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08)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08화
성장(2)
아이린이 눈을 떴을 땐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한가운데였다.
“여긴······.”
마치 꿈을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풀잎의 싱그러운 촉감도 시원한 바람도 희미하게 느껴진다.
하늘엔 태양이 없고 별들만이 총총 떠 있었으나 사방을 둘러볼 수 있을 만큼 밝았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이질적인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풀잎을 침대 삼아 누워 있는 한 아이였다.
색- 색-
아이의 몸무게가 풀잎에 맺힌 이슬만큼 가벼운지, 아이의 몸이 땅에 닿지 않고 풀잎들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어떻게 하지?’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 알 수 없고 알 만한 사람은 곤히 잠자고 있는 이 아이밖에 없다.
아이를 깨워서 물어볼까 싶다가도 너무 곤히 잠을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미안하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팔뚝을 잡아 흔들었다.
“저기······.”
“으응······.”
아이는 아이린의 손을 휙 내쳤다.
깨우지 말라는 듯이 눈살도 찌푸렸다.
아이린은 다시 한번 흔들었다.
“으아아아! 나 잠 좀 자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의 눈은 찬란한 황금에 녹음을 녹여낸 것처럼 아름답고 반짝였다.
아이의 눈썹이 좁혀졌다.
“조금만 코~ 하고 네 이야기 들어줄 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코~ 해. 보채지 말고. 알겠어?”
“그게 아니라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내 안이지.”
“네 안?”
“나 누군지 몰라?”
아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는데?”
“세계수잖아. 세계수. 엘프들의 신이자 나무들의 어머니!”
이 작은 아이가 세계수라고?
그렇다면 좀 전에 봤던 아이가 세계수?
“어머니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것 같은데······.”
“하! 너도 만만치 않거든?! 키도 쪼그만 게!”
아이린의 역린을 건드리자 아이린는 열이 받았다.
“······너보단 크거든?”
세계수는 얄밉게 웃었다.
“조만간 난 너보다 커질 거거든? 내가 봤을 때 네 키가 작은 이유는 그 영약 때문이 아니라 밤에 잠을 자지 않아서 그래.”
세계수는 다시 아이린의 이마를 살포시 눌렀다.
“그러니까 코~ 자자. 그러면 키가 나처럼 쑥쑥 자랄 거야.”
“아니, 난······.”
그러기엔 다 커버렸는데······.
* * *
아이린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이곳이 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린아! 어서 와!”
죽은 오빠가 아이린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오빠의 앞에 있었다.
“웃차!”
오빠는 작은 아이린의 몸을 들어 목말을 태워주었다.
“어이구~ 우리 공주님 언제 이렇게 무거워졌을까?”
아이린은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말이 새어 나왔다.
“······무겁지 않아.”
“미안. 미안. 숙녀에게 해선 안 되는 말이었는데.”
오빠는 아이린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걸었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흙냄새가 뒤섞여 코를 간질였다.
그제야 주변이 보인다.
이곳은 벨프 가문의 저택 안에 있는 작은 산책로다.
겨울을 완연히 밀어내고 싱그러운 녹음이 물들기 시작하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곳이다.
너무 아름답다.
그래서 슬펐다.
“나도 오라버니 목말 태워줄래.”
“하하. 안 돼. 안 돼.”
“왜? 린이가 작아서? 린이가 오라버니만큼 커지면 목말을 태울 수 있을까?”
오빠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어떤 표정일지 알고 있었다.
오빠는 환하게 웃고 있으리라.
“그래! 나만큼 커지면 목말 태워줘.”
“응! 그럴게! 약속이야 약속!”
아이린의 새끼손가락과 오빠의 새끼손가락이 마주 걸린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아이린은 너무나도 잘 안다.
이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못하리라.
아이린의 나이가 오빠의 나이를 훌쩍 넘었어도 오빠만큼 커지지 못했다.
그리고 목말 태워져야 할 오빠는 죽었다.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백번 천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냐고.”
이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은 아이린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마치 만지지도 못할 아름다운 별님을 갖길 원하는 어린아이처럼.
영원히 갖지 못할 행복한 과거 속에서 어지러이 헤매는 것은 지금의 아이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심만을 더 키울 뿐.
봄바람에 피 냄새가 뒤섞인다.
저 멀리 혈귀가 보인다.
오빠는 사라지고 아이린의 손에 어느새 오빠의 흑룡아가 들렸다.
오빠에게 길들여져 어색했었던 흑룡아는 아이린에게 다시 길들여졌다.
그게 가슴이 아리도록 슬펐지만, 이 슬픔과 분노를 장작불로 삼아 저 혈귀를 베고 불태우리라.
아이린은 혈귀에게 달려들었다.
* * *
“그마아아아안!”
아이린은 마치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좀 전의 초원이었다.
아이린의 앞에 화가 잔뜩 난 어린 세계수가 보였다.
“잘 자라고 행복한 꿈을 보여줬는데 도대체 왜 악몽으로 바꾸는 거야!”
“난 원하지 않았어.”
아이린은 세계수를 노려봤다.
“난 그런 꿈 원하지 않았다고.”
세계수는 잔뜩 심술이 나 볼이 빵빵해졌다.
“그러면 오밤중에 그렇게 슬픈 이야기로 날 괴롭히지 말던가! 난 그런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잠을 못 잔단 말이야.”
“······그건 미안해. 하지만 나도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어.”
햄스터처럼 부풀어 올랐던 볼이 쑥 들어갔다.
“좋아. 그건 나도 미안해. 멋대로 행복한 꿈을 꾸게 해서.”
서로에게 사과를 하자 날 선 분위기가 누그러들었다.
“그래서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야?”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잠을 못 잔다면서.”
“당연히 네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짜증이 나긴 하지. 하지만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무슨 이야기?”
“음······. 말하기 부끄러운데······.”
아이답게 감정이 오락가락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제멋대로라고 해야 할지.
아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난 여길 어서 나가고 싶어. 아침 훈련해야 하거든.”
“끙······.”
세계수는 4살 아이처럼 몸을 배배 꼬더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조금만 얘기해 줘.”
“······그래 빨리 얘기해 주고 떠날게. 무슨 이야길 듣고 싶어?”
“······우리 아빠 이야기.”
“아빠? 네게 아빠가 있어?”
“당연하지!”
“누군데?”
“티그리스지. 그럼 누구야.”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스승님이 네 아빠라고? 왜?”
“날 태어나게 해줬으니까.”
“태어나게 해준 건 전 세계수 아니야?”
“그것도 맞는 이야기긴 하지. 하지만 원래 드래곤에게 죽었어야 할 내 운명을 바꿔준 건 티그리스잖아. 그러니까 내 아빠라고 해도 되지.”
“그건 아빠라고 하기보단 은인이라고 부르는 편이······.”
세계수는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워낙 가벼워서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풀잎 위를 방방 뛰었다.
“시끄러워. 내가 아빠라고 하면 아빠인 거야.”
“······완전 제멋대로네.”
“아무튼! 우리 아빠 얘기 좀 해줘. 겨루는 우리 아빠에 대해 잘 몰라서 얘길 잘 안 해준단 말이야. 마왕을 구한 용사 이야기만 잔뜩 해주고!”
세계수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린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 얘기 좀 해줘. 우리 아빠는 어떻게 생겼어?”
“······뭐야 얼굴도 못 보고서 아빠라고 하는 거야?”
“응. 내가 열심히 땅을 비집고 나오기 전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렸는걸? 겨루가 얘기해 줬는데 나쁜 녀석들 혼내주러 갔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티그리스가 정말 못된 부모인 줄 알겠다.
아이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그림은 잘 못 그리는 데.”
“그냥 아빠를 떠올리면서 얘기해 줘. 내가 알아서 기억을 읽을 테니까.”
“음······.”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린이 세계수에게 티그리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에 동화책을 읽어주던 오빠가 떠올랐다.
아이린이 어렸을 적엔 아빠가 굉장히 바빠서 오빠가 잠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줬었다.
그리고 항상 잠이 들기 전에 이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한다.
-아빠는 언제 와? 오빠?
세계수도 어렸을 적 아이린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오빠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스승님은 굉장히 대단하신 분이야.”
“오오~”
세계수는 아침 이슬처럼 반짝이는 눈망울로 아이린을 쳐다봤다.
“훌륭한 검술가이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시기도 하지. 그분을 처음 마주한 것은 제국 대학 입학식 때였어.”
아이린은 티그리스와의 추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린은 말주변이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뭔가 말을 하려고 해도 말문이 턱 막힌다랄까?
그래서 말하기보단 듣는 걸 더 좋아했다.
이 성격이 말하는 걸 좋아하는 샤를로트와 리니아와 잘 맞아서 아이린의 입장에선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티그리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의외로 말이 술술 나왔다.
“······원래라면 로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을 거야. 로이가 익힌 검술은 벨프 가문의 검술의 약점을 파고드는 반동 검술이라는 거였거든. 하지만 스승님이 그 검술을 파훼하는 법을 알려주셨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이린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로이의 도발에 그대로 넘어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로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때 레인로버와 티그리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혈귀에게 복수한다는 꿈도 이루지 못하고 빈스모크 가문의 압박에 짓눌려 제국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도 아이린은 티그리스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다.
검술 지도를 받고 영약을 제공받았으며 벨프 가문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기반까지 다져주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티그리스 님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루빨리 강해져서 도움이 되고 싶은데······.”
아이린은 또다시 우울해졌다.
“이 작은 몸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틱.
세계수가 아이린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워낙 힘이 약해서 제대로 소리도 나지 않고 아프지도 않았다.
“또! 또! 슬퍼진다. 도대체 왜 슬퍼하는 거야!”
“······말했잖아. 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너나 나나 똑같아. 아직 어리고 미숙하잖아. 나도 아빠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 하지만 나는 꼬맹이가 허리를 뚝! 부러뜨리기만 해도 죽는 몸인걸?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부지런히 쑥쑥 자라야지. 잠도 잘 자고!”
“하지만 너무 느려. 벌써 우노의 위치를 찾아냈어. 그리고 길리온 왕국은 황국을 노리기 위해 병력을 준비 중이고. 그런데 나는 아직 고리가 3개뿐인걸? 이 정도론 스승님께 도움이 되지 않아. 오히려 민폐나 걱정거리가 될 뿐이지.”
세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급한 것 같지 않아? 나무를 봐. 나무가 다 크려면 최소 20년은 있어야 해. 하지만 넌 이제 검술을 배운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넌 5살이나 다름이 없는 거라구!”
“하지만 스승님은······.”
“스승님 말고 샤를로트를 봐. 그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검술 훈련을 했다면서. 그러면 거의 15년을 넘게 수련하고 나서야 고리를 4개 만든 거 아니야? 그런데 겨우 5년 정도밖에 수련을 안 했으면서 샤를로트랑 맞먹으려고 하는 거야? 그건 너무 욕심이잖아.”
아이린은 주먹을 잘게 떨었다.
세계수가 한 말은 아이린이 샤를로트와의 대련에서 질 때마다 떠오르는 당연한 논리였다.
동시에 도피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가 나약해지는 것 같아 그 생각을 지워냈다.
그리고 문제를 단순화시켰다.
아이린은 샤를로트보다 약하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 한다.
하루라도 더 빨리.
“네 말이 맞아. 난 욕심이 많아. 하지만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영영 스승님께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더 조급해지는 거야.”
“에휴······. 겨루 말이 맞네. 별님이 하늘에 반짝인다고 해서 닿을 수 있는 게 아닌데 갖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라고. 그래서 불을 삼킨 거구나.”
“······불?”
“어. 네 성장을 방해하는 용암처럼 뜨거운 불꽃 말이야.”
아이린은 세계수가 말하는 뜨거운 불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 없는 돈을 다 털어서 샀던 ‘태양의 눈물’이라는 영약이었다.
당시엔 영약을 어떻게 복용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삼켜 버렸는데 그게 지금까지도 아이린의 몸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전부 다 내 욕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하지만 그러지 않고선 혈귀에게 복수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바보 같아.”
“맞아. 난 바보였어.”
“멍청이.”
“그래. 맞아.”
“똥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똥멍청이.”
“그만해.”
세계수는 깔깔 웃었다.
좀 전의 진지하고 현명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치한 어린아이의 모습만 남았다.
“똥멍청이래요! 똥멍청······ 악!”
결국 세계수는 아이린에게 한 대 맞았다.
“너! 이씨! 나 때렸어?!”
“스승님은 나쁜 말 하는 사람 싫어해.”
“······진짜?”
“진짜야. 겨루한테 물어봐.”
“······그런데 왜 때린 거야?”
“그냥 화나서.”
“너어어!”
세계수는 아이린을 마구 때렸다.
하지만 깃털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이린은 세계수가 지칠 때까지 그냥 맞아주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으니까.
“헉······. 헉······. 넌 내가 다 크면 아주 혼꾸녕을 내줄 거야.”
“그럼 이제 날 내보내 줘. 아침 훈련해야 하니까.”
세계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빨리 강해지면 우리 아빠한테 도움이 될까?”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보단 더 도움이 되겠지.”
세계수는 팔짱을 끼며 다시 생각에 빠졌다.
“으으······. 겨루가 욕심쟁이는 나쁜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넌 착한 욕심쟁이 같기도 하고······.”
세계수의 반짝이는 눈이 떠졌다.
“내가 널 도와줄게. 딱 2가지만 내게 약속해 줘.”
“······뭘 도와주겠다는 건데?”
“우씨! 네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뜨거운 불꽃을 거둬주겠다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빨리 강해질 수 있도록 힘도 나눠줄게.”
“그런 게 가능해?”
세계수는 으스대며 말했다.
“난 엄연한 신이야. 신. 물론 아직 약하긴 하지만······. 뭐, 널 도와주는 것 정도야 가능하지.”
“그렇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해줄게.”
“또! 또! 그런다. 그렇게 급하게 키가 크려고 하니까 불꽃을 삼킨 거 아니야! 좀 물처럼 유연하고 차분해질 수 없어?”
“······미안.”
세계수는 손가락을 3개 펼쳤다.
“딱 3개만 약속해.”
“방금 까지만 해도 2개 아니었어?”
“4개로 할까?”
“······3개로 하자.”
“좋아. 우선 첫 번째. 우리 아빠의 소망을 이룰 때까지 도와줘.”
“소망?”
“우리 엄마가 말해줬는데, 아빠는 하늘에 반짝이는 달님에 닿을 만큼 커다란 소망을 갖고 있다고 했어. 그 소망이 뭔진 모르겠는데 네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무튼 도와줘.”
아이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속할게.”
“두 번째, 내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를 지켜줘. 내 호위 기사가 되는 거지!”
“······아이라는 게 엘프를 말하는 거지?”
“맞아.”
“첫 엘프가 세상에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최소 15년은 걸릴 거야. 하지만 네게 힘을 건네주면 20년은 더 걸릴지도 몰라.”
“20년이나?!”
세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 어리고 약해. 지금은 겨루가 날 지켜주고 있지만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날 해코지하려 한다면 쉽게 다칠 거야. 그러니 날 지켜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지켜줘.”
“하지만 스승님을 돕다가 보면 널 잠시 떠날 수도 있는데? 수업을 들을 때도 있고.”
“그땐 내 허락을 맡고 떠나. 아니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붙여주든가.”
아이린은 깊게 고민했다.
“네겐 찰나의 시간일지 몰라도 인간에게 20년은 너무 길어.”
“그건 나도 알아. 대신 확실히 네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네가 원래 성장할 수 있었던 키만큼 커지게 될 것이고 균형이 맞지 않던 몸도 다시 맞춰줄 거야.”
“그러니까 내 몸을 재성장시켜 준다는 거야?”
세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면 평생 그 꼬꼬마 상태로 살든가. 나중에 내가 너보다 커지면 아주 죽어라 놀려줄 거다?”
어린아이답게 굉장히 유치한 도발이다.
아이린은 세계수의 같잖은 도발은 무시하고 깊게 생각했다.
20년과 육체의 재구성 그리고 빠른 성장.
세계수가 공수표를 남발할 리가 없으니 확실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20년은 아깝지 않지.”
물론 나중에 벨프 가문을 다스려야 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좋아. 이젠 마지막 3번째.”
아이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또 얼마나 엄청난 조건을 내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세계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리 아빠 좀 불러줘. 나 아빠 보고 싶어.”
마지막 소원은 너무나도 아이다웠다.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쉽지.”
“좋아 그러면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아이린의 새끼손가락과 세계수의 새끼손가락이 마주 걸렸다.
세계수의 손가락은 솜뭉치처럼 보드라웠다.
세계수는 아이린의 손가락이 어떻다고 생각할까?
······오빠의 손가락처럼 조금 두껍고 거칠면서도 따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