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12)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12화
길 잃은 자의 낙원(1)
가을 옷이 묵혀 있는 침대 밑을 슬쩍슬쩍 쳐다보는 초가을이 되었다는 건 곧 2학기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가거나 여행을 떠났던 이들이 트리니티 기숙사에 모여들었다.
“아이린! 왜 이렇게 키가 컸어?! 성장기야?”
나려와 수인들은 훌쩍 커버린 아이린을 보자 깜짝 놀랐다.
특히 마야는 놀라는 것을 넘어 충격에 빠졌다.
“마······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키가 제일 작다고?”
마야는 수인치고 굉장히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마야는 은연중에 아이린보단 새끼 손톱만큼 더 크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린이 훌쩍 커버리니 마야가 꼴등이 되어버렸다.
마야는 초조하게 아이린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비, 비결이 뭐야?
“어떻게 컸냐는 말인 거지?”
“응. 나도 좀 알려줘.”
아이린은 세계수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세계수 앞에서 매일같이 빌어봐. 그럼 들어줄 거야.”
마야는 크게 당황했다.
-하, 하지만 난 마사라이를 따르는 무녀가 됐는데······. 세계수 앞에서 키 크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걸 들었다간 테호 할아범한테 죽도록 혼날지도 몰라.
“······미안. 내가 방학 중에 수인어를 공부하긴 했는데, 그렇게 빨리 말하면 난 알아듣지 못해.”
겨루는 키득대며 말했다.
“이번에 마야가 마사라이의 어······ 신관! 그래 신관이 되었대. 그래서 세계수에게 빌 수 없대.”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겨루는 마야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몰래 빌어봐. 여긴 네 엉덩이를 걷어찰 테호 할아범이 없잖아.
-그, 그럴까?
마야는 눈치를 보더니 결국 세계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키가 크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야는 마사라이에게 비는 것처럼 두 손바닥을 마주하고 오른손으로 빙빙 돌렸다.
-저······ 세계수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굉장히 키가 작아서요. 그것 때문에 나려가 심심하면 제 정수리에 턱을 괴고 쓰다듬어 주거든요. 그게 기분 나쁘진 않긴 한데 한 번쯤은 저도 나려의 정수리에 턱을 괴고 쓰다듬어 주고 싶어요. 혹시 나려보다 머리통 하나만 더 크게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테호 할아버지 몰래 공양을 올릴게요.
-에······. 그건 좀 무리인 것 같은데.
-역시 그런가요? 그럼 다른 건······.
마야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 몸이 굳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세계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이미 아이린을 도와주고 있어서 말이야. 나도 쑥쑥 자라려면 더 이상 힘을 나눠주는 건······. 어? 괜찮아?
-으아아아악!
마야는 갑자기 나타난 세계수에 너무 놀라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마야! 마야! 괜찮아?! 마야!
마야가 거품을 물고 쓰러진 사이 남자들은 남자들만의 시간을 보냈다.
에이든은 아처가 쏜 마탄을 검으로 막아냈다.
펑-!
에이든은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며 말했다.
“이거 손이 얼얼한데······? 개조된 거야?”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력을 조금 높여봤어. 최근에 나타난 키메라들을 상대로 하기엔 위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라칸은 신형 마탄총을 살펴보고 있던 아처에게 다가갔다.
“쏴 보니까 어때?”
“전보단 나쁘진 않긴 한데 네가 만들어준 그 저격총 위력만큼은 안 되네.”
“그건 양산이 불가능한 물건이야. 가격이 만만치 않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을 훑었다.
“그것보다 습기 침투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 것 같아?”
“그건 해결됐어. 조만간 리모델링한 모델을 전해줄게.”
“오케이. 기대가 되는걸?”
그때 저 멀리서 루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어어!”
달려오는 루안의 얼굴을 보자 셋은 굉장히 당황했다.
“······뭐야. 너 왜 그렇게 탔냐?”
루안의 얼굴은 마치 히르페인들처럼 구릿빛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전에 말 안 했던가? 나 고디바 왕국 다녀왔어.”
“엥? 거길 왜?”
“칸드 교관님이 아즈라크 가문에서 다른 창술사들과 대련을 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거든. 한마디로 도장 깨기를 다녀왔다 이거지.”
“오오~ 그래서 어땠어?”
루안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3성짜리 창술사들은 죄다 때려눕혔지. 그놈들이 분해하는 표정을 너희가 봤어야 했는데.”
에이든은 루안과 하이파이브했다.
“잘했어. 루안.”
“내가 좀 치지.”
루안은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상담 좀 해도 될까?”
“무슨 상담?”
“그······.”
루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게 생각을 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에이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속 시원하게 네 식대로 말해. 답답해 죽겠다.”
“으음······. 그게 내가 아즈라크 가문 애들을 다 때려눕히니까 가문의 가주님이 직접 찾아왔어.”
“조금 신기하긴 한데 있을 만한 일 아니야?”
“······9살짜리 여자애랑 같이.”
그러자 에이든의 표정이 굳었다.
“뭐? 9살? 설마······.”
“맞아. 그 9살짜리 얘랑 결혼하라고 하더라고.”
“받아들인 건 아니지?”
“당연하지. 조금 부담스럽다고 솔직하게 얘길 했어. 그래도 계속 결혼을 부추기길래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린다고 했어.”
“그래도 너치곤 제법 유연하게 대응했네.”
“······내가 글도 못 배운 평민이긴 하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다고.”
루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발로 툭 찼다.
“그 9살 꼬마애는 날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 기분이 솔직히 말해서 X같았어.”
“칸드 교관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같이 갔다면서.”
“유망한 전사를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건 고디바 왕국의 제법 흔한 문화래. 그러니까 너무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더라고.”
에이든은 루안의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칸드 교관님 말대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정 안 되면 나처럼 빨리 결혼하든가.”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과 죽음은 멀면 멀수록 좋다고 말했잖아.”
“커흠! 그, 그랬었나?”
“매일같이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나랑 저녁 늦게까지 훈련한 걸 모를 것 같아? 분명 트리니티 안에 네 집이 있는데도 나랑 같이 샤워하고······”
에이든은 당황해서 빠르게 루안의 말을 끊었다.
“아무튼! 네 진짜 고민이 뭐야?”
루안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 정략결혼은 솔직히 말해서 평민인 내 입장에선 조금 익숙하지 않다랄까? 가주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거부하면 큰일이 나지 않나 해서 말이야. 그게 조금 걱정이야.”
“고디바 왕국의 문화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일단 루체트 황국 내에선 애초에 귀족이 직접 나서서 평민에게 정략결혼을 하자고 얘기를 하지 않아.”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평민이 귀족이랑 결혼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어. ······동화책에나 나왔지.”
“그리고 상대방이 거부한다고 해서 불쾌해하면 안 돼. 그건 예의가 없는 행동이거든. 그러면 티그리스 교관님은 얼마나 곤란하겠냐. 매일같이 사방에서 혼사 편지가 날아오는데 말이야.”
“티그리스 교관님은 레인로버 황녀님하고 결혼한다고 공식으로 발표했잖아. 그런데 왜 혼사 편지가 또 와?”
“첩이라도 보내겠다 이거지. 내가 아는 티그리스 교관님이라면 안 받아들이겠지만.”
에이든은 루안의 등을 탁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지 말아. 그 사람들도 안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을 테니까.”
“······알겠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마음이 편하네.”
“그래도 예의 있게 편지 하나 정도만 보내줘. 편지 쓰는 거 오늘 저녁에 도와줄게.”
“고마워.”
에이든은 오늘 또 저녁 늦게 들어갈 모양이다.
그때, 저 멀리서 네메시스가 다가왔다.
“네메시스 교관님. 안녕하세요.”
“다들 방학은 잘 보냈어?”
“네.”
“그럼 라칸 좀 빌려 가도 되지? 티그리스 수석 교관님이 부르셔서 말이야.”
라칸은 아처에게 개량한 마탄총 몇 자루를 넘기며 말했다.
“이것들도 시험해 보고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말해줘. 나 다녀올게.”
“엄청 많이 만들어놨네? 그래서 피곤해 보였던 거구나.”
“영감이 생기면 바로바로 만들었거든. 아무튼 난 간다.”
“그래. 오늘 저녁에 같이 밥이나 먹자.”
라칸은 적당히 얘들과 떨어지자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우로스가 나타난 겁니까?”
네메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타이밍이 참 지랄 맞게도 말이야.”
* * *
라칸과 네메시스는 티그리스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집무실엔 트리샤와 티그리스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라.”
라칸은 적당히 빈자리에 앉았다.
“성물 우로스 회수를 하고 싶다고 했었지?”
“네.”
티그리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대륙 지도에 작은 말판을 올렸다.
말판의 위치는 고디바 사막이었다.
“우로스가 고디바 사막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지금 당장 출발하더라도 편도로만 한 달 가까이 걸리는 거리지.”
“텔레포트로는 못 가나요?”
“이 거리를 텔레포트로 단번에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고 최소 15번에 걸쳐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나달은 대학 교육 문제와 인퀴지터 일만 해도 벅찬 상태지. 그럼 바스티얀 학교장님밖에 남지 않는데······.”
“학교장님은 조금 힘드시겠죠.”
바스티얀은 저번 올페르 백작과의 결투 이후로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철혈 심장을 찾기 위해 장거리 텔레포트를 여러 번 사용하는 것은 현재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열차와 낙타를 타고 가는 게 최선이지. 이로 인해 일어날 문제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넌 이번 학기 수업을 듣지 못한다. 이번 학기를 통째로 날려야 한다는 거지.”
“······그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건 네가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문제니까.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네가 고디바 사막을 가는 동안 총기 개발이 거의 멈출 거란 거다.”
현재 라칸은 루체트 황국 내에서 마탄총 개발 분야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말레우스나 다른 드워프들이 개발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아우로므의 비늘과 뼈를 이용한 무구를 만들고 있는 중이라 총기 개발에 뛰어들 수 없다.
“······그러니 가지 말라는 소리신가요?”
“아니, 선택하라는 뜻이다.”
며칠 전, 라칸이 티그리스에게 진중하게 부탁했다.
성물 우로스 회수 작전에 참가하고 싶다고.
그동안 라칸은 총기 제작과 마공학 연구에만 열을 올렸다.
그게 자기 역할이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라칸은 아센시오 가문을 다녀온 뒤로 조금 달라졌다.
뭘 느끼고 뭘 봤길래 변한 것일까?
“꼭 가고 싶나?”
라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총기 개발을 포기해서라도?”
“네.”
티그리스는 말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면 왜 가야만 하는지 설명해줄 수 있나?”
라칸은 네메시스와 트리샤를 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조금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을까요?”
티그리스가 눈짓으로 나가란 제스처를 취하자 둘은 군말 없이 일어나 문을 닫고 나갔다.
“얼마 전, 우노의 정체를 밝혀낸 이후 퀘스트 보상이 들어왔습니다.”
“몇 포인트가 들어왔지?”
“포인트가 아니라 추가 보급권이 들어왔습니다.”
“추가 보급권? 그게 뭐지?”
라칸은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100만 포인트를 모으면 한 번 더 회귀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티그리스는 라칸도 눈치챌 정도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게 정말인가?”
“네.”
티그리스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지금 갖고 있는 포인트는 얼마지?”
“25만 포인트 정도입니다. 앞으로 75만 포인트만 더 모으면 회귀의 회중시계를 하나 더 구매 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최근 포인트에 더 집착한 것이군.”
라칸은 잠도 줄여가며 마셜 장군과 아처와 소통하며 총기 개량과 각종 마공학 물품들을 개발했다.
단순 심경 변화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포인트가 정말로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럼 이번에 우로스 회수 작전에 참가하고 싶은 이유도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서인가?”
“네. 그렇습니다. 공적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포인트를 많이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100만 포인트를 모을 때까지 넌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계속 모을 생각이겠군.”
“네. 만약을 위한 보험 같은 거죠. 특히 저는 총기 개발 쪽에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딱히 저를 위해 포인트를 투자할 일이 거의 없기도 하죠. 지금 모아둬야 합니다.”
라칸의 말은 굉장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라칸은 단순히 이성적인 판단하에 포인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티그리스는 라칸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나?”
“아뇨. 티그리스 교관님께 처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럼 당분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왜죠?”
“도망칠 구멍이 하나 생기면 사람은 그 도주로만 바라보게 된다. 마치 너처럼.”
“네?”
티그리스의 말투는 얼음만큼 차가웠다.
“만약 한 번 더 회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넌 포인트를 25만 포인트나 모으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든 네 발전을 위해 소모했겠지.”
티그리스의 말에 라칸의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 말은 넌 완벽한 도주로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을 소홀히 하고 있는 거다.”
“아니에요. 저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보는 앞에서 25만 포인트를 사용해라. 네 마력을 올리든 영약을 사든 아니면 기술을 익히든 너를 위해 투자해라.”
“그럴 수 없어요. 만약에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티그리스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라칸은 너무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티그리스가 라칸에게 이리 화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라칸. 딱 한 번 말하니 잘 들어라.”
티그리스는 라칸의 눈을 쏘아봤다.
“지금의 삶에 충실해라. 도망치려 하지 마.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라.”
“그래도 지금 포인트를 모으지 않으면······.”
“넌 시스템과 포인트의 노예가 될 것이냐? 라칸?”
티그리스의 냉철한 말에 라칸은 가슴을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다.
“시스템과 포인트는 네 도구일 뿐이다. 내가 검을 다루듯 너는 포인트를 네 의지대로 다뤄야 한다. 100만 포인트를 모으는 동안 너는 정체되고 만다. 네가 남들보다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재적소에 네가 포인트를 써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앞서가는 사이 너는 가만히 있을 거냐? 언제든 도망칠 수 있는 도주로만을 바라보면서?”
라칸은 드디어 가슴 속 깊은 곳에 감춰두었던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무섭습니다.”
라칸은 주먹을 꽉 쥐며 떨었다.
“만약 이번 회차에 실패한다면······. 설령 우노의 봉인에 성공하더라도 나달 님이나 아모리스 님이나 티그리스 교관님께서 죽는다면 제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넌 회귀를 할 것이냐? 그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라칸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티그리스는 자신이 이번 회차의 라칸에게서 뭘 빼앗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티그리스는 라칸에게서 실패와 후회를 빼앗았다.
라칸은 지금까지 깊은 절망과 후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그리스는 라칸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건네주었다.
심지어 라칸이 평생 검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완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정 지으면서 대신 총기 개발과 마공학 업무에만 집중시켰다.
지금의 나약한 라칸은 티그리스가 만든 것이다.
“이기적이군.”
“······네?”
“네게 소중한 사람이 죽어야 회귀를 사용하겠다는 말은 네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회귀를 사용하지 않을 거란 말이 아니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뭐가 틀린 거지? 지금까지 로타와 아르펨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수십 만 명이 넘는다. 넌 그들의 목숨이 나나 아모리스 님의 목숨과 다르다고 말하는 거다.”
라칸은 입을 달싹였다.
티그리스의 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나도 레인로버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굉장히 힘들 거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셔도 죽을 만큼 힘들겠지. 그럼에도 나는 절대로 회귀를 하지 않을 거다. 우노를 성공적으로 죽였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내가 다시 회귀하기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티그리스는 라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니 이번 삶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우노를 죽일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로 인해 희생될 죽음과 피는 그토록 네가 원하던 주인공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다.”
“주인공······.”
티그리스의 따끔한 훈계에 라칸의 눈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순 없다.
티그리스는 다시 질문하기로 했다.
“그럼 다시 묻겠다. 라칸. 이번 성물 탈환 작전에 참가하고 싶나?”
“티그리스 교관님께선······.”
“내 생각은 묻지 마라. 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로타와 아르펨과의 전쟁 중에도 문제가 터지면 나를 찾을 거냐? 아니면 아모리스를 찾을 건가? 내가 알고 있는 너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회귀 전의 저 아닙니까?”
“아니, 지금의 너를 말하는 거다.”
티그리스는 라칸의 눈을 바라봤다.
“라칸, 다시 묻겠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가?”
라칸은 깊게 생각했다.
아니, 주인공은 생각했다.
“가겠습니다.”
“이유는?”
“제게 부족한 것은 마공학 기술이나 마법 실력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부족하지?”
“경험과 실패 그리고 후회입니다.”
티그리스는 속으로 감탄했다.
라칸은 티그리스와 달리 깊은 절망과 후회를 경험하지 않고도 변할 수 있는 진정한 소설 속 주인공 같았다.
“이번 성물 우로스 회수 작전의 최종 책임자는 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팀을 꾸려서 보고한 뒤 출발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