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147)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147화
충돌(4)
드윈의 검의 능력이 하나 봉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오울프의 검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페이라는 옆구리에 흐르는 내장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이를 악물었다.
“……오러 양이 말도 안 되는군.”
드윈의 검에서 나오는 마나를 중단시켰다고 해서 베오울프가 체내에 갖고 있는 오러의 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미 베오울프가 오러 고리에 비축해 둔 오러의 양은 바다와도 같은데, 바다로 흐르는 모든 강줄기를 억지로 막은 느낌이랄까?
도저히 베오울프의 육체에 남아 있는 오러의 양은 줄어들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페이라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성수를 꺼내 환부에 부었다.
그러자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흘러내리던 내장과 피들이 원상태로 돌아갔다.
펠렌이 베오울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질 무렵 오슬로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신체가 얼마 남지 않았어.”
페이라는 혀를 찼다.
“가관이군.”
오슬로의 부활에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게 아니다.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만 하면 살아날 수 있는 ‘죽음의 학습’의 능력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존재하는데, 근처에 죽고 부활할 신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신체라고 함은 아르펨이 직접 만들어낸 ‘호문쿨루스’의 신체만 가능했다.
열차에 오를 때 미리 화물칸에 63구의 빈 육체를 탑승시켜 놨지만,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몇 개나 남았지?”
“3개.”
“쯧.”
베오울프를 암살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솔직히 베오울프를 죽이기 위해 페이라와 펠렌을 동시에 투입하는 건 과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아니었다.
페이라나 펠렌 둘 중에 하나라도 이 자리에 없었다면, 오히려 역으로 크게 당했을 것이다.
펠렌은 6서클 대지 원소 계열 마법 ‘연화(蓮花)’를 통해 가까스로 베오울프를 떨어뜨렸다.
다른 마법들 중에 그나마 대지 원소 계열 마법이 베오울프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베오울프는 펠렌이 만들어낸 뾰족한 바위 위에서 흉흉한 눈빛을 보내며 세 사람을 노려봤다.
페이라는 펠렌에게 말했다.
“비브라토가 지원을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비브라토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 인근에서 대기 중이다. 우리끼리 해결해야 해.”
“이럴 때일수록 레비스 그놈이 아쉬워지는군.”
레비스의 저주만 있으면 지금처럼 고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냥 저주만 걸고 길리온 왕국으로 도망쳐 숨어버리면 해결될 테니까.
페이라는 목을 뚜둑 꺾으며 말했다.
“놈을 적당히 망가뜨린다는 계획은 철회하고 그냥 죽이는 건 안 되나?”
“죽인다면 죽일 수 있고?”
페이라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예 못할 건 없지.”
펠렌은 페이라가 진심으로 나오겠다는 말에 의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페이라가 벨프 가문을 무너뜨렸을 때처럼 본격적으로 힘을 발동하면 펠렌도 막기 힘들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거의 사흘 밤낮이 넘도록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괴물이 되어 수습하기가 힘들어진다.
펠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그사이에 베르강이나 바스티얀이 습격해 오면 답이 없어지니까.”
“그럼 다른 계획은 없나?”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놈은 많이 지쳤으니까.”
베오울프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지만, 눈 밑에 드러난 다크서클과 파랗게 변한 입술은 감출 수 없었다.
베오울프는 변경백 일 때문에 36시간이 넘도록 잠을 자지 못했고, 나이는 50에 가까워졌다.
풀 컨디션으로 싸워도 모자랄 판에 베오울프의 신체 컨디션은 거의 최악에 가까웠고, 체력이 빠르게 떨어진 것이다.
“이대로만 하면 오늘 날이 새기 전에 완벽하게 제압이 가능하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야.”
황국이 베오울프가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지라도 하루 안에 이 노르베르드 지역까지 날아올 수 있는 전력은 나달이나 바스티얀 정도뿐이다.
블랙 마이스터인 베르강까지 다중 텔레포트로 날아온다면 하루하고 반나절은 더 걸린다.
그 정도면 베오울프를 제압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냥 그렇게 하지 말고 오슬로를 그 도망친 둘에게 보내도록 하지.”
“오슬로를?”
“신체가 3개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
오슬로를 호른과 이자벨에게 보낸다는 이야기에 베오울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감정 변화를 눈치챈 펠렌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나쁜 생각은 아니군. 인질을 잡으면 놈도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진 못할 테니까.”
펠렌은 오슬로를 보며 말했다.
“오슬로. 그 둘을 추적해서 데려와. 아, 그 호른이라고 했던가? 그놈의 두 다리를 잘라 버려도 상관없다.”
베오을프는 이를 악물었다.
오슬로는 논외로 치고 페이라든 펠렌이든 둘 중에 하나를 죽이거나 크게 상처를 입힌 뒤 호른이 도망간 방향으로 합류해야 한다.
오슬로가 호른을 따라잡아 인질로 삼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다.
그때, 허공을 찢고 한 사내와 함께 완벽하게 제압된 호른과 기절한 이자벨이 나타났다.
베오울프의 발이 멈추더니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펠렌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비브라토를 쳐다봤다.
“비브라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네 임무는 주변 감시일 텐데?”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을 너무 질질 끌고 있는 것 같아서.”
비브라토는 성물 ‘심연의 안대’로 베오울프가 마음 깊이 숨기고 있는 감정을 읽어냈다.
그것은 이자벨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었다.
비브라토는 기절한 이자벨의 몸을 염동 마법으로 들어 올렸다.
“네 검이 빠를지 내 마법이 빠를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손가락을 하나라도 움직이는 순간 네 아내는 죽는다.”
베오울프는 죽일 듯이 비브라토를 노려봤다.
비브라토는 덤덤히 말했다.
“그 검을 내려놔라. 베오울프. 안 그러면 이 둘이 죽는다.”
베오울프가 저 둘을 놓고 도망친다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둘의 목숨은 보장받을 수 없다.
베오울프는 비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죽으면 그 둘을 놔줄 건가?”
호른은 피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안 됩니다. 베오울프 님……….”
그런 호른의 눈을 베오울프는 쳐다볼 수 없었다.
호른은 이토록 비참한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약해서 주군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심이 솟구쳐 올랐다.
이렇게 될 바엔 죽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비브라토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속박 마법으로 막아둔 상태였다.
베오울프는 펠렌을 보며 말했다.
“약속해라. 내가 포기하면 그 둘을 살려줄 것이라고.”
펠렌은 비브라토의 말대로 길게 끌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도록 하지. 검을 놓아라.”
베오울프는 변경백으로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베오울프는 자신의 아내와 기사단장의 목숨을 버리고 일단 살아남은 뒤 전력을 끌어모아 놈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오울프는 변경백이기 이전에 한 여인의 남편이었고, 자신을 죽을 때까지 따르기로 한 한 사내의 주군이었다.
베오울프는 검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페이라의 대검이 쏜살처럼 베오울프에게 날아갔다.
베오울프는 반사적으로 오러를 양팔에 가득 모아 막아냈지만, 온전히 막을 수 없었다.
우득-!
베오울프의 양팔이 부러짐과 동시에 거대한 나무에 처박혔다.
비브라토는 워프 마법으로 드윈의 검을 자신의 손에 옮겼다.
“참 쉬운 일이었는데 어렵게 돌아갔군.”
베오울프는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네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 악귀 같은 눈빛은 티그리스를 떠오르게 했다.
펠렌의 심기가 뒤틀렸다.
펠렌은 염동 마법으로 베오울프를 들어 올렸다.
베오울프는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을 설명해 주마. 네 심장에 있는 여섯 개의 고리를 하나씩 하나씩 파괴할 것이다. 보통이라면 죽겠지만, 아쉽게도 난 인간의 신체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아서 말이다. 너는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몸이 되어 평생 죽을 때까지 걷지도 기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베오울프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티그리스가 황도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눈을 돌리는 것이다.
베오울프의 몸이 성수가 아니면 되살리기 힘들 정도로 망가지게 되면, 놈은 베오울프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터.
6개월, 아니, 1년 정도만 티그리스가 황국의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면, 트리니티부터 시작해서 평화조약을 맺은 수인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와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펠렌은 새로운 마법 술식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 흉흉한 기세에 호른은 감히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그럼 잘 가라.”
그때, 페이라의 기감에 기묘한 것이 걸렸다.
—!
푸른 검강이 페이라의 등을 노리고 깊숙하게 들어오자 페이라는 반사적으로 대검을 들어 막아냈지만, 대검 네 자루가 모조리 두 동강 나며 허리가 잘려 나갔다.
폐부까지 절단되었기에 페이라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성대에 공기가 유입되지 않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뒤이어 비브라토의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소리 없는 검강.
비브라토는 배리어를 펼치는 것이 아닌 블링크를 펼쳤다.
하지만 반응이 너무 늦어 척추가 훤히 드러났다.
“크윽…….”
드윈의 검까지 놓쳐 버린 비브라토.
소리 없이 다가온 암살자는 드윈의 검과 함께 기절한 호른과 이자벨까지 낚아챘고, 트리샤에게 빌렸던 ‘은묘의 망토’를 벗었다.
펠렌은 암살자의 얼굴을 보자 기겁했다.
“베르강……!”
베르강이 드윈의 검으로 펠렌의 마법을 조각내자 염동 마법이 끊겼다.
베오울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러를 발에 모아 펠렌의 턱에 갈겼고, 펠렌은 반응도 하지 못해 나동그라졌다.
오슬로는 얼마 남지 않은 육체 때문에 베오울프에게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베오울프는 빠르게 베르강의 옆으로 다가왔다.
“구해줘서 고맙긴 하지만 어떻게 자네가 여기에 있는 거지?”
“뭐, 운이 좋았지. 마침 이 근처에 있었거든.”
베르강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최상급 포션을 같이 건넸다.
베오울프는 말없이 부러진 양팔에 포션을 붓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목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부러진 양팔이 원상태로 돌아옴과 동시에 피로가 누적된 육체에 활력이 돌았다.
베르강은 베오울프에게 드윈의 검을 건넸다.
“싸울 수 있겠나?”
“충분하지.”
베르강과 베오울프가 검을 들고 옆으로 나란히 서자 펠렌과 비브라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성수와 리커버리 마법으로 빠르게 상처를 회복시켰지만 너무나도 큰 변수가 생겼다.
마법을 자르는 베오울프.
그리고 황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로 불리는 베르강이 합세하니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았다.
펠렌은 일단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지막 성수를 꺼내 허리가 잘려 나간 페이라의 환부에 부었다.
그러자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처럼 잘렸던 허리가 철커덕하고 붙더니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페이라는 자신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는 충격에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재빠르게 일어났다.
“……비브라토. 어떻게 베르강이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비브라토는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분명 3㎞ 이내로 접근하면 내가 못 알아챌 리가 없는데…… 아니, 그것보다 분명 황도에 있어야 할 베르강이 어떻게 여기까지…….”
비브라토는 심연의 안대를 이용해 베르강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려 했다.
그러나 베르강은 심연의 안대의 치명적인 단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베르강은 눈을 감았다.
심연의 안대는 상대방이 눈을 뜨고 심연의 안대를 착용한 사람이 대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 두 가지가 맞춰져야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베르강은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마나 감지’ 능력으로 마치 눈을 뜬 것처럼 상대방의 위치와 장애물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기에 굳이 눈을 뜰 필요가 없었다.
“……설마 심연의 안대도 알고 있는 건가?”
“황국의 정보력을 너무 물로 보는군.”
베르강은 피 묻은 검을 치켜세웠다.
“오늘 너희는 살아 돌아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베르강의 진득한 살기에 펠렌을 포함한 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오슬로가 펠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퇴해야 할까?”
펠렌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지.”
평소 같으면 작전이 완전히 틀어졌으니 도주를 택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이 작전마저 실패하면 펠렌에겐 미래란 없다.
펠렌은 아르펨이 노리는 바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아르펨과 로타에겐 시간이 무한하다.
시간이 흘러 베르강이나 티그리스가 늙어 무덤에 들어갔을 무렵에 새로운 권속을 만들어 다시 도전해도 상관은 없지만 펠렌은 아니다.
펠렌에게는 기껏해야 1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로드엘림 가문과 황국에 복수를 해야 하는데…….
이번 기회마저 물 건너가 버리면 아르펨과 로타는 펠렌에게 다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어.”
펠렌의 흰자가 검게 물들기 시작하자 비브라토와 페이라는 흠칫 놀랐다.
펠렌이 지금까지 숨겼던 능력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펠렌이 아르펨에게 받은 선물은 총 세 가지다.
심장이 뚫려 죽어가는 펠렌을 되살려 준 것 하나.
펠렌의 재능의 한계를 열어주고 8서클의 대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지원을 해준 것 하나.
마지막은 페이라나 오슬로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능력 하나.
쿠르르르르릉-!
가뜩이나 어두웠던 하늘이 더욱 끈적하고 어두운 구름으로 뒤덮기 시작한다.
“펠렌!”
비브라토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펠렌에게 소리쳤지만, 이미 멈추기엔 너무나도 늦은 상태였다.
하늘에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브라토는 검은 비가 아닌 구름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검은 번개에 주목했다.
“젠장! 우린 빠져나간다! 저 천둥에 휩쓸리면 안 돼!”
비브라토는 재빨리 다중 텔레포트 술식을 빚었다.
그러나 그것을 허용할 베오울프가 아니었다.
베오울프는 드윈의 검을 내저어 비브라토의 다중 텔레포트 술식을 끊어냈다.
“이런 제기랄!”
베르강은 티그리스의 회고록에 적힌 펠렌의 능력을 떠올렸다.
그 이름은 ‘하늘을 가리는 교만한 손’.
하늘에서 바라보는 신의 눈을 가려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신이자 왕이 된다는 오만한 펠렌의 추악한 욕망이 형상화된 능력이었다.
하늘에 검은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릉-!
그 벼락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집어삼키더니 하나의 기괴한 생명체로 만들어졌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시체와 땅과 열차 잔해들까지 하나로 엉겨 붙기 시작하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리처(creature)가 창조되었다.
우어어어어어어-!
크리처는 슬라임처럼 땅을 기어 달려들었다.
슬라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빠르며 주변에 있던 땅과 잔해들을 몸뚱이로 먹어치우며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베르강은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검을 타고 미끄러져 이동하던 검강이 크리처의 몸에 적중했고, 크리처는 풍선처럼 펑! 하고 터져 나갔다.
그 육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산산조각이 났지만, 육편은 기괴하게 살아 움직이며 베르강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교만한 손인가.’
펠렌이 저 크리처들을 무한히 생산할 수 있다는 점도 무서운 점이지만, 가장 위협적인 것은 크리처를 생산하는 저 검은 번개였다.
펠렌의 번개에 휩쓸리는 순간 제아무리 베르강이라고 하더라도, 크리처가 되어 펠렌의 명령만 따르는 괴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간헐적으로 벼락이 치지만 펠렌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비가 내리는 양만큼 번개를 내리칠 수 있기에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최선이었다.
베오울프는 이자벨과 호른 근처에 몰려든 크리처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며 말했다.
“티그리스가 지금까지 이런 괴물들하고 싸운 건가?”
베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젠 티그리스에게 변경백 자리를 마음 놓고 물려줘도 되겠군.”
“장례식하고 취임식을 동시에 시킬 게 아니라면 정신 바짝 차리고 검이나 휘두르게. 못 본 사이에 체력이 아주 약해졌어.”
“검 대신 펜대나 쥐고 살더니 이렇게 되더군. 노르베르드로 돌아가면 검술 훈련이나 제대로 다시 시작해야겠어.”
베오울프와 베르강은 헛소리를 주고받으며 긴장을 푼 뒤 서로 등을 맞대고 섰다.
주변이 크리처로 가득했다.
아무리 베고 베어도 마치 바다나 강물을 가르는 것처럼 줄어들 낌새가 없었다.
“혹시 이곳을 빠져나갈 좋은 수라도 있나?”
“아니, 기다리는 것은 있네.”
“……기다린다고? 누구를?”
“옛 영웅.”
“옛 영웅?”
히히히히히히히-!
그러자 공기를 찢는 번개들 사이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름 돋는 목소리에 베오울프의 등허리가 오싹해졌다.
“저놈들이 귀신도 부리나?”
베르강은 씨익 웃었다.
“아니, 내가 기다리는 분이 왔네.”
돌풍이 불더니 하늘을 뒤덮던 검은 구름이 갑작스럽게 걷히며 달이 드러났다.
검은 벼락을 떨어뜨리던 구름은 잠시 밀려났고, 타락한 별빛 성녀의 물안개는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저건.”
펠렌부터 시작해서 베오울프까지 잠시 전투를 멈추고 모두 고개를 들어 구멍이 뻥 뚫린 하늘을 쳐다봤다.
휘영청 굽은 달 한가운데에 빗자루를 타고 푸른 귀기가 흐르는 낫을 든 여인 하나가 곰방대를 피우고 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지? 베르강?”
“아닙니다. 아모리스 님.”
아모리스는 씨익 웃으며 곰방대를 휘저었다.
그러자 곰방대에서 흘러나온 탁한 연기가 사방에 흩어지더니, 혼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혼령들은 50명을 훌쩍 넘겼다.
“자, 죽은 것도 억울한데 복수도 못 하고 죽으면 섭하지. 안 그래?”
귀신들은 모두 검과 갑주를 입고 있었다.
“자! 어서 그 원념을 풀어라!”
귀신, 아니, 죽은 늑대 기사들과 황금 기사들 그리고 인퀴지터들은 은은한 달빛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