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297)
297화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서울 한복판에 이런 데가 있었어?”
작은 성채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규모의 한옥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교도소 뺨치는 높디높은 방벽 때문에 몰랐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건 뭐 가히 별천지 세상과 다름없었다.
이 정도면 곳간이 웬만한 집 한 채 크기라는 경주 최 부자댁과 맞먹지 않을까?
안채로 들어서자 흡사 영화에 볼 법한 삼엄한 보안 체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들이 국정원이야 뭐야.”
하지만, 이런 경험은 빈사르 왕세자 덕분에 빈번히 겪어왔기에 딱히 어색할 것도 없었다.
“아따.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구석구석에 경호원이 배치된 건 물론, 고개 한 번만 돌려도 CCTV 서너 개는 우습게 보였다.
그렇게 한옥의 탈을 쓴 요새를 두리번거리며 구경 삼매경에 빠져 있을때 앞서 걸어가고 있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더니 내쪽으로 뒤돌아섰다.
오른쪽 뺨에 길게 그어진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송대운 대표님?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냥 신기해서요? 서울 한복판에 이런 말도 안되는 집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한옥에 관심도 있고 하다 보니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실례되는 행동입니다. 참고로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밖에 나가면 깔끔히 잊어주셔야 합니다.
순간 남자의 눈빛이 매섭게 번득이며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웬만한 강심장도 절로 위축될만한 그런 포스였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웬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칼자국 사내의 찢어진 눈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태연하게 물었다.
“제가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한 실장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한 실장님. 지금 실례는 그쪽에서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한 실장의 눈가가 한차례 꿈틀했다.
“제가 휴대폰을 들기를 했습니까? 그림을 그리기라도 했습니까? 그냥 집이 이뻐서 둘러봤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를 무슨 간첩 취급을 하면서 실례니 뭐니 언급하는 게 맞습니까? 백 선생이라 불리시는 분은 원래 집에 온 손님 대우를 이런 식으로 합니까? 아니면 한 실장의 독단적인 행동인 겁니까?”
“지금 무슨···.”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저는 지금 기본적인 에티튜드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쪽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저는 엄연히 이 집에 초대를 받고 온 손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손님 대우는커녕, 사람 겁주면서 으악이나 죽여요? 와! 생각해보니깐 기분 상당히 안 좋네. 이러는 거 그쪽 어른도 알고 있습니까?”
“……….”
한 실장이라 불린 사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알면 됐습니다. 얼른 갑시다. 어르신 기다리다가 지치실라.”
한 실장은 눈앞에 저 서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남자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친놈인가?’
보통 이곳에 들어오면 제아무리 대기업 총수라 할지라도 긴장한 기색을 내보인다.
사람을 압도하는 날카로운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백 선생과 연관된 소문들이 워낙 흉흉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저 젊은 놈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허세를 부리며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인생의 파고를 겪어온 한 실장이었기에 그 정도 구분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정말 저 송대운이라는 자는 이곳에 놀러 오듯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제정신이면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게 불가능했기에.
‘뭐···. 미친놈이든, 뭐든 상관없지.”
그래봤자 이제 막 서른을 간신히 넘긴 애송이에 불과했다.
어차피 겪어보지 못한 어둠을 마주하게 된다면 절로 겸손해질 게 분명했기에 한 실장은 더 이상 대운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미로처럼 갈라지는 여러 통로를 지나 마침내 아자팔각이 새겨진 한옥 문 앞에 섰다.
“회장님. 송대운 대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창호지 너머로 노인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라 캐라.”
덜컥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어준 한 실장이 내게 들어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실만한 공간이 사랑방처럼 꾸며져 있었고, 일본식 좌식 의자 앞에는 대나무 재질의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도포 차림으로 보이는 검은 실루엣이 아른아른 비쳐 보였다.
“거기 뒤에 계신 분이 그 유명한 백 선생입니까?”
“껄껄껄. 만나서 반갑구려. 내가 백 선생이라 불리는 늙은이외다.”
아무리 그래도 멀리서 힘들게 찾아온 손님인데 얼굴 한번 안 보여주는 겁니까?”
“이거 미안하게 됐소이다. 내가 마음이 약해가꼬 이상하게 얼굴만 마주 보면 얘기가 잘 안 나옵니다.”
“그렇게 심약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그런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이라니 이거 놀라운데요?”
“끌끌끌. 나에 대해 뭐라고 하더이까?”
“위명이 쟁쟁하시던데요? 피도 눈물도 없는 수전노, 한번 빨대 꼽히면 영혼까지 빨리는 고바우, 명동의 현금왕, 사채시장의 황제 뭐 이런 것들이요?”
블라인드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끌끌끌. 젊은 양반이라 그런가? 고마 기백이 남다르시구랴.”
“그렇습니까? 저는 그냥 들은 그대로 말씀드렸을 뿐인데. 혹여 기분 상하셨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주변에서 뭐라 떠들든 상관없는 일이지. 그래, 그 경계심 많은 이용상이까지 살살 꿰어내면서 날 보자고 청한 이유가?”
“돈놀이하는 놈이 사채업자 찾는 이유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비즈니스 얘기도 좀 하고, 그 유명하신 백 선생님과 여러 유익한 대화도 나눠보려고 온 거죠.”
“껄껄껄. 요즘 가장 잘나가는 전도유망한 투자가 양반과의 비즈니스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로구만. 그래, 얼마나 빌리실 생각이신가?”
“얼마까지 가능합니까?”
“흐음···. 하루에 땡길 수 있는 총알이 3,000억 정도는 될게요. 부족하신가?”
확실히 어마어마하긴 했다.
아무리 자산이 많다고 해도, 단기간에 저 정도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왜 재벌 총수들이 급할 때 이 양반을 찾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정말 가능합니까?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나름대로 이런저런 경험을 하다 보니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들을 하도 많이 봐서 의심이 좀 많습니다.”
블라인드 너머로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로서는 급할 게 없었기에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여유롭게 다도를 즐겼다.
“1960년대쯤…당시 내가 한번에 빌려줄 수 있는 자금 규모는 약 60억대였소이다. 60억 가지고 뭘 그리 유세냐고 하진 마시게나. 당시 오성 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이 190억 정도였으니 .”
갑자기 웬 돈 자랑인가 싶었지만, 일단은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1980년대에 들어서자 내가 움직이는 자금 규모는 2,000억 원을 넘어섰지. 그때부터 재계에서는 요상한 소문이 도는 게 아니겠소? 백 선생이 마음만 먹으면 재벌 몇 정도는 손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고. 에잉···. 누가 그런 고약한 소문을 낸건지. 내가 그 작자들을 날리긴 왜 날려? 그런 우량 고객들이면 알아서 받들어 모셔야지. 안 그렇소이까?”
이제야 알겠다.
자신의 영향력을 어필함으로써 나름의 기선제압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뭐. 어찌 됐건 그런 헛소문 덕분에 그 어떤 기업 총수도 내가 부르면 두말하지 않고 달려오더군. 끌끌끌. 그거 하나는 아주 좋더구만. 일부는 나를 보고 사채 시장의 큰손이니, 사채왕이니 헛소릴 해대지만 알고 보면 나처럼 애국자도 없소이다. 나름 세금도 낼만큼 내고 그랬거든. 사채 하는 놈 중에 나만큼 세금 많이 낸 놈 있으면 나와보라지.”
“그러셨습니까? 그런 대단한 애국자분께서 왜 이렇게 음지에 숨어 살고 계신 겁니까?”
살짝 긁어주자 백 선생의 말투도 조금씩 변해갔다.
“거 젊은 양반이 말 한번 고약하게 하는구만. 숨어 살긴 누가 숨어 산다고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원래 그래. 급할 땐 세상 은인으로 모실 것처럼 굴더니, 막상 돈 갚을 때가 되면 안면몰수 하는 후레자식들이 적지 않단 말이지. 그런 도의도 모르는 것들을 교육 좀 해주다보면 본의 아니게 적이 생기기 마련 아니겠소? 기본적으로 나는 평화주의자에 가깝소이다.”
“백 선생님 같은 평화주의자 두 명만 더 나타났다간 나라가 뒤집히겠네요.”
“흐음···. 젊은 양반······.”
“송대운입니다.”
“껄껄껄. 실례했구만. 그래 송 사장. 자꾸 얘기가 옆으로 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얼마를 빌려서 어디에 쓸 건지 이제 제대로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돈만 빌려주면 됐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내가 뭘 믿고? 참고로 다른 놈들은 원금반환계획서, 사업계획서까지 꼼꼼하게 받소이다. 송 사장 같은 경우는 특별히 나와 독대를 했기 때문에 그런 귀찮은 과정은 생략한 게고. 그러니 입으로라도 설명해야 하지 않겠소?”
“뭐 투자 놀이 하는 놈이 뻔하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한번 굴려서 크게 한탕 챙겨보려고 그러는 거죠.”
“송 사장은 M&A쪽 보다는 벤처투자 쪽 아니었나?”
“굳이 밥그릇을 하나만 둘 필요가 있습니까? 사이즈가 커지면 밥그릇 개수도 자연스럽게 느는 거죠.”
“어디에 투자할 생각이시오?”
“글쎄요? 이제 차차 알아봐야죠.”
“끌끌끌.”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린 백 선생.
“송 사장은 애초에 돈을 빌리러 온 게 아니구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아. 보통 나한테 돈 빌리러 오는 놈들은 하나같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놈들뿐이거든. 다급히 돈세탁을 해야 하는 정치인, 연말에 잔고 증명을 해야 하는 건설회사 사장, 어음을 막기 위한 기업인들까지. 당장 그 돈이 아니면 회사 망하게 생긴 치들 있지 않은가? 그런 자들이 주로 나를 찾지, 송 사장 같은 태도로 사채를 끌어다 쓰는 놈은 세상에 없어.”
“눈치가 빠르시네요. 사실 저 돈 많습니다. 무엇보다 예전에 코인 잘못했다가 인생 나락 갈 뻔 한 이후로 저 빚 무지 싫어합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겐가?”
“백 선생님 한번 보고 싶어서요.”
“나를? 나를 왜?”
“그냥 앞으로 자주 볼 것 같기도 하고 묻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또다시 짧은 적막이 흘렀고 이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껄껄껄. 간땡이 하나는 인정해줄 만하구만. 아니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지 모르는 겐가? 그까짓 이유로 여길 걸어 들어왔다고? 이봐라 송 사장아. 젊은 혈기도 좋지만, 그것도 사람 봐가면서 부리야 되는 기다. 아무리 잘나가는 놈이라도 목숨은 하나 뿐인 거 니 모리나?”
반 존대를 할 때는 그래도 표준어에 가까웠지만, 하대하기 시작하자 백선생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 됐다. 나도 니 낯짝이 궁금했는데 그걸로 퉁 치는걸로 하꾸마. 네 참말로 운 좋았데이. 딱 3년만 일찍 찾아왔어도 니 절대 여기서 몸 성히 걸어 못 나가. 그건 알고 있어레이.”
“어이구 무서워라. 저는 그냥 유명인이랑 대화 한번 나눠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반응할 일입니까? 아까는 무슨 우량 고객이니 뭐니 하더니 갑자기 태세가 바뀌셨네요?”
“끌끌끌. 사업체 하나 간수 못 해서 사채업자나 찾는 모지리들이 우량 고객은 무슨 우량 고객이고.”
“백 선생님이 그분들을 무시할 입장은 아닐 텐데요? 과거에 사업하셨다가 여러 차례 쓴맛을 많이 보셨잖습니까? 1960년에 설립했던 현주모방은 섬유 수출 붐을 타고 비상하나 싶더니 경쟁업체들에 밀려 공중분해 돼버렸고, 사금융 양성화를 목적으로 만드셨던 단자회사도 그리 재미를 보진 못하셨을 텐데요?”
순간 공기의 흐름이 뒤바뀐듯한 착각이 들었다.
블라인드 넘어 실루엣은 미동조차 없었고, 서늘한 적막과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는 사람의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백선생이 내게 물었다.
“니···. 뭐꼬? 그걸 우째 알고 있노?”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
“아! 그리고 명보 그룹의 사실상 현 소유주이시기도 하시죠? 명오천 회장님?”
드르르르륵
탁!
순간 대나무 블라인드가 요란스럽게 걷히며 경악한 초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