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115)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15화
회색 쥐(7)
베이튼은 레일라의 명함과 앰플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이상한 꿈을 꿔서 그런지 기분이 싱숭생숭한 터라 오전에 일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정확하게 무슨 꿈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일어났을 때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베이튼은 탁상에 올려져 있는 시계를 봤다.
오전 11시.
‘점심까지 1시간 남았나.’
레일라와 점심을 먹게 되면 베이튼은 레일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녀는 뱀 같은 여자라서 자기가 문 먹잇감을 손쉽게 놓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끊어내야 한다면 지금 끊어내야만 했다.
‘누구를 믿어야 할까.’
베이튼은 사실 티그리스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자신은 노르베르드 가문에게 정말 최선을 다해 충성했다고 생각한다.
노르베르드 타워도 건설하고 각종 부동선 투자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렸으니까.
하지만 베오울프는 가끔 고생한다며 성과금을 주는 것을 제외하면 베이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고, 티그리스는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심지어 황녀의 생일 파티 때나 트리니티 후원회 파티 때 베이튼을 한 번이라도 데려갈 법하건만 그러지 않았다.
만약 티그리스가 베이튼을 진정으로 신용하고 아꼈다면 그 파티 자리에 베이튼을 데려갔으리라.
‘하지만 왜 알브레 백작을 넘긴 걸까?’
티그리스가 베이튼과 알브레 백작 간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다.
자신에게 알브레 백작을 요리할 기회를 준 것은 이제 슬슬 믿기 시작하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후원회에서 끝까지 티그리스와 맞먹으려 한 알브레 백작이 괘씸해서 그런 것일까?
이유야 모르겠지만 베이튼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건축 지식을 쥐어짜 내 알브레 백작이 단 한 톨도 남겨 먹기 힘들게끔 했다.
재하청ㆍ재재하청 금지에 원자재의 표준 단가와 표준 품셈을 적용하고 시공사 측에서 나온 감독관이 있을 때만 건축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알브레 백작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괴롭혔다.
복수는 꿀보다 달콤하다던가?
베이튼은 알브레 백작의 안면 근육이 비틀릴 때마다 자꾸 올라오는 입꼬리를 통제하느라 힘들 정도로 즐겁고 달았다.
이것만 떠올리면 베이튼은 티그리스에게 감사하다고 고개를 수십 번이고 숙여도 모자란 상황이지만, 베이튼은 여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베이튼은 귀족이 되고 싶었다.
귀족이 되어 알브레 백작의 만행을 귀족 사회에 낱낱이 공개하여 아버지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점심시간까지 이제 겨우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레일라의 점심 식사 제안을 거절하든 받아들이든 간에 지금 연락을 넣는 것이 맞았다.
베이튼은 명함에 적혀 있는 전문 번호를 한참을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결정을 내렸다.
* * *
베이튼이 레일라에게 전문을 보내자마자 티그리스에게 곧바로 연락이 왔다.
-서재로 올라오도록.
베이튼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우연인가 아니면 레일라가 티그리스의 시험이었던 것인가?
만약 시험이었다면 베이튼은 통과한 것인가?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질문들에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안녕하세요. 베이튼 씨.”
“……그래.”
온갖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탓에 베이튼은 레니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재로 곧바로 향했다.
베이튼은 서재 문 앞에서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문을 두들겼다.
“베이튼입니다.”
-들어오게.
베이튼은 예법을 갖춰 문을 열고 들어갔다.
티그리스는 언제나 그랬듯이 기품 있는 자세로 베이튼을 맞이했다.
티그리스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에 앉게.”
베이튼은 티그리스의 눈빛을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챘다.
레일라는 100% 티그리스의 시험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과연 맞은 것인지 아니면 틀린 것인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했다.
티그리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왜 거절한 거지?”
베이튼은 레일라와의 점심 식사를 거절했다.
그 이유를 묻는 티그리스의 질문에 베이튼은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베이튼은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티그리스 님께 먼저 보고드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침에야 들어오셨다고 들었기 때문에 아직 주무신다고……”
“내가 자네를 아직까지 믿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티그리스의 말에 베이튼은 등골이 오싹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베이튼 자네는 내게 단 한 번도 본심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네.”
티그리스의 말에 베이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감언이설로 내 귀를 혼탁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 주변에 산더미만큼 쌓여 있네. 하지만 내게 필요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자네도 아주 잘 알고 있지 않나?”
베이튼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티그리스가 한 번도 본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며 믿지 못했지만, 본인 역시 티그리스에게 본심을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티그리스의 곁에서 간을 보며 의중을 살폈을 뿐이다.
그런 짓은 베이튼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티그리스에게 그런 사람이 필요할까?
베이튼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자네를 내치지 않은 이유는 유능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이젠 아니야.”
티그리스는 황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베이튼이 아닌 다른 경영자를 찾아 ‘더 노르베르드’의 수장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베이튼은 자신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고 하더라도 망가지거나 더 좋은 검이 손에 들어오면 결국은 버려지게 마련이네. 하지만 애착이 가는 칼은 날이 무뎌지고 금이 가도 어떻게든 고쳐 쓰거나 도저히 못 쓸 정도로 망가지면 집무실에 전시해 두지.”
베이튼은 티그리스의 뒤에 있는 늑대검을 쳐다봤다.
늑대검은 녹슬지 않도록 영구보존 마법이 인챈트 되어 있는 유리 보관함에 전시되어 있었다.
베이튼은 저 늑대검이 티그리스에게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검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 늑대검은 티그리스가 기사가 될 때 베오울프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검이었다.
티그리스에게 굉장한 의미가 담겨 있는 늑대검은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현장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티그리스가 자주 사용한 샐러맨더의 검은 나무 거치대에 대충 거치되어 있었다.
“쓸모 있는 자가 되기보다 의미 있는 자가 되게. 쓸모 있는 자는 쓸모를 다하면 버려지지만, 의미 있는 자는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회자되게 마련이니까.”
티그리스는 검지에 껴 있는 노르베르드 가문의 인장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그게 귀족의 삶이네.”
티그리스는 품속에서 황금색 봉투를 꺼냈다.
황금색 봉투는 오직 황제가 교지를 내릴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봉투였다.
“이 교지를 들고 보름 뒤에 있을 정례 회의에 참석하게. 그때 자네의 작위 수여 심사가 동시에 이루어질 것일세.”
베이튼은 순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물론 작위 수여 심사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바로 귀족이 되는 게 아닐세. 여러 달성 조건이 붙겠지. 아마 트리니티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룰 걸세.”
베이튼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의심이 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어째서 제가 작위 수여 심사를 받게 된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작위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맡게 될 것이네.”
“……네?”
“자네는 앞으로 황국 내 보안 시설 건축 및 관리 업무를 맡게 될 것일세. 그런 막중한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려면 제대로 된 신분이 있어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겠지.”
베이튼은 정신을 차리고 티그리스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 말씀은 트리니티에 보안 시설이 갖춰질 예정이란 뜻입니까?”
“그렇네. 자세한 내용은 히드라와 이야기를 나누게. 보안 관련 업무는 내 소관이 아니니.”
“히드라라고 한다면 인퀴지터의…… 세상에.”
베이튼은 자신이 얼마나 큰 임무를 맡게 될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설마 그 레일라가 히드라였던 겁니까?”
“아니, 레일라는 어제 새벽 황도에 소행성 낙하를 일으킨 범인의 동료일세.”
“네? 소행성 낙하 말씀이십니까? 어제 새벽에는 아무 일도……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신문에 분명 한 실험실에서 조명 마법 실험 중에 사고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황도 시민들은 조명 실험이 아니라 별똥별 같았다고 말했는데…….
“그럼 그게 진짜 유성이었던 겁니까? 아, 오늘 아침까지 못 들어오셨던 게 그 문제 때문이었던 거군요.”
“그렇네. 자네는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을 맡게 될 것일세. 그러니 복수심은 일단 접어두는 편이 좋겠지.”
베이튼은 티그리스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알브레 백작에게 복수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두라는 이야기였다.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황제 폐하의 교지를 베이튼에게 건넸다.
베이튼은 공손하게 받았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보단 내 충고를 잊지 말게. 이젠 노르베르드 가문이나 베오울프 변경백님이 아닌 황국과 황제 폐하를 섬기는 자가 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게. 준비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테니까.”
베이튼은 천당과 지옥을 수십 번은 오간 느낌이라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서재를 떠나는 베이튼을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오늘 중으로 무조건 제국 대학의 병동으로 찾아가 치료를 받게.”
“네? 치료 말씀이십니까?”
티그리스는 베이튼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의 머리에 숨어 있는 기생충을 빼내야 하니까.”
베이튼은 소름이 돋았다.
* * *
레인로버와 나달 그리고 베르강은 봄의 궁전에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솜니움이 죽고 펠렌이 왼팔을 날린 성과를 거뒀지만, 레인로버를 비롯해 셋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레이 타운 쪽 피해자 집계는 됐나요?”
레인로버의 질문에 나달이 대답했다.
“현재 진행 중에 있긴 합니다만 시위가 멈추지 않아 집계가 어렵습니다.”
“역시 일반 시위자인지 감염자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나 보군요.”
“제 눈이나 다른 요원들의 입장에선 모두 동일한 시위자로 보이지만 라칸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나 봅니다. 라칸이 지금 경찰들과 협조하여 일반 시위자와 감염자를 구분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시위자는 계속 불어나고 있다면서요.”
베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심지어 흥분한 시위자들이 경찰 하나를 집단 폭행했다고 합니다.”
“그건 방금 소식 들었어요. 피해자의 몸 상태는 어떻다고 하나요?”
“자연 치유되려면 16주는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난리가 났겠네요.”
레인로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솜니움이 죽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역시 머릿속 기생충은 죽일 수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남은 상처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거겠죠.”
“그레이 타운 문제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문제였으니까요. 솜니움은 그저 기름통에 불씨 하나를 튕겼을 뿐입니다.”
솜니움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했을 뿐 없던 트라우마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
그레이 타운은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탓에 신원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시민들이 가득했고, 더러운 환경 때문에 종종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국은 전염병이 돌 때만 개입하고 그 외엔 거의 방치하다시피 놔두었다.
빈곤한 백성들은 그레이 타운뿐만이 아니라 이미 황국 전역에 퍼져 있었으니, 그레이 타운의 시민들만 구제하는 복지 정책을 펼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잠잠했던 게 정말 이상할 정도였죠. 언제 그레이 타운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레이 타운은 문제투성이였어요.”
“그럼 왜 지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레이 타운 시민들은 가만히 있었던 겁니까?”
나달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그레이 타운의 갱단들이 타운 내 시민들을 통제했습니다. 레드 파우더의 유통을 비롯해 밀수 사업, 인신매매 사업 등 여러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그레이 타운만큼 좋은 환경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갱단들의 주 수입원인 레드 파우더 유통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틀어막아 버렸으니 갱단들이 시민들을 통제할 이유도 힘도 사라졌죠.”
레인로버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하 경제가 죽으니 갱단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들이 시민들을 통제할 수단이 사라졌다는 말씀이네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솜니움의 나이트메어도 한몫했을 겁니다.”
“그럼 그레이 타운의 ‘회색 쥐’들의 숫자는 더더욱 늘어날 거란 뜻이군요.”
“네. 가만히 놔두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베르강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레인로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이 타운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보진 못했어요. 당장에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바스티얀 학교장님 말씀이군요.”
레인로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렌이 바스티얀 학교장님의 형제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문젠데, 토드 황제 폐하께서 바스티얀 학교장님께 뭔가를 숨긴 듯해요.”
“티그리스 경께서 무슨 일인지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까?”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더라고요. 확실히 심각한 내용인 듯해요.”
베르강은 나달을 보며 말했다.
“혹시 자네는 바스티얀 학교장님께서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고 있나?”
나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저도 말씀드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건 바스티얀 학교장님 개인의 문제가 아닌 로드엘림 공작 가문의 문제라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개인이 아닌 가문 문제인가……. 이거 문제가 심각하군.”
레인로버는 마른세수를 했다.
“솜니움을 죽이고 펠렌의 왼팔을 자른 것은 정말 큰 성과이긴 하지만, 놈들이 곪아 있던 상처를 헤집어 놓아버려 골치가 아프네요.”
베르강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현명하게 잘 해결하실 겁니다.”
* * *
팍스 제국의 개국공신 현자 레논이 말했다.
젊은 시절 삶이 주는 고난을 온몸으로 이겨낸 흉터가 주름으로 남는 대신 마음은 굳은살처럼 딱딱해져 웬만한 일에도 초연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바스티얀은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살해한 사람은 자신의 친형이지만 친형에게 협조한 가문들이 여전히 떳떳하게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스티얀은 생각보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논이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분노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조급함이 사라지고 복수의 방법이 지혜로워졌을 뿐이었다.
“제 부모님을 죽이는 데 협조한 가문의 명단을 주십시오.”
바스티얀의 잠잠한 분노에 토드 황제는 준비했던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와 같은 분노는 토드 황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가문들을 어떻게 할 셈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
“예. 그렇습니다.”
바스티얀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저 그들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길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작금은 격변의 시대다.
로타와 아르펨이라는 거대한 적을 앞두고 있는 황국은 열심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인재들을 모으고 자금을 풀어 시장과 유통망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대세를 따르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은 현명하고 발 빠르게 대처하겠지만, 자신에 손에 들려 있는 보석과 금화를 놓지 못해 더 큰 기회를 잡지 못하는 우둔한 자들은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바스티얀은 그 우둔한 자들이 바로 자신의 부모님을 죽인 가문들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금화를 놓지 못해 로드엘림 가문의 가주까지 죽인 자들이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을 리가 없으니까.
“격변의 시대에 그들이 휩쓸려 죽어가는 것을 저는 방관할 것이고 구제해 달라고 손을 내밀면 발로 걷어차 버릴 것입니다.”
토드 황제는 부모님을 죽인 친형을 직접 죽이고 난 직후의 바스티얀을 떠올렸다.
당시 바스티얀은 마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산불과도 같은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똑같이 분노하고 있었지만, 궤가 달랐다.
큰 도시를 천천히 집어삼키는 호우(豪雨)와 같은 분노가 바스티얀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오밤중에 그 누구도 모르게 집 안에 들이치는 물처럼 천천히 집어삼킬 것만 같아 토드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나달을 통해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다만 부탁 하나만 하겠네. 분노에 눈이 멀어 현명한 선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주게.”
바스티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