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243)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243화
흑토(4)
30분 전.
아이린과 고든은 가드 포인트를 버리고 살덩어리들을 뚫으며 전진했다.
어떻게든 사수해 보려 했지만 살덩어리들이 원체 많아 버틸 수가 없었다.
고든은 혈귀와 황금 기사들이 싸우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봤다.
“저쪽으로 가는 게 맞을까요?”
아이린은 살덩어리를 양단 내며 말했다.
“가장 가까운 아군이 저곳밖에 없으니까요.”
사실 아이린과 고든만 있었다면 살덩어리들을 뚫고 도망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속도가 나지 않는 이유는 둘에게 딸린 식구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뒤를 슬쩍 쳐다봤다.
“헉……. 헉…….”
트레인 가드 20여 명이 아이린과 고든이 열어준 길을 열심히 뒤따라오고 있다.
저들은 모두 고리가 1~2개에 불과한 용병들.
고든과 아이린이 떠나면 이들은 5분도 못 버티고 모조리 죽을 것이다.
아이린은 눈에 들어오는 땀을 닦아내며 정면을 바라봤다.
셀 수도 없이 많았던 살덩어리들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또렷하게 느껴진다.
아빠와 오빠를 죽인 혈귀가 저 앞에 있다.
혈귀는 지금 어떤 상태일까?
필립의 황금 기사들과 테오도르의 철혈 마법사들은 혈귀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거의 반년 동안 전술 연구를 하고, 나머지 반년간 전술 훈련을 했다고 들었다.
만약 혈귀가 죽어가는 상태라면.
그래서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하지 못하고 그들이 혈귀를 죽여 버린다면.
으득-!
아이린은 이를 악물며 살덩어리를 베어냈다.
아이린의 머릿속에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혈귀에게 가족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어디 아이린 혼자뿐인가?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 중에서도 혈귀에게 가족의 목숨을 잃은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도 아이린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
“아이린!”
고든의 부름에 아이린은 정신을 차렸다.
아이린은 어느새 탁 트인 공터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아이린, 더 이상 가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저 멀리 필립이 홀로 페이라와 싸우고 있었다.
후방엔 부상을 입은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상처는 너무나도 참혹해 비위가 약한 몇몇 트레인 가드들은 헛구역질을 했다.
“어서 도와주세요.”
“네, 네!”
고든의 말에 트레인 가드들은 부상당한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아이린은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둘의 싸움에만 집중했다.
필립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이 피 칠갑이 되어 있는 것도 모자라 눈과 귀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혈귀의 공격을 쳐내고 공격하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필립의 검이 페이라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빈틈이었기에 페이라의 목을 베어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공격이 허무하게 빗나갔다.
“이젠 쉬어라.”
페이라의 검들이 힘없이 움직였다.
페이라도 분명 지친 것이다.
황금 기사들이 달려간다.
그러나 그들의 돌진 속도로 검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철혈 마법사들도 실드 마법을 써보지만 페이라의 검이 닿자마자 사라진다.
저 공격을 막을 사람은 아이린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린은 바스티얀이 자신에게 선물해 주었던 ‘유령 장화’를 사용했다.
훙-!
블링크 마법이 발동되며 삽시간에 페이라의 뒤로 이동했다.
페이라의 주변에 가득한 희미한 핏빛 안개들이 아이린의 얼굴 피부를 따갑게 긁었다.
노리는 것은 페이라의 심장.
아이린의 흑룡아가 매섭게 페이라의 허리를 양단해 들어갔다.
놈의 살점에 파고드는 과정이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처럼 한참 느리게 느껴진다.
아이린의 흑룡아는 기어코 놈의 척추까지 닿았다.
이대로 끊어내면 되건만 검이 멈췄다.
페이라의 검에 매달린 촉수가 흑룡아를 감싼 것이다.
페이라의 분노 섞인 눈빛과 아이린의 붉은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욕설이라도 퍼부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아빠와 오빠를 살려내라며 미친년처럼 울부짖어야 할까?
아이린은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보여주기로 했다.
벨프의 의지는 아이린이 살아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으아아아아아!”
아이린은 용살을 사용했다.
아이린의 검기가 놈의 검과 단단한 척추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아이린의 용살은 티그리스의 것처럼 세련되지 않았다.
아이린은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흑룡아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울컥-!
페이라의 왼쪽 허리가 없었다.
내장은 보이지도 않았고 상처 입은 심장이 피를 뿜어내며 펄떡이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페이라는 서 있었다.
놈은 네 개의 검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다시 블링크를 사용했다.
아이린은 땅에 떨어진 필립의 검을 뽑아 들어 공격했으나, 놀랍게도 페이라의 검이 움직여 아이린의 검을 막아냈다.
아이린의 몸이 쭉 뒤로 미끄러졌다.
저릿- 저릿-
죽기 직전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놈의 검격은 힘이 실려 있었다.
“필립 경!”
그사이 고든은 죽어가는 필립을 안아 치유술사들에게 데리고 왔다.
치유술사들은 치유 마법과 함께 포션을 있는 대로 때려 부었다.
그러나 필립의 몸 상태는 호전될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포션이라고 하더라도 치유할 수 있는 선이 있는 것이다.
현재 필립의 상태는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끔찍한 상태였다.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평생 검을 잡지 못할 몸이 될 것이다.
아이린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페이라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린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놈에게 접근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
페이라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검 네 자루 중 성자 그레고리우스의 성검을 제외한 모든 검이 마치 망가진 찰흙 덩어리처럼 무너졌다.
성기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도 마법 중 하나인 ‘제사’였다.
각종 장기와 부서진 척추와 심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돌아왔다.
하지만 완벽한 정상은 아니었다.
여전히 놈의 몸에선 계속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고, 오른쪽 다리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 네가 아이린 데 벨프로군.”
페이라는 걸레짝이 된 두건을 벗었다.
놈의 머리칼과 동공은 붉었다.
물론 아이린과 같은 붉은색이지만 느낌 자체가 다르다.
페이라의 눈과 머리칼은 피처럼 짙고 어두운 붉은색이었고 아이린의 눈과 머리칼은 불처럼 화려했다.
“그 정도 실력을 갖췄으면서 네 아비와 오라비가 내 손에서 죽을 땐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 그랬으면 내가 편하게 보내줬을 텐데.”
아이린은 당장에 놈을 베어 넘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왜 덤비지 않는 거지? 네 원수가 네 눈앞에 있다.”
아이린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뜨거워진 머리가 차가워진다.
“……널 죽이기 전에 물어볼 게 하나 있다.”
페이라는 이해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궁금해할 만한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겠지. 나와 벨프 가문 사이에 무슨 악연이 있느냐. 이거 아니겠나?”
아이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알 자격이 충분하지. 아니, 알아야만 하겠지.”
페이라는 발을 질질 끌며 걸어왔다.
페이라가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하얀 사제복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넌 네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 가문…… 아니, 네 아비와 창천 기사단이 이 땅에서 어떤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페이라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장담컨대 너는 네 가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노룡 그란티스를 사냥한 벨프 가문의 위대한 업적만 알겠지. 하지만 그건 초대 가주의 이야기고 후손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네 아버지는 굉장히 잔혹했지. 창천 기사단을 움직여 상처 입고 죽어가는 병자들이 모여든 패잔병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였으니까.”
아이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왜?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모양이지?”
페이라는 당시를 떠올렸다.
“그들은 전쟁으로 팔을 잃고 다리를 잃은 자들이었고 밭을 갈며 소박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귀족들의 복수와 탐욕에 희생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천 기사단은 패잔병 마을에 빈스모크 가문의 밀정이 들어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패잔병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마치 밭에 숨어든 벌레들을 죽이기 위해 밭을 불태우는 것처럼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였다.”
페이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때, 난 뭘 하고 있었을 것 같나? 난 차가운 핏물 구덩이에 숨어 빌어먹을 룩스 여신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지.”
페이라는 촉수를 거두고 오른손에 그레고리우스의 성검을 들었다.
“아이린. 아직도 넌 나를 벨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이린은 필립의 검을 떨어뜨렸다.
페이라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넌 네 아비와 오라비와 다르게 양심이 있는 모양이군.”
페이라는 아이린이 포기했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린의 손이 아공간 주머니로 향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매끈한 롱소드 하나가 천천히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난 네가 왜 벨프 가문 휘하에 있던 가문들만 골라 무너뜨린 것인지 항상 궁금했다. 이야기는 길었지만 결국 너도 이 저주받은 땅의 피해자다. 이 말 아닌가?”
페이라는 크게 웃었다.
“그래. 맞다. 흑토는 인간의 피로 젖은 땅이다. 동시에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는 땅이지. 그래서 나는…….”
“그래서 이 땅을 불모지로 만들겠다는 거군. 더 이상 이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꼴을 볼 수 없다는 것 아닌가?”
페이라의 발이 멈칫했다.
“……내 생각을 아주 잘 아는군.”
아이린은 티그리스의 회귀록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레인로버로부터 페이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페이라는 이상하게도 흑토지대에 집착하고, 빈스모크 가문이 무너지자마자 흑토지대에 사는 모든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이 땅을 불모지로 만들겠다고 쉼 없이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티그리스는 페이라가 왜 그런 짓을 벌이나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저 페이라와 싸웠다.
하지만 아이린은 달랐다.
혈귀는 도대체 뭐가 그리도 미웠길래 벨프 가문을 넘어 흑토지대를 망가뜨리려 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나는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도 밥을 먹을 때도 검을 수련할 때도 너를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아이린은 눈을 감고 세계수의 말을 떠올렸다.
-혈귀도 너처럼 검을 휘두르지 않고선 못 버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아이린은 다시 눈을 뜨고 증오로 가득 찬 혈귀의 눈을 쳐다봤다.
“하지만 문득 네게도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벨프 가문에게만 그런 참혹한 짓을 벌였을 리가 없으니까.”
페이라는 흉흉한 눈빛으로 아이린을 쏘아봤다.
“그래서 내 대답이 네 예상 중 하나였다는 말이냐.”
“그래.”
아이린은 검을 치켜들었다.
이 성물의 이름은 ‘신념’.
절대 부러지거나 날이 나가지 않고 변화도 하지 않는 검이었다.
“너와 내가 겪은 일은 참혹하지만, 동시에 이 저주받은 흑토지대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흔히 겪는 일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들에겐 힘이 없었고, 우리에겐 힘이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요점이 뭐지? 이제 피는 그만 보고 싸움을 멈추자는 거냐?”
“아니, 네 분노를 이해하겠다는 거다. 그리고 내가 너를 증오하는 만큼 네가 나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
세계수는 아이린에게 화해하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화해는 아이린과 혈귀 사이에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러니 이 땅에 너와 나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 모든 증오의 매듭을 짓자.”
“그래. 잡설이 길었군.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말이야.”
페이라는 기습적으로 아이린에게 검을 날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린은 페이라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약간 비틀어 피해냄과 동시에 돌진했다.
‘빠르다.’
페이라는 아이린의 검을 가까스로 막았다.
몸 상태가 그리 좋진 못하지만 촉수의 속도는 여전히 날렵했다.
아이린의 검은 미끄러지듯 페이라의 검면을 타고 흘러 놈의 손을 베었다.
분명 눈에는 보였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각도와 타이밍이었다.
페이라는 살점이 잘려 나갔으나 개의치 않았다.
페이라는 검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하지만 아이린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검을 들어 흘려보냈다.
“어떻게?”
페이라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린은 빠르다.
하지만 필립에 비하면 느리다.
그렇기에 페이라는 아이린을 쉽게 베어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이린의 검술은 페이라의 이해를 넘는 신묘함을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페이라의 검로가 어디로 향할지 완전히 이해한 듯 페이라가 검을 휘두르면 이미 그 자리엔 아이린이 없었다.
필립과는 전혀 다른 전투 양상에 페이라는 굉장히 곤혹스러웠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상대를 이해하면 그 사람의 검로를 예상할 수 있다고.”
아이린은 페이라의 검을 아예 피해 버린 뒤 검을 휘둘렀다.
놈의 촉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말씀을 나는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내 멍청한 오해였어.”
아이린의 검이 놈의 어깨를 가른다.
“스승님께서 느끼는 감각이 이런 느낌이구나.”
아이린은 페이라의 수가 모두 보였다.
왼손에서 기습적으로 뻗어 나온 대검이 아이린의 목을 노리고 들어온다.
하지만 아이린은 여유롭게 반 발자국 물러나 피해냈다.
“이년이!”
연속되는 공격에도 아이린은 계속 흘리며 타격을 입혔다.
페이라의 촉수가 휘어지며 예상치 못한 각도로 휘어져 들어왔다.
그러나 아이린은 여유롭게 검을 흘린 후 놈의 배에 상흔을 남겼다.
“너의 검로는 직선만이 가득하구나.”
직선은 곡선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티그리스의 말이 아이린의 귓가에 맴돈다.
페이라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마구잡이로 검을 내지르지만, 아이린은 티그리스의 바람대로 분노를 이용하고 있었다.
아이린의 고리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일주일 전에 네 번째 고리를 만들었으나, 아이린의 몸에 축적되어 있던 영약들과 세계수의 축복이 시너지의 효과를 발현하며 희미하게 다섯 번째 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페이라의 모든 상흔에서 대검이 튀어나왔다.
모든 검로가 읽힌다면 양으로 승부하면 된다.
‘차분하게.’
아이린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대검을 쳐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놈이 피 안개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이미 아이린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이상하게도 피 안개를 쓰고 있지 않았다.
아마 성물이 사라지면서 능력이 없어진 거겠지.
그렇다면 놈이 들고 있는 성물은 무슨 능력일까?
“아이린! 놈은 마법에만 면역이다! 피 안개는 걱정할 필요 없어!”
테오도르의 말에 아이린은 대검을 흘리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쳤다.
아이린의 수준으론 흘려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하지만 검을 맞대보니 알겠다.
이 대검, 아이린이 부술 수 있다.
아이린은 자신의 오러를 대검에 실어 보냈다.
놈의 대검을 타고 아이린의 푸른 검기가 파고든다.
펑-!
대검이 폭발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건…….”
이 감각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벨프 가문의 가주와 검을 마주했을 때 벨프 가문의 가주도 자신의 검을 이런 식으로 폭발시켜 없애 버렸다.
“설마…… 용살이…….”
아이린의 검이 휘저어질 때마다 대검이 폭죽처럼 터지며 사라진다.
그러나 벨프 가문의 가주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그럴 리가……. 내가 분명 없앴는데?”
대검이 소나기처럼 내린다.
그러나 아이린을 막아설 순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모든 빗방울을 쳐내듯이 아이린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대검을 검 하나로 부수고 조각내며 전진했다.
그 장엄한 모습은 고든마저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였다.
남은 것은 페이라가 들고 있던 그레고리우스의 검 한 자루.
“으아아아아아!”
페이라의 검이 아이린을 향해 날아간다.
쩡-!
그레고리우스의 검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린은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된 페이라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놈의 피부와 살점 그리고 뼈를 가르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이린과 페이라의 붉은 눈이 부딪힌다.
동시에 페이라의 목이 날아가며 붉은 호선을 남겼다.
* * *
전장 정리가 한창일 무렵 로건과 와이번 기사단이 도착했다.
“……페이라를 죽었다고?”
“네.”
“그런데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는군.”
로건의 말에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아이린이 세계수에게 했던 말 그대로 ‘견디지 못해서’ 한 일이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앞으로 뭘 할 생각인가?”
아이린은 말없이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겠다.
검을 든 순간부터 지금까지 혈귀를 죽이기 위해 살아왔으니까.
아이린은 머리가 복잡할 땐 티그리스를 떠올렸다.
티그리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티그리스라면 무엇부터 할까?
“……일단 이 지긋지긋한 살덩어리들부터 없애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이 멀리 있을 땐 일단 당면한 문제부터 천천히 해결하면 된다.
티그리스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처럼.
“그래. 그게 맞지.”
“그것보다 스승님 쪽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페이라가 이렇게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그쪽이야 잘하지 않겠나.”
“하긴 스승님이라면 잘해내시겠죠.”
로건은 와이번 위에 올라탔다.
“그럼 이곳은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나는 도주한 살덩어리들을 추격해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백작님.”
“왜 그런가?”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페이라가 이 흑토지대에 왔을까요?”
아이린의 말에 로건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 페이라가 처음 등장했다던 서쪽 흑해 연안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내가 한번 찾아볼까?”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