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324)
324화 탈출
이승환 회장님과 정면에서 눈이 딱 마주친 나는 트럭과 마주한 고라니처럼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의 한 조각.
‘아오씨. 송대운 바보 멍청아! 이 집을 나한테 소개해준 게 이승환 회장님이잖아!’
처음 이 집에 나를 데리고 와준 분이 이승환 회장님이었다는 걸 미처 망각했다.
2M 정도 되는 간격을 두고 숨 막히는 대치가 이어졌다.
문득 지원이가 내 팔짱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선 곁눈질로 옆을 살폈다.
의외로 담담한 기색의 지원이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할아버지인 이승환 회장을 응시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이 회장님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 회장님의 구둣발이 한 걸음씩 내딛어질 때마다 내 심장도 거기에 맞춰 날뛰기 시작했다.
심심할 때마다 만나는 이 회장님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염라대왕 부럽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보였다.
“너희 둘···. 여기서 뭐 하는 게냐?”
“아···. 그게.”
막상 질문을 받자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게 썸타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중.
“데이트하고 있어요 할아버지.”
“데이트?”
“예. 보시다시피.”
지원이가 팔짱 낀 팔을 들어 올리며 차분히 상황 설명을 했다.
의아한 시선으로 우리 두 사람을 보는 이 회장님.
“데이트라면 연인들끼리 하는 거 아니더냐?”
“아직 그런 건 아니고 천천히 알아가고 있어요.”
“뭬야!?”
소리를 버럭 지르는 이 회장님의 노호성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참말이야?”
추궁하는 듯한 이 회장님의 물음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친한 동생 사이로 온 건 아닙니다···. 하하.”
내 대답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이 회장님이 우리 두 사람을 그대로 지나쳤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에 다급히 이 회장님을 부르려 했지만.
“뭐해? 안 따라오고.”
“옙.”
그렇게 나는 학생주임에게 끌려가는 학생의 심정으로 이 회장님의 뒤를 따라나섰다.
***
유독, 이 룸 안 공기만 다른 것일까?
서늘하고 묵직한 공기가 내 전신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이 회장님이 마침내 입술을 뗐다.
“그러니깐···. 너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그말인게야?”
“예. 그렇게 됐습니다.”
당차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한번은 각오한 일이 아니었던가.
“내가 밀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아니, 콧방귀도 안 뀌었다니요···.”
괜히 눈치가 보여 힐끔 옆을 살폈지만, 다행히 지원이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네놈 볼 때마다 지원이 한번 만나보라고 몇 번을 얘기했더냐? 인제 와서 발뺌이야?”
“그게 아니고···. 그때는 진짜 동생일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동생보다는 특별한 존재죠.”
“에잉. 정치인하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이리 빙빙 도는 게야. 그래서 결혼한다고?”
“커헉. 아, 아뇨! 아직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우리 지원이를 지금 장난으로 만나는 게야?”
“헙! 그건 더더욱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서로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이은 킬 패스에 어느새 얼굴에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평소에는 장난도 칠 정도로 편한 어르신이었지만, 이해관계가 생기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뭐랄까. 여친을 집까지 데려다주려다가 정문에서 장인어른을 딱 마주친 느낌이랄까.
“맞아요 할아버지. 서로 오빠동생으로 알게 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천천히 다가가고 있어요.”
지원이의 지원사격에 이 회장님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에잉. 뭐가 그리 복잡한게냐. 그냥 마음에 들면 몇 번 만나다가 냅다 결혼하면 되는 것을.”
“회장님···. 요즘 속도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히 반대하는 뉘앙스는 아니어서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갑자기 결혼을 언급하시니 심장이 또 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지원이랑···. 결혼?’
이게 모쏠의 고질병인 급발진 병일까?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결혼식장은 물론 자식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왜 혼자 변태처럼 실실 쪼개고 있어?”
카랑카랑한 이 회장님의 목소리에 핑크빛 망상이 와장창 깨져버렸고, 한차례 머리를 털어낸 나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이 회장님을 쳐다봤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순간 지원이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보시다시피 이제는 더 이상 오빠동생 사이가 아닌 진지한 남녀 관계로 서로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제가 지원이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옆에 딱 붙어 있던 지원이의 육신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는 게 마치 도축업자가 토실토실한 한우를 품평하는 듯했다.
영겁 같던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긴장을 감추지 못한 나는 연신 손에 흐르는 땀을 바지에 닦아야 했다.
마른 침을 꿀떡 삼키려던 그 순간.
“크헐헐헐. 잘됐네! 잘됐어. 내 언젠간 이리될 줄 알았지.”
느닷없이 화통한 웃음을 터트린 이 회장님이 흐뭇한 눈빛으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래서 선 한번 보라고 했더니 거부한 게로구나.”
“예. 할아버지.”
양반집 규수처럼 조신하게 대답하는 지원이를 헤벌쭉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함을 감지했다.
“선보기로 이미 확정 난 거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냐? 애가 원하지도 않는데 무턱대고 선을 잡긴 왜 잡아? 우리 집안이 그렇게 경우 없는 집안은 아니다 이것아.”
이 회장님의 말에 나는 벙찐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지원이는 그런 내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끌끌끌. 신중한 것도 좋은데 뭐든 질질 끌어봤자 좋을게 없는 법이야. 대운이 네놈은 투자는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지르면서 연애 사업은 왜 그렇질 못하는게야?”
“그거야···.”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도, 편한 동생으로 알고 지낸 관성이 있어서 아직은 그 잔재를 털어 낼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도 거의 없었지만.
“좋다. 일단은 뭐···. 니들 생각이 그러하다니 나도 애미애비한테는 일단 모른척하마.”
역시 우리 이 회장님! 센스가 남다르시다.
“그나저나 무릎 안 저리냐?”
“예?”
“아침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왜 혼자 무릎을 꿇고 있어?”
“아···?”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나는 황급히 다리를 폈고.
“으헉! 내 다리!”
감각이 없어진 다리에 찌릿한 전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옅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 회장님이 혀를 차셨다.
“쯧쯧쯧. 지원이 너는 저런 맹한 놈이 뭐가 좋다고.”
“귀엽잖아요.”
아픈 와중에도 그 한마디가 내 광대를 승천하게 했다.
예기치 못하게 이 회장님과 마주하게 됐지만, 결과는 썩 나쁘지 않았기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고프다. 같이 밥이나 뜨자꾸나.”
이 회장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들이 줄줄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뭔가 큰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 들자 미칠듯한 허기가 몰려왔다.
불그스름하게 달궈진 참숯 위에 구리 불판이 올라갔고, 그 위로 양념에 잘 재워진 갈비가 고운 자태로 드러누웠다.
직원이 고기를 구워주는 동안 본격적인 이 회장님의 질문 폭격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대운이 네놈.”
“옙?”
“우리 지원이가 어디가 그렇게 좋더냐?”
훗, 이 정도 질문은 충분히 예상범위 안이었다.
“겉보기엔 말 한번 잘못 걸었다간 따귀라도 맞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배려심 깊고, 착하고, 또 현명합니다. 무엇보다···.”
고개를 돌려 지원이를 한번 쳐다보고선 헤벌쭉 입을 벌렸다.
“너무 이쁘지 않습니까?”
“끌끌끌. 이제야 그게 눈에 보이더냐?”
“그러게요. 왜 그게 이제야 보였을까요?”
긴장이 풀려서인지 어느 정도 넉살은 부릴 정도로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직원이 나눠 준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넣으려는 찰나.
“그래서 애는 몇이나 낳으려고?”
“컥! 콜록콜록.”
예상치 못한 공격에 고기가 목구멍에 턱 막혀버렸다.
거친 기침을 토해내는 나를 보며 지원이가 등을 두드려줬다.
기침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 회장님을 쳐다봤다.
“아니, 이제 막 알아가고 있다니깐 갑자기 애는 무슨 앱니까?”
“아니 이것아.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그럴 것 아니야?”
“그건 맞지만···. 근데 왜 지원이한테는 아무것도 안 묻고 저한테만 물어보십니까?”
물론 상상은 해본 적은 있지만 이런 자리에서 밝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쟤는 애초에 너한테 홀딱 빠져있는 게 보여서 뭐 물어볼 것도 없다.”
“큼큼···. 그래요?”
무슨 조울증 환자도 아니고, 당황했다가도 저런 얘기만 들으면 가슴이 요동친다.
“끌끌끌. 아무튼, 보기 좋구나. 자주 봐야 정도 깊어지고 하는 법이니깐. 지원이 너도 회사 일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거라. 자고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다.”
“그렇게 할게요 할아버지.”
그렇게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갈비가 동이 나고서야 압박 면접을 방불케 하는 식사 자리가 끝이 났다.
어렵사리 이승환 회장님을 떠나보내고, 지원이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어후, 거기서 회장님과 딱 마주칠 줄 누가 알았냐? 대한민국 정말 좁다 좁아.”
핼쑥해진 내 안색을 보던 지원이가 살풋이 웃음을 내비쳤다.
“고생했어요. 짓궂은 질문도 많았는데.”
“아니야.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나중에는 더 편해졌어. 뭐랄까. 우리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느낌이랄까···?”
“우리 관계가 어떤 관곈데요?”
“그야 당연히 썸···.”
이라는 말을 내뱉으려다가 본능적으로 그 말을 내뱉어선 안 된다는 자각이 들었다.
“감질나서 썸은 더 이상 못 해 먹겠다. 그냥 우리 이제 사귀자. 마음이 커져가서 안 되겠어.”
지나가듯 툭 내뱉은 모양새였지만 사실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을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몸쪽 꽉 찬 돌직구에 얼굴이 새빨개진 지원이가 시선을 내리깔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떨어지며 어두침침하게 땅거미가 내려앉았지만, 눈부신 광명이 찾아오듯 세상이 환해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앞으로···. 잘 할게.”
“저도요···.”
그렇게 나는 인고의 기간 끝에 솔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
“딜런?”
스테파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아까부터 왜 계속 혼자 실실 웃고 있는 거죠?”
“제가요? 설마요.”
“거울 보고 올래요? 지금도 웃고 있거든요?”
큰일이다. 도무지 웃음이 통제가 안 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십만 년 만에 하게 된 연애인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
“하하하···. 원래 제가 웃음이 많잖습니까. 이번에는 무슨 이상한 일 같은 거 안 꾸미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놉! 그런 웃음과는 아예 결이 다른 웃음이에요.”
“그게 무슨···?”
“사고 치기 전에 짓는 웃음은 뭐랄까···? 살짝 wicked(음흉한)한 웃음이라면, 지금은 뭐랄까···. blissful(더 없이 행복한)한 미소랄까?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여자의 촉은 무섭다더니 그걸 간파할 줄이야.
“좋은 일 있죠. 우리 회사도 잘 되고 있고, 투자한 회사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고, 하하하. 세상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하하.”
난데없이 동탁 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며 스테파니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흡사 미친놈이라도 보는듯한 얼굴이었다.
“오늘 컨디션이 좋으신가보군요. 근래 무척 피곤해 보이셨는데 보기 좋습니다.”
김선기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다 돌연 무릎을 ‘탁’ 쳤다.
“아! 대표님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그게···. 한국벤처캐피탈협회로부터 협조 요청이 왔습니다. 해외 스타트업 포럼에 참석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더군요.”
“해외면 어딜 말하는 겁니까?”
“일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