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70)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70화
생일 파티(1)
티그리스는 새벽을 가장 좋아한다.
아침 새는 잠들어 있고 밤새들은 이제 잠에 들기 시작하는 그 짧은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요한 명상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검을 뽑아 들고 중단세를 취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새벽이슬에 티그리스의 옷과 머리가 젖어 들듯, 티그리스는 자신의 내면에 젖어 들었다.
향기로운 풀잎 향기가 사라지고 탁한 먼지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인 전장의 냄새가 티그리스의 코끝을 간질였다.
최후의 전쟁.
그 지옥 같던 마지막 전쟁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상하좌우 어디를 봐도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붉은색 살덩이들이 가득한 언덕 한가운데에 티그리스는 홀로 서 있었다.
그날처럼 티그리스의 배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배에서 나온 피는 하반신을 붉게 물들였고 숨은 가빠왔다.
끔찍한 고통에 힘이 빠져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고, 당장에라도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티그리스에겐 무릎을 꿇고 쉴 자격이 없었다.
티그리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 칠갑이 된 얼굴이 보였다.
레인로버, 샤를로트, 아이린, 베오울프, 베르강, 바스티얀, 리니아, 고든, 호른, 로건, 네메시스, 말레우스, 레니, 톰…….
그들의 눈엔 생기가 없었지만, 모두 티그리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티그리스는 감히 그들의 눈을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해 하늘을 봤다.
하늘은 우중충한 탁한 잿빛으로 가득했다.
하늘엔 붉은 비가 내렸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며 무거워졌다.
티그리스는 이 무거움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 죄책감과 가슴을 짓누르는 이 무거움이 티그리스의 들끓어 오르는 욕망을 억제하는 구속구였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지금 당장에라도 길리온 왕국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곳엔 매튜 왕자와 제임스 국왕이 있다.
놈들은 로타와 아르펨의 꼭두각시가 되어 밀림을 황폐화시키고 황국에게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당장 멸지로 달려가고 싶었다.
멸지엔 현재 로타가 잠들어 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에라도 멸지 곳곳을 누비며 잠든 로타를 찾아내 목을 베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티그리스는 고디바 사막을 가고 싶었다.
고디바 사막엔 로타의 손과 발이 미궁과 유적 그리고 던전을 파헤쳐 기괴한 키메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핏물로 만들어 낸 족쇄를 잠가 스스로를 속박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놈들은 지금 티그리스의 수준으로 죽이기 까다롭다는 것도 있었고.
만약에 죽이더라도 놈들의 경계심을 높여 불필요한 희생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며.
아직 우노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티그리스의 성질머리대로 움직이면 얻는 이득보다 손해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다시 용기를 내 끔찍한 참상을 눈에 담았다.
이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전장을 현실에서 보지 않기 위해.
* * *
짹- 짹-
아침 새가 우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티그리스는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티그리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검을 휘두를까 고민했지만, 티그리스는 검을 거뒀다.
티그리스는 검을 사용하는 것보다 사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티그리스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티그리스 님 여기 수건 있습니다.”
티그리스는 레니가 건넨 수건을 받아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고맙다. 리니아는 일어났나?”
“네. 트리샤까지 모두 일어났습니다.”
티그리스는 빅토리에의 아침이 너무 밝다는 걸 깨달았다.
몇 시간이나 서서 명상을 한 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지금 몇 시지?”
“오전 8시 5분입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되었나?”
“예.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홀로 명상을 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것 같았다.
티그리스는 레니에게 땀에 젖은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그럼 바로 식사해야겠군.”
“준비하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신발을 털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거실로 들어왔다.
멈칫.
티그리스는 욕실로 향하려다가 트리샤를 포함한 네 사람의 옷차림을 보고 멈췄다.
네 명은 위아래로 모두 같은 연노란색 계열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트리샤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티그리스 님!”
“……옷을 맞춘 건가?”
트리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때요? 디자인하고 색깔 모두 꽤 괜찮죠?”
트리샤는 소파에서 일어나 한 바퀴 돌았다.
연노란색에 맞게 등엔 병아리 모양 자수가 큼직하게 놓여 있었다.
그 모습 정말 부끄러웠는지 리니아는 얼굴이 펑!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보아하니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싫지만은 않은 그런 애매한 경계선에 놓인 것 같았다.
“……잘 모르겠군.”
“병아리 같고 귀엽지 않아요? 아, 티그리스 님 것도 샀으니까 씻고 갈아입으세요.”
티그리스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내 옷도 샀다고?”
“저희만 입으면 티그리스 님이 외로워하실 것 같아서요. 아, 레니랑 카렌은 평소에 트레이닝복을 입을 수 없으니까 같은 브랜드의 앞치마를 샀어요.”
티그리스는 레니의 앞치마를 봤다.
평범한 검은색 앞치마인 줄 알았는데 앞치마 끝단에 작게 연노란색 병아리 자수가 그려져 있었다.
레니는 티그리스의 눈치를 보며 뺨을 긁적였다.
당장 벗으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듯했다.
“선물이니까 꼭 입으셔야 해요.”
트리샤는 굉장히 기대하는 눈치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티그리스는 그런 트리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환불해라.”
“너무해애애!”
* * *
티그리스는 평범한 하얀색 면티를 입은 채 아침 식사를 했다.
트리샤도 티그리스가 입을 리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불만은 없었다.
그냥 혹시나 입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사 온 거지 딱히 큰 의미는 없었다.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이 호밀 빵 누가 한 거예요? 설마 레니 씨?”
레니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아, 그 딸기잼은 카렌이 한 거예요.”
“우와~ 왠지 딸기잼 맛도 좀 다르더라니. 이 호밀빵하고 찰떡궁합이네요.”
“감사합니다. 많이 드세요.”
겨우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 펜트하우스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굉장히 생동감 있게 변했다랄까?
트리샤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덕분에 샤를로트와 아이린 그리고 리니아의 표정도 굉장히 밝았다.
‘떨쳐낸 모양이군.’
어제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죽은 경호원들 때문에 착 가라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세 명 모두 썩 나쁘지 않았다.
장례식도 길어봤자 일주일이다.
그사이에 마음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미래를 살아나가야 한다.
특히 이 세 사람은 앞으로 황국을 이끌어갈 주역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빨리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 필요성이 있었다.
‘트리샤가 큰 역할을 한 모양이군.’
아무래도 트리샤를 기사로 받아들인 것은 티그리스 개인적으로나 이 세 사람에게 있어서나 굉장히 잘한 선택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차가 나오자 티그리스는 입을 열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일정이 있는 사람이 있나?”
트리샤를 포함한 네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히 없는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다음 주 수요일은 레인로버 황녀님의 생일 파티가 있는 날이다. 레인로버 황녀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지.”
“생일 파티요? 혹시 저희도 초대받은 건가요?”
“그렇다. 샤를로트, 리니아 그리고 아이린 너희는 아직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으니 일반 드레스를 입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트리샤.”
티그리스의 진지한 눈빛에 트리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말씀하세요.”
“기사 서임은 이번 주 토요일에 약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너는 검은 늑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늑대검은 받지 않을 것이고 내가 수여하는 검을 받게 될 것이다. 이해했나?”
“아. 예 알겠습니다.”
“기사 정복은 내가 따로 준비해 줄 테니 그것을 입고 파티에 참석하도록 해라. 그리고 이번 주 금요일까지 황궁 예법을 익힐 수 있도록.”
트리샤는 눈을 크게 떴다.
“네?! 황궁 예법을요?”
“황궁 예법은 제인이 자세히 알려줄 것이다.”
“아니, 그 복잡한 예법을 일주일 만에 익히라고 하시는 건 조금 무리가 아닐까 싶은데요.”
“못 익히면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 넌 이제 모험가가 아닌 기사니까.”
트리샤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번 파티는 트리샤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황녀의 생일 파티는 황국 각 지역에서 고위 귀족들이 몰려온다.
그들이 떠드는 정보는 당연히 일반 평민에게서 얻을 수 없는 고급 정보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리베르’에게 있어서 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단 한번 해볼게요.”
“그럼 참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다. 그리고 네 검이 고쳐지려면 한 달 정도 남았다고?”
“아, 예. 맞아요.”
“혹시 그 검 없이 전에 말했던 애통의 반지를 얻는 것은 무리인가?”
“음……. 깨는 것은 가능하긴 한데 그 검들 없이 외부로 나가는 건 조금 위험할 것 같아요.”
애통의 반지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의 난이도는 중에서 중상 수준으로 트리샤에겐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애통의 반지의 위치가 길리온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뱀이 지나간 절벽인 만큼, 길리온 왕국에서 트리샤가 접경 지역 근처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암살자가 아니라 기사단이나 마법사 또는 특수부대를 보낼 수 있었다.
티그리스는 탁자를 검지로 톡톡 쳤다.
“일정이 조금 아슬아슬하군.”
“그래도 전에 말씀드렸던 8월 중순까진 무조건 가능해요.”
“그럼 검이 고쳐지는 대로 바로 출발하는 것으로 하지. 그러나 일정이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명심해라.”
“예. 알겠습니다.”
트리샤는 땅딸보 아저씨를 빨리 닦달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서임식이 끝나는 대로 붉은 마나초를 줄 테니 고리를 하나 더 만들 수 있도록.”
“붉은 마나초가 있으시다고요? 어떻게요?!”
“전에 황제 폐하께 받은 게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컨디션 관리를 잘해두도록.”
“세상에…….”
놀란 건 트리샤뿐만이 아니라 샤를로트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트리샤가 6성 기사가 된다면 샤를로트의 아버지인 로건과 동급의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가 진짜 붉은 마나초를 받아도 될까요? 저를 만난 지 며칠 되셨다고 이렇게 믿어주셔도 되는 건지…….”
“그래서 받기 싫나?”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군말 없이 받도록. 앞으로 넌 갈 길이 멀었다.”
트리샤는 6성 기사에서 끝날 인재가 아니었다.
그걸 뛰어넘어 소드 마스터도 되어야만 했다.
트리샤에겐 6성 기사가 되는 것보다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현재 소드 마스터가 되기 위한 ‘영감’을 얻지 못해 6성 기사에 10년간 머물고 있는 로건과 베오울프만 봐도 알 수 있다.
영감은 순수한 재능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실 티그리스가 트리샤의 영감을 일깨워 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메마른 나뭇가지에 꽃을 피우는 격이었다.
그러나 트리샤는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꽃까진 아니더라도 ‘꽃봉오리’까진 올라온 상황이었다.
티그리스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트리샤가 영감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계속 자극시켜 주는 일뿐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하루라도 빨리 추가된 고리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트리샤는 감동한 눈빛으로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그 연노란색 트레이닝복 환불하고 올게요.”
“…….”
* * *
일주일 후.
봄의 궁전은 밤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쳤다.
레인로버 황녀의 생일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봄의 궁전 내에 있는 연회장이 우아한 현악으로 울려 퍼지고, 각계각층의 수반들과 그 자제들이 모여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이 파티의 주인공인 황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바로 연회장 중앙에 서서 다가오는 손님들의 인사와 함께 선물을 받고 있었다.
“황녀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켈란 자작님.”
“날이 갈수록 더더욱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마리아는 보이지 않는군요? 마리아가 얼마나 컸는지 보고 싶었는데.”
“아……. 아하하. 마리아는 배탈이 나서 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아프면 쉬는 게 당연한 걸요.”
레인로버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속은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미켈란 자작.
길리온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미켈란 가문의 가주로 길리온 왕국이 황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자 제일 먼저 성문을 개방한 배신자였다.
제 딴에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지만, 만약 그런 사람이었다면 백성들에게 엉성한 창 하나만 쥐여주고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미켈란 자작의 딸 마리아가 오지 못한 이유는 배가 아파서가 아닌 사돈 관계를 맺은 길리온 왕국의 비스타 백작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제가 황녀님을 너무 오랫동안 붙들었군요.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네. 부디 파티를 즐겨주십시오.”
미켈란 자작은 레인로버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레인로버는 미켈란이 보이지 않자 손수건으로 손등을 닦아냈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황녀에게 다가오는 귀족들을 보았다.
티그리스의 인명록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황국을 배신하고 로타와 아르펨의 권속들에게 들러붙은 거머리 같은 자들이었다.
레인로버는 황국에 배신자들이 이렇게 많은 줄 꿈에도 몰랐다.
저들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가문의 존속을 위해라고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 모두 자기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배반한 배신자일 뿐이었다.
레인로버는 저 미래의 배신자들을 향해 웃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숨이 막혔다.
‘그냥 다 집어치우고 싶다.’
가장 행복해야 할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불행해야 한다니 이게 얼마나 큰 아이러니인가?
정말 단 한순간만이라도 좋으니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 꽉 끼는 드레스도 찢어버리고.
그때, 한 무리가 연회장에 들어왔다.
티그리스와 샤를로트, 아이린, 리니아 그리고 트리샤였다.
-세상에…… 티그리스 경이다.
-티그리스 경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원래 이런 파티에 절대 참석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티그리스는 황녀에게 곧바로 직진했다.
수없이 많은 귀족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티그리스와 눈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길을 터주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 생긴 길을 당당하게 걸어 황녀 앞에 고개를 숙여 연회장에 맞는 예를 표했다.
“티그리스 디 노르베르드,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뒤따라서 리니아, 샤를로트, 아이린, 트리샤도 격식에 맞는 예를 표했다.
레인로버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고충을 완벽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도 안심이 되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티그리스 경.”
“아닙니다. 황녀 전하.”
황녀와 티그리스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티그리스는 황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이 연회장은 현 황국의 축소판이었다.
황국을 끝까지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 황국을 이미 배신한 사람들 그리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황국을 배신할 사람들까지 뒤섞여 서로 술을 마시고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이 아이러니함에 구토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황녀 전하 죄송하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 5분만 제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창 손님들이 들어오는 와중에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레인로버의 표정은 아슬아슬해 보였다.
티그리스는 황녀 뒤에 있는 시종장을 말없이 쳐다봤다.
시종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네. 5분이라면…….”
* * *
티그리스는 황녀를 에스코트하며 연회장에 따로 마련된 응접실로 향했다.
시종장도 따라 들어오려고 하자 티그리스는 문 앞을 가로막았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니 시종장은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도의 영웅의 말이다 보니 시종장은 어쩔 수 없이 문 앞에 대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응접실 문이 닫히고 레인로버와 단둘이 남게 되자 레인로버는 긴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 특유의 만들어진 미소도 싹 지우고 자세도 흐트러졌다.
황녀는 정말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만들어진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짓는 미소였다.
“고마워요. 티그리스 경. 진짜 숨 막혀 죽을 뻔했거든요.”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따라 티그리스 경이 정말 존경스럽더라고요. 어떻게 저 사람들의 가식적인 얼굴을 보고도 참아왔는지……. 아직도 속이 메슥거려요.”
티그리스는 응접실에 비치된 생수를 황녀에게 따라주었다.
“그나저나 오늘 극단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전에 약속했잖아요. 같이 연극을 보자고요. 제 바로 옆 좌석을 맡아뒀으니까 바로 옆에 앉으셔야 해요.”
“…….”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말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티그리스 경.”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왜 그래요 불안하게.”
티그리스는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 연극에 라칸이 나올 겁니다. 그러니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에?! 갑자기 라칸이 왜 나와요? 혹시 인퀴지터의 임무라든가…….”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티그리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말했다.
“라칸의 퀘스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