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40)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40화
흑토(1)
아이린은 흑토지대행 열차에 올라갔다.
‘5년 만인가?’
벨프 가문이 몰락한 후 엄마와 함께 도망쳐 나오듯 빅토리에행 열차에 올라탄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지금의 아이린은 달랐다.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벨을 흔들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지금의 아이린은 흑토지대로 지원을 가는 사단장과 황금 기사단 휘하 제3대대장 필립과 동일한 개인 침실을 쓰고 있었다.
침대 하나와 작은 테이블 하나 있는 초라한 방이지만, 전시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물론 평소의 아이린이라면 이런 불편한 호사는 거절했을 것이다.
이 모든 호사는 아이린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티그리스의 제자라는 이름값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린은 이 호사를 기꺼이 누리기로 했다.
아이린은 침대가 아닌 책상에 앉아 아공간 주머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티그리스가 용살의 관찰 기록을 토대로 집대성한 책.
아이린이 멋대로 이름을 붙인 ‘용살에 관하여’라는 책이었다.
-내가 그란티스와 렐리우스를 상대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몇 줄 추가했으니 가는 길에 보도록 해라.
티그리스는 아이린이 용살을 익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용살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검술이다.
아이린의 천재성이라면 언젠간 익힐 수 있겠지만, 흑토지대로 향하는 약 일주일 동안 익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럼에도 티그리스가 아이린에게 이 책을 건네준 이유는 단 한 가지.
-잡생각을 버리는 데 좋을 거다.
티그리스의 말대로 아이린은 현재 심적으로 굉장히 몰린 상태였다.
흑토지대에 있던 엄마와 연락이 닿아 다행히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혈귀는 정확하게 과거 벨프 백작령의 수도였던 ‘스칼레’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스칼레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값어치가 있는 땅이 아니다.
흑토지대 내에 얼마 없는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성에는 유리하지만 역으로 공격하기엔 까다롭다.
그리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거의 없어서 군사 목적용 도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라리 황국에 타격을 줄 거였다면 현재 한창 밀을 수확하고 있는 남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스칼레로 돌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벨프 가문이 다시 일어서는 걸 막기 위해서겠지.’
현재 스칼레를 중심으로 흑토지대가 다시 번창하고 있다.
토드 황제가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도 있고, 로라가 잠도 줄여가며 열심히 일을 한 것도 있다.
그러니 페이라는 아예 다시 복구할 수 없게 철저히 파괴할 목적으로 스칼레를 공격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뿌–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린의 마음도 덩달아 달아오른다.
페이라를 마주하게 되면 아이린은 어떻게 될까?
공포심에 주저앉을까?
아니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까?
아이린은 생각을 꺾고 억지로 책으로 눈을 옮겼다.
사락-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티그리스의 정갈한 글씨체가 아이린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아이린을 위하여.]이 정갈한 글씨체에서 티그리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이린의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분해진다.
아이린은 심호흡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 * *
페이라는 정신을 차렸다.
“그륵……. 그르륵…….”
페이라의 손엔 피를 뿜으며 죽어가는 기사가 들려 있었다.
놈의 폐부엔 페이라의 붉은 대검이 파고들어 있었다.
대검을 타고 놈의 맥동이 느껴진다.
놈은 공포에 젖어 있다.
페이라는 나무에 박힌 도끼를 빼내는 것처럼 검을 뽑아낸 후 기사를 내동댕이쳤다.
기사는 빗물과 핏물이 고인 구덩이에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페이라는 자신의 옷을 쳐다봤다.
“또 더러워졌군.”
추적추적한 진눈깨비가 내린다.
비와 눈 그 어중간한 액체가 사제복에 엉겨 붙어 피처럼 붉게 변했다.
페이라는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페이라의 왼팔과 오른팔에서 나온 네 자루의 대검이 땅에 틀어박혔다.
그러자 검을 타고 폐허에 가득한 핏물을 모조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페이라의 사제복도, 머리와 몸에 엉겨 붙은 어설픈 눈도 하얀색을 되찾았다.
페이라는 구덩이에 빠진 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기사는 살아 있었고, 두려운 눈빛으로 페이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구덩이에 파묻혀 있는 기분은 어떻던가?”
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기에 페이라는 묵묵히 말을 이어 나갔다.
“핏물에 질식할 것 같아 두렵던가? 아니면 이 지독한 피 냄새 때문에 버티질 못하겠던가? 아니면 핏물에 몸을 숨겨 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던가?”
페이라는 놈의 안주머니를 살폈다.
놈의 안주머니엔 포션이 들려 있었다.
페이라는 놈의 앞에서 포션 병을 깨뜨려 부숴 버렸다.
기사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사라졌다.
페이라는 놈의 팔을 강제로 잡아 끌어 질질 끌고 시체가 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사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목에 핏물이 고여 물 끓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페이라는 과거를 회상했다.
“자네라면 내 기분을 조금은 알 수 있겠어. 나도 자네처럼 그 핏물 구덩이에 몸을 숨겼던 적이 있거든.”
“그때도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지. 지금처럼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이었어. 몸은 점점 차가워지고 말발굽 소리는 주변에 가득했지.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점점 위로 차올라 날 질식시킬 것 같았어.”
페이라는 기사를 시체더미 한가운데에 던져놓았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 룩스 여신님께 살려달라고 빌었을까? 아니면 내게 고맙다며 꽃반지를 만들어주었던 소녀의 시체가 내 몸을 잘 가려주길 바랐을까? 아니.”
페이라와 눈을 마주친 기사는 몸이 덜덜 떨려왔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쇼크가 온 것이다.
“제발 그 빌어먹을 창천 기사들이 어서 떠나길 바랐어.”
페이라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성수를 꺼냈다.
“그때, 난 자네들처럼 구세주를 만났지. 그분은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는 내게 손을 내밀며 복수할 힘을 주었어.”
페이라가 성수를 붓자 기사의 몸이 극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의 옆구리에 난 상처가 빠르게 아물다 못해 살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살점은 주변에 가득한 시체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아니야! 안 돼! 안 돼!”
“으아아아악!”
시체 더미에 몸을 숨겨 페이라가 떠나길 기다리던 사람들은 살점이 달라붙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러나 살점은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아가 발과 팔을 낚아채 살덩어리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살려주어어어어어!
거대한 살덩어리가 울부짖더니 수십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조각난 살덩이들이 페이라를 보며 또다시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너희들의 고통 이해한다. 하지만 조금만 참아라.”
페이라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러자 방금 만들어진 키메라들을 필두로 사방에서 붉은 살덩어리들이 페이라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고귀한 희생과 핏물이 이 땅을 더욱 비옥케 만들 것이니까.”
* * *
로라는 바쁘게 펜을 놀리며 보고를 들었다.
“행정관님. 라발가 자작 가문이 군사 지원을 거부한다는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다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병상을 빠르게 늘려야 합니다.”
“피난민들이 식량창고를 털어가고 있습니다. 엄한 규율이 필요합니다.”
로라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라발가 자작에게 이 일을 황실에 반드시 보고하겠다고 전문을 보내세요. 현재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인데 기사를 보내지 않는 것은 황명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요.”
“공관에 빈자리가 났으니 그곳으로 심각한 환자들을 우선 옮기세요. 의사들과 포션들이 열차를 타고 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버티라고 꼭 말하고요.”
“식량은 피난민들에게 아낌없이 푸세요. 열차를 타고 구호품들이 먼저 오고 있으니 아슬아슬하게 맞을 겁니다.”
로라는 비서에게 조금 전에 서명한 서류를 건넸다.
“마탄총을 들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이 자원입대하면 가족들을 먼저 후방으로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는 내용을 추가했어요. 정리해서 모든 스칼레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하세요.”
비서는 서류를 받아들고 자리를 떠났다.
로라는 퍽퍽한 보리빵과 식어버린 차로 대충 요기를 하며 황실로부터 온 전문들을 살폈다.
‘절망적이지만 아예 못 버틸 것은 아니야.’
혈귀의 공격을 받았다는 첩보를 받자마자 황실은 즉각적으로 구호품부터 보내주었다.
아마 2~3시간 내로 구호품들이 도착할 것이다.
중요한 건 한 가지.
‘혈귀가 벌써 지척에 왔어.’
피난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불과 12시간 전에 혈귀가 스칼레 바로 아래에 있는 렌성을 무너뜨렸다고 했다.
혈귀가 빠르게 움직인다면 최소 6시간, 길면 12시간 내로 스칼레성 앞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다.
‘혈귀가 오면 절대 못 막아.’
현재 스칼레에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겨우 502명, 그리고 마법사는 43명에 불과하다.
물론 추가로 마탄총병 2,129명과 수성용 아티팩트 21개가 있다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혈귀를 막아내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놈은 홀로 벨프 가문의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렸던 괴물이니까.
황실이 보내주기로 한 황금 기사단과 철혈 마법병단이 오지 않는 한 놈을 이곳에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지원병력은 12시간 내로 도착한다고 했다.’
12시간 안에 과연 스칼레를 지킬 수 있을까?
로라는 차를 마시기 위해 컵에 손을 뻗었다.
쨍그랑-!
그러나 로라의 떠는 손이 컵을 놓치고 말았다.
로라는 떠는 손을 붙잡았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로라는 혈귀가 나타났다는 말에 지난 닷새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을 자면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그날처럼 또 도망칠 수만은 없어.’
어떻게 다시 되찾은 땅인데.
절대 혈귀에게 남편과 아들의 시체가 묻혀 있는 이 땅을 건네줄 수 없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전령이 들어왔다.
“급보입니다! 서쪽 5㎞ 지점에 키메라들이 출현했습니다!”
“뭐?!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온 거지?”
“모르겠습니다. 그 기괴한 살덩어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럼 혈귀는? 혈귀는 어디에 있지?”
“이상하게도 혈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라의 만년필 촉이 구부러졌다.
“일단 당장 대피 경보를 내리고 전투준비를 해. 치안관과 셰퍼드 장군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것이…… 둘 다 오늘 아침부터 보이질 않았습니다.”
로라는 눈앞이 핑 돌았다.
전쟁을 준비해야 할 장군과 치안관이 사라지다니.
혈귀가 지척에 다가왔음을 알아채고 도망친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스칼레를 버리는 게…….”
“헛소리! 이곳은 흑토지대 내에서도 제일 높고 험준한 지역이다. 이곳에서도 막아내지 못하면 다른 곳은 성 하나만 끼고 막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렇지만…….”
5년 전에도 이곳은 혈귀에게 무너진 곳이 아니던가?
전령은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우선 기사들 중 지휘 경험이 있는 자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겠어. 기사들 목록을…… 아니, 내가 직접 가야겠어.”
로라는 외투를 걸치고 집무실 밖을 나섰다.
* * *
혈귀가 나타났다는 말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마차가 부서져 길목을 막은 곳도 있었고, 사람들끼리 달려가다가 엎어져 밟히는 자도 보였다.
로라는 이 무질서한 공포 속에 마음이 꺾일 것만 같았다.
콰아아아앙-!
쾅!
서쪽에서 수성용 아티팩트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다.
로라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고 참호를 향해 나아갔다.
아직 모두 도망친 게 아니다.
피난민들이 도주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이 아직 남아 있다.
로라는 참호에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마석 타는 냄새가 들렸다.
마총이 발사되는 소리, 아티팩트가 불을 뿜는 소리 등 귀를 찢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로라는 땅에 떨어진 마총을 쥐고 참호로 달려갔다.
“으아아아아악!”
“끄아아아!”
마탄총의 위력은 확실했다.
총을 맞으면 놈의 몸에 치즈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죽어 나갔으니까.
하지만 개체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놈들은 죽은 살덩어리들을 집어 방패로 삼아 돌진했고 기어코 참호 안으로 들어왔다.
놈들의 사냥 방식은 간단하다.
살덩어리에서 나온 촉수들이 병사들의 목과 팔을 휘감으며 살덩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안에서 뼈와 살점을 으스러뜨리고 잡아먹어 상처 입은 몸을 치유했다.
그나마 기사들이 분전하며 살덩어리들을 베어냈지만, 살덩어리들은 죽은 시체들을 집어삼키더니 금방 수복해 버렸다.
희망이 없다.
혈귀가 등장조차 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쉽게 임시 방어선이 점령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로라는 총을 들었다.
퉁-!
묵직한 마탄이 살덩어리에 파고들었다.
살덩어리의 정중앙에 있던 놈의 머리에 정확하게 꽂히며 놈은 그대로 축 늘어져 죽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살덩어리들이 로라를 쳐다봤다.
-사, 살, 살려줘.
로라는 소름이 돋았다.
살덩어리에 박힌 인간은 울고 있었다.
-살려줘어어어어어어!
살덩어리는 로라에게 수십 개의 팔과 다리를 이용해 달려들었다.
로라는 계속 발사했지만, 놈은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로라는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아이린…….”
사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로라는 눈을 감았다.
퍽!
그때, 로라의 코앞에서 핏물이 터져 나갔다.
로라는 눈을 떴다.
로라의 코앞에서 멈춰 선 살덩어리.
놈의 몸에는 커다란 창 하나가 박혀 있었다.
살덩어리는 창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이어서 날아온 창 세 개가 놈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로라는 창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엔 수백의 와이번들이 보였다.
그 와이번의 위엔 푸른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프리하르덴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가장 앞엔 신문에서나 봤던 프리하르덴 가문의 영주, 로건이 있었다.
“발사!”
와이번을 탄 기사들은 살덩어리들을 향해 투창을 날렸고, 기사들의 투창은 살덩어리들을 꿰뚫었다.
로건은 적진 한가운데를 향해 뛰어내렸다.
그리고 프리하르덴의 여름을 뽑아 내려찍었다.
쾅!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얼음꽃이 로건의 주위로 퍼져 나가며 살덩이들을 헤집었다.
뒤이어서 프리하르덴 가문의 기사들도 내려와 검을 들었다.
와이번들도 기사들의 옆에 서서 울부짖었다.
-우어어어어어!
전장을 뒤흔드는 와이번들의 울부짖음에 살덩어리들은 기겁해 몸을 떨었다.
“전원 돌격!”
로건과 푸른 와이번 기사들은 모두 달려서 살덩어리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역공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