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296)
296화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빙산(氷山)의 일각(一角)’
그림자 속에 가려진 지하경제를 이만큼 잘 은유한 표현이 있을까?
통상적으로 지하경제란 세금을 비롯하여 법망을 피하여 보고되지 않는 경제를 말하며, 주로 사채, 매춘, 마약, 도박 등이 이에 속했다.
대한민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162조 원으로 추정되며 이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최고 수준.
다시 말해 수백조 원에 이르는 시중 유동자금을 주도하는 어둠 속 한국경제의 응달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하경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채시장이었다.
흔히 일반 서민들은 조건이 까다로운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없을 때 마지막 보루로서 대부업을 찾는다.
사채시장은 과거 은행 본점이 몰려있던 명동을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일부 큰 손들은 한 인간 혹은 기업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뿐 아니라, 국가 경제의 흐름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명동 사채시장을 주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지, 사업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어떠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은 사업업자 대부분은 독립적으로 사업을 운영하지만, 사이즈에 따라서는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해산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열이 형성되며, 종국에는 피라미드 형태의 시스템이 구축된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소수의 전주, 혹은 큰 손이라 불리는 이들이 존재하며, 수사기관이나 검찰도 이들의 신상정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설령 현직 사채업자라 할지라도 수년에 걸쳐 업계에서 살아남아 있어야 그 존재나마 알 수 있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베일 속에 활동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명동 큰 손들은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채무조차 거의 없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웬만한 대기업 총수와 맞먹는 자금 규모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힘은 전화 한 통이면 수천억 원을 움직일 수 있는 현금 동원력에 있었다.
이런 ‘큰 손’ 사이에도 희미하게 서열이 매겨져 있는데, 이는 그들의 ‘한도액’ 액을 통해 나눠진다.
그리고 그 한도액이 가장 크다고 알려진 인물이 명동 사채시장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백 선생’이라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백선생’이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인지, 혹은 어떤 단체를 지칭하는 것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대한민국 전통 부촌 1번지라 불리는 서울 성북동.
1970년대부터 권력층과 대기업 총수들이 모여 살며 부촌을 형성한 곳이었다.
북악산을 병풍 삼아 남산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와 청와대를 끼고 삼청공원 옆의 도로를 지나 삼청터널을 빠져나오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성북동 길 초입이 나온다.
그리고 그런 성북동 안에서도 ‘꿩의 바다’라 이름 붙은 마을이 존재하는데 울창한 나무와 기괴한 암석들이 많아 꿩, 까치가 많이 찾는다고 하여 이름 붙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수많은 재력가들이 살고 있는데 한번 터를 잡으면 옮기는 경우가 거의 없어 집이 매물로 나오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보다 조용하고 외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마을 가장 끝자락에 그야말로 고래등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기와집이 존재했다.
홀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 기이할 정도의 적막이 흐르는 한옥집 부근으로 흰색 탑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지하 주차장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철문이 쩌억하고 입을 벌리자 탑차가 내부로 진입했다.
겉모습은 고풍스러운 한옥이었지만, 지하 주차장은 탑차가 그대로 들어갈 정도로 높고 또 넓었다.
탑차가 지하 주차장 깊숙이까지 당도하자 또 다른 철문 하나가 열리며 시커먼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차에서 내린 배달 기사 복장의 사내가 선두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이미지의 사내였지만 볼에 길게 그어진 흉터가 그의 인상을 무척이나 사납게 만들었다.
“다녀왔습니다 실장님.”
“문제는?”
“없습니다.”
“수고했다. 전부 옮겨 실으면 퇴근해라.”
“예. 실장님.”
운전석에 오른 배달기사가 윙바디를 열자 차곡차곡 쌓인 정체 모를 상자 더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우르르 몰려든 사내들이 어딘가로 박스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흉터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
타닥타닥
누런 황토벽 벽난로에서 통나무 장작들이 불꽃을 너울대며 훨훨 타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가죽 소파에는 개량 한복 차림의 노인이 안경을 걸쳐 쓰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에 희끗희끗하게 센 장발을 질끈 묶은, 탑골 공원에 가면 흔히 볼 법한 평범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이 노인이 명동 사채시장의 정점이라 불리는 백 선생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노인의 곁으로 다가간 칼자국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총알 준비 끝났습니다 회장님.”
조그마한 안경을 고쳐 쓴 노인이 사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생했다. 별문제는 없었고?”
노인에 입에서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 터져 나왔다.
“물론입니다. 검새(검찰)들이 냄새를 맡았다고 해서 평소보다 더 철저히 진행했습니다.”
사내의 보고에 노인의 고개가 미약하게 끄덕여졌다.
“한 실장이 신경 썼으면 검찰 할애비라도 별 수 있긋나? 고생했다.”
노인의 치하에도 남자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표정하게 묵례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일전에 이 사장이 말했던 그 자가 오늘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응? 이 사장이 누꼬?”
“왜 강남에 이용상 사장 있지 않습니까?”
“아아. 이용상이. 끌끌끌. 요새 가는 귀가 멀어뿟나, 어째 오는 말을 영 알아듣질 못하노. 그 송대운인가 뭔가 하는 젊은 친구 말하는거제? 여기저기 투자해서 큰 돈 벌었다는.”
“그렇습니다. 혹시나 해서 저도 따로 좀 알아봤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솔직히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노인의 노회한 눈동자에서 미약한 이채가 띠었다.
“천하의 한 실장 입에서 대단하다는 말이 다 나오고, 확실히 보통 청년은 아닌갑네. 하긴, 이용상이가 대뜸 내한테 찾아와가 만남을 주선하려는 것만 봐도 범상치가 않은기라. 용상이 입장에서는 인생을 건 도박이었을 낀데. 끌끌끌. 내가 만약 그걸로 트집이라도 잡았으면 이용상이 글마 그거 아마 이 세상 구경은 거기서 끝났을기라.”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노인을 보며 한 실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여쭙는 것이지만···. 그 송대운이라는 자는 왜 만나보려 하시는 겁니까? 제아무리 날고 기는 인물일지라도 직접 대면하시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으십니까?”
“끌끌끌. 우리 한 실장이 그게 궁금했드나?”
“혹여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이다. 한 실장 정도면 내한테 그런 질문 할 자격 충분하지. 암. 그렇고말고. 한 실장이 내 밑에서 일한지가 올해로 몇이고?”
“이십 년입니다 회장님.”
“이십 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세월인데 그러고 보면 한 실장 니도 참 많이 변했데이.”
“회장님을 향한 마음은 변할 일 없습니다.”
“끌끌끌. 재미없는 자슥 같으니라고.”
화로 속에서 화드득거리며 타고 있는 장작 쪽으로 시선을 돌린 노인이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이봐라 한 실장아.”
“예 회장님.”
“선친께서는 단지 수완이 좋다는 이유로 일제 앞잡이 취급을 당하셨고, 해방 후에, 우리 집안은 친일파로 몰리며 평생을 뒤에서 손가락질만 받으며 살아왔다.”
뜬금없는 노인의 넋두리에 한 실장이 허리를 고쳐세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렇게 평생 욕만 묵다가 암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덜컥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기라. 그때 내 나이가 고작 스물셋이었다. 그때부턴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살았데이. 지금 생각해도 학을 뗄 만큼 말이다.”
쓴웃음을 머금은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개처럼 일만 하다가 문득 화장실 거울을 보게 됐는데 그때 깨달은기라.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걸.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다가 명동 중국대사관 옆에 사무실을 하나 냈지. 그렇게 본격적으로 이 바닥에 뛰어든게야.”
“대단하십니다. 그 나이에 그런 결정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끌끌끌. 그만큼 절박했다는거 아이겠나. 산전수전 다 겪고 보니 알겠드만. 결국, 큰돈을 벌기 위해선 돈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아무튼, 그렇게 채권장사로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다가 내게도 기회란게 오더구만.”
평소 본인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 백 선생이었기에 목석같던 한 실장도 귀를 쫑긋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3년 여름 정도였을끼다. 웬 일본놈 하나가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대뜸 채권을 달러로 환전해줄 수 있냐고 묻는거 아이겠나.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 액수가 심상치가 않은기라. 그때 본능적으로 알았지. 아. 이건 내 일생일대의 기회구나. 진한 돈 냄새가 진탕을 쳤고, 절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승낙부터 해뿟어. 끌끌끌.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 그 일본놈이 야쿠자 조직의 자금을 담당하는 조직원이라는 걸. 당연히 정상적인 채권은 아니었고 때문에 말도 안되는 수수료를 떼도 그쪽에서 별말을 못했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서 나 말고는 딱히 그 일을 해줄 사람도 못 찾았을기고. 아무튼, 그걸로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수익을 남길 수 있었지. 돌이켜보니 그때가 시작이었던기라. 사채업의 본질을 이해하고, 돈의 속성을 엿보게 된 것이.”
순간 나른하기만 했던 노인의 눈빛이 매섭게 번득였다.
“제대로 된 돈 맛을 봤으니 눈깔이 회까닥 안돌아삐겠나? 같은 편이 돼줄 놈들한테는 딴 마음 못 먹게 돈을 먹여댔고, 내 앞길에 방해가 되는 놈, 앞으로 방해가 될 것 같은 놈은 모조리 제끼기 시작했다. 한번 결정하면 절대 번복은 없었고, 다신 기어오르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았지. 그런 독심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었던 거고.”
한 실장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떡 삼켰다.
옆집 노인네처럼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앉아있지만, 그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냉혈한 인간인지 누구보다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돈이란 놈은 사람을 안 가린데이. 지들이 아무리 잘났고, 잘 나간다케도 돈 앞에서는 지가 입고 있는 빤스라도 벗어 던지는 게 현실인기라. 그만큼 돈이란게 무서운 기다. 적도 친구로 만들 수 있고, 친구도 불구대천 원수로 만들 수 있거든.”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정원이 내다보이는 통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소나무 정원에는 사박사박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끌끌끌. 이야기가 너무 멀리 돌아와뿟네. 한 실장 니도 내 나이가 되면 알끼다. 원래 나이를 묵으면 가끔씩 변덕이 기승을 부리고 그칸다. 사실 그 송대운이란 놈은 이전부터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 안 그렇겠나? 뜬금없이 한국 자산가 순위가 뒤바낐는데. 한 실장 니는 안 궁금하나? 글마가 과연 아군이 될 인물인지, 적이 될 인물일지 말이다.”
뒤에서 있던 한 실장이 나직이 물었다.
“만약 적이라 판단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뭘 어쩌노.”
고개를 돌려 한 실장을 바라본 노인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늘 하던 대로 해야지.”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노인이 전화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야? 그래? 알았어. 들여보내.”
짧은 통화를 끝낸 한 실장이 노인에게 말했다.
“송대운 대표. 지금 막 사저(私邸)로 들어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