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322)
322화 나는 어떤 사람이야?
“대운 오빠?”
눈에 들어온 지원이의 모습에 통제력을 잃은 내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거기서 혼자 뭐해요?”
“어···. 아? 아어! 차 안에 뭐가 있는지 보고 있었어. 하하하.”
“그럼 문을 열지 왜 선팅된 차 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요?”
“아? 그러네? 이야 너 똑똑하구나. 그런 방법이 있었구만.”
뇌를 거치지 않고 나불거리는 주둥이를 찰싹 내리치고 싶었다.
그러면서 지원이의 모습을 힐끔 눈에 담았다.
가죽으로 된 롱 부츠와 골반이 두드러지는 스커트, 딱 달라붙는 검정 니트에, 브라운 코트까지.
나는 무슨 연예인이 나타난 줄 알았다.
평소에 하고 다니던 수수한 화장이 아닌, 각잡고 제대로 화장을 해서였을까?
늘 보던 지원이의 모습과는 다소 괴리감이 있었다.
“너···. 오늘 힘 좀 줬다?”
기껏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이따위라니···. 내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행히 지원이는 별 신경 안 쓰는 기색이었다.
“오랜만에 나들이라 신경 좀 썼죠. 그나저나···.”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지원이의 눈길.
“오빠야말로 오늘 무슨 날이에요? 되게 멀끔하게 하고 왔네?”
“내가 언제 니 앞에서 추잡하게 하고 다닌 적 있었니?”
“그건 아니지만, 항상 업무용 정장만 입고 다녔잖아요. 이런 캐쥬얼 스타일은 또 느낌이 색다르네요. 되게 잘 어울려요.”
“아···. 그래? 큼큼···. 고맙다.”
제멋대로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사수하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었다.
“겨울 다 간 줄 알았는데 날이 제법 쌀쌀하다. 어서 타.”
“고마워요.”
내 곁을 스쳐 간 지원이가 조신하게 보조석에 착석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스쳐 가며 특유의 라벤더 향기가 은은하게 코를 간질였다.
탁!
다급히 차 문을 닫은 나는 고개를 돌려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너 왜 이러냐 대운아? 정신 차리자.”
유진이와 주희가 했던 얘기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뭔가···. 저번보다 오늘이 더욱 다르게 느껴졌다.
그 다름이 무엇인지는 당사자인 나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모르겄다. 일단 가자.”
고개를 내저은 나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거예요?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그냥 따라와. 내가 아주 색다른 경험을 시켜줄 테니까.”
그러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졸라 카리스마 있었어!’
피식 웃음을 터트린 지원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던가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 지원이의 모습을 눈에 담고선 지그시 엑셀을 밟았다.
매번 하는 운전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긴장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
약 50여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지원이를 쳐다봤다.
“다 왔다.”
차창 밖을 둘러보던 지원이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간다는 데가···. 여기였어요?”
“너 이런데 와본 적 있어?”
“그야···. 한국에선 없죠.”
“완전 서울 촌놈이시구만. 일단 내려. 내가 신세계를 체험시켜줄 테니.”
철컥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간판.
[양수리 전통시장]마침 오일장이 들어서는 날이라 제법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만 다녀봤지 이런 전통시장은 처음이지?”
지원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시장이 얼마나 재밌는지 내가 아주 제대로 체험시켜줄게. 나만 따라와.”
기세등등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가 살풋한 미소를 내비쳤다.
“재밌겠네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오케이. 참고로 여긴 백화점과는 다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쫓아와야 해. 알겠지?”
끄덕끄덕
그렇게 한국 전통시장이 생전 처음인 재벌 가문 아가씨를 데리고 본격적인 시장 투어에 나섰다.
제일 처음 우리를 반겨준 건 실신호떡이라 불리는 호떡 맛집이었다.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을 정도로 그 인기가 대단한 곳이었다.
점심시간을 살짝 비껴간 시간대라 그런지 다행히 줄 선 사람들이 그리 많진 않았다.
간이 천막으로 만들어진 호떡집은 수많은 연예인들의 인증사진이 타일처럼 붙어있었다.
“제가 봤던 호떡 비주얼하고는 좀 다르네요···?”
“그런 밋밋한 호떡하고는 클라스가 다르다고 할 수 있지.”
반죽에 어마어마한 견과류가 투하돼서 그런지, 호떡이 아니라 빈대떡과 같은 비주얼을 자랑했다.
줄 서서 기다리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우리 차례가 왔다.
흰 종이컵에 담긴 실신호떡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지원이가 앵두 같은 입술을 앙 벌리고선 작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선 조금씩 커지는 그녀의 동공.
“어때 맛있지?”
“진짜 맛있네요···.”
“맛있어할 줄 알았···. 야야야. 너만 먹지 말고 나도 좀 줘야지!”
실신호떡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지 야무지게 먹어치우는 지원이의 모습에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면서 주전부리로 가볍게 배를 채웠고, 이후 본격적인 시장 투어를 시작했다.
“이건 뭐에요?”
“어···. 음. 독일군 헬멧 같은데?”
“저건요?”
“중세시대 철갑옷…같은데?”
“저게 왜 한국 전통시장에 있어요?”
“그건 나도 모르지.”
진짜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나 전통시장은 기상천외한 물건들이 많았다.
“저건 뭔데 여성용이라고 적혀있어요?”
지원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박스로 만든 요상만 푯말 하나가 놓여있었다.
[오빠! 살려주세요! (여성용)]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를 흉측한 생김새에 본능적으로 지원이의 눈을 가렸다.
“저, 저건 파는 거 아냐. 딴 거 보러 가자.”
그렇게 우리는 부지런히 시장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구경을 했고,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파김치를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파김치 얼마에요?”
“어머? 이쁜 선남선녀 커플이 왔네! 내 특별히 만 이천 원에 줄게.”
아주머니의 돌발 발언에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넉살 좋은 미소를 장착했다.
“그렇게 이쁘면 만 원에 주시면 안돼요? 여자···. 친구랑 맛있게 먹을게요.”
없는 애교까지 끌어내자 아주머니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셨다.
“오호호. 내 특별히 이쁜 색시 보고 싸게 주는 거야? 새댁은 좋겠어. 자고로 남자가 이렇게 싹싹해야 가정도 화목한 법이야.”
속닥이듯 말하지만 다 들립니다 아주머니.
의외로 지원이는 차분한 얼굴로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먹음직스러운 파김치까지 득템하고선, 차를 타고 두물머리 인근 조용한 카페로 이동했다.
남한강 뷰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자리에 커피를 가져다 놓은 나는 멍하니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지원이에게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너무 돌아다녀서 다리 아프지?”
“아니에요. 오랜만에 사람 구경도 하고, 시장도 돌아다녀 보고···. 색다른 재미였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눈빛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이다. 데려오길 잘했네.”
“그런 쪽으로는 영 맹탕일 줄 알았는데 은근히 센스가 있네요.”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하거든?”
미약한 항변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지원이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늘 오빠···. 평소와 다른 거 알아요?”
“내, 내가? 뭐가?”
“그냥 뭔가 더 자상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까는 왜 그랬어요?”
“아까?”
“아주머니가 우리 둘 보고 커플이라고 했을 때요. 평소 같았으면 펄쩍 뛰며 부인했을 거잖아요.”
당황한 나는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한번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막상 질문받으니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 깎아주시잖아. 하하하···.”
정말 내 머리털을 쥐어뜯고 싶었다.
기껏 한다는 대답이 저 모양이라니.
이상하게 오늘따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기분이었다.
“흐음···.”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제대로 힐링한 기분이에요.”
“그래? 하하하. 다행이네. 싫어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사실 오빠가 어디를 데려간다고 했어도 좋아했을 거에요. 이렇게 둘이서 시간 보내는 건 처음이잖아요.”
“엥? 우리 같이 밥 많이 먹었잖아.”
“무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그 국밥집이요?”
아? 그러고 보니 지원이랑은 항상 국밥집 아니면 해장국집만 갔었구나.
“물론 거기도 좋았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하잖아요. 주말에 그것도 서울을 벗어나서 전혀 새로운 공간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냈으니···. 오빠도 괜찮았어요?”
“나? 나야 무지무지 좋았지. 자주 오는 시장인데도 뭔가 느낌이 다르더라고.”
거짓은 아니었다.
원장 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을 자주 가는 편인데 그때와는 감정이 달랐다.
구름 위를 나는 듯, 기분이 둥둥 떠다녔고,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신경도 쓰였지만, 아이처럼 좋아하는 지원이를 보자 그런 것도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오빠랑 알고 지낸 지도 벌써 5년이 넘었네요. 시간이 참 빨라요.”
“벌써···. 그렇게 됐나?”
“할아버지를 통해 처음 오빠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후에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오빠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죠.”
“큼큼···. 그래서 니가 볼 땐 나는···. 어떤 사람이야?”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왜 이렇게 손에서 땀이 흐르는 걸까?
힘겹게 내뱉은 질문에 반해 대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존경할만한 사람···. 오빠는 그런 사람이에요. 다 가지고 태어난 저와 달리 아무것도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자산가가 되었죠. 하지만 저에겐 그 부분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그런게···. 있어?”
“오빠는 주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요. 그래서 사람들을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만들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
독백하듯 담담히 속내를 털어놓는 지원이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처음엔 질투였고, 그다음엔 호기심이었어요. 이후에는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오빠한테만 고백하자면 사실 저는 제 인생에 별로 큰 흥미가 없었어요. 뭐랄까···? 뭘 해도 재미가 없달까···. 그냥 해야 하니깐, 그간 누려온 것들이 있으니깐 거기에 대한 책무를 다하자는 생각뿐이었죠.”
크고 촉촉한 연갈색의 눈동자가 조금씩 내 가슴에 스며든다.
“그런데 송대운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그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선 제 세상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아주 미약한 변화지만 저에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경험이었죠. 그래서 늘 오빠 주변을 맴돌았어요. 그 낯선 감정이 신기해서.”
이때부터였다.
뇌의 통제를 벗어난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시점이.
“고맙네···. 그리 좋게 봐주니.”
최대한 어색하지 않아 보이려고 신경 썼지만 아마 거울을 본다면 무척 어색했을 것이다.
“저···. 다음 주에 선봐요.”
“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아마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까지 가게 될 확률이 높아요. 집안 대 집안의 문제라.”
“아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재벌가에 태어났으면 당연한거에요. 오히려 저는 엄청 늦은 편이죠. 그것도 집안에서 많이 배려해준 거고요. 이제는 저도 거부할 명분이 없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제가 해야 할 책무라는 게 있거든요.”
“아···.”
순간 머리가 텅 비는 느낌과 함께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전에도 분명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확실한 건, 그때와 달리 지금은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 깃든 눈으로 지원이를 바라봤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에 떠다니는 구름과 지원이의 얼굴이 자줏빛으로 물들어갔다.
“오빠를 좋아했어요. 오빠가 생각한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짤막한 그 한마디가 심장을 관통하며 일순간 세상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