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16)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16화
길 잃은 자의 낙원(5)
“다녀왔어?”
트리샤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좀 어떠셔?”
“별로 좋지 않습니다.”
“혹시 독에 중독되거나······.”
“그건 제가 판단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로 일흔이 넘으셨으니 노환 때문에 몸져누웠을 수도 있고요.”
트리샤는 다우드가 가져온 말린 잎사귀를 꺼냈다.
“하지만 뭔가 특이한 게 하나 있긴 했어요.”
라칸은 잎사귀를 만지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이걸 어디서 구하신 거예요?”
“내 오빠가 아빠 앞에서 이걸 향 상자에 넣고 태우더라고. 이게 도대체 뭐야?”
“이건 ‘티소피아’라는 식물의 잎사귀예요. 오크들이 전투나 사냥 전에 제법 사용하는 흥분제죠.”
티소피아라면 트리샤도 들어본 적이 있다.
오크들이 제법 사용하는 흥분제이자 마취제라서 티소피아 잎을 먹은 오크들은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고 더 격렬하게 싸운다.
하지만 트리샤가 알고 있는 티소피아완 조금 달랐다.
“이게 티소피아라고? 티소피아는 하얀색인데다가 말려도 이렇게 검은색으로 변하지 않아. 옅은 회색빛으로 변하지.”
“그냥 말리면 옅은 회색으로 변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알코올에 일주일간 절인 뒤 최소 5서클 이상의 연금술사가 증발 마법으로 알코올과 수분기를 완벽하게 걷어낸 뒤 히란 나무 수액에 절이고······.”
레인로버의 눈빛에서 지루함이 스쳐지 나가자 라칸은 빠르게 말을 줄였다.
“······아무튼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 정제한 각성제입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보통 ‘엑사이테’라고 부르죠.”
레인로버는 고개를 갸웃했다.
“각성제? 독이 아니라?”
“네. 맞습니다. 이걸 피운 향을 맡으면 시야가 넓어지고 몸이 훨씬 가벼워지죠. 단, 이 각성제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어요.”
“그게 뭔데?”
“이걸 인간이 사용하면 인체 면역력이 극도로 떨어집니다.”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잔병치레에 잘 걸린다는 건가?”
“네. 그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물론 트리샤 정도의 젊고 건강한 기사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전혀 없어요. 애초에 기사는 몸이 튼튼하잖아요. 면역력이 떨어져 봤자 몸이 으슬으슬한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아모리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잔병이 많은 노인이나 어린아이에겐 치명적이겠네.”
“네. 맞아요. 침상에 누워 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사람이 이걸 들이마시면 병이 더 가속화되겠죠.”
라칸은 트리샤를 보며 말했다.
“혹시 제가 구해 와달라고 했던 샘플은 가져왔나요?”
“아, 여기.”
트리샤는 라칸이 달라고 했던 머리카락과 침 그리고 혈액 샘플을 건넸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하겠다는 거야?”
“독에 중독되었나 확인해 보려고요. 분명 조사하면 뭔가 나올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잠깐 기다려 주세요.”
라칸은 샘플을 들고 방으로 들고 갔다.
그사이 레인로버는 고생한 트리샤에게 따뜻한 차를 내왔다.
트리샤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감았다.
그럴수록 아빠의 노쇠한 피부와 주름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트리샤는 뭔가 결심했는지 아모리스를 보며 말했다.
“아모리스 님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단순한 노환도 엘릭서를 마시면 나을 수 있는 겁니까?”
아모리스의 눈빛에서 다양한 감정이 부딪히는 게 보였다.
트리샤도 혼날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던 것이기 때문에 아모리스의 매서운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아모리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네 심정도 이해가 가니 엘릭서에 대해 얘기해 줄게. 라칸이 포인트로 구매한 엘릭서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개념이 아니야.”
“그럼 뭔가요?”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물약이지.”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아모리스는 마지막까지 한 번 더 고민했다.
괜한 얘기를 꺼냈다가 저들의 욕심을 부채칠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꺼내선 안 돼.”
아모리스는 레인로버를 보며 말했다.
“심지어 티그리스한테도.”
“티그리스 경한테도요?”
“그래. 맹세하면 왜 엘릭서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지 설명해 줄게.”
트리샤와 레인로버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맹세할게요.”
아모리스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엘릭서는 연금술사들 사이에선 부활을 상징해. 말 그대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물건이지. 실제로 아하드가 그렇게 되살아났어.”
“아, 아하드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키메라 드래곤의 발톱에 머리가 날아갔다가 다시 재생했지. 당연하겠지만 역사엔 기록되지 않았어. 나랑 호스 그리고 페레이라와 아하드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했거든. 그래서 그런지 드워프의 기록 보관소에도 없던데?”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게?”
“엘릭서가 인체에 작동하는 원리는 굉장히 간단해. 인체의 시간을 가장 건강했던 시점으로 되돌리는 거야. 그러니까 진짜 쉽게 말해서 회춘과 초재생 능력이 합쳐진 엄청난 묘약이란 거지.”
“회춘이요?”
아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실제로 아하드도 그렇게 젊어졌거든. 물론 아하드가 죽은 시점이 31살인가 32살 때라서 엘릭서를 사용한 티가 많이 나지 않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지.”
아모리스는 페레이라가 아하드의 잘려 나간 머리에 엘릭서를 부었을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아하드의 머리가 뼈 그리고 뇌와 눈을 거쳐 근육과 피부까지 삽시간에 자라났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체에 가득했던 아하드의 흉터와 문신들도 싹 사라지고 노폐물도 빠져나와 푸른 불길에 타올랐다.
그 장엄한 모습은 마치 잊혀진 시대에 존재했다던 전설의 불사조가 다시 부활하는 것 같았다.
“그런 엘릭서를 만약 네 아빠가 먹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설마 젊어지는 겁니까?”
“그래. 일흔 먹은 노인이 탱탱한 20대로 변한다면 왕국 신민들과 부족장들은 뭐라고 할 것 같아? 국왕이 흑마법을 썼다며 반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최악은 이 비밀이 풀려 라칸을 납치하려고 한다거나 내전이 일어나는 거고요.”
아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 그렇게 되면 트리샤, 넌 감당할 수 있겠어?”
트리샤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모리스는 차를 모두 털어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마음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긴 한데 엘릭서를 사용하는 건 절대 반대야. 그러니까······ 포기해.”
아모리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레인로버와 트리샤 그리고 아모리스가 기다리다 지쳐서 쪽잠에 든 새벽녘.
라칸이 문을 열고 나왔다.
“검사가 끝났습니다.”
그 말에 트리샤가 제일 먼저 반응해 일어났고, 아모리스도 거실로 나왔다.
아모리스는 트리샤가 껄끄러워 마주 보고 앉으려다가 그냥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우선 독에 당하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런거야? 정말로 노환이 오신 거야?”
“네. 그렇습니다. 나이도 있으시니 몸이 많이 노쇠해지셨겠죠. 심지어 엑사이테에 4주간 노출되셨으니 인체 면역력은 바닥을 쳤을 거고요. 독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질병 쪽으로 보는 게 맞다고 봅니다.”
트리샤는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반 포션으론 호전이 안 되겠네?”
“네. 안타깝게도 현재 개발된 포션들은 외상 치유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마셔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겁니다.”
트리샤는 깊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트리샤의 마음은 여전히 엘릭서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엘릭서를 사용하고 난 이후의 후폭풍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트리샤는 마음을 깔끔하게 접기로 했다.
“사람은 모두 늙고 죽으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봐.”
트리샤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하지만 다우드 그 씹어 먹어도 모자랄 새끼는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아빠를 죽이려고 들어? 그런 패륜아 새끼가 한 나라를 이끄는 국왕이 되겠다고? 난 절대 인정 못 해.”
트리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사막뱀자리 성좌의 성물 ‘르미르’를 뽑아 들었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다우드 그 새끼를 먼저 저승으로 보내는 거야. 그러니까······.”
“잠깐 흥분을 가라앉혀 주세요.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엘릭서를 사용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 엘릭서에 대해 아모리스 님께 다 설명을 들었으니까. 그건 사용해선 안 되는 물건이야.”
라칸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문 너머로 엘릭서가 어떤 건지 설명을 들었어요. 그러니 저도 그건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거야?”
“네.”
“그게 뭔데?”
“전 포인트로 각종 영약을 살 수 있어요. 개중엔 엘릭서처럼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노쇠해진 몸을 낫게 해주는 영약이 제법 많죠. 면역력도 높여주는 약도 있고요.”
“······그게 정말이야?”
“네. 물론 그걸 먹는다고 해서 완전히 나을 수 있을지는 몰라요. 하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그 근거는?”
라칸은 자신의 눈앞에 뜬 퀘스트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신규 퀘스트!]고디바 왕국의 국왕을 살려라.
보상: 10,000포인트.
제한시간: 4일.
“퀘스트가 떴거든요. 1만 포인트짜리 난이도라면 많이 어렵긴 하지만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트리샤는 라칸을 와락 안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라칸은 흥분한 트리샤를 빨리 떼어내며 말했다.
“그······ 아직 말이 안 끝났는데······.”
“뭐가 또 있어?”
“문제는 제가 ‘탐색 스킬’로 국왕 폐하의 몸을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연금술로 해낼 수 있는 일이면 해보고, 안 되면 포인트 상점의 영약이나 각종 약품으로 해결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널 왕성 안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거지?”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런데 트리샤 경도 힘겹게 들어간 왕성을 어떻게 몰래 들어갈 수 있을지······.”
레인로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런데 우리가 몰래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네?”
“지금 우리가 몰래 이동하는 이유는 카이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온 거잖아. 하지만 우린 이미 카이라에게 여기에 온 걸 들킨 상태지. 그럼 우리가 지금 몰래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긴 하지만 다우드 왕세자가 저희를 들여보내 줄까요? 국왕 폐하를 살리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절대 안 들여보내 줄 것 같은데.”
트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그 다우드 씹새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아무것도 없어.”
트리샤는 품에서 이사 국왕의 편지를 꺼내 팔랑였다.
“우리는 국왕 폐하의 정식 초대장을 받고 온 거니까. 정 안 되면 다 때려 부수고 들어가면 돼.”
* * *
동이 틀 무렵.
왕성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은 하품을 하며 졸음을 몰아내고 있었다.
“하암~ 30분 있으면 교댄가?”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지.”
“그나저나 또 한 번 거기 가야 하는데. 언제 갈래?”
“흠······. 휴가를 좀 맞춰서······ 어? 저건 또 뭐야?”
저 멀리 네 사람이 왕성 입구로 걸어왔다.
“에이. 귀찮게 시리.”
“왕성은 당분간 출입 금지라는 거 모르나?”
병사들은 창을 내밀며 말했다.
“정지. 정지. 누구냐?”
가장 앞에 서 있던 한 여인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난 트리키아 빈트 이사 빈 일야스 하마자르.”
트리샤는 늘 손목에 감고 있던 밴드를 벗어 하마자르 가문의 상징인 축복받은 붉은 별을 보여주었다.
“이 나라의 공주다.”
군단장 불시 순찰에 걸린 것처럼 병사들은 겁을 잔뜩 집어삼켰다.
그리고 경례를 했다.
“부, 붉은 사막의 일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길을 열어라.”
“아······.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트리샤의 당당한 패기에 문을 열었다.
트리샤와 네 사람은 당당하게 왕성 문을 통과했다.
트리샤가 지나가자 병사들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런데······ 하마자르 가문에 트리키아라는 공주가 있었던가?”
“······그러게?”
“몰라. 일단 보고나 하자.”
* * *
트리키아 공주가 입성한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개인 집무실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경비대장은 내성 입구로 후다닥 내려왔다.
“뭐? 공주? 무슨 공주가 왔다고?”
“트리키아 공주님이시랍니다. 그런데 트리키아란 이름의 공주님이 있었습니까?”
“트리키아? 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경비대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도망친 공주다.”
“도망친 공주요?”
“15년 전쯤에 파혼하고 성벽을 넘어서 도망친 공주야.”
그걸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트리키아 공주가 성벽을 넘어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에 있던 경비대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한 뒤 자신이 경비대장이 되었는 걸.
퇴직한 그 경비대장은 퇴직금으로 닭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게 대박이 나서······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실을 빨리 다우드 왕세자님께 알려야 한다.
내성을 지키던 병사가 덜덜 떨며 말했다.
“저, 저기 옵니다! 어떻게 합니까?”
경비대장은 순간 다우드 왕세자가 자신에게 직접 말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외에 다른 하마자르 왕가의 혈족이 왕성에 들어오려고 하면 무조건 막거나 돌려보내라. 정 안 되면 내가 왕성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거나.
차기 국왕의 명령을 일개 경비대장이 어떻게 거스르겠는가?
경비대장은 빠르게 경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젠장. 이, 일단 막아! 어떻게든 시간을 끌라고!”
“제가 어떻게 막습니까?”
“이런 멍청한 녀석! 넌 왕세자 전하께 보고를 올려라. 내가 막을 테니까.”
경비대장은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함을 깨달았다.
경비대장은 헝클어진 머리를 투구로 가리고 주름진 옷을 대충 툭툭 쳐서 편 후 앞으로 나섰다.
“저, 정지! 정지! 누구냐!”
“트리키아 빈트 이사 빈 일야스 하마자르다.”
‘미친······. 진짜잖아.’
저 손목에 보이는 6개의 붉은 별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마나는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다.
저건 정말 하마자르 가문의 공주 트리키아다.
“큼! 붉은 사막의 일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이곳의 경비대장 무사트라고 합니다.”
“그럼 문을 열어라.”
당당한 말투에 경비대장은 순간 바로 문을 열라고 할 뻔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돌아갈 것 같진 않고.’
그렇다면 왕세자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가 경비대장은 적당한 핑계를 찾았다.
“공주님께선 출입하실 수 있지만 절차상 뒤에 계시는 세 분의 신원을 확인해야 합니다. 실례지만 신원을 밝혀주실 수 있습니까?”
뒤에 있던 한 여인이 후드를 벗었다.
로즈골드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짐과 동시에 여인은 루체트 황가의 상징을 꺼냈다.
“전 레인로버 데 루체트. 루체트 황국의 황녀입니다.”
‘신이시여. 내게 왜 이런 시련을······.’
경비대장은 이걸 상부에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얘졌다.
“화, 황금의 일족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방문해서 미안합니다. 무사트 경비대장.”
“아, 아닙니다. 그것보다 왜 갑작스레 오신 건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루체트 황국의 영원한 동맹인 고디바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 몸져누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왔습니다.”
레인로버는 라칸과 아모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황국에서 제일 가는 치료사들을 데려왔는데······. 혹시 들여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녀님께서 보증하신다면 가, 가능은 합니다만······.”
경비대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국왕 폐하의 옥체를 저 둘이 직접 보는 것은 다우드 왕세자님과 담당 치료술사의 허락 없인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트리샤는 경비대장에게 국왕의 친서를 보여주었다.
편지 앞부분에 찍혀 있는 고디바 왕국의 인장을 본 경비대장은 이제 울고 싶었다.
“이사 국왕 폐하께서 나를 직접 보자고 하셨다. 다우드 오라버니의 허락은 필요 없지.”
“하, 하지만······.”
“책임은 내가 진다. 그러니 넌 우리를 안에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
공무원들을 홀리는 마법 주문이 트리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책임진다고 분명히 그랬지?’
경비대장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럼 안내할 시녀를 바로 붙여 드리겠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머물고 계신 침소의 위치는 내가 알고 있으니 시녀도 필요 없다. 넌 출입증만 주면 된다.”
경비대장은 결국 붉은 보석이 박힌 출입증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 * *
라칸은 아모리스에게 속삭였다.
“역시 뭐든 자신감이 중요하네요. 정말 억지 같았는데.”
“여기 경비가 개판인 것도 있어. 그리고 너도 맡았지? 저 경비대장하고 경비들에게서 서큐버스 냄새가 나는 거?”
라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사람들도 모두 뮬에 다녀온 게 분명해요.”
트리샤는 출입증을 부술 듯이 쥐었다.
저 경비들의 허술함이 이 나라의 국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평생 모국을 쳐다도 보지 않을 거라 다짐했고, 고디바 왕국이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속에서 마구 열불이 났다.
트리샤와 네 사람은 어느새 국왕의 침소까지 다다랐다.
트리샤는 라칸을 보며 말했다.
“부탁할게. 네게 이 나라의 운명이 달렸어.”
“걱정 마세요. 무조건 해낼게요.”
트리샤는 경비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뭘 하느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트리샤의 호통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내가 트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3개의 붉은 별을 가진 사내.
다우드였다.
“옛말에 수탉은 소리 내어 울고, 암탉은 알을 낳으라는 말이 있지.”
다우드는 트리샤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느 암탉의 울음소리가 담장을 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