제법 잘 먹혔고.”
“흐음···. 그렇군요.”
그렇게 나는 이 회장님이 쏟아내는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의 수요미씨 그룹은···.”
순간 이 회장님의 얼굴에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거긴 쳐다도 보지 말거라. 아니, 알려고도 하지마. 그들은 감히 네가 덤벼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들을 절대 자극해선 안 돼.”
표정을 숨기려는 티가 역력했지만, 나는 보고야 말았다.
이 회장님의 얼굴에 묻어나온 것은···.
‘두려움’, ‘절망’, ‘불안’.
처음 보는 이 회장님의 모습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