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42)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42화
흑토(3)
껍질을 벗겨낸 세검이 홀로 날아왔다.
지금까지 대검이라는 무게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필립도 순간 놓쳤을 정도로 빠르고 날렵했다.
세검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물고기처럼 방패 사이를 비켜 지나가 한 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컥!”
펑!
검이 꽂히자마자 기사의 몸은 빠르게 부풀어 오르더니 폭발했다.
그 핏방울과 살점은 모조리 기화되어 시체와 방패가 있던 자리에 피 안개로 남았다.
기사들은 첫 전사자에 대한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코와 입을 헤집는 듯한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켁! 컥어어억!”
근처에 있던 기사들의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급기야 눈과 귓구멍, 피부에도 피가 새어 나왔다.
“피 안개에 닿지 마라! 당장 물러서!”
테오도르는 기사들이 피를 쏟아내는 이유가 바로 피 안개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동료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던 기사들이 달려들어 구출하려고 하자 테오도르는 아예 실드로 기사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피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유령처럼 실드 벽을 빠져나가 기사들을 향해 들어가려고 했다.
“젠장할!”
테오도르는 결국 죽어가는 기사 넷의 주위를 크게 실드로 둘러 가뒀다.
“살려줘! 살려…… 커어어억!”
실드 안에 갇힌 기사들은 피눈물을 쏟아내며 동료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기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페이라는 테오도르의 빠르고 정확하며 굉장히 이성적인 판단에 감탄했다.
“판단이 빠르군. 하지만…….”
쩡-!
세검이 기사들을 뚫고 지나가 실드를 산산조각 냈다.
피 안개가 따뜻한 물에 넣은 잉크처럼 대기에 빠르게 퍼졌다.
“자,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 * *
페이라와 황금 기사단과의 충돌에 천지가 뒤흔들렸다.
전장과 약 700m 떨어진 가드 포인트에서도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콘크리트 먼지가 떨어질 정도였다.
고든은 구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아이린을 쳐다봤다.
명상이라고 하기엔 오러 운용이 거칠고, 오러 운용술을 운용하고 있다고 하기엔 잠잠하다.
그래서일까?
잠깐이라도 시선을 떼면 고든을 제치고 전장으로 달려갈 것 같았다.
그때, 아이린의 눈이 떠지며 다리 위에 올려놓았던 대검을 잡고 일어났다.
“옵니다.”
“네?”
드드드드드-!
우지끈!
나무를 부수는 소리와 함께 말 수천 마리가 달리는 듯한 진동이 발을 타고 흐른다.
트레인 가드들은 저마다 갖고 있던 무기들을 손에 쥐고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아이린은 고든과 트레인 가드들을 제치고 입구 밖으로 나섰다.
“아이린!”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고든은 빠르게 아이린을 뒤따라 갔다.
아이린은 입구를 나서자마자 횡으로 검을 그었다.
날카로운 검기가 대검 끝을 타고 미끄러지며 이동하더니 나무를 베고 지나쳐 갔다.
나무가 쓰러지며 가드 포인트로 빠르게 달려오던 거대한 뭔가를 깔고 뭉갰다.
월광이 없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뒤따르던 트레인 가드들이 섬광 아티팩트를 터뜨렸다.
펑-!
투박하고 거친 섬광 마법에 드러난 것은 거대한 살덩어리들이었다.
생기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잿빛 살덩어리들에 팔과 다리들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모양새에 본능적인 혐오감이 몰려왔다.
-죽여주어어어어어!
살덩어리들은 아이린과 트레인 가드들을 발견하자 비명을 질렀다.
놈이 빠져나오려 나무를 부수고 달려들자 아이린은 잽싸게 달려들어 살점에 파묻힌 머리를 갈랐다.
고든도 한 마리를 맡아 베어냈다.
‘……무슨?’
겉보기엔 물러 보이는 이 살덩어리들은 생각보다 엄청 질겼다.
방심하지 않고 검기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베어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고든과 아이린은 죽은 살덩어리들을 관찰했다.
“이게 그 키메라인가?”
“그런가 봐요.”
뿌득-
아이린의 이가 갈렸다.
가드 포인트에 있는 통신 시설을 이용해 수십 번이나 스칼레에 통신을 보냈지만, 스칼레에선 회신이 오지 않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런 놈들이 가드 포인트들을 죄다 부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엄마는?’
아이린의 머릿속에 안 좋은 생각들이 가득 찼다.
“아이린.”
고든의 부름에 아이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섬광이 닿지 않는 깊은 어둠에 셀 수 없이 많은 황금빛 안광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린은 검을 들었다.
전장의 장점이자 단점은 주변이 살기로 가득해 신경을 다른 곳에 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린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걱정이 생존본능이란 이름의 원초적인 감정에 집어삼켜졌다.
-살려주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아아!
아이린은 검을 휘둘렀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페이라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군인들은 시시했다.
유명 가문의 기사들이라고 해도 페이라의 대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백 년간 그 누구도 넘지 못했다던 성벽도 페이라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페이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베르강이나 티그리스와 같은 강력한 개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그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충격!”
쾅!
황금 기사를 17명이나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황금 기사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며 페이라를 공략했다.
“테오도르!”
테오도르의 스트렝스 마법이 필립을 감쌌다.
필립이 홀로 대검을 막아내자 그사이 다른 기사들이 달려들어 혈귀에게 검을 휘둘렀다.
페이라의 세검이 빠르게 회수되며 기사들에게 날아갔지만, 철혈 마법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리플랙션 실드 마법을 사용했다.
쾅!
세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며 땅에 처박혔다.
페이라는 어쩔 수 없이 뒤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군. 여기엔 7서클 마법사가 없을 텐데?’
리플랙션 실드 마법은 무려 7서클 마법.
원래라면 평균 4~5서클 마법사에 불과한 철혈 마법사들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다.
페이라는 기사들 뒤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을 쳐다봤다.
그곳엔 푸른 구체 형태의 아티팩트에 마석을 집어넣고 있는 철혈마법사들이 있었다.
‘……전술용 아티팩트인가?’
페이라는 누군가가 발을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아래를 보니 페이라가 서 있는 땅이 마치 늪지대처럼 변해 페이라의 발을 잡아끌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강하게 발을 박찼지만 오히려 더욱 파고들었다.
이 또한 7서클 원소 마법 ‘사일런스 그레이브’였다.
상대를 천천히 땅 깊이 파묻어 버리는 일종의 속박 겸 공격 마법으로 시전자의 마력이 다 떨어지지 않는 한 늪지대에 발을 담근 것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마법이었다.
‘시간을 주는 게 아니었다.’
필립과 황금 기사들이 왜 그리 필사적으로 마법사들을 지켰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저런 전술용 아티팩트를 사용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고, 그걸 위해서인지 사망자들이 계속 발생하더라도 페이라의 대검을 뒤로 절대 보내지 않았다.
“노르베르드에서 전력을 노출한 게 제법 타격이 크군.”
역시 베오울프 습격 작전 당시 생존자를 단 하나도 남겨놓아선 안 됐었다.
검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과 많은 대검을 사용하려면 가만히 서서 집중해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새 페이라의 허리까지 땅에 잠겼다.
그동안 필립과 기사들은 전열 정비와 함께 포션을 마시며 체력과 상처를 치유했다.
테오도르와 마법사들은 아티팩트들을 가동해 바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페이라가 또 다른 수를 숨겨두고 있을지 모른다는 판단에 공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판단은 정확했고 페이라는 결국 아껴두었던 모든 수를 쓰기로 했다.
페이라의 남은 대검 두 자루 모두 바스라지며 안에 감춰진 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검들은 모두 룩스교에서 성검이라 불리는 검들이다. 차례대로 성자 레이너드의 검.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단검. 성기사 밀의 검. 성자 그레고리우스의 검이지.”
필립과 테오도르는 바짝 긴장했다.
페이라가 아무런 이유 없이 숨겨진 검을 드러냈을 리가 없으니까.
“왜 잘 알려지지도 않은 성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궁금해하겠지. 하늘을 봐라.”
필립은 살짝 눈을 돌려 하늘을 쳐다봤다.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이 사라지고 네 개의 별자리만이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무슨.”
“죽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성좌들의 모습이 참으로 추하지 않나? 하지만…….”
페이라의 목까지 땅에 집어삼켜졌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군.”
페이라의 머리까지 모두 집어삼켜지며 촉수까지 죄다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필립과 테오도르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페이라가 보이지 않으니 더욱 불안하다.
필립은 마나의 실을 사용해 페이라의 위치를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페이라는 마나가 아닌 신성력을 사용하다 보니 마나의 실로 페이라를 찾아낼 순 없었다.
오히려 먼저 페이라의 위치를 찾아낸 것은 필립이었다.
“아티팩트를 지켜!”
테오도르의 외침과 동시에 성검 네 자루가 마치 물개를 사냥하는 상어처럼 땅을 뚫고 나와 마법사들을 덮쳤다.
테오도르의 명령에 리플랙션 실드 마법을 준비 중이던 마법사들이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다.
전술용 아티팩트 3개를 중심으로 실드 마법이 작동했다.
쩡-!
그러나 검들이 실드 마법에 닿자마자 실드 마법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무슨……!”
테오도르는 왜 실드 마법이 사라졌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검들은 무자비하게 아티팩트를 꿰뚫었다.
“으아아아아악!”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티팩트를 휩쓸고 지나간 검들이 마법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필립을 포함한 기사들이 마법사들을 지키기 위해 가까이 붙어 있었지만, 단 한 번의 기습 공격으로 철혈 마법사들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죽은 마법사들의 몸이 터져 나가며 피 안개가 전장에 자욱하게 깔렸다.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간 피 안개는 양옆에서 몰려오는 키메라들을 상대하던 일반병을 휩쓸었다.
“끄아아아악!”
“우에에에에엑!”
피 안개는 더 많은 피를 부르고, 그 피는 다시 피 안개가 되어 더 많은 피를 불렀다.
테오도르는 온 신경을 집중해 바람 마법으로 피 안개들을 끌어모아 실드 마법으로 가뒀다.
그래서일까?
땅에서 갑자기 솟구친 페이라의 공격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네놈이 제일 성가셨어.”
페이라의 발이 대검으로 변하며 테오도르를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못 막는다.’
쾅-!
그러나 필립의 방패가 가까스로 대검을 막아냈다.
테오도르는 그 여파로 큰 부상을 입은 채 멀리 날아가 버렸지만, 페이라에게도 큰 빈틈이 생겼다.
필립은 방패를 비틀어 대검을 튕겨 보낸 후 아껴두었던 성물을 사용했다.
필립이 사용한 성물은 ‘죄수잡이’라는 이름의 포박끈.
천공의 사슬처럼 드래곤을 묶어둘 정도로 강력한 성물은 아니지만, 살인을 한 인간을 향해 던지면 자동적으로 몸을 포박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촤륵!
필립의 포박끈이 페이라의 팔과 촉수를 죄다 묶자 필립이 외쳤다.
“꽂아!”
주변에 있던 황금 기사들이 달려들어 검을 페이라의 몸에 꽂았다.
다섯 개의 칼날이 페이라의 배와 심장, 폐 등 급소란 급소를 죄다 찔렀다.
울컥!
페이라의 입에서 피가 한 움쿰 쏟아졌다.
그러나 놈은 웃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대단하군.
필립의 등허리에서 소름이 돋으며 검을 휘둘렀다.
놈의 목을 쳐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페이라의 검들이 필립의 검을 쳐냄과 동시에 검을 꽂은 다섯의 황금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황금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놓고 방패를 들었다.
그러나 어설픈 자세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고, 태반이 죽거나 신체 한 곳이 잘려 나갔다.
기사들의 몸에서 나온 붉은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 주변을 휩쓸었다.
“으아아아악!”
페이라는 온몸에 칼이 꽂힌 채로 일어났다.
검신이 놋으로 만들어진 검이 주변에 가득한 피 안개를 빨아들였다.
그러자 놈의 몸에 박힌 칼들이 죄다 빠져나가고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제법 아프군.”
“젠장.”
네 자루의 검이 필립을 향해 날아왔다.
필립은 결단을 내렸다.
필립은 방패와 검을 놓고 망토에 손을 집어넣었다.
쩌저저정-!
필립의 망토에서 뽑혀 나온 검이 네 자루의 검을 모조리 쳐내며 검로를 기묘하게 비틀었다.
동시에 페이라의 빈 허리를 베어냈다.
필립의 몸엔 단 하나의 상처도 남지 않았지만, 페이라의 배는 내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페이라는 뒤로 물러났다.
“그 대단한 검술을 지금까지 숨겨두고 있었나?”
“단순히 검술만 숨겨둔 게 아니지.”
페이라는 신성력을 사용해 치유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속도가 더뎠다.
모종의 기운이 페이라의 치유를 방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페이라는 필립의 검을 쳐다봤다.
필립의 검신은 기이하게도 톱날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성물인가?”
“네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 맞는 성물을 가져왔지.”
“그런데도 네 부하들에게 공격하라고 명령한 건가? 멍청하군.”
“설마 목과 심장에 칼이 박혀도 살아남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으니까.”
필립은 검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일이 없을 거다.”
페이라는 신성력이 바닥나자 피 안개들을 불러 모았다.
단검이 피를 모조리 삼키며 신성력을 회복시켰다.
“어딜!”
필립이 페이라에게 달려들자 페이라는 검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검들이 필립의 몸을 꿰뚫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꿰뚫은 감각이 없다.
‘잔상?’
페이라는 뱀처럼 슬며시 다가온 살기에 뒤를 돌아봤다.
필립은 어느새 페이라의 등 뒤로 옮겨 검을 내질렀다.
촤아아아악!
페이라의 등허리에 긴 상처가 나며 피 분수를 쏟아냈다.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상반신 전체를 동강 냈을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큭!”
필립의 왼쪽 어깨가 화끈했다.
페이라의 피가 튄 곳이었다.
그 피들이 안개로 변해 필립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자신의 피도 안개로 만들 수 있던 거였나?’
필립은 더욱 페이라를 몰아붙였다.
필립이 페이라를 먼저 무너뜨리느냐 아니면 페이라가 필립의 몸을 죄다 갉아먹느냐의 싸움으로 변모했다.
촤악-! 촤악-!
페이라는 사실 필립의 검격에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몸을 회복시키려면 신성력이 필요한데, 룩스 여신을 믿지 않는 페이라의 입장에서 신성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검으로 피를 흡수해 신성력으로 치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립은 피를 흡수할 틈을 절대 주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돌리면 필립의 검이 심장과 목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좀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급소를 찔리는 순간 페이라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페이라가 처한 상태만큼이나 필립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다.
피 안개가 필립의 피부를 넘어 근육까지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아!”
근육이 점점 말을 듣지 않아 원하는 방향으로 세밀하게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필립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쩡-!
필립의 검이 처음으로 페이라의 검과 정면 충돌했다.
필립의 검은 페이라의 검을 튕겨냈다.
페이라는 굉장히 놀랐다.
필립은 현재 페이라의 검을 밀어낼 완력이 없다.
쩡-! 쩡-!
운인가 싶었지만 필립은 연속적으로 대검을 쳐냈다.
급기야 페이라의 오른쪽 다리를 깊숙하게 베어냈다.
“큭!”
페이라의 다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근육까지 베어져 페이라의 기동력이 확 죽어버리고 말았다.
‘완력이 아니야. 기술이 좋아진 거다.’
필립은 이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립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안 보여.’
필립의 오른쪽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피 안개가 기어코 필립의 오른쪽 눈을 갉아먹은 것이었다.
‘괜찮아.’
필립에겐 아직 청각과 촉각이 남아 있었다.
필립은 감각 증폭을 사용해 떨어진 시각 능력을 대체해 검이 오는 방향을 읽어냈다.
심지어 테오도르를 포함한 철혈 마법사들이 필립에게 각종 버프 마법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직 쓰러질 수 없다.
쩡-! 쩡-!
황금 기사들은 그 처절한 공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난입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싸움이었기에 기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법사들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둘의 공방을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황금 기사들은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베르강 님?”
필립의 검술은 베르강의 것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검로가 비슷하다기보단 느낌이 비슷하다.
자연처럼 예측 불가능하면서도 파괴적이며 동시에 아름답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 사물이 동조하며 움직이는 기분이 든다.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런 감각이군요. 형님.’
필립의 풀 네임은 필립 폰 아인볼프.
블랙 마이스터 베르강의 사촌 동생이다.
필립은 어렸을 때부터 베르강의 매혹적인 검술에 매료되어 황금 기사단에 자원했다.
그래서 언제나 베르강과 같은 강한 기사가 되기 위해 피가 나도록 노력해 왔다.
-필립. 내 검술을 따라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네 검술을 찾아라.
하지만 필립은 베르강의 말을 따르기 어려웠다.
필립은 순수하게 베르강의 검술이 아름다워서 아인볼프 가문의 기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황금 기사단에 입단한 거니까.
-고든은 7성 기사가 될 거다. 고든은 자기가 성장해야 할 방향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필립. 네가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다면 네가 뭘 원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검을 휘둘러라.
‘형님. 전 소드 마스터가 되고 싶어서 검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필립의 푸른 검기가 베르강의 검기처럼 하얀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해처럼 강렬하지 않지만 달처럼 은은하게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는 것 같다.
‘저는 형님을 닮고 싶습니다.’
필립의 검이 네 자루의 검을 동시에 쳐냈다.
‘형님처럼 자유로우면서도.’
필립의 검기가 페이라의 배를 훑고 지나갔다.
페이라의 배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한입 베어문 것처럼 거대한 상처가 남았다.
‘형님처럼 아름다운.’
필립의 검이 페이라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
필립의 검이 페이라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생채기만 남겼을 뿐 베어내지 못했다.
“대단하군.”
필립은 페이라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필립의 두 눈과 고막은 사라졌고, 사지는 뼈가 들어날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으니까.
원래 필립은 좀 전부터 구조적으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럼에도 검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필립의 악착같은 투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
페이라의 네 자루의 성검이 필립의 몸으로 날아왔다.
“이젠 쉬어라.”
마법사들이 실드 마법을 사용했지만 페이라의 검이 실드에 닿자마자 실드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기사들이 빠르게 달려들었지만 페이라의 검이 닿는 속도보단 느렸다.
필립은 다가오는 죽음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하늘을 쳐다봤다.
훙-!
하지만 페이라는 뒤에서 다가오는 섬뜩한 살기에 검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아악!”
페이라는 허리를 동강 내려던 거대한 대검을 간신히 막아냈지만, 대검이 척추를 으스러뜨리는 것을 막아내진 못했다.
페이라는 간신히 뒤를 쳐다봤다.
“넌…….”
페이라는 타오를 듯한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아이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