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142)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42화
성좌의 던전(12)
다음 날 아침.
티그리스는 해먹에서 일어났다.
엘프들의 숙소라고 함은 늙어 죽은 나무의 속을 조심스럽게 파내 집처럼 만든 것이라 벌레들이 많이 꼬일 줄 알았지만,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나무를 갉아 먹는 개미와 같은 벌레들을 엘프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어떻게 벌레들이 한 마리도 꼬이지 않았는지는 조금 신기했다.
아마 마법적 처리를 한 것 같았다.
티그리스는 강가에서 샤워를 하는 대신 클린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를 이용해 몸을 깨끗하게 세척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뮤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티팩트로 몸을 닦은 건가?”
“그렇다.”
뮤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숙소 뒤로 흐르는 강가를 가리켰다.
“괜한 잔소리를 하기 싫지만 어머니께 가기 전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법으로 씻으면 육체는 깨끗해지겠지만 마음이 정돈되지 않거든.”
길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강가에서 제대로 씻고 오라는 뜻이다.
“알겠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그리고 이걸 받아라.”
티그리스는 뮤네에게 하얀색 옷과 샌들을 받았다.
“씻고 오면 이것으로 갈아 입어주길 바란다. 마음이 정결하고 육신도 정결하다면 다음은 옷차림이…….”
“갈아입도록 하지.”
황도에 오면 황도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이곳은 엘프의 밀림이니 엘프의 법도를 따를 생각이었다.
굳이 이런 사소한 일로 마찰을 벌이는 것은 싫기도 했고.
“하지만 검은 넘기지 않겠다.”
티그리스의 말에 뮤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황제 앞에 검을 들고 가는 순간 목이 달아나는 것처럼, 엘프들의 신 앞에 검을 들고 가는 행위는 굉장히 불경한 행위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검만큼은 넘길 생각이 없었다.
티그리스는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근처에 검을 항상 둔다.
기사이기 때문에 검을 항시 차고 다닌다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 티그리스의 안전을 최소한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뮤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하지만 아공간 주머니는 내게 맡겨두도록.”
티그리스는 뮤네에게 옷을 받아 들고 강가로 향했다.
* * *
엘프들이 넘긴 옷은 일상복이 아닌 세계수의 앞에 나서는 사제들이 입는 사제복이었다.
그리고 그 사제복은 위아래 구분이 없는 단벌이었고, 심지어 바지가 아니라 아래가 뻥 뚫려 있는 키톤 형태였다.
“…….”
바람이 불 때마다 가랑이 사이를 스치는 기분 나쁜 상쾌함이 간헐적으로 습격할 때면 주먹이 절로 쥐어졌지만 티그리스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
뮤네는 계속 주의 사항을 설명했다.
“어머니의 앞에 서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어머니의 몸에 손을 대면 된다. 원래는 무녀나 사제들이 중간에 껴서 이야기를 들어야겠지만, 어머니께서 이번엔 특별히 직접 대화를 나누시겠다고 했다.”
뮤네는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말했다.
“이런 경우는 용사 페레이라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곤 하지 않겠지만, 굉장히 특별한 상황임을 알아뒀으면 좋겠다.”
“이해했다.”
티그리스는 엘프들의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쳐 걸었다.
엘프들은 티그리스를 굉장히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저 인간인가?
-어머니께서 저 인간의 무엇을 보고 부르신 걸까?
-그나저나 겉보기만 봐도 굉장히 강해 보이는군. 무녀장을 검술로 이겼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엘프들은 티그리스를 보곤 평가를 내리거나 의문을 품거나 호감을 표하거나 적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강한 어린 엘프들을 포함해 모든 엘프들이 일정 거리 밖에서 티그리스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위계질서가 제대로 잡힌 모양이었다.
티그리스는 황금빛을 토해내고 있는 세계수에게 다가갔다.
세계수 근처엔 사제들과 원로 그리고 무녀들이 티그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제장은 돌그릇에 담긴 물을 티그리스에게 건넸다.
“어머니를 뵙기 전 손과 귀를 씻으시오.”
티그리스는 물을 조금 들어 귀를 씻고 손을 씻었다.
무녀가 건넨 깨끗한 천을 받아 귀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자 사제장이 이어서 말했다.
“그럼 신을 벗고 어머니께 나아가시오.”
티그리스는 샌들을 벗고 세계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거친 풀이 티그리스의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고 보드라운 흙이 티그리스의 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기분은 굉장히 기묘했다.
티그리스는 솔직히 말하자면 살짝 긴장했다.
세계수는 살아 있는 엘프들의 신이자 모든 엘프의 어머니다.
인간들로 치자면 빛과 치유의 신 룩스가 현현한 상태랄까?
그러다 보니 아무리 티그리스라고 하더라도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 요정들이 티그리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날아다녔다.
세계수 요정들의 모양새는 엘프들을 20분의 1로 축소시키고 잠자리 날개를 달아둔 모양새였다.
요정들은 티그리스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황금색 가루를 떨어뜨렸는데, 저것이 네메시스와 소라가 찾아다녔던 세계수 요정의 날개 가루였다.
-신기해.
-정말 신기해.
요정들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티그리스를 계속 관찰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세계수님이 특별하게 생각하실 만해.
-뒤틀려 있는 걸까? 아니면 운명을 개척한 걸까?
티그리스는 세계수 요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진 못한다.
그저 요정들은 세계수에게 접근하는 모든 지성체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정들이 티그리스의 어떤 내면을 들여다본 것일지 모르겠지만 연신 티그리스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이윽고 세계수의 앞에 도착했다.
세계수는 티그리스가 고개를 위로 90도로 꺾어도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높았고, 주변을 한 바퀴 걸어도 3시간은 걸릴 만큼 굉장히 거대했다.
이런 거대한 세계수를 사투티메오가 어떻게 불태운 것일까?
티그리스로선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잡생각을 거두고 세계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나무줄기에 손을 댔다.
[그래. 역시 너였어.]귀가 아닌 머릿속 전체를 울리는 세계수의 포근한 목소리에 티그리스는 순간 잠에 들 뻔했다.
마치 따스한 봄 햇살 아래에 몸을 누인 것처럼 편안하면서도 상쾌했다.
그러나 뒤에 오는 세계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스.]화아아아아악-!
티그리스의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티그리스는 정신줄을 꽉 붙잡고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티그리스는 세계수의 앞이 아닌 드넓은 초원 한가운데에 있었다.
앞뒤 좌우를 살펴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떨어진 조난자와 같았다.
하늘은 밝았지만 그보다 더 밝게 빛나는 별들이 쏟아질 듯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압도적이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티그리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티그리스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변했군. 호스.”
티그리스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한 엘프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엘프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녀의 귀와 황금을 빚어낸 것처럼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 덕분이었다.
“그 주체하지 못할 오만함이 사라지니 훨씬 보기 좋구나.”
티그리스는 이 여인이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그리스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전 호스가 아닙니다.”
여인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도자기에 담긴 물이 유리컵으로 옮겨진다고 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 않니? 넌 내게 있어서 영원한 호스다. 티그리스.”
“…….”
“하지만 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티그리스라고 불러주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여인은 티그리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뺨을 어루만졌다.
티그리스는 그 부드럽고도 상쾌한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미안하고 고맙다. 언제나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네게 너무나도 무거운 짐을 지웠어.”
티그리스는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어제 뮤네가 말해준 마녀의 시대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인간들을 죽여야만 했던 호스와 마녀들의 비극.
여인, 아니, 세계수는 호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이유 모를 감정이 꿈틀대며 반말이 튀어나왔다.
“……이것 때문에 부른 건가? 세계수?”
그 감정은 분노였다.
티그리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손이 자연스럽게 검으로 향했다.
왜 자신이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평생 잊고 살았던 깊은 상처를 들쑤시는 듯한 고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세계수는 티그리스의 볼에서 손을 뗐다.
“그것은 아니다. 네가 존재할 수 없는 시대에 다시 환생했길래 이상해서 부른 것이다.”
“존재할 수 없는 시대?”
“네가 환생하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도 평화로우니까.”
세계수는 손을 내저어 황금빛 저울을 만들었다.
양팔 저울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다. 마왕과 같은 대륙을 집어삼킬 거대 악이 존재하지 않지. 너처럼 인과율을 맞추는 균형자가 태어날 수 없는 시대라는 거다.”
티그리스는 세계수의 말을 최대한 이해해 보려 했다.
“그러니까 내 비정상적인 강함의 이유가 세상의 균형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인가?”
“네가 특별하다는 자각은 있군. 그렇다.”
“그럼 그 균형자는 누가 정하는 거지? 그리고 왜 하필 나나 페레이라지?”
세계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으음…….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 마치 나뭇가지가 한계까지 휘어질수록 돌아오려는 탄성이 강해지는 것처럼, 이 불안정해진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일종의 저항이자 힘이 바로 너희지.”
세계수가 저울에 손을 부드럽게 올리자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저울이 천천히 균형을 갖추며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 균형자의 역할은 누군가가 정해주지 않는다. 일종의 자연현상에 가깝지. 너와 내가 태어나고 죽고 바람이 불고 그치듯이 말이다. 하지만 페레이라는 조금 다르다.”
“페레이라가 지구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인가?”
“그래. 마왕의 힘이 너무 거대해서, 인간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서 룩스 그 녀석이 무리를 많이 하긴 했지.”
“……룩스라면 내가 아는 그 빛과 치유의 신을 말하는 건가?”
“그래. 너무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신격마저 버리고 일개 성좌로 추락한 그 룩스를 말하는 거다.”
티그리스는 너무 충격적인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해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룩스는 실존했고 페레이라는 룩스가 불러온 것이었다.
그리고 룩스는 마왕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일개 성좌로 추락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당장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티그리스. 진실은 때론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영혼을 난도질하는 날카로운 칼이 되곤 하니까.”
“……호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세계수는 티그리스가 호스와 자신을 아예 별개의 인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면서도 즐거웠지만, 굳이 짚지 않기로 했다.
“호스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당시 호스와 나와의 관계는 그리 좋다고 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모르겠군. 네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아 호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아냈을지도 모르겠어.”
하긴 호스에게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인간들을 죽이라고 말한 것은 엘프들이었지만, 그 명령을 내린 것은 세계수였을 테니까.
티그리스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그럼 페레이라는 마왕을 봉인하기 위해 룩스가 일부러 불러낸 희생양이라는 건가?”
세계수는 티그리스가 폭발 직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여기서 티그리스의 성질을 자극하면 저 검이 뽑혀 나와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애초에 티그리스가 여기까지 참았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세계수는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세상에는 불필요한 존재는 없다. 모두 쓸모를 다하고 죽지. 누군가는 악역으로, 누군가는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누군가는 평범한 농부로, 누군가는 물건을 훔치는 도둑으로. 세상이란 거대한 연극에 너나 나나 아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넌 운명을 너무나도 맹신하는군.”
세계수는 티그리스의 말투에서 툭 튀어나온 혐오와 불만을 읽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운명이란 단어 자체를 굉장히 싫어한다. 자신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것 자체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자신이 인형극의 속의 인형과 같다는 걸 좋아할 인간은 없으니까. 넌 그 삶에 만족하나?”
세계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인간이 독특한 것이다. 거인이나 드래곤이나 엘프나 수인은 정해진 흐름에 벗어나지 않는다. 뮤네는 무녀장이자 밀림의 수호자의 장이 될 운명으로 태어났다. 방금 만난 사제장인 롬은 사제장이 될 운명을 타고났지.”
“만약 엘프들이 자신의 운명이 정해졌다는 것을 알면 좋아할까?”
“오히려 만족할 것이다. 내 아이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올바르게 자랐으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달라.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 과정에서 다치고 깨지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도 기어코 벗어나려고 한다. 마치 너처럼.”
세계수는 겉으로 보이는 티그리스가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눈동자가 멀어졌다.
티그리스는 세계수가 말하는 ‘너’는 티그리스가 아니라 호스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넌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재능을 타고났다. 그리고 인간들 위에 군림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 하지만 너는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왕의 운명을 버리고 인간들을 죽이는 악역을 자처했다. 그 결과 인간들이 살아남았지.”
티그리스는 세계수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호스는 원래 왕으로 군림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왕으로서 모든 인간과 함께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호스는 그 운명을 거부하고 인간들을 살리기 위한 칼이 되어 인간들을 죽였다.
그 일이 정의로운 일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릴 수 없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인간들은 결국 살아남았다.
호스는 운명을 거슬러 바꾼 것이다.
“네 말에 따르면 마왕의 탄생은 필연이었다는 말로 들리는데? 마왕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멸망할 이유가 없었다.”
“대륙의 존망을 건 위기는 몇 번이고 존재했었다. 단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말은 마왕의 탄생은 일어날 일이었다는 건가?”
“꼭 마왕이 아니라도 세상을 위협할 위기는 언제고 도래할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티그리스는 세계수를 노려봤다.
“네 목숨이 달린 일인데 너무나도 평온하게 말을 하는군.”
“내가 앞서 말했듯 나는 언제고 사라질 운명이다. 엘프들도 사라지겠지. 거인과 드래곤도 그리고 인간들도 결국은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탄생과 죽음. 그 자연스러운 순환을 거부하기 위해 철혈 심장을 만들고 엘릭서를 만들고 호문쿨루스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역시 세계수는 티그리스가 왜 여기에 온 것인지 알아챈 듯했다.
“내가 무슨 이유로 밀림에 온 것인지 아는 모양이군.”
“존재해서는 안 되는 시대에 네가 이곳에 있다는 뜻은 지금 이 세상이 성좌의 시련이나 던전 속이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네가 태어났으니 그 시대는 큰 위기에 봉착했겠군.”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노라는 성좌가 이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침공을 준비 중이다.”
“우노라……. 그 오염된 성좌이자 행성 침략자를 말하는 것이군. 우리 아이들은 무사한가?”
“죽음도 운명이라 방금 말하지 않았나? 넌 나를 통해 엘프들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하는 건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난 엘프들의 신이기 이전에 어머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너와 엘프들은 내가 사는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법용 사투티메오가 너를 불태웠거든.”
“……역시 그랬던가. 그러면 살아남은 엘프들은 단 하나도 없겠군.”
“그래.”
세계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이곳은 성좌의 시련 속인가 던전 속인가?”
“성좌의 던전이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세계수의 손에서 갑자기 주먹 크기만 한 씨앗 하나가 튀어나왔다.
티그리스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그 씨앗이 어떤 씨앗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이건 설마 세계수의 씨앗인가?”
“그래. 이런 날이 언제고 올 것 같아 미리 준비한 것이다.”
“세계수의 씨앗을 세계수 네가 품고 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성좌의 던전을 통해 네게 접근하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던 거였어.”
“사실은 다른 엘프가 오길 바랐었다. 인간의 손, 그것도 네 손에 엘프들의 존망을 걸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좌의 던전에선 성물을 제외한 모든 물건을 들고 빠져나올 수 있다.
세계수는 언제고 자신이 죽을 날을 대비해 세계수의 씨앗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고, 누군가가 성좌의 던전을 통해 자신에게 접근해 씨앗을 건네받기를 고대했던 것이었다.
“너무 가능성이 낮은 도박이 아닌가? 성좌의 던전을 통해 네게 접근하기를 바라는 것은? 넌 네메시스와 소라가 밀림을 활보할 때도 성좌의 던전에 들어온 수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 않나?”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 또한 운명이었겠지.”
티그리스는 세계수의 운명론에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데 티그리스가 할 말은 없었다.
“네게 부탁을 하마. 씨앗을 현세로 돌아가 심어줘라. 그리고 세계수와 세계수에 열리는 엘프들이 제대로 성장할 때까지 보살펴 줘라. 그러면 지금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무엇이든?”
세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티그리스는 세계수가 지금까지 순순히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를 이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세계수는 티그리스의 비위를 맞추고 있던 것이었다.
자신과 엘프들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피워내고 엘프들을 되살리기 위해.
티그리스는 검 자루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부탁을 하기 전에 호스에게 할 말이 있을 텐데?”
세계수는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지 티그리스의 말이 끝나자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호스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호스. 당신에게 너무나도 모진 일을 시켰습니다.”
티그리스는 호스가 아니다.
그리고 호스도 티그리스가 아니다.
하지만 티그리스는 세계수의 사과에 이유 모를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