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141)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41화
성좌의 던전(11)
해가 지고 초승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세계수에 걸릴 무렵, 뮤네가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월광이 좋지 못했기에 뮤네는 은은한 초록빛을 띠는 라이트 구를 티그리스의 앞에 밀어 넣어주었다.
티그리스에게 라이트 구가 없다고 해서 돌부리나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는 사실을 뮤네도 알고 티그리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뮤네가 굳이 라이트 마법을 사용해서 티그리스에게 모습을 보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뮤네는 티그리스에게 굉장히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티그리스는 엘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엘프가 먼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사과를 건네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서를 뒤져봐도 엘프들에게 감사와 사과를 받은 인간은 오직 세계수를 구했던 용사 페레이라를 제외하면 없었으니까.
아마 이 사건이 실제 역사에 편승 되었다면 페레이라를 제외하고 엘프들에게 직접 용서를 받은 두 번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너를 죽이고 해치려 했던 일들을 모두 용서해다오.”
티그리스는 고개를 숙인 뮤네를 쳐다봤다.
이 장면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몇 달 전, 티그리스가 모리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던 그날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입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티그리스가 사과를 하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사과를 받는 입장이다.
‘……이런 기분인가?’
티그리스는 그때 모리타가 느꼈을 감정을 느끼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에 칼들 들이밀었던 자가 되레 사과를 해오는 이 불쾌한 상황.
회귀 전의 티그리스였다면 이 사과를 받아주었을까?
아니, 모리타에게 사과를 하지 않고 목을 쳤던 티그리스였다면, 이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사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가 정말 몹쓸 짓을 했었군.’
모리타는 정말 처절하고 굴욕적인 심정으로 티그리스를 용서했을 것이다.
모리타가 살려면 티그리스의 일방적인 사과를 받아준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으니까.
뮤네는 티그리스가 한동안 말이 없자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 이 사과를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네가 원한다면 어머니께 데려가 줄 수 있다. 물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리타와 티그리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힘의 균형이 어디에 쏠려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철저하게 티그리스가 갑이고 엘프들은 을이다.
지금 뮤네를 용서하든 안 하든 세계수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엘프들은 티그리스를 세계수로 안내해야만 한다.
오히려 티그리스가 뮤네의 사과를 거절하고 밀림을 떠나 버리면 엘프들은 굉장히 곤란해질 것이다.
엘프들의 신이자 어머니인 세계수의 명령은 반드시 수행되어야만 하니까.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일은 엘프들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욱 두려운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하지.”
뮤네는 티그리스가 용서를 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순간 표정이 흔들렸다.
“용서해…… 주는 건가?”
“그렇다.”
뮤네의 용서를 받아주지 않아도 이득을 취할 수 있지만, 티그리스는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용서받은 입장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만 왜지? 나는 너를 죽이려고 했었다.”
“물론 용서하지 않거나 사과받는 대신 네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선택지도 있겠지.”
티그리스는 뮤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내가 날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게도 사연이 있다는 말이다. 이번 일로 나는 나대로 깨달은 바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면 된다.”
이 일을 상인의 관점으로 접근해 뮤네에게서 많은 것을 뜯어내려고 한다면, 자신을 용서해 주었던 모리타보다 못한 인간이 될 테니까.
불편하고 어려우며 비생산적인 길을 선택했지만, 티그리스의 마음은 편했다.
티그리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인간들과는 종이 아예 다른 것 같군. 너처럼 도량이 넓은 인간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티그리스는 도량이 넓다는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티그리스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피해를 주면 반드시 피의 복수를 했기 때문에 도량이 넓다는 칭찬은 처음 들어봤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해야만 속이 시원했냐는 말을 더 많이 들었지.
“그렇게 말을 해줘서 고맙군.”
* * *
티그리스는 뮤네와 나란히 숲속을 걸었다.
“우선 밤이 늦었으니 내일 어머니를 뵙는 것으로 하지. 숙소를 안내해 주겠다.”
티그리스는 솔직히 급할 것이 없다.
네메시스와 소라 문제도 잘 해결된 것 같고, 철혈 심장의 완성에 티그리스가 더 이상 관여할 일은 없으니까.
“그러도록 하지.”
숙소까지 한참 남았기에 티그리스는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세계수 님이 지금처럼 직접 계시를 내리는 일은 흔한 일인가?”
뮤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난 500여 년간 없었던 일이다.”
“500여 년이라고 한다면 마왕의 시대를 제외하면 없다는 건가?”
“그렇지. 마왕 이전의 시대에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포악한 용이나 거만한 거인 그리고 저주받은 악마들이 밀림을 작정하고 공격해 올 때를 제외하면 없었지.”
“그럼 보통 엘프나 밀림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세계수 님이 직접 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뜻인가?”
뮤네는 우거진 녹음 사이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세계수를 보며 말했다.
“거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 세계수 님이 말씀을 하시는 경우는 엘프들의 존망이 걸렸을 때였지. 지금처럼 ‘인도하라’라는 말이 아니라 ‘동쪽이 위험하다.’ 아니면 ‘북쪽이 위험하다.’라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 마왕의 경우에는 북쪽이 위험하다고 계시를 내린 건가?”
“음…….”
뮤네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미안하지만, 알려줄 수 없겠군.”
“왜지?”
“자칫 잘못하면 마왕이 부활할 수 있으니까.”
티그리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계시를 알게 되면 마왕이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하지만 마왕 부활의 결정적인 힌트가 어머니의 계시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용사 페레이라는 마왕을 봉인하기 전에 엘프들에게 어머니의 계시에 대한 정보를 인간들이나 드워프들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갔지. 물론 우리도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뮤네는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물론 어머니의 계시에 마왕 부활의 힌트가 담겨 있다는 내용도 극비이긴 하지만……. 네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다.”
티그리스 과연 뮤네에게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뮤네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을까?
일어나지도 않은 과거의 일을 추측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은 없다는 역사학자들의 말이 있지만 티그리스는 뮤네를 용서하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이런 마왕의 시대 이후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그럼 계시를 알고 있었던 인간은 용사 페레이라 하나뿐인가?”
“그건 아니다. 검성 호스와 당시 밀림에 들어와 있던 극소수의 거래상들과 밀렵꾼들이 있었지. 검성 호스는 페레이라가 개인적으로 알려준 거지만 엘프들과 거래하던 거래상들이나 사냥꾼들은 아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럼 그 거래상들이나 사냥꾼들은 어떻게 됐지?”
뮤네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호스와 마녀들이 추적해 죽였다.”
“……그렇게 해야 할 정도로 극비 사안이었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엘프와 수인, 드래곤 그리고 거인들이 연합해서 인간들에게 전쟁을 선포했을 테니까.”
“인간들을? 왜지?”
“당연히 너는 모르겠지만 마왕의 탄생에는 인간들의 지분이 90%는 차지한다. 아니, 인간 때문에 탄생했다고 해도 될 정도다. 그래서 엘프를 포함한 모든 종족들이 인간들에게 정말 화가 많이 났었지. 특히 드래곤들은 비늘 산을 잃어버렸으니 말 다 했고.”
이건 티그리스도 전혀 모르던 정보였다.
페레이라의 모험기에 마왕 봉인 이후의 역사는 적혀 있지 않다.
검성 호스의 검술서에도 당연히 그런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고.
“마왕 탄생의 책임이 있는 종족이 인간이고 몇몇 인간들은 심지어 마왕을 만들거나 부활시키는 법까지 알고 있었다. 엘프들의 입장에선 언제 또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험 요소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지.”
“하지만 용사 페레이라가 마왕을 봉인했지 않나? 인간들이 잘못을 했다고 하지만 수습은 인간이 했다.”
뮤네는 의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봉인까지 알고 있다니. 보통 인간들은 페레이라가 마왕을 죽인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너는 어느 정도 진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뮤네는 앞을 가로막는 잔가지들을 부드럽게 밀어 넘기며 말했다.
“오히려 페레이라가 사라졌으니 거인들과 드래곤들은 더욱 포악하게 나왔다. 지금이 아니면 인간들의 씨를 말릴 기회가 없다고 말이지. 그래서 검성 호스와 마녀들이 나선 거다. 마왕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모든 인간들을 죽일 테니 인간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됐지?”
뮤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녀의 시대가 도래했지.”
늘 비어 있던 퍼즐의 빈 부분이 드디어 맞춰졌다.
사실 티그리스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아모리스만 봐도 마녀는 악한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아모리스가 기억하는 마녀들도 전혀 악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녀들이 인간들을 학살하고 왕국을 통째로 몰살시켜 버리는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온건한 역사학자들은 마녀들이 인간들에게 차별을 당해서 그에 분노하여 인간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과격한 역사학자들은 마녀들이 마왕의 힘을 이어받아 날뛰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니었다.
그 어떤 역사서에도 그 비밀이 적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비밀의 실마리가 뮤네의 입에서 드디어 풀렸다.
마녀들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인간을 죽인 것이었다.
“인간들은 드워프들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거기에 비밀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해. 덕분에 마왕에 관한 정보는 너무나도 빠르게 퍼져 나갔고 호스와 마녀들은 왕국 단위로 인간들을 몰살시킬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모두가 죽으니까.”
“호스나 마녀들이 힘을 합쳐서 거인들이나 드래곤의 공격을 막으려 했었다면…….”
“그랬다면 어느 정도 버텼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막아냈을 수도 있고. 그런데 호스나 마녀들도 인간들을 믿지 못했던 것 같다.”
티그리스는 충격적인 진실에 숨이 턱 막혔다.
호스의 입장에서도 페레이라가 목숨을 바쳐서 마왕을 힘겹게 봉인했는데, 몇 년 안에 또다시 마왕이 부활하기라도 한다면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왕을 부활시키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었다고 하니…….
티그리스라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 마녀의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서들이 소실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아마 그럴 거다. 나도 자세한 방법은 모르겠지만, 호스와 마녀는 1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서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 점에 대해선 엘프나 드래곤, 거인까지 모두 인정하고 있지.”
뮤네는 충격에 빠진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원래는 이건 인간이나 드워프들에겐 절대 이야기해 주지 않는 이야기다.”
“그럼 수인도 모르나?”
“수인들은 자체적으로 마왕과 관련된 단어들을 모두 ‘금어(禁語)’로 지정해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문자 자체를 봉인했다.”
봉인이라는 말에 티그리스는 트리샤가 마왕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때를 떠올렸다.
“혹시 마왕이라는 단어를 수인어로 쓰기 힘든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넌 정말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군. 내가 알고 있기론 단순히 단어가 복잡한 게 아니라 주술의 힘이 담긴 단어라고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수인들은 마왕이란 단어를 듣기만 해도 피하게 된다고 하더군.”
“단순히 그것만으로 통제가 가능한가?”
“안되면 인간들처럼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잊혔지.”
티그리스는 과거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과거를 캐고 다니는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했다.
만약 티그리스가 과거를 밝혀내는 순간 마왕이 다시 부활하기라도 한다면…… 우노뿐만이 아니라 부활한 마왕을 상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면 우노가 일부러 마왕을 부활시킨다거나.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뮤네는 티그리스의 심각한 표정을 보자 피식 웃었다.
“다행이군. 그래도 이 이야기를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웃을 이야기는 절대 아니지.”
“혹시라도 단순한 호기심에 진실을 캐고 다닐 생각이라면 멈추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군. 진정한 비밀이라 함은 잊혔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거니까.”
뮤네는 거대한 나무 앞에 멈춰 서며 말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검성 호스가 한 말이다. 마음에 새겨 두도록.”
뮤네는 거대한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나무줄기 한가운데에는 나무 덩굴로 만들어진 두꺼운 천막이 가려져 있었다.
“이곳이 숙소다. 안에는 침대가 있고 씻을 곳은 근처에 강이 하나 있으니 이용하도록. 내일 동이 트는 대로 찾아오겠다.”
“잠시만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다.”
뮤네는 전혀 싫은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뭐가 또 궁금하지?”
“드워프들. 마왕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드워프들은 어떻게 했지?”
그러고 보니 뮤네는 종족을 언급할 때 의도적으로 드워프를 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 땅딸보들 말인가?”
뮤네는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왕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드워프 노예들은 거인과 드래곤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밟아 죽였다.”
“……엘프들과 교류하던 드워프들은 어떻게 했지?”
“어머니의 계시를 듣거나 마왕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드워프들은 모두 드래곤과 거인들에게 넘겼다. 놈들의 기록하는 습관은 너무나도 위험하거든.”
현시대 드워프들에 대한 취급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바닥일 줄은 티그리스도 몰랐다.
“그럼 이만 자도록 해라. 내일 아침 일찍 어머니를 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