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74)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74화
생일 파티(5)
바스티얀은 트리샤에게 간단히 내용을 전달받고 복도로 나왔다.
바스티얀이 사일런스 마법을 주변에 걸자 트리샤는 쪽지를 건넸다.
“이게 그 마법진입니다.”
반쪽짜리 마법진이었지만 분석에 걸린 시간은 30초도 되지 않았다.
“이건 수증기 폭발 마법이네.”
“수증기 폭발이요?”
“액체 상태의 물을 강제로 수증기 상태로 만들어 폭발시키는 마법이지. 이 마법은 윤리 문제로 인해 황국에서 사용이 금지된 마법이기도 하지.”
트리샤는 마법에 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테러와 연관을 지으니 이 마법이 어떻게 사용될지 단번에 알아챘다.
“설마 사람의 몸에 있는 수분을 강제로 폭발시키려는 겁니까?”
“인체의 피를 강제로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은 고난이도 마법일세. 하지만 이 마법진을 분석해 보니 인간의 혈액을 이용한 수증기 폭발 마법인 게 확실하군.”
“세상에…… 그럼 폭발 강도는 어떻게 되나요?”
“인체 내부에 포함된 수분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 성인 남성이 폭발하면 반경 3m는 즉사, 10m까진 3도 화상을 비롯해 심각한 상해를 입을 걸세. 폭발한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바스티얀은 냉철한 눈빛으로 마법진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원거리 폭발을 위한 통신 마법과 디스펠을 방해하는 보안 술식에 알고리즘 마법, 마력 감지를 방해하는 술식까지 긴밀하게 엮여 있군. 마치 세공품처럼 세밀하게 변형을 거친 것이라 웬만한 마법사는 사용도 못 하겠어.”
정리하자면 이 마법진에 담겨 있는 정보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마법의 종류는 인간의 혈액을 끓어오르게 만들어 폭발시키는 수증기 폭발 마법이다.
둘째, 통신 마법과 알고리즘 마법이 있어서 마법을 발동시키는 순간 범인이 지정한 사람들의 몸이 폭발한다.
셋째, 얼마나 많은 살아 있는 인체 폭탄이 이 주변에 있을지 모른다.
“그럼 이 마법진과 연동된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알고리즘의 주소가 절반 이상 잘려 나가 있어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네. 만약 찾아내더라도 일주일 이상 걸릴 것 같군.”
“그럼 디스펠은…….”
“마법진 전체를 봤으면 모를까 이렇게 반쪽짜리론 불가능하네. 특히 보안 술식이 걸려 있는 것이라서 더욱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
바스티얀은 쪽지를 팔랑이며 말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이 보안 알고리즘이 특정 ‘물약’과 반응한다는 것을 찾아냈다는 점이네. 무색무취의 물약이거나 맛이 진한 음료수에 타서 먹였을 가능성이 높겠지.”
“그럼 오늘 파티에 사용된 음료수에…….”
바스티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네. 이번 연회에선 음료수에 이상이 없는지 30분마다 면밀하게 체크를 하네. 만약 특정 통신 마법과 반응하는 물약이 들어 있다면 곧바로 알아챘겠지.”
“그럼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물약이 든 음료수를 마셨다는 건데…….”
“그럼 하나밖에 없지. 연극단원들.”
트리샤는 등골이 오싹했다.
“나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과 황족들은 안전한 음료수를 마시지만, 저들은 다소 허술할걸세.”
“잠시만, 그러면 라칸이……!”
“흥분할 필요는 없네. 일단 물약이 섞인 음료수만 찾아내면 해결할 방법은 있네.”
바스티얀은 회중시계를 꺼내 봤다.
연극이 종료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어서 물약이 든 음료수를 가져오게. 난 그동안 파훼할 마법을 구상하고 있겠네.”
“네. 알겠습니다.”
* * *
트리샤는 일단 이 내용을 티그리스에게 보고했다.
때마침 아이린이 라칸과 연결된 통신 수정구를 갖고 왔다.
티그리스는 통신 수정구를 건드려 라칸을 호출했다.
-라칸입니다.
“지금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있지?”
-30분 정도입니다.
“지금 트리샤를 보낼 테니 너와 단원들이 공통적으로 마신 물이나 음료수를 넘겨라.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오늘 단원들에게 제공된 음료를 마신 적이 있나?”
라칸은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라칸의 대답에 레인로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말은 라칸의 목숨도 이미 범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말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빠르게 음료를 가져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낸 사실이 있습니다.
“뭐지?”
-테러범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이름은 마티아, 룩스 교단의 사제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문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베르강은 재빨리 황금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티아 사제가 누구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는지 파악하고, 지금 이곳에 있다면 구속할 준비를 해라. 공범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라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마티아 사제가 가져온 물이나 음료가 있다면 그것을 중점적으로 가져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만 통신을 끊겠다.”
용의자의 이름과 신분 그리고 테러 방식까지 모두 알아냈다.
이제 놈을 조용히 포획하는 일만 남았다.
녀석이 왜 테러를 저지르려고 하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하니까.
티그리스는 샤를로트와 아이린 그리고 리니아에게 말했다.
“세 사람은 고생이 많았다. 세 사람은 자리로 돌아가 대기해 줄 수 있겠나?”
더 이상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고맙다.”
세 사람은 관람석 문을 닫고 나갔고, 레인로버와 티그리스만이 남았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표정을 봤다.
평소의 감정이 없는 무뚝뚝한 표정이 아닌 심각한 표정으로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대 뒤편을 보고 있었다.
“라칸이 걱정되시나요?”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일 것 같습니다.”
만약 마티아 그놈이 당장에 수증기 폭발 마법을 사용하면 티그리스가 손쓸 새도 없이 라칸은 죽게 될 것이다.
티그리스는 자신의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를 봤다.
“……이 성물도 만능은 아니군요.”
이 성물의 한계를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약 라칸이 테러의 징후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라칸의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티그리스는 고민했다.
당장에라도 무대 뒤로 달려가서 마티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죽여 버리면 되지 않을까?
만약 라칸이 알아채지 못한 공범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마티아를 잡아도 라칸과 연극 단원들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마티아가 눈치를 채고 자폭을 해버린다면?
바스티얀이 디스펠에 실패한다면?
만약 공범이 튀어나와 다른 식으로 테러를 저지른다면?
그때, 레인로버의 손이 티그리스의 손을 덮었다.
“티그리스 경. 괜찮을 거예요. 바스티얀 님이라면 답을 찾아내실 테니까요. 그리고 나달도 곧 이곳으로 온다고 하고요.”
7서클 대마법사도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티그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라칸과 공조하여 테러범의 신상을 밝혀내고 어떻게 테러를 저지를 것인지까지 모두 알아냈다.
이제 남은 것은 바스티얀과 베르강 그리고 나달이 해주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테러가 일어나 라칸도 잃고 수백 명이 죽고 다친다면, 할 일을 다 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까?
‘아니.’
티그리스는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티그리스가 이 관람석에서 사라지면 놈은 이상하게 여기고 자폭할 수도 있었다.
티그리스가 또다시 깊은 시름에 빠지기 시작하자 레인로버는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티그리스 경.”
“예. 레인로버 전하.”
“저희가 티그리스 경을 믿듯이 티그리스 경도 저희를 믿어주세요.”
레인로버는 티그리스가 적은 인명록을 무려 10번이나 정독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레인로버는 그 누구보다 티그리스를 잘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가 레인로버를 ‘황도 빅토리에와 맞바꿀 수 없는 대장군’이라 묘사했듯 티그리스 자신을 묘사한 한 문장이 있었다.
[아군을 믿지 못하는 오만한 검사.]티그리스가 저지른 대부분의 실수와 실패는 아군을 믿지 못한 것부터 비롯되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문제가 터졌을 땐, 티그리스가 독선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티그리스가 또 실수를 저지를 조짐을 보이자 레인로버는 강하게 티그리스의 손을 붙잡았다.
“티그리스 경이 불안해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티그리스 경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잘 믿지 않기 때문이죠. 특히 지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말이죠.”
티그리스는 레인로버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티그리스는 회귀한 날로부터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사람이 180도로 한 번에 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필로 깊게 눌러쓴 글씨를 지우개로 아무리 지워도 흔적이 남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남을 잘 믿지 못하는 티그리스의 성격은 부스러기처럼 남아 있었다.
“무려 7서클의 대마법사 둘과 소드 마스터 하나가 직접 움직이고 있어요. 그 세 사람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는데 설마 이 문제를 해결 못 하겠어요?”
“물론 라칸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 때문이란 걸 알아요. 티그리스 경에게 라칸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를 조금 더 믿어주세요. 이 일은 저희가 해결할 수 있어요.”
레인로버의 말에 티그리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최후의 전장을 떠올렸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티그리스의 코끝을 간질이자 몸과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티그리스는 눈을 떴다.
“레인로버 황녀님이 판단하셨을 때, 제가 직접 움직이면 방해가 될 것 같습니까?”
“지금 티그리스 경까지 움직이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정말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을 때, 티그리스 경이 나서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받이에 허리를 붙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티그리스 경. 저희를 믿어줘서.”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 손을 좀…….”
“아!”
레인로버는 자신도 모르게 티그리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손을 뗐다.
레인로버는 얼굴이 붉어지며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티그리스 경이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진정됐습니다.”
티그리스는 막바지로 치닫는 연극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인로버는 티그리스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네. 언제든지요.”
* * *
라칸은 속이 메스꺼워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라칸은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토해냈다.
—-!
신물만 나올 때까지 모두 토해낸 라칸은 변기 물을 내렸다.
티그리스와 트리샤가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저 물과 음료수와 이번 테러와 연관이 있다는 걸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라칸도 사실 많이 참았다.
마티아의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 계속 괜찮은 척 연기하는 것은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라칸의 목숨이 마티아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인내심의 한계점을 넘겼다.
“후…….”
모든 것을 다 쏟아낸 라칸은 입을 헹구고 거울을 봤다.
바바리안 분장 때문에 가려져서 낯빛이 어떤지 볼 수 없었지만 굉장히 지친 사내가 라칸을 보고 있었다.
‘나 죽는 걸까?’
만약 티그리스가 마티아를 막지 못한다면, 라칸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티그리스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목숨이 남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아냐. 김유신. 마음 약해지지 마.’
여기서 라칸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태연하게 평소의 라칸처럼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장렬하게 페르셴에게 죽는 것이었고.
이제 20분만 버티면 끝이었다.
“바바리안들 모두 나와!”
라칸은 화장실까지 울려 퍼지는 무대 감독의 호출에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웃통을 벗고 무대 감독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옆으로 마티아가 다가왔다.
“좀 전에도 그렇고 자리를 자주 비우더군. 무대를 보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어디에 갔다가 온 거지?”
라칸은 마음을 다잡고 ‘하급 연기’를 사용했다.
“그냥 화장실에 좀 갔다가 왔어.”
“화장실은 왜 간 거지?”
“그런 건 왜 궁금한 건데?”
“그냥 어딜 그렇게 쏘다니나 해서.”
라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지막이 되니까 조금 긴장한 것 같아서.”
“네가 긴장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 겉보기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나도 첫 무대니까. 긴장될 만하지.”
“흐음……. 다 마시거나 반쯤 남은 음료수 병을 치운 것도 긴장을 풀기 위해서 그런 건가?”
마티아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음료수 병을 트리샤에게 넘겨준 것이 문제가 된 걸까?
최대한 들키지 않게 건네줬는데, 마티아는 자신이 조작한 음료수 병이 사라지자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뭐 그런 셈이지.”
마티아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대기실 구석 테이블에 놓인 반쯤 남은 음료수 병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나? 내가 마시던 거라서 좀 찾고 싶은데?”
“……다 치웠는데?”
“어디로?”
“나도 몰라. 그냥 스태프한테 넘겼어.”
사실 음료수 병이 든 박스를 통째로 트리샤에게 넘겼다.
설마 녀석이 그걸 본 걸까?
라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흐음…….”
녀석의 불편한 신음 소리에 라칸의 털들이 쭈뼛 섰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룩스 여신을 믿나?”
“……그런 건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거지?”
“그냥 갑자기 나도 네가 궁금해져서.”
“……잘 모르겠어.”
“그래? 아쉽군. 잘하면 우리가 같은 곳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
라칸은 얼어붙었다.
“무슨…… 소리야?”
“이거 참, 나도 비스코처럼 긴장하면 말이 좀 많아지는 스타일인 모양이군. 토미에게 들어보니 비스코도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스타일이라고 하면서? 안 그런가? 토미?”
토미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마티아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닐세. 이제 곧 우리 차례로군. 이제 장렬하게 죽는 일만 남았나? 그럼 모든 게 끝이로군.”
라칸은 머리가 멍해졌다.
라칸이 트리샤에게 물병을 건네준 건 약 40분 전이다.
과연 티그리스는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다시 구토가 나오려 했다.
그때, 무대를 엿보던 무대 감독이 말했다.
“바바리안들 출발해라.”
마티아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하나? 라칸? 무대감독님이 지시를 내리지 않았나?”
쿵- 쿵- 쿵- 쿵- 쿵-
라칸의 심장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렸다.
라칸은 자신도 모르게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티아가 라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누구인지 알아챈 모양이군. 언제부터 알았지?”
“…….”
“하긴 대답할 리가 없지. 원래 연극이 끝나면 진행하려 했는데, 역시 지금 시작해야겠군. 이제와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말일세.”
마티아와 라칸은 계단을 올랐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의 신음 소리가 너무나도 소름이 끼쳤다.
“이보게. 방금 전의 그 태연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역시 죽음 앞에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룩스 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군.”
라칸은 마티아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마티아가 마음만 먹으면 라칸은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마티아는 겁먹은 라칸의 표정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우리 내기를 하지. 자네를 돕는 사람들이 내 마법을 완전히 파훼했을지. 아니면 못 했을지. 오직 여신님만이 알고 계시겠군.”
마티아는 무대와 무대 뒤를 가리는 천막을 향해 나가면서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차근히 이 사태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사실 내가 이런 큰 죄를 짓는 이유는 자네나 나의 문제가 아닌 길리온 왕국과 룩스 교단의 의사소통의 부재 때문이었네.”
“우리 룩스 교단은 매튜 왕자가 그렇게 화가 났을 줄은 전혀 알지 못했네. 자금을 대주던 케일 자작이 잡힌 게 화가 났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티그리스를 건드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거든.”
“‘그분’이 황국의 시선을 기껏 흑토 지대에 고정시켜두었는데, 엄한 벌집을 건드려 토드 황제와 티그리스가 길리온 왕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 미리 룩스 교단 측이 매튜 왕자의 심경 변화를 알아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밝은 무대 조명이 라칸의 얼굴에 드리웠다.
라칸은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 앞으로 나가면 라칸은 죽을 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나처럼 신실하고 선량한 룩스 교인들은 언제나 큰일을 위해 순교를 해왔으니까. 길리온 왕국과 룩스 교인들이 안전해질 수 있다면 난 백번이고 죽을 수 있다네.”
마티아는 라칸의 목을 감싸며 무대 한가운데로 향했다.
뱀이 목을 휘감은 것처럼 끔찍해 몸이 굳었다.
무대 위 배우들은 물론이고 관객들까지 모두 희한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마티아는 라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기도하고 싶은 내용이 있나? 내가 임종 기도를 해 주지. 사실 축사 기도가 내 전문이 아니라 임종 기도가 내 전문이거든.”
라칸은 고개를 들어 티그리스를 쳐다봤다.
티그리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라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칸은 희망을 발견했다.
“……죽으려면 혼자 뒤져라.”
“역시 이단의 길을 선택했군. 그래도 고맙네. 자네 덕분에 제법 마음이 가벼워졌어. 이것도 룩스 여신님의 축복이 아닌가 싶군.”
마티아는 라칸을 옆으로 밀었다.
“이제 내기의 끝을 봐야겠군. 자네는 자네 동료들을 믿나?”
그리고 마치 이 무대의 주인공인 것처럼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마티아는 왼 손바닥을 펼쳐 마력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왼 손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마티아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흑토 지대를 언급함과 동시에 이 무대 위에 올라선 모든 사람들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마티아는 황제를 쳐다보며 말했다.
“흑토…… 컥!”
마티아는 갑자기 몸이 앞으로 밀쳐지더니 무대 밖으로 튕겨 나갔다.
마티아가 고개를 돌려 무대 위를 돌아보니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나달이었다.
라칸은 마티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했지?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마티아는 경악했다.
“어떻게?!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나달은 서늘한 눈빛으로 마티아를 내려다봤다.
“자네는 황국의 힘을 너무 무시하는 군.”
마티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런 젠……!”
마티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달이 텔레포트 마법을 마티아에게 시전한 것이었다.
콰릉!
그리고 먼 곳에서 커다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