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1)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화
기회
부러진 창칼 사이로 창백한 머리가 구른다.
붉은 피로 점철된 땅의 입장에선 붉은빛을 더할 뿐인 메마른 목일 뿐이었지만, 티그리스에겐 대전쟁을 끝낸 마침표였다.
하늘로 솟구쳐 추락하는 붉은 피를 맞으며, 티그리스는 잘려 나간 머리를 향해 돌아섰다.
조각난 시체와 창칼들 사이에 안착한 새하얀 머리를 향해 부러진 ‘대적자의 검’을 치켜세운다.
목이 잘렸지만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르펨은 이 세상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우주 너머의 존재기 때문이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되었다. 난 죽는다.”
잘려 나간 머리에서 나온 건조한 목소리는 티그리스의 긴장감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대단하군. 인간의 몸으로 나 아르펨을 죽이다니.”
갑옷이 무겁다.
티그리스는 넝마가 된 갑주를 벗었다.
철컹!
황금빛이 퇴색되어 빛바랜 놋쇠의 색을 토해내고 있는 갑주가 허물 벗듯이 벗겨졌다. 드워프들이 드래곤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만들었다는 ‘우로스’라는 전설의 갑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티그리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족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여왕 ‘우노’와 함께했던 천년의 세월 동안 너처럼 강한 자는 보지 못했다.”
티그리스는 묵묵히 걸었다.
발에 노르베르드 변경백의 보물 ‘드윈의 검’의 조각이 밟혀도, 프리하르덴 백작가의 보물 ‘프리하르덴의 여름’이 발에 차여도 피로 점철된 구덩이를 향해 걸었다.
“과연 오만한 티그리스라 불려도 충분한 검술이었다.”
오만이란 단어에 티그리스는 발이 멈추었다.
오만.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의 꼬리표였다.
티그리스는 검술의 천재였다.
한 번 본 검술은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고, 두 번을 보면 검술을 창시한 이의 의도를 알 수 있었으며, 세 번을 보면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들어 상승의 검술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티그리스보다 강한 검사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훌륭한 기사가 되지 못했다. 자신보다 못한 검사를 버러지 취급했으며 마법 따윈 쓸모없는 학문으로 폄훼했다. 결정적으로 티그리스는 이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살아 움직이는 이가 없다.
인류의 존망을 건 최후의 전쟁에서 황국의 황금 기사단도, 철혈 마법 병단도, 인퀴지터도, 밀림의 수호자들도 용병들도 모두 흐르는 핏물의 강이 되었다. 오로지 세상에 자신만이 잘난 줄로 알았던 오만한 티그리스만이 남았다.
티그리스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모든 일에는 끝이 필요하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한 송이의 꽃을 건네기 전에, 이 지옥 같은 대전쟁의 종막을 선언하는 붉은 마침표가 우선이 되어야 했다.
“그 고고하고 아름다운 눈……. 곧 오염과 침식의 여왕님의 것이…….”
콰직!
티그리스는 부러진 대적자의 칼로 아르펨의 머리를 찍었다.
아르펨의 목 없는 육체에서도 부서진 머리에서도 생기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
마침표 끝에 공백이 남듯 피 냄새가 섞이는 대전쟁의 막이 끝나고 티그리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애써 외면해 왔던 감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티그리스는 극심한 고독감에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벌을 받는 것이다.’
그래. 벌이었다.
하늘에서 내린 천벌.
하늘에서 내려준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베풀지 않았기에 하늘이 노한 것이었다.
붉은 피로 가득한 전장에 은빛을 더하지만 피 냄새 가득한 붉은색이 희석되지 않았다.
-죽어어어어어!
그때, 티그리스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 죽은 것이 아니었던가? 티그리스는 부러진 대적자의 검을 짚고 일어났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지만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발 누군가 살아 있길.
지금 들리는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길.
-죽어어! 죽어어!!!
환청이 아니다.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다.
티그리스는 시체의 언덕을 기어서 넘었다. 한 사내가 애처롭게 흩날리는 푸른 불꽃의 검을 들고 한 시체를 향해 검을 내리찍고 있었다.
그러나 시체는 실시간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척추를 따라 갈비뼈가 생겨나고 쇄골이 자랐으며 그 위로 살이 덮기 시작했다. 이윽고 머리가 생기더니 입이 생기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죽어! 죽어! 이 끈질긴 벌레 새끼야!!!”
비명은 점점 웃음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라칸! 내 심장은 네 싸구려 불꽃으론 태울 수 없단 말이다!!!”
티그리스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쉼 없이 구르는 수레바퀴’ 로타.
‘마음으로 조각하는 예술가’ 아르펨과 같은 외계의 존재다.
라칸이 뛰어난 마검사이긴 하나 라칸의 검과 마법으론 로타를 온전히 죽일 수 없었다. 마검사들은 대개 그렇듯 마법도 검도 끝을 보지 못한다.
황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검사라 불린 라칸은 결국 자신의 심상을 검에 담을 수 있는 소드 마스터도 세상의 작은 이치를 깨달은 대마법사도 되지 못하였다.
극에 달하지 못한 이가 로타를 벨 수 있을 리 없다.
이윽고 로타의 오른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죽어라! 라칸!!!”
로타의 오른팔이 섬전같이 라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은빛 실선이 로타의 오른팔을 잘라냈다.
털썩!
잘려 나간 로타의 오른손이 핏물에 추락했다.
“끄아아아아아!”
로타의 끔찍한 비명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로타는 오른손을 다시 재생하려 했지만 잘려 나간 상완골 아래로 전혀 재생이 되지 않았다.
로타의 재생을 방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검술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티그리스……!”
로타는 필사적으로 왼팔을 재생시켰다. 빨리 라칸의 남은 오른팔을 잘라내어 붙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시 티그리스의 검이 움직였다.
부러진 대적자의 검이 로타의 단단한 갈비뼈를 자르고 심장을 갈라냈다.
울컥!
라칸이 수십 번을 찔러도 뛰던 심장이 티그리스의 칼질 한 번에 두 조각이 났다. 로타의 심장이 멈췄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티그리스가 자신의 심상을 검에 담을 수 있는 소드 마스터의 단계에 올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라칸은 로타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누웠다. 전부 끝났다는 안도감에 뒤늦게 고통이 몰려왔다. 라칸은 고통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르펨 그 개새끼는 죽었냐?”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X발 새끼. 잘 뒈졌다.”
티그리스는 주변을 훑었다. 혹시나 산 사람이 있나 봤지만 이곳도 생존자가 없었다.
오직 라칸뿐이었다.
라칸은 잘린 왼팔에서 몰려오는 화끈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
“포인트 상점.”
라칸은 종종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하곤 했다. 티그리스는 그런 라칸을 평생 무시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엘릭서는 재고가 소진됐고……. 젠장 이것밖에 없네. 최상급 치유 포션 2개 구매.”
라칸의 오른손에서 황금빛 찬란한 회복 포션이 두 병 생겨났다.
라칸이 아공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던가? 티그리스가 알기론 라칸은 7서클이 아니라 6서클 마검사였다. 아공간 마법은 7서클 대마법사 수준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야. 받아라.”
라칸은 한 병을 티그리스에게 던졌다. 제구력은 엉망이었지만 티그리스는 재주 좋게 받았다. 라칸이 잘린 왼팔에 절반을 뿌리고 나머지는 삼켰다.
티그리스는 구멍이 뚫린 왼쪽 배에 뿌리고 나머지는 입에 집어넣었다. 최상급 포션답게 바닥난 마력이 차오르고 신체 컨디션도 빠르게 돌아왔다.
“언제부터 아공간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았지?”
“아공간 마법은 지랄. 포인트 상점이다.”
“포인트 상점?”
라칸은 빈 병을 내던지며 일어났다.
“너 아렌 요새 공방전 때 없었냐?”
“있었다. 그때 식탐을 깎아내는 자 템페를 내가 베었잖나?”
“아니, 공방전 직전 작전 회의 때 말이야. 그때 내가 무슨 능력을 갖고 있는지 모두 설명했을 텐데?”
“작전 회의 땐 참석하지 않았다.”
라칸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맞다. 이 새끼 그래서 혼자 닥돌했었지. 아렌 요새를 붕괴시켜서 적 병력들을 한 번에 묻어버리자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잖아.”
“그 덕에 아렌 요새는 지킬 수 있었지 않았나?”
“지랄. 그때 아렌 요새 사상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 아렌 요새를 지킬 병사가 없어서 결국 로타에게 넘어갔잖아.”
라칸은 티그리스를 쏘아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너랑 무슨 얘길 하겠냐.”
“그래서 네 능력이 뭐지?”
“똥이나 처먹어라. 다 끝난 마당에 뭐 하러 얘길 해주냐.”
라칸은 피바다뿐인 전장을 훑었다. 그 눈빛에서 티그리스와 같은 고독과 슬픔이 만져졌다.
“시발……. 결국 다 죽었네. 레인로버 황녀님도 프리하르덴 백작님도 전부…….”
라칸은 울지 못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더 강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지금 100만 포인트를 갖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티그리스가 자신의 오만함에 후회를 하듯 라칸은 자신의 검술과 마법 실력에 후회했다.
좀 더 검을 수련할걸.
좀 더 마법 공부를 할걸.
포인트에 의존하지 않고 나 자신을 성장시킬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었다. 라칸은 땅에 널브러진 ‘현자의 검’을 옆구리에 차고 해가 지는 방향으로 걸었다.
“난 이제 간다. 넌 알아서 잘 먹고 잘살아라.”
“어디로 갈 셈이지?”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지 잘난 맛에만 사는 녀석이 이제야 남 생각도 할 줄 아나 보지?”
“무너진 황국을 다시 세우자.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루체트 황가의 핏줄을 찾아…….”
“지랄하지 마!”
라칸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네가 다른 사람 말만 잘 들었으면 이 모양 이 꼴은 안 났어! 멍청한 내 말은 듣지 않아도 레인로버 황녀님이나 프리하르덴 백작님이나 망할 땅딸보 드워프 아저씨 말을 듣고 같이 싸웠다면 이 지경까지 안 왔다고!”
라칸의 날카로운 말에 티그리스의 심장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라칸은 티그리스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하자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하하! 평소 같으면 평민 새끼가 감히 위대하신 변경백에게 무슨 망발을 지껄이냐면서 그 우아하고 고상한 말투로 지랄했을 텐데 가만히 있네? 너도 양심이 있나 보지?”
“……넌 인류를 구원한 영웅이다.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영웅? 영웅이라고? 이제야 영웅 취급을 해주는 거야? 우와 시발 존나게 고맙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각하 나리!”
티그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하다.”
“……뭐라고?”
“내가 교만했다. 네 말대로 이 모든 참상은 내 탓이 크다.”
라칸은 어안이 벙벙했다. 티그리스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녀석 때문에 병사 10만 명이 죽었을 때도, 수인족들이 괴멸을 당했을 때도, 아렌 요새를 결국 빼앗겼을 때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라칸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슬픔, 좌절, 허탈을 지나 결국 분노로 모였다.
“좀 더 빨리……! 좀 더 빨리 미안하다고 했다면! 좀 더 빨리 네 잘못을 알았다면!!!”
라칸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네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면…… 이 지경까지 안 왔을 텐데…….”
“미안하다. 이 말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티그리스가 고개를 숙이자, 라칸은 비명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이 개 X발 새끼가아아아아아!”
라칸은 검을 뽑아 티그리스의 목에 가져다 댔다. 선혈이 검을 타고 흘렀다. 라칸은 지금이라도 당장 티그리스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벨 수 없었다.
라칸, 아니, 김유신의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가는 새로운 계획 때문이었다. 이 참상을 모두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라칸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너 만약에 과…….”
찌이이이이이잉!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저 멀리 거대한 보랏빛 빛줄기가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빛줄기에 시선을 빼앗길 시간은 없었다. 라칸과 티그리스는 동시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땅을 뚫고 검고 붉은 촉수가 둘을 향해 날아왔다. 티그리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촉수가 잘려 나갔지만 대적자의 검이 손잡이만 남고 부서졌다.
아슬아슬했던 내구도가 다한 것이었다.
텅!
라칸도 똑같이 남은 오른팔로 촉수를 올려 쳤지만 촉수에 작은 생채기만 남을 뿐 잘라내지 못했다.
심상 개화를 한 소드 마스터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극명한 차이였다.
둘이 바닥을 밟자 사방에서 수백 개의 검붉은 촉수들이 둘을 향해 덮쳐왔다.
“티그리스!”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검을 던졌다. 티그리스는 손잡이만 남은 대적자의 검을 버리고 ‘현자의 검’을 받았다. 마검사에게 특화된 성물이지만 티그리스에겐 중요치 않았다.
검이란 것이 중요했다.
티그리스는 오러를 끌어올렸다. 라칸은 티그리스의 준비 자세를 보고 무엇을 할지 예상이 갔는지 바로 허리를 숙였다.
티그리스의 검에서 방출된 검기가 촉수들을 가르고 지나갔다. 라칸이 겨우 생채기만 냈었던 촉수 수백 개가 동시에 두 동강이 났다.
다른 촉수들보다 유난히 굵었던 것들도 상관이 없었다.
모두 티그리스의 검 앞에 평등하게 잘려 나갔다.
하늘 높이 솟구쳤던 촉수들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지진을 일으켰다.
라칸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것들은 뭐지? 로타랑 아르펨이 남겨놓은 비장의 수라도 되는 건가?”
“아니, 이건 로타와 아르펨과 다르다.”
베어냈기에 알 수 있다.
이것은 로타와 아르펨이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유기물이다. 분명 유기물이건만 같은 부피의 강철보다 무겁고 단단했으며 질겼다.
즉, 이 세상의 규칙과 어긋나는 존재였다.
“이건…… 어떤 존재다.”
“존재?”
그때 잘려 나간 거대한 촉수 하나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말끔한 절단면으로 하얀 무언가가 꿈틀대며 나오기 시작했다.
검붉은 촉수에서 나온 것과 다르게 눈처럼 창백했으며 얼굴과 머리카락은 없었지만 몸은 여성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창백한 여인은 촉수의 끝에서 분리되어 두 발을 딛고 티그리스를 봤다. 눈은 없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와 하나가 될 가치가 있군.
창백한 존재는 소리가 아닌 정신파로 말을 했다. 인간의 격을 넘어선 무언가라는 것을 라칸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여인은 손을 뻗어 티그리스를 향했다.
-티그리스. 나와 하나가 되어라. 나는 우노. 오염과 침식의 여왕이자 우주와 차원을 유영하여 신이 될 위대한 자다. 너는 나와 함께 신이 되기에 충분하다.
“넌…… 아르펨과 로타와 무슨 관계지?”
-아르펨과 로타는 나와 하나가 되기로 했던 자들 중 하나. 비록 죽었지만 둘의 혼이 내게 돌아옴에 따라 옥좌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라칸은 허공에 뜬 메시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최종 퀘스트? 여왕 우노? X발 아르펨과 로타가 끝 아니었어……?”
우노는 라칸의 중얼거림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노에게 있어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가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넌 나와 함께할 자격이 충분하다. 나와 하나가 되어 이 행성의 지배자가 되거라. 필멸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티그리스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력감에 혼란스러웠다. 우노를 베어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노의 본체는 저 창백한 여인이 아니다.
티그리스는 발밑에서 느껴지는 작은 진동을 감지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티그리스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이 끔찍한 촉수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돋보기를 든 인간 앞에 선 개미가 이런 감정일까? 티그리스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민하지 말지어다. 어차피 너는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니.
티그리스가 감지한 촉수들이 땅을 천천히 뚫고 올라왔다. 수십만 개의 촉수들이 전장을 모두 메웠다. 땅이 사라지고 촉수가 땅이 된 것 같았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검을 놓칠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라칸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장의 수가 하나 남았기에.
“포인트 상점.”
라칸의 눈앞에 수없이 많은 상품 목록들이 떴다. 개중엔 품절된 것들도 있었지만 아직 남은 것이 두 개 있었다.
[지구 귀환권]남은 개수: 1EA
가격: 1,000,000포인트
[회귀의 회중시계]남은 개수: 1EA
가격: 1,000,000포인트
라칸은 주저 없이 ‘회귀의 회중시계’를 선택했다.
찬란한 은색의 회중시계가 라칸의 손에서 튀어나오자, 단 한 번을 쳐다보지 않았던 우노가 라칸을 봤다.
-그건 무엇이냐? 그것에서 시간의 힘이 느껴진다.
라칸은 주저 없이 ‘회귀의 회중시계’의 용두를 눌렀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라칸은 티그리스를 보며 말했다.
“야. 내가 과거로 돌아가도 널 설득할 자신이 없거든. 그리고 돌아가더라도 널 이겨먹을 자신도 없고. 난 재능이 없으니까.”
째깍- 째깍-
라칸은 티그리스에게 ‘회귀의 회중시계’를 던졌다. 티그리스는 반사적으로 받았다.
“그러니까 네가 돌아가라.”
째깍- 째깍-
“지금 이게 무…”
“말 끊지 말고 들어. 10년 전의 나는 단순해서 김유신, 상태창, 시스템 이 세 개만 말하면 내 능력이 뭔지 다 말해줄 거야. 그리고…….”
째깍- 째깍-
회중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12시에 향한다.
“좀 잘해. 마지막 기회니까 새끼야.”
“라……!”
시계에서 하얀빛이 터지며 티그리스는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