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Investor Who Picks Up Conglomerates RAW novel - Chapter (325)
325화 간다고 전해주세요
“일본이라···. 굳이 제가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내 물음에 김선기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벤처캐피탈 협회에서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담당자 말로는 일본 측에서 대표님을 콕 집어 초청했다고 합니다.”
“흐음···. 굳이 나를···.”
물론 지금 내 위치가 한국 벤처 업계를 대표하긴 했지만, 굳이 나를 딱 꼬집었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창업 생태계가 어떠한가요? 희한하게 그쪽 얘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내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매튜에게 쏠렸다.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에겐 있지만, 일본에는 없는 게 바로 활성화된 벤처 생태계이니까요. 한국은 창업 생태계가 그나마 잘 구축된 편이라 미래 산업 부문에서 여러 스타트업들이 나오고 있지만, 일본은 그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단적인 예로 모두가 잘 아시는 ‘코드’가 있습니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일본 내 최대 모바일 메신저인 ‘코드’의 모기업 국적을 일본으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코드’의 본류는 한국 기업인 웨이버입니다. 그만큼 일본인들이 벤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죠.”
기술 강국인 일본이었기에 당연히 창업에 관한 관심도 클 줄 알았는데 다소 의외였다.
“한국은 9개의 유니콘 기업이 등재돼 세계 유니콘 기업 순위에서 독일과 공동 5위에 위치에 있지만, 일본은 고작 3개에 불과하죠. 그만큼 혁신 성장 가능성은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걸 뒤늦게 자각했는지 최근 일본에서도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고 있긴 합니다.”
“의외네요. 일본 정도면 당연히 벤처 생태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테파니의 의문에 매튜가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본에서 스타트업이라고 했을 때 딱 떠오르는 기업이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고 거래 플랫폼 ‘메루카리’나 ‘페이팔’에 인수된 ‘페이도’ 정도겠군요. 그만큼 일본은 아직까지 대기업에서 주요 소비시장을 꽉 잡고 있습니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말씀드리면 일본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지만, 스타트업에 대한 벤처투자가 국가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은 GDP대비 0.03%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선진국에 대비하여 매우 저조한 수준이지요.”
“왜 그런 걸까요?”
“아마도 일본 특유의 민족성과 문화가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흥미로운 얘기에 내 몸뚱이가 매튜 쪽으로 기울었다.
“민족성과 문화요?”
“우선 첫 번째로는 리스크를 극도로 꺼리는 일본의 비즈니스 문화를 꼽을 수가 있겠군요. 일본 기업과 비즈니스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꽤나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닐 겁니다. 뭐하나 확실히 대답하는 법이 없고, 해석의 여지가 있는 모호한 표현만 남용하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의사결정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간단한 계약 하나 체결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죠. 좋게 말하면 작은 것 하나에도 신중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매튜의 말에 스테파니가 손뼉을 탁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기억이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 일본에서 온 사업가가 있었는데 간단한 협약 하나 맺는 건데도 어찌나 시간을 질질 끌던지···. 결국 우리 쪽에서 무산시켜버린 적이 있었어요.”
“하하. 이해가 안 되겠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일본에서는 비즈니스를 할 때 신뢰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회는 한번 실수하면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라 낙인이 찍히는 감점 주의 문화가 만연하기 때문에 신뢰 관계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의사결정은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
“따지고 보면 이런 일본의 기업 문화는 스타트업에게 필수적인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 여러 시행착오를 통한 ‘개선’이라는 린스타트업적 사고방식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장기적 성장을 위한 단기적 실패를 허용할 수 있는 아량의 범위가 일본에게는 매우 제한적인 거죠.”
“아이러니하네요. 린 스타트업을 개발한 미국의 에릭 리스는 정작 도요타의 린 제조 방식에서 린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정작 일본은 그 방식을 채택하지 않아 혁신에 뒤처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두 번째는요?”
얘기가 재밌던지 매튜를 쳐다보는 스테파니의 눈이 반짝였다.
“두 번째는 스타트업의 근간을 이루는 ICT(정보통신기술)에 대한 저조한 투자도 한몫했습니다. 현재 일본 기업들이 사용하는 IT 시스템 중 20%가 20년 전에 도입된 낡은 것들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헐···. 20년이요? 그 정도면 무조건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새로운 것보다는 불편하더라도 기존에 쓰던 걸 추구하려는 기업 문화가 ICT 기술에 대한 투자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게 한 겁니다. 실제로 1997년에 일본 ICT 투자액은 20조 엔(215조 원)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17조 엔에도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같은 기간 ICT 투자액이 4배 이상 증가한 미국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양상이죠.”
“놀랍네요. 유지한 것도 아닌 오히려 퇴보한 수준이라니···.”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는 간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사 개발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보단 외주 개발이나 패키지형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슨 일본의 IT 스타트업이 자체적인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기보다는 대기업으로부터 외주 받은 소프트웨어 개발로 연명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매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만큼 일본은 아직도 IT 엔지니어에 대한 인식이 한국만큼 좋지 않습니다. 근무 여건이 좋지 않으면서 돈도 벌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하죠. 환경이 이러하다 보니 혁신적인 비즈니스를 창출한다는 생각은 힘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새끼 때부터 목줄에 매여있던 강아지가 성체가 돼서 목줄을 풀어줘도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매튜 정도면 창업 관련 강연만 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담담한 음색과 명확한 딕션은 이상하게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보는 요소인데···. 일본의 청년들은 기본적으로 창업을 꺼립니다. 그러다 보니 창업계를 견인해갈 만한 인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죠. 다들 잘 아시겠지만 스타트업은 자금과 인력이 제한된 만큼 팀원 하나하나의 역량이 회사의 존망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의 명문대를 나온 학생들 대부분은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지, 창업을 하려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특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비중이 일본 전체 노동인구의 1%에 불과하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네요. 일본의 대기업이 어마어마하게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닐 텐데···.”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 창업이란 선택지가 배제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 한국도 일본과 유사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있지만, 일본보다 심각하진 않습니다. 그만큼 기존의 분위기를 타파하고 창업 생태계를 꾸리기 위해 노력해온 결실이 이제야 드러나기 시작한 거죠. 아! 그리고 일본에서는 기업가로 성공해도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사회 풍조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마 치명적인 요소가 됐을 겁니다.”
“에? 아니, 기업가로 성공하면 어마어마한 자산가가 되는 건데 존경받지 못한다고요?”
이건 나조차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자고로 성공한 기업가라면 모두가 원하는 워너비의 위치가 아니던가?
“일본에서 창업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사실상 제 발로 가시밭길을 걸어가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고용 보험의 혜택도 받을 수 없고, 실업수당은 물론 정부에서 취업자를 대상으로 제공하는 그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처럼 국가 지원금이나, 무이자 대출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창업자 우대 대출은커녕 직장인 대비 신용도가 낮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금융거래도 하지 못 할 테죠. 한마디로 대기업을 벗어나서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스테파니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저 같아도 창업이라는 선택지를 고를 것 같진 않네요.”
“일본 정부도 뒤늦게 문제를 인식한듯합니다. 내부 인적 리소스만으로는 일본의 창업 생태계를 활성화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최근 외국인 창업가 유치를 위해 스타트업 비자 지원이나 지자체 연계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유인책을 내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번에 딜런을 초대하려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겁니다.”
“흐음···. 의도가 뭔지는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는군요. 근데 굳이 그런 불모지에 대표님이 가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요?”
김선기의 말에 매튜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 방금전까지 일본 창업 시장을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기회가 많이 열려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동남아를 두고 한번 볼까요? 동남아 전체 인구는 대략 7억 명이 조금 안 됩니다. 일본 인구는 1억 2천만 명 정도 되죠. 하지만 시장 규모만 따지면 동남아 전체 시장보다 일본 시장이 훨씬 더 큽니다. 그 말은 단일 시장인 일본이 진입하기엔 훨씬 용이하다는 뜻이죠. 더구나 일본에서 한국 창업 관계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호의적인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일본 사람들은 한국 대기업을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일본의 기업을 베껴서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죠. 하지만 한국의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영향력을 끼친 게 전혀 없음에도 그 정도로 성장했으니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생각이겠죠.”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매튜의 설명을 듣던 나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일본의 벤처캐피탈 상황은 어떠한가요?”
“작년부터 여러 국가의 VC들이 일본 진출을 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면 일본은 쌓아둔 돈이 많고 워낙 좋은 원천 기술이 많기 때문에 창업 생태계가 활성화된다면 유니콘 기업이 터져 나올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한국의 VC들도 지금 시기에 일본에 진출하는 게 초기 시장에 진입하는 적기가 될 거라 보고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김선기가 넌지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요즘 스케쥴도 바쁘신데 그냥 거절하는게 어떨까요? 어차피 창업 포럼 같은 행사는 사실상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닙니까?”
“아뇨. 간다고 전해주세요.”
“예? 가신다고요?”
“한번 가보죠 뭐. 그렇게 노다지라는데 안 갈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수요미씨 그룹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가야 하는 곳이 일본이었다.
예기치 않게 좋은 명분이 생긴 듯했다.
그렇게 한 달 후, 나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