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07)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07화
성장(1)
레인로버는 심각한 표정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설마 로타와 아르펨이 마왕의 존재를 알아챈 걸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노의 성물이 마왕성에 있는 것으로 봐서 로타와 아르펨은 마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티그리스가 마왕성에 가본 것도 아니고, 회귀 전에 마왕이 등장했던 적도 없었으니 쉽사리 답하기 어려웠다.
“아모리스 님. 마왕의 봉인에 대한 정보가 마왕성에 남아 있겠습니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모리스도 전부 아는 건 아니다.
특히 멸지는 아모리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 정보가 희박했다.
“그럼 로타와 아르펨이 마왕을 깨울 수 있습니까?”
아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불가능해.”
“하지만 아우로므의 봉인은 풀리지 않았습니까?”
아모리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허접한 봉인술하고 지금 마왕 봉인하고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좀 말이 심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드라코레퀴엠에 있던 봉인은 주술이라기보단 마법에 가까운 거였어.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나달이 봉인을 풀 수 있었던 거지. 심지어 부적들을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았잖아.”
아모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어 올렸다.
“너희들이 걱정하는 걸 충분히 이해하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마왕이 봉인되어 있는 곳은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어서 아예 보거나 만질 수가 없어.”
“하지만 신비의 땅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마왕이 봉인되어 있는 성산 중심부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 심지어 나조차도.”
“아모리스 님이 만드신 봉인인데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금고를 만드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금고를 뚫을 수 있게 만들면 금고를 사는 사람들은 불안하지 않을까? 그거랑 같은 이치야. 하지만 내가 조금 걱정이 되는 건 로타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
로타는 성좌다.
성좌의 영혼을 갖고 있는 마왕과 비슷한 존재다.
그가 신비의 땅에 입성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럼 큰 문제 아닙니까?”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큰 문제는 아니야. 지금 마왕은 현실 세계 기준으로 1,300년이 지났고, 마왕의 입장에선 최소 10만 년의 세월을 홀로 보냈어. 제아무리 비범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좁고 컴컴한 동굴 속에 10만 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미쳐 버리겠지?”
“그 예전에 말했던 멸아(滅我) 상태에 빠졌다는 겁니까?”
“그래. 자기 자신이 누구이고 왜 이곳에 갇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거야. 그러니까 만에 하나 마왕이 깨어나더라도 마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손가락을 움직이는 방법도 까먹었을걸?”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된다.
설마 마왕의 침공을 다시 대비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거기까진 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만약 마왕의 봉인을 푼다면 어떻게 될까요?”
“로타가 내가 모르는 방법으로 봉인을 푼다면 일어날 최악의 상황은 하나밖에 없지. 신비의 땅의 멸지화.”
“그러니까 신비의 땅이 멸지처럼 변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시공간이 뒤섞이는 공간에 멸지처럼 변이 입자가 마구 휘몰아치는 지옥도로 변하겠지. 거긴 멸지보다 더 말도 안 되는 공간이 될 거야.”
“신비의 땅 안에서만 멸지화가 진행이 될까요?”
아모리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 일단 멸지의 크기로 봐선 안개의 숲도 위험하지 않을까?”
“황도를 천도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로타도 죽은 목숨이야. 호문쿨루스라곤 하더라도 변이 입자에 완전면역은 아닐 테니까. 아니지. 멸지에 우노의 성물을 가져다 뒀으니까 어떤 방식으로든지 변이 입자에 적응했을까?”
가만히 듣던 나달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당장 신비의 땅으로 향한다고 해서 로타를 만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야. 신비의 땅은 시공간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내가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보다 더 낮으니까. 애초에 살아 있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게 진짜 사람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제대로 안 갈걸?”
“그럼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로타가 무슨 짓을 할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로타를 노리기보단 아르펨을 노리는 쪽이 훨씬 더 나을 거야. 아르펨을 협박하든 구워삶든 로타가 왜 신비의 땅으로 갔는지 강제로 물어보는 게 더 빠른 길이겠지.”
결국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 점이 티그리스를 더 불안하게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놈들이 신비의 땅에 접근할 줄 어떻게 알았겠나?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신비의 땅엔 그 녀석이 있을 텐데?”
“그 녀석?”
나달과 레인로버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티그리스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
“모리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재수가 좋다면 로타랑 만났겠네. 아니지 그걸 재수 좋다고 말해야 하나?”
“······만약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그 녀석 개과천선했잖아. 로타에게 빌붙을 일은 없을 테니······. 모르겠네. 그 녀석은 원래 널 만나자마자 죽는 운명이었거든. 죽다가 살아난 운명만큼 강한 게 없으니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도 예측이 잘 안 가.”
아모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혹시 모르지. 그 녀석이 우리한테 큰 도움을 줄지? 로타를 신비의 땅에 파묻어 버릴 수도 있고.”
“그랬다면 좋겠네요.”
* * *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난 산책 좀 하고 갈게요.”
“······나도 같이 하자.”
“저도요.”
아이린과 샤를로트 그리고 리니아는 말없이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산책로를 같이 걸었다.
오늘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우노의 성좌를 찾았고 우노의 성물은 멸지에 있다는 것.
멸지를 들어가기 위해 텔레포트 게이트를 찾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드워프의 기록 보관소에 모레부터 출입할 것이라는 것까지.
사람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셋은 그냥 가만히 듣기만 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스케일의 대화라 왜 셋이 이 회의에 껴 있는 것인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라칸 오빠가 조금 부러워졌어요.”
리니아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샤를로트와 아이린은 알아챘다.
라칸은 시스템이란 독특한 능력 덕분에 황국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실제로 아센시오 가문의 비밀을 캐내서 우노의 성좌를 알아낸다든지, 마탄총을 개발해서 군사 혁신을 이끌어낸다든지 확실히 인류와 황국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착착 수행하고 있었다.
티그리스가 말하길 샤를로트와 아이린 그리고 리니아는 검술의 천재라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전장에 투입될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샤를로트는 고리 4개짜리 검사일 뿐이고, 아이린과 리니아도 고리가 3개일 뿐이니까.
“······훈련이나 할까?”
샤를로트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복잡할 땐 검을 휘두르면 조금 낫다.
그래도 발전한다는 기분이 아주 조금이라도 드니까.
셋은 연무장에 도착하자마자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서로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쳐다봤다.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삼각 전투 시스템이다.
샤를로트는 연무장 주변에 떨어져 있는 돌을 하나 주워 하늘 위로 던졌고······.
툭!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아이린과 리니아는 동시에 샤를로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이린과 리니아의 공격이 엇박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공격을 하는 것보단 사각에서 엇박으로 들어가는 게 훨씬 더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샤를로트가 리니아처럼 방패를 하나 들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반년 전이었다면 뒤로 살짝 물러나 리니아의 검을 피해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샤를로트의 검에 새하얀 서리가 끼더니 주변이 차가워졌다.
쩡-!
아이린의 대검은 샤를로트가 비껴서 막아내고, 허공에 생겨난 새하얀 고드름과 같은 검기가 리니아의 검을 막아냈다.
3성 기사와 4성 기사의 갭 차이가 크다곤 하지만 샤를로트와 같은 천재가 검기를 깨우쳤을 때는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샤를로트는 티그리스로부터 그녀에게 맞는 최적의 검술을 배운 상태.
샤를로트는 이젠 아이린과 리니아가 동시에 덤벼도 쉽사리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아이린은 그게 너무 분했다.
아이린이 아직 3성 기사인 이유는 아이린의 덜 여문 육체 때문이었다.
티그리스의 예측대로 깨달음은 빠르게 찾아왔다.
지금 당장에라도 4번째 고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고, 집중만 한다면 얇은 검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트리샤는 아이린에게 4번째 고리를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다.
트리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이린의 육체는 덜 여물었고 4번째 고리를 만드는 순간 육체에 큰 반동이 올 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정 4번째 고리를 만들고 싶다면 티그리스가 있을 때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했다.
샤를로트가 급하게 4번째 고리를 만들었다가 거의 2달이 넘도록 요양을 했었기에 아이린은 트리샤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쾅!
“큭!”
아이린은 샤를로트의 날카로운 반격에 뒤로 내팽개쳐졌다.
빠르게 낙법으로 몸의 균형을 되찾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샤를로트의 입장에선 반격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린의 이마 앞에 새하얀 고드름이 보였다.
아웃이다.
리니아도 금세 아이린과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리니아는 먼지를 툴툴 털며 일어났다.
“······샤를로트 언니는 진짜 못 당하겠네요.”
“나도 아직 멀었어.”
샤를로트의 겸손한 말에 아이린은 괜히 상처를 받았다.
샤를로트가 멀었다면 자신은 얼마나 더 정진해야 할까?
거대한 흑룡아를 쥐고 있는 아이린의 작은 손이 잘게 떨렸다.
아이린은 먼지를 털지 않고 일어났다.
“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샤를로트는 아이린이 훈련 중에도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난 조금 더 수련하다 갈게.”
“저, 저도요!”
아이린은 흑룡아를 검집에 집어넣고 기숙사로 향했다.
‘교관님을 만나 봬야 할까?’
아이린은 정체되어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하지만 티그리스라면 아이린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을까?
‘아니야.’
티그리스는 굉장히 바쁘다.
최근 키메라 사태를 끝내고 나서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만큼 많았다.
성물 우로스 문제도 있고 키메라 사태 뒷수습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아이린이 티그리스에게 매달리는 것은 그에게 굉장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자신은 민폐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정체되어 있으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아이린은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달이 구름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야심한 밤에도 은은한 황금빛이 호롱불처럼 일렁였다.
아이린은 홀린 듯이 그 빛을 따라 걸었다.
그 빛 끝엔 아이린의 허리 정도 올 정도로 작고 여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세계수다.
-세계수님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요? 전 조금 고민이 있어요.
그리고 세계수의 곁에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 호랑이족 소녀, 겨루가 보였다.
-이번에 베개를 사려고 하는데 폭신한 오리 깃털 베개가 좋을지 아니면 조금 단단한 솜 베개를 살지 고민이 돼요. 둘 다 좋긴 한데요. 깃털 베개는 너무 폭신해서 잠이 안 오고 솜 베개는 단단해서 잠이 잘 안 와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겨루가 수인어로 대화를 하는 통에 아이린은 겨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저 근심 걱정 없어 보이는 해맑은 소녀도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걸까?
아이린은 발길을 돌리지 않고 멍하니 겨루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다쟁이 소녀는 귀를 쫑긋 세우며 세계수에게 귀를 기울였다.
-아, 둘을 섞어보라고요? 세상에 세계수님! 너무 천재예요! 그러면 비율만 맞춘다면 제 마음에 쏙 드는 베개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베개 커버는 뭐가 좋을까요? 보드라운 면 커버? 아니면 까슬까슬한 삼베 커버? 아니면······.
겨루의 호랑이 귀가 움찔하더니 뒤를 돌아봤다.
아이린은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살짝 흔들었다.
겨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린! 좋은 밤이야!”
“······좋은 밤.”
겨루를 포함한 수인 소녀들은 어느새 황국 공통어를 빠르게 익혔다.
물론 전공 서적을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
추운 겨울을 지나 보드라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세계수처럼 겨루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게 아이린은 조금 부러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아······. 음······.”
겨루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자 아이린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미안. 그런 걸 캐묻는 게 아니었는데.”
혹시 함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민감한 내용이 아니었을까?
아이린은 덜컥 겁이 났다.
“아니야. 음······.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겨루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국어사전을 뒤지더니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걸 뭐라고 하더라······. 베개! 베개를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어보고 있었어.”
“아······.”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길래 가족이나 진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이린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계의 운명을 뒤흔드는 우노에 대한 회의를 하고 왔는데, 이 수다쟁이 소녀는 한가롭게 베개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니.
뭔가 하찮으면서도 귀엽기도 하고······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겨루에게 다가갔다.
“그런 걸 물어보면 세계수가 답을 해줘?”
“음······. 말은 안 해.”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겨루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또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다.
‘수인어를 좀 배울걸.’
아이린은 샤를로트나 리니아처럼 붙임성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수인어를 배우지 못했다.
샤를로트나 리니아는 간단한 대화 정도는 겨루랑 나누던데······.
“음······. 음······. 그러니까. 마음? 그래. 마음에 있는 걱······ 정을 세계수에게 말하면 기분 좋아져.”
“그래?”
“아이린, 너도 걱정 있어?”
겨루의 말에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있어.”
겨루는 활짝 웃으면서 세계수를 가리켰다.
“그러면 말해! 그럼 가슴이 뻥! 뚫려!”
겨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여기 자리를 줄게.”
“아니야. 굳이 그러지 않아도······.”
겨루는 아이린을 부드럽게 잡아당겨 세계수의 앞에 끌고 갔다.
“세계수는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해. 그리고 해답이 보여.”
“아니, 나는······.”
“그럼 파이팅!”
겨루는 그 말을 끝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아이린은 뻘쭘해져서 세계수를 가만히 쳐다봤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환하게 빛을 내뿜는 신비로운 나무.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처럼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겨루의 마음이 이해가 갈지도?’
뭔가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없었지만 겨루가 왜 세계수의 옆에 계속 붙어 있는지 알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이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 안녕······?”
아이린은 세계수가 혹시 말을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나 세계수는 잠잠히 빛을 내뿜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린은 문득 부끄러워서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누군가에게 가슴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는 건 티그리스를 제외하곤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계수에게 이야기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 같았다.
‘오히려 아무도 안 들으니까 괜찮은 게 아닐까?’
아이린은 솔직히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걸 떠나서 너무 진중하고 피 냄새 나는 이야기라 말을 하려다가도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아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수라면?
그냥 가만히 듣기만 하는 세계수라면 괜찮지 않을까?
아이린은 감지계 오러 운용술 ‘청각 강화’를 이용해 주변에 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아이린과 세계수뿐이다.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런 말을 초면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나 조금 고민이 있어.”
막상 입을 떼니 이야기가 생각보다 술술 흘러나왔다.
어렸을 적에 믿고 따르던 오라버니와 아버지가 혈귀에게 죽었던 이야기.
그리고 복수를 위해 없는 돈을 다 털어서 비싼 영약을 멋도 모르고 먹었더니 몸이 더 이상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흑토 지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엄마 이야기.
아이린의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슬픈 이야기지만, 세계수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스승님 같아.’
티그리스는 아이린의 비참한 과거사에도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세계수처럼 묵묵히 들어주다가 아이린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줬다.
그게 얼마나 고마웠던지······.
“스승님께 보답을 하고 싶은데, 난 너무 약해.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지만 나 홀로 멈춰 있는 것 같아서······. 멍청이 같고 한심해 보여. 리니아는 벌써 나를 따라잡았고 샤를로트는 저 멀리 가고 있는데······. 그때 그 영약을 먹지 않았다면 괜찮았을까?”
아이린은 어느새 겨루처럼 세계수에게 답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수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게 안심이 되면서도 조금 쓸쓸했다.
“이젠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나는 뭘 해야 하지? 검술 훈련을 계속해도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아. 스승님은 날 천재라고 하지만 난 아닌 것 같아. 스승님은 나의 뭘 보고 제자로 받아주신 걸까?”
아이린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저기······.
머릿속을 울리는 아이의 목소리에 아이린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
순간 환청을 들은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아이린의 눈앞에 4~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넌······.”
-나 이제 코~ 해야 할 시간인데······. 너무 시끄럽거든?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아이린의 이마에 닿았다.
-너도 좀 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