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134)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34화
성좌의 던전(4)
호국경은 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는 귀족에게 붙여지는 직책이다.
그렇다 보니 현재 말레 왕국 내에서의 권력 구도를 보자면, 현재 티그리스는 왕 바로 다음의 권력가다.
그런 자가 갑자기 살기를 뿌려대며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병사들이나 기사들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주…… 죽여주십시오! 호국경님!”
눈치 빠른 기사 하나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자, 하인이고 기사고 구분할 것 없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티그리스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병사가 거품을 물고 기절하자 내동댕이쳤다.
흠칫!
티그리스는 주변을 훑었다.
그 누구도 티그리스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티그리스와 눈을 마주치면 저 거품을 문 병사처럼 험한 꼴을 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문득 이 구도가 굉장히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 베오울프가 저주에 걸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때, 노르베르드 안에서 티그리스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자는 이런 공포를 통한 지배를 원할지 모르겠지만, 티그리스의 입장에선 과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자꾸 베오울프가 앓아누웠던 그 날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끔찍한 나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후.”
티그리스는 심호흡을 한번 했다.
자신이 너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 있음을 인정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지금 이 상황을 이용할 방법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가 차게 식으며 돌아가기 시작하자 티그리스는 기사들과 똑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제물들을 쳐다봤다.
그녀들의 몸에 난 잔 상처들을 보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거인들이 상처 입은 제물을 원할 것 같으냐?”
티그리스의 말에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티그리스의 말이 맞건 틀리건 지금은 아무 말도 해선 안 된다.
그저 숨을 죽이고 티그리스의 분노가 풀리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들의 상처가 곪아 거인들이 제물을 거부하면 네놈들의 아내라도 내놓을 생각이냐고 묻는 거다.”
“죽여주십시오! 호국경님!”
티그리스는 공포에서 발한 권력을 휘두르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 누구도 티그리스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만약 티그리스가 상식 밖의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원래 공포에 젖은 인간들은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성이 돌아올 무렵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뒤늦게 떠오르는 법이니까.
티그리스는 엎드려 빌고 있던 기사가 갖고 있던 수갑 열쇠 꾸러미를 낚아챘다.
“오늘 이 제물들을 건네는 일은 내가 직접 하겠다.”
그때, 티그리스의 환관 하나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호국경님. 오늘 켐벨 자작님과의 오찬은…….”
티그리스가 환관을 쏘아보자 그는 흠칫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 취소하겠다고 전하겠습니다.”
티그리스는 그리폰 기사단장에 말했다.
“여인들을 호송 마차에 태워라.”
“저 호국경님 호위는…….”
“호위 따위는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내 말에 또다시 토를 달면 내가 직접 경을 칠 것이다.”
티그리스의 카리스마에 기가 죽은 기사들과 병사들은 다급하게 여인들을 호송 마차에 태웠다.
“안 돼! 안 돼!!!”
여인들은 끌려가기 싫어 발버둥을 쳤다.
여인들의 날카로운 손톱에 병사들의 뺨과 팔에 생채기가 났지만, 병사들은 여인들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
티그리스가 여인들에게 손을 대는 병사들이 있는지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여인들을 마차에 강제로 태운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티그리스에게 창살 열쇠를 건넸다.
티그리스는 열쇠를 건네받고 마부의 옆에 올라탔다.
마부는 호국경이 자신의 옆에 올라타자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뭐 하나. 출발 안 하고.”
“예! 예! 알겠습니다.”
마부는 무려 10마리가 이끄는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며 성곽을 빠져나갔고, 남겨진 기사들과 병사들은 멍하니 사라진 호국경의 마차를 쳐다봤다.
“단장님 이걸 어떻게 합니까?”
“……나도 모르겠다. 일단 국왕 폐하께 말씀드려야지.”
기사단장은 이 사실을 어떻게 보고드려야 할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 * *
마차를 타고 간 지 5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마차가 급격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티그리스가 마부를 쳐다보자 마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호…… 호국경님. 그…… 말이 지친 것 같습니다. 비가 와서 땅이 진창이기도 하고…….”
“거인들이 사는 곳까지 얼마나 남았지?”
“마차로 아흐레는 더 가야 합니다.”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 이 속도로 아흐레를 가야 하는 거리라면, 티그리스는 잠을 자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이틀이면 갈 수 있다.
‘마부에게 정확한 거인의 위치를 알아내고 이들을 버리면 되겠군.’
티그리스는 던전을 공략하면 사라질 호국경의 자리는 원하지도 않았다.
미치도록 신경 쓰이는 것은 오직 하나.
베오울프의 안위다.
티그리스는 뒤를 돌아봤다.
여인들은 추위에 덜덜 떨며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침에 비가 살짝 내려 추위를 타는 모양이었다.
“잠깐 쉬어야겠군.”
“네. 맞습니다.”
“근처에 쉴 만한 마을이 있나?”
“예. 조금만 더 가면 나골이라 불리는 작은 성이 있습죠. 네.”
“그곳으로 가지.”
“예. 알겠습니다!”
마부는 말의 등을 채찍으로 때리며 말했다.
“이놈들아 조금만 더 가자. 그러면 쉴 수 있으니까.”
마부의 말대로 조금 더 가니 나골이라는 성이 나타났다.
티그리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부에게 작은 금덩어리를 건넸다.
마부는 금덩어리를 보자 크게 놀라 눈을 부엉이처럼 동그랗게 떴다.
“아니, 이게…….”
“이거면 여인들에게 먹일 식량과 말에게 먹일 건초를 사기엔 충분할 거다. 돈이 남으면 여인들이 덮을 두껍고 질 좋은 이불이나 가죽을 구해 오도록 해라.”
“여인들에게 덮을 이불을 말씀이십니까?”
티그리스는 콜록거리는 여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인들이 폐병에라도 걸리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 무조건 질 좋은 것들로 가져오도록 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호국경님!”
“난 여기를 지키고 있을 테니 다녀오도록.”
마부가 걸음아 나 살려라 달렸다.
티그리스는 마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열쇠 꾸러미를 들었다.
이제 여인들을 풀어주고 갈 길을 갈 셈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순 없었으니까.
지이이잉-
그때, 티그리스의 품속에 들어 있던 신호기가 진동했다.
‘이건?’
바스티얀이 만들어낸 이 신호기는 근방 1㎞ 이내에 대원들이 있으면 진동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 말은 이 성안에 대원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인들을 사냥하는 것도 급한 일이긴 하지만, 대원과 합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만약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티그리스의 권력과 힘으로 구해줄 수 있을 테니까.
티그리스는 일단 마부석에 다시 올라탔다.
현재 티그리스는 굉장히 튄다.
호국경이라는 자가 나골 성에 마부 하나만 데리고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미 티그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나골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졌을 테니, 티그리스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쪽에서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한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병사와 이 성의 관리들로 보이는 무리들과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티그리스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레인로버 황녀였다.
티그리스는 반사적으로 예를 표하려다가 멈췄다.
현재 말레 왕국 내에서 레인로버 황녀가 어떤 직책을 갖고 있든 간에 티그리스보다 높을 리가 없다.
티그리스는 마부석에서 내려오지도 않은 채, 레인로버 황녀를 쳐다봤다.
레인로버 황녀는 자연스럽게 치마를 들고 인사했다.
“호국경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나골 성의 성주 미야라고 합니다.”
언제나 먼저 예를 표하는 것은 티그리스였는데, 반대의 상황이 되니 티그리스는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조급함과 날카롭게 날이 섰던 신경이 싹 가라앉으며 편안해졌다.
레인로버 황녀는 보기만 해도 티그리스의 마음을 평온케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티그리스는 마부석에 내려와 입을 열었다.
“반갑소. 성주.”
“호국경님께서 직접 제물들을 데리고 나골 성에 방문하셨다고 들었을 때 제 귀를 의심했답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요?”
티그리스는 병사들을 훑으며 말했다.
“여기서 말씀드리기 어려우니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병사들에게 제물들의 호위를 잠시 맡겨도 되겠나?”
“예. 물론이죠.”
레인로버가 손짓을 하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호위 대형을 갖췄다.
“잠깐 대화를 나누고 올 테니 너희는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와 레인로버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아무도 보지 않자 레인로버는 티그리스를 와락 껴안았다.
“티그리스 경. 여기서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티그리스는 순간 당황해서 멈칫했지만, 곧 조심스럽게 레인로버를 안아주었다.
레인로버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괜찮은 게 절대 아니었다.
갑자기 주변에서 성주라고 치켜세우더니 갑자기 결재 서류를 내미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트리샤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서류를 봐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냥 말과 병기, 비축 식량 숫자가 제대로 맞는지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며 직접 발로 나섰죠. 어차피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이 성을 벗어나야 하니까 탈출 경로도 좀 봐둘 겸 해서요.”
레인로버는 역시 레인로버였다.
굉장히 당황스러울 법도 하건만 굉장히 의연하게 잘 대처했다.
“그런데 말 숫자랑 밀 비축량이 아예 안 맞는 거 아세요? 그래서 서기관하고 말구종을 요절을 내버리려다가 참았죠. 딱 봐도 저 몰래 착복한 게 분명했어요.”
왠지 레인로버의 뒤를 따라오던 관리들이 이 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는 것 같더니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무 성주의 일에 심취한 거 아닙니까?”
“그냥 보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올라서요. 어떻게 말 숫자가 21마리나 차이 나고 밀 비축량이 절반이나 차이가 날 수 있죠? 이 성에 있는 백성들이 곧 맞이할 겨울을 어떻게 보내려고…….”
레인로버는 자신이 너무 과몰입을 했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제가 너무 성주의 일에 심취한 것 같네요. 어차피 여긴 상관도 없는 곳인데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품에서 안정을 취한 뒤 떨어졌다.
“하아……. 힐링된다.”
“힐링 말씀이십니까?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뇨. 여기 유행어예요. 마음이 안정된다는 뜻이죠.”
“벌써 유행어도 익히셨습니까?”
“사람들이 흔하게 사용하던데요? 뭔가 입에 착착 달라붙지 않아요? 자주 사용해야지.”
“…….”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티그리스 경이 호국경이라니. 굉장히 어울리는데요?”
“레인로버 황녀님도 성주직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뭐, 덕분에 연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죠. 그런데 문제는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좀 쉽지 않아요.”
레인로버는 C팀이다 보니 셀로스 호수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나골 성의 단 하나뿐인 성주다 보니 이곳을 탈출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가는 곳이면 무조건 제 전속 시녀나 기사 하나가 따라붙게 되어 있더라고요. 심지어 화장실에도 시녀가 따라오는 거 있죠?”
“그런데 지금은 없지 않습니까?”
“그야 호국경님이 수도에서 기사들하고 고위 관리들을 요절을 내고 처음 방문한 성이잖아요. 시녀나 병사나 눈치가 있으면 빠져야죠.”
“그 소문이 벌써 났습니까?”
“1시간 전쯤인가? 왕실에서 수정구로 직접 연락이 왔어요. 호국경이 경을 치고 이쪽으로 갔으니 최대한 잡아둬 달라고요.”
레인로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어보니까 거인들에게 바칠 제물에 상처가 나면 어떻게 하냐고 했다면서요? 참 마음씨도 착하셔라.”
“……그냥 수도를 빠져나올 구실을 만든 것뿐입니다.”
“뭐, 그런 거라고 믿을게요. 아무튼 여기에서 시간을 많이 쓸 수는 없어요. 아마 2~3시간 내로 그리폰 기사단이 올 거예요.”
그리폰 기사단이 달라붙으면 괜히 귀찮은 일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단 여기를 빨리 빠져나가야겠군요.”
“일단 제물들하고 같이 나가죠. 제가 방금 들은 소식인데 동쪽 성문에 라이오너 떼들이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라이오너는 오크와 똑같은 5등급 몬스터다.
게다가 오크처럼 떼를 지어 다니는 몬스터다 보니 웬만한 상인들이나 용병들은 길을 가다가 라이오너들이 다녀간 흔적이 발견되면 도망치는 게 상식이었다.
“라이오너 떼들에게 습격을 당한 흔적을 남기면 추적을 피할 수 있겠군요.”
“몬스터들을 유혹하는 향수도 갖고 있으니까 실제로 공격을 받게 만들 수도 있어요.”
“원래 그건 닉스들을 꾀어낼 때 사용하려던 거 아니었습니까?”
“여분은 충분히 있어요. 한 방울 정도만 사용해도 괜찮을 거예요.”
라이오너 떼들이 얼마나 달려오든 지 간에 레인로버가 위험해질 일은 없다.
티그리스 선에서 모두 정리될 테니까.
“혹시 셀로스 호수의 위치도 알고 계십니까?”
“네. 말을 타고 간다는 가정하에 나골 성에서 동쪽으로 사흘 거리에 있더라고요.”
“그럼 저와 같이 움직이시다가 셀로스 호수 근처에서 헤어지면 되겠군요.”
일단 레인로버와 임시 동행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니,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동행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음……. 저희 나골 성 쪽에서 호위 병력을 지원해 준다고 하면 어떨까요? 저도 중간에 끼워서 가고요.”
“만약 그렇게 되면 라이오너 떼들에게 호위 병력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레인로버는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들 걱정하는 거 맞잖아요. 저 여자들이 다치는 게 보기 싫어서 그때 화내신 거죠?”
“……괜한 사람이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명분도 있었으니까요.”
“뭐~ 그런 거라고 믿을게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상냥한 모습이 가끔씩 드러날 때마다 정말로 좋았다.
이 점이 바로 회귀 전의 티그리스와 지금의 티그리스가 아예 다른 사람이라는 증거니까.
레인로버는 깊이 생각하더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뭐, 그럼 그냥 막무가내식으로 하죠.”
“막무가내식이요?”
“은신 아티팩트가 있으니까 그것을 사용해서 제가 몰래 티그리스 경의 마차에 올라탈게요. 어차피 이 나골 성엔 5서클 마법을 알아낼 수 있는 마법사도 없고 아티팩트도 없어요. 나중에 마부랑 여인들만 어떻게 구워삶기만 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은데요?”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았다.
레인로버가 진짜 나골 성의 주인이었다면 모를까 어차피 이곳은 성좌의 던전 내부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남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런데 화장실에도 시녀들이 따라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해결해 볼게요. 볼트 마법으로 아주 잠깐 기절시키든가 하면 될 거예요.”
계획을 어느 정도 구체화시키고 난 후,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마차로 향하자 티그리스의 마부가 말들에게 건초를 먹이고 있었고, 여인들은 딱딱한 빵을 손에 쥐고만 있었다.
마부가 티그리스의 명령을 잘 따랐는지, 여인들은 두꺼운 검치 털가죽을 각자 하나씩 덮고 있었다.
“호국경님!”
마부는 티그리스를 보자마자 거스름돈을 짤랑이며 들고 왔다.
“잔돈이 남았습니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말레 왕국의 인장이 박힌 은화 8개와 동화 10개가 들어 있었다.
티그리스는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럼 저는 말이 먹을 건초들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없소. 성주.”
“그럼 알겠습니다.”
레인로버는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여봐라 30분 내로 말을 먹일 건초들을 준비해라!”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인로버를 쳐다봤다.
“그 건초들은 어디에 담으면 되겠습니까?”
“어디긴 어디겠느냐. 저기 여인들이 타고 있는 철창에 담으면 되지 않겠느냐?”
“아! 예.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레인로버는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 *
30분 후.
레인로버가 명한 대로 병사들은 말들이 먹을 건초들을 철창에 실었다.
여인들은 티그리스의 명대로 마른 따뜻한 건초 더미를 바닥에 깔고 검치 가죽을 위를 덮었다.
지친 몸과 푹신한 건초 더미, 그리고 추위를 달랠 수 있는 두꺼운 검치 가죽까지 있으니 몇몇 여인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건초를 모두 실었습니다. 호국경님.”
티그리스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레인로버와 약속한 30분이 지났다.
티그리스는 마부에게 말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마차가 다소 무거워지긴 했지만, 말들은 자신들이 먹을 건초가 실렸다는 것을 알았는지 열심히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골 성의 동쪽 성문에 도착할 무렵 병사들과 기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젠장! 성주님이 사라지셨다! 어서 찾아!
-성주님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거지?
그때, 티그리스의 옆으로 누군가가 앉았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티그리스는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레인로버였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손등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어서 가죠.]그리고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손을 잡았다.
티그리스도 레인로버의 손을 살짝 잡았다.
레인로버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티그리스는 레인로버가 웃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