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63)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63화
트리샤(2)
트리샤는 아이린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우와~ 아이린 씨 대단하시네요! 그 나이에 고리가 3개라니! 역시 티그리스 경의 제자라서 그런가?!”
“…….”
“이렇게 작은 몸으로 그 무거운 대검을 어떻게 드시는 거예요? 보셨죠? 그 양반도 한 손으로 못 들고 두 손으로 드는 거? 힘이 장사시네. 장사셔~!”
아이린은 발길을 멈추고 트리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트리샤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아이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구렁이가 들어가 있는 모략가의 눈빛이라기보단, 청승맞은 과일 가게 아줌마 같은 느낌이었다.
뭐가 되었든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시는 스타일이시구나! 전…….”
“만약 스승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시는 거라면, 미리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안 됩니다.”
“엑, 단호하시네요. 단호박인 줄. 아, 이거 600년 전에 유행이 지난 건데.”
아이린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걸었다.
트리샤는 아이린의 뒤를 쫄쫄 쫓아갔다.
“진짜 한 30분도 안 될까요?”
“스승님은 아무나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진~ 짜 진짜!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요. 10분도 안 될까요?”
아이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트리샤 씨.”
“진짜 진짜 진짜?”
“네. 진짜 안 됩니다.”
힘으로 떼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떼어놨다.
겉보기엔 굉장히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아이린은 트리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었다.
아이린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세를 숨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고리 4개짜리 검사이거나 또는 수준 높은 마법사라는 뜻이다.
황국 전역에 퍼져 있는 영주들에게 맨몸으로 찾아가도 단번에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강자가 왜 이렇게 허름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린이 트리샤의 말을 계속 무시하자, 트리샤는 발길을 멈췄다.
드디어 포기했나 싶어 흘금 뒤를 돌아보자 트리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뭔가를 각오한 표정이었다.
“진짜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트리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기다란 곡검을 꺼냈다.
고디바 사막의 전사들이 주로 쓴다는 ‘만곡도’였다.
만곡도의 가드 중앙엔 붉은 불을 연상케 하는 보석이 박혀 있었고, 검날은 보기만 해도 서슬 퍼런 것이 아이린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아이린 씨가 나쁜 거예요.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아이린은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던 롱소드를 붙잡았다.
길을 걷던 시민들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 겁을 집어먹고 떨어졌다.
트리샤는 곡검을 천천히 휘둘렀다.
아이린은 롱소드를 반쯤 뽑아 들었다.
그러나 검기가 날아오거나 하지 않았다.
곡검은 마치 검신에 기름을 먹인 것처럼 주홍빛 불이 타오르더니 동그란 불덩이 하나가 맥없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
불덩이가 너무 하찮게 떨어진 통에 아이린은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 불덩이와 트리샤를 번갈아 쳐다봤다.
트리샤는 곡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 불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불덩이는 트리샤의 손길이 닿자 붉은 여우로 변했다.
붉은 여우는 트리샤의 손에 몸을 비비더니 넓은 가슴에 파고들었다.
“메메 잘 있었어?”
-캬릉~
털이 불꽃으로 만들어져 뜨겁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뜨겁진 않은지 트리샤의 옷이나 긴 머리칼이 타지 않았다.
트리샤는 메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반짝였다.
“만약 티그리스 경을 소개해 주신다면, 특별히 우리 귀여운 메메를 안을 기회를 드릴게요. 이거 정말 흔한 기회가 아니에요.”
아이린은 맥이 탁 풀렸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우리 메메 안 귀여워요? 메메가 뜨거워 보이지만 굉장히 따뜻해요. 추운 사막에서 안고 자면 얼마나 기분 좋은데요.”
-꺼억!
여우의 입에서 불꽃이 흘러나왔다.
“어때요? 안아보고 싶지 않아요?”
아이린은 뭔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아이린은 반쯤 뽑힌 롱소드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됐습니다.”
“아씨 이게 아닌데! 이거 진짜 흔한 기회가 아니라니까요!”
* * *
결국 아이린은 트리샤를 뒤에 달고 노르베르드 타워 앞에 도착했다.
노르베르드 타워 앞은 아주 깨끗해져 있었다.
예전엔 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백화점과 식당 손님을 제외하면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티그리스의 안전을 위해 기자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티그리스와 관련된 기사는 황실의 허가를 받은 뒤에 내보낼 수 있다는 보도지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파파라치들이 아직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이 정도쯤은 참을 만했다.
샤를로트가 말하길, 이 정도 인기에 파파라치 정도는 세금과도 같은 거라고 하던가?
아이린은 파파라치들을 무시하며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야~ 여기가 노르베르드 타워구나. 엄청나게 크네요! 아이린 씨.”
트리샤도 마치 일행인 것처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앞 보안 철창을 지키고 있던 경비 두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허가된 사람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역시 안 통하네.”
트리샤는 철창과 사내를 흘금 봤다.
철창은 딱 봐도 마법 처리가 된 듯 단단해 보였고, 심지어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만지면 전기가 흐르게 되어 있는지 ‘전기 주의’라는 경고 팻말이 붙어 있었다.
경비도 일반 경비처럼 생겼지만, 트리샤가 봤을 때, 이 두 사내는 일반적인 경비가 아니었다.
모두 4성 기사였다.
지금 계속 트리샤의 뒤통수 따갑게 쳐다보는 비밀 경호원들과 같은 출신인 것 같았다.
만약 트리샤가 허튼짓을 하려는 순간 곧바로 무력 조치가 취해질 것이 분명했다.
트리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방법은 정말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 했는데.’
트리샤는 아이린이라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기로 했다.
“아이린 씨! 혹시 용혈검을 되찾고 싶지 않아요?”
우뚝!
아이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경비들과 숨어서 트리샤를 지켜보고 있는 비밀 경호원들의 눈빛도 살기로 물들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용혈검이요. 용혈자리의 성물을 말하는 거예요.”
아이린이 트리샤에게 다가오려고 하자 경비가 입을 열었다.
“아이린 씨. 저희가 확인해 본 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들어가셔서…….”
“아뇨. 한번 들어볼게요.”
아이린의 표정은 깊은 겨울의 칼바람처럼 차가웠다.
아이린을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경비들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이린은 트리샤를 노려보며 말했다.
“용혈검의 위치를 알고 있나요?”
트리샤는 메메를 쓰다듬으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청승맞은 아주머니와 같은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노련한 장사꾼의 눈빛이었다.
“저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으신데, 전 ‘성물 사냥꾼’이란 이명이 붙은 꽤 유명한 모험가예요. 제가 못 찾는 성물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럼 지금 용혈검의 위치를 모른다는 거군요.”
“하지만 제게 하루만 주신다면 바로 알 수 있어요. 현세에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만약 현세에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지까지 전부요. 만약 티그리스 경을 소개해 주신다면 오늘 내로 용혈검이 현세에 있는지 없는지 알려 드릴게요. 만약 현세에 있다면 그 위치까지 알려 드리고요.”
“어떻게 있는지 없는지 알려주실 수 있다는 거죠?”
“그건 영업 비밀인지라 알려 드리기가 좀 곤란하네요.”
좀 전의 애원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트리샤의 눈빛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마치 ‘네가 이걸 거절할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당장에라도 꺼지라고 말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고 싶었지만…… 용혈검이다.
벨프 가문의 상징이라는 의미보다 아빠가 사용하던 검이라는 의미가 더 큰 검.
용혈검은 아이린이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갖고 싶은 보물이었다.
“그…….”
당장에라도 알겠다고 대답을 하려던 아이린의 입이 순간 굳었다.
‘이러면 안 돼.’
아이린이 트리샤와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하면 티그리스는 분명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아이린은 티그리스에게 수도 없이 많은 은혜를 받았다.
로이와의 결투 때 티그리스가 없었다면 죽는 것은 아이린이었을 것이고, 티그리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벨프 가문이 다시 세워질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하지만 정도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또 티그리스에게 기대려고 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너무나도 화가 났다.
아이린은 트리샤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어? 에?”
아이린이 이 제안을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트리샤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예? 왜요? 용혈검의 위치를 알려 드린다니까요.”
“스승님께 이런 곤란한 부탁을 드릴 수 없으니까요. 용혈검과 관련된 문제는 제 문제이니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가세요.”
“……허.”
트리샤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이린을 쳐다봤다.
분명히 용혈검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했을 때, 심장이라도 뽑아 줄 것처럼 간절한 눈빛을 내비쳤다.
그러나 심정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린의 눈빛이 냉철하게 변하더니 트리샤의 제안을 거절했다.
보통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라고 한다면 새로운 부모와 자식 관계라고 말하며 스승이 일방적으로 자식에게 많은 것을 베푼다.
검술 지식은 물론이고 제자가 올바르게 성장할 때까지 모든 금전적인 지원까지 모두 제공한다.
그러니 티그리스에게 트리샤를 소개해 주는 일쯤은 아이린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용혈검이 중간에 끼니 아이린은 되레 부담을 느껴 버리며 용혈검을 포기해 버렸다.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아닌 것 같네.’
아이린의 성격이 무조건적으로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있긴 하겠지만, 아이린은 티그리스를 스승 그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트리샤는 이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기로 했다.
너무 성급하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접근했다.
아이린의 성격과 유형을 자세히 조사한 뒤에 천천히 공략해 나갔어야 했다.
트리샤는 메메를 역소환했다.
“제가 너무 성급하게 부탁을 드린 것 같네요.”
트리샤는 아이린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혈검이 아이린 씨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검인 줄 알고 있는데, 저도 급한 마음에 말이 막 나와 버렸군요.”
사과하는 자세와 목소리 눈빛은 굉장히 진중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굴해 보이지도 않았다.
“……사과를 받아들이죠.”
“말뿐인 사과는 별 소용은 없겠죠. 대신 아이린 씨가 찾고 있던 용혈검의 위치를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트리샤는 여기서 아이린과의 인연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이린이 자연스럽게 연락할 이유를 주며 티그리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제 환심을 살 생각은 하지 마세요.”
트리샤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린의 성격을 단번에 파악했다.
아이린은 그냥 공짜로 주면 받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면 받아주는 성격이었다.
“에이. 물론 무료는 아니죠. 전 모험가이니 의뢰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린은 살짝 미심쩍긴 했지만, 트리샤가 워낙 정중하게 나오기도 하고, 깔끔한 의뢰 형식으로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말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의뢰금은 얼마나 됩니까?”
트리샤는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원래는 10골드부터 시작하는데…… 에잇 모르겠다! 아이린 씨에겐 특별히 5골드에 해드리죠.”
“…….”
트리샤는 미워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어쩔 땐 무례하게 굴었다가 갑자기 진지해지고 이번엔 입이 가벼운 장사치처럼 변했다.
도대체 뭐가 진짜 트리샤의 성격인지 알 수 없었다.
“저를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건 정말 파격 세일입니다. 원래 세일을 절대 해주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모험가 길드에 돌아가는 순간 의뢰가 이~ 만큼 밀려 있을걸요? 그런데 아이린 씨의 의뢰는 특별히 제일 먼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단돈 3골드면 말이죠!”
트리샤는 말로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아이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입을 열었다.
“……방금 5골드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이린 씨가 워낙 예쁘셔서 2골드는 서비스로 깎아드렸습니다. 어? 잠시만, 방금 또 하나 깎였다. 방금 지으신 멍한 표정이 굉장히 귀여우셔서 특별히 2골드로…….”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아이린과 트리샤는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티그리스였다.
“어?! 어?”
트리샤는 티그리스를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이린 네 손님인가?”
“아뇨. 아녜…….”
“티그리스 경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전 트리샤 우드라고 합니다!”
트리샤는 하늘이 내려주신 이 천금 같은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트리샤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속사포처럼 자기 PR을 시작했다.
“과분하게도 성물 사냥꾼이란 이명을 갖고 있고, 몸매도 꽤 죽여주고 얼굴도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나는 매력적인 여모험가죠! 정말 아주~ 조금만 시간이 되신다면 얘기를 좀 나눠보실 수 있을까요? 물론 덤으로 제가 모험하면서 겪은 재미난 이야기도 해드리겠습니다! 마왕의 시대, 마녀의 시대, 거인의 시대, 용의 시대 할 것 없이 제가 성좌의 시련을 겪으면서…….”
“그만하시죠.”
“넵!”
트리샤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도 시끄러웠다.
티그리스는 트리샤의 손목을 흘금 보고 눈동자를 봤다.
트리샤는 티그리스가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훑자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살짝 가렸다.
트리샤의 손목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티그리스는 트리샤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꿰뚫어 본 것만 같았다.
“따라오십시오. 저도 마침 찾고 있었습니다.”
“……네? 저를요?”
“네.”
티그리스는 트리샤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라칸이 성좌의 시련에 갇혀 있을 때 구해준 수준 높은 모험가이자, 수인 해방 집단 ‘리베르’의 유일한 인간 출신이라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직접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트리샤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무려 5번째 고리를 완성시킨 천재였다.
‘그리고 손목…… 일단 확실한 것은 아니니, 서재에 가서 책을 잠깐 훑어봐야겠군.’
트리샤는 엘리베이터를 타며 말했다.
“그런데 저 평민이라서 반말을 하셔도 되는데요.”
“일단 서재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트리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티그리스를 흘금 보며 자신의 손목을 가렸다.
* * *
트리샤는 거실 소파에 앉아 홍차와 쿠키를 맛보며 잠시 기다렸다.
“티그리스 경께서 서재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아, 네. 그나저나 이 쿠키 정말 맛있네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레니? 레니 씨가 구우신 건가요? 티그리스 경은 정말 축복받았네요. 이렇게 맛있는 쿠키를 구울 줄 아는 사용인을 밑에 두어서.”
레니는 트리샤의 칭찬에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헤헤……. 감사합니다. 나가실 때 조금 싸 드릴게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아이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는 입만 있다면 평생 굶어 죽진 않겠네.’
레니는 곧바로 티그리스의 서재로 안내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니는 공손히 뒤로 물러나 서재 문을 닫고 나갔다.
트리샤는 서재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티그리스의 서재는 작은 도서관을 옮겨놓은 것처럼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책이 엄청나게 많으시네요?”
“최근 취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책 읽는 거 정말 좋죠. 그런데 정말 다양한 책들을 많이 모으셨네요.”
역사서부터 시작해서 잡지, 소설, 철학서 등 장르와 학문을 가리지 않고 꽂혀 있었다.
그런데 트리샤의 눈길을 사로잡는 책장이 있었다.
겉보기에도 깔끔하고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티그리스의 서재에 순서 없이 중구난방으로 꽂혀 있는 책장이 있었다.
심지어 맨 아래 칸은 중간까지만 채워져 있었다.
트리샤는 단번에 저 책장의 의미를 알아챘다.
‘읽은 순서로 꽂아놓은 거다.’
트리샤는 그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한 번 훑고 입을 열었다.
“성좌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최근에 읽으신 것들이 다 성좌들과 관련된 논문이랑 여행기들이네요?”
“관심을 갖게 될 일이 있었습니다.”
트리샤는 티그리스의 눈길을 피해 책장의 책들을 계속 훑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존댓말을 하실 건가요? 편하게 그냥 반말하셔도 됩니다. 전 평민이고 티그리스 경은 귀족이시잖아요.”
“혹시 이 책을 찾고 계신 겁니까?”
트리샤는 티그리스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책을 보자 동공이 살짝 커졌다.
그 책의 제목은 [고디바 사막 부족의 혈통과 역사]였다.
트리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히르페인이라서 그 책을 꺼내신 건가요?”
“단순한 히르페인은 아니시죠.”
티그리스는 책을 펼쳤다.
“이 책엔 고디바 왕족, 정확히 말하자면 하마자르 부족 가문의 특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티그리스는 책에 적혀 있는 부분을 읽었다.
[하마자르 가문의 사람은 검은 머리칼에 구릿빛 피부, 눈동자는 다른 부족들과 다르게 붉지 않고 연한 보랏빛을 띤다.]티그리스는 트리샤의 표정을 흘금 봤다.
능글맞던 표정이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었다.
“……하마자르 가문의 유전적 특질은 눈동자가 보라색인 것을 제외하면 굉장히 흔합니다. 그리고 보랏빛 눈동자는 하마자르 가문만의 특징은 아니죠.”
“맞습니다. 하지만 하마자르 왕족들만이 시술받을 수 있는 특별한 별 문신이 있다고 써 있습니다.”
티그리스는 트리샤의 오른 손목을 봤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손목이지만, 저 손목을 중심으로 기묘한 오러가 샘솟고 있었다.
마치 오러 고리처럼.
“……시치미를 떼 봤자 의미가 없겠군요.”
트리샤는 오른손 검지에 끼어 있는 평범한 은반지를 뺐다.
그러자 오른 손목에 언뜻 보면 패션 문신으로 보이는 작은 별 다섯 개가 드러났다.
저것이 하마자르 왕가의 상징이자 화염용 ‘타이케스’를 사냥한 하마자르 가문의 상징 ‘붉은 축복 별’이었다.
티그리스는 책을 내려놓고 타국의 왕족을 향한 기사의 예를 표했다.
허리는 굽히지 않되 고개만 살짝 숙이고 오른손을 왼 가슴에 손을 올리는 예법이었다.
“붉은 사막의 일족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트리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