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76)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76화
경호(1)
나달은 중절모를 벗으며 말했다.
“베르강 경이 제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시다니 의외로군요.”
원래 베르강은 나달을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나달이 인간이 아닌 호문쿨루스라서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황제가 내린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요원들의 생명이나 민간인의 생명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가장 쉽고 빠른 길을 선택한다.
한 번은 나달과 공조하여 임무를 수행했다가 아끼는 기사 둘을 허무하게 잃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웬만하면 나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귀록에 따르면 나달은 자기 목숨을 버려가며 레인로버 황녀를 구해냈다.
적어도 황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애국자라는 것이다.
“······이번 일은 내가 아닌 네 쪽이 전문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프란치스코는 황국의 백성들을 선동하고 내분을 일으켜 황국을 썩고 병들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을 품은 노인이다.
베르강은 티그리스처럼 누군가를 베고 죽이는 일에 특화되어 있지, 프란치스코와 같은 늙은 선동가를 상대하는 일은 전문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교구장과 루체트 성전 그리고 주변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모두 조사를 해봤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네. 이렇게 깨끗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
“너무 깨끗해서 의심이 간다 이 말씀이십니까?”
“그런 셈이지. 저 독사 같은 노인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쉽지 않군.”
나달은 의외라는 듯이 베르강을 쳐다봤다.
“프란치스코 교구장을 그렇게 보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베르강 경은 신실한 룩스교 신자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제 일을 겪었는데 인식이 변할 만도 하지.”
나달은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것 같습니다.”
룩스교의 사제라는 사람이 흑토 지대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자살 테러를 진행하다니.
자살 테러를 하라고 지시를 한 사람이나, 자살 테러를 치밀하게 계획하여 진행한 사람이나 모두 미친 것이 틀림이 없었다.
“자네답지 않게 잡담이 늘었군.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는가?”
“예. 있습니다.”
베르강은 나달이 건네준 서류 봉투를 받았다.
“이거면 프란치스코 교구장을 압박하실 수 있을 겁니다.”
베르강이 서류를 꺼내려 하자 나달이 제지했다.
“아, 잠시만. 이건 모두 1급 기밀입니다.”
1급 기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베르강이나 나달, 재상과 같은 최상위권 관료직들을 제외하면 열람이 불가능했다.
베르강은 주변을 훑었다.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 병단 그리고 법무부 관계자들이 있었다.
“잠시 모두 자리를 비켜주겠나?”
그 말에 황금 기사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참관실 밖으로 나갔다.
베르강은 두꺼운 서류 봉투를 열어 문서를 읽었다.
그 안엔 하나하나가 파란을 일으킬 만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루체트 성전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업타운의 룸살롱에 들어가는 사진, 그 안에서 음주 가무를 즐기는 사진, 술에 취해 여자와 함께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까지 모두 찍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얻은 거지?”
“원래 인퀴지터 내부 정보로만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몇몇 고위 관리들만 해도 룩스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이 정보가 넘어갈 우려가 있었습니다.”
“룩스교와 친밀한 관계라는 게 무슨 의미지?”
“세금 이야기입니다.”
루체트 성전의 산하에 있는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은 루체트 황국에서 인정한 몇 안 되는 ‘공공보건재단’이다.
일반 백성들에게 보건 상식을 알려주거나 전염병이 창궐한 곳에 사제와 자원봉사자를 파견하는 등 각종 자원봉사를 지원하고 있었다.
당연히 황국의 세금과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고위 귀족들이나 부호들이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에 기부를 하면 일정 부분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의 회계장부를 일일이 뜯어보진 못했지만, 케일 자작을 비롯한 각종 고위 귀족들의 장부를 확인해 보니 굉장히 재밌는 정보가 나오더군요.”
예를 들어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에 금화 100개를 기부했다고 하면,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은 150개를 기부했다고 명세서를 떼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황국의 국세청에 보고할 때 금화 150개를 기부했으니, 금화 150개 분량만큼의 세금 혜택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뭐 이런 쓰레기 같은······.”
“기부는 돈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의료용품이나 사무용품 등도 받죠. 예를 들어 하나당 1실버짜리 만년필을 10실버로 가격을 책정하고 기부를 받는 것이죠.”
“그럼 그만큼 세금 감면이 되는 것인가?”
“예. 맞습니다. 보니까 이런 식으로 세금을 떼어먹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나?”
“네. 최근에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재상을 직접 불러 이 사안을 해결하라고 지시하셨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종교와 정치가 한 번에 걸려 있다 보니 이 일을 맡길 칼잡이를 쉽게 구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인퀴지터가 조사해 본 결과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 귀족들보다 연루되어 있는 귀족들이 훨씬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빅토리에 사회복지 재단에 회계장부를 내놓으라고 말할 간덩이가 큰 세금 징수관은 없다.
잘못하다간 출근길에 칼 맞고 비명횡사할 수 있었으니까.
“정말 상상 이상으로 썩었군.”
“원래 탈세는 세금의 탄생부터 있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베르강은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내가 건드릴 수 없다. 세금 관련해선 내가 많은 것을 알지 못하니까. 다른 것은 없나?”
“제법 나쁘지 않은 게 한 가지 더 있죠.”
몇몇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과거 기록이 적혀 있었다.
성기사들 중 살인을 한 사이코패스나 전쟁 범죄를 일으킨 용병 출신들도 있었고, 사제들 중에선 사기꾼도 있었다.
역시나 베르강이 예상했던 대로 이들은 사제와 성기사로 신분을 세탁한 놈들이었다.
게다가 모두 길리온 왕국 출신 범죄자들이라 황국의 내부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베르강은 페이지를 계속 넘길수록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녀석들을 어떻게 철저하게 관리하는 거지?”
길리온 왕국에서 살인과 강간, 방화를 저질렀던 놈들이 황국에선 음주 가무만 즐기고 여자를 사서 성욕을 해결한다?
한번이라도 고기 맛을 본 사람들은 평생 고기를 찾게 된다는 말처럼, 살인의 희열을 느낀 범죄자들이 다시 살인을 찾지 않을 리 없었다.
“그건 저희도 완벽하게 파악하진 못했습니다.”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무슨 의미지?”
“룸살롱의 창녀들에게서 들은 내용이 있습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마시는 ‘와인’은 독특하다고요.”
“독특하다는 게 무슨 의미지?”
“그들이 룸살롱에 올 때, 항상 자신들만의 와인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몇몇 창녀들이 호기심에 마셔본 결과 와인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난다고 합니다.”
“······피라고 한다면 설마 흡혈귀?”
흡혈귀는 멸지의 마왕이 만들어낸 몬스터 중 지능이 굉장히 높은 몬스터다.
혈마법이라는 독특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놈들로 멸지의 마왕의 대장군 중 하나인 ‘레드문’의 혈족이었다.
그리고 상위 계급의 흡혈귀가 하위 계급의 흡혈귀에게 명령을 내리면 ‘흡혈’의 본능까지 참아낼 수 있을 정도로 상명하복이 확실한 몬스터였다.
하지만 용사에 의해 모조리 박멸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1,000년 동안 흡혈귀가 대륙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아닙니다. 1,000년 동안 잠잠했던 흡혈귀가 다시 탄생했다는 건 조금 믿기 어려우니까요.”
베르강은 머릿속을 뒤졌다.
분명 아르펨의 권속들 중 흡혈과 관련된 녀석이 하나 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템페!’
식탐을 깎아내는 자 템페는 재능 있는 자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재능과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템페의 권속들도 똑같이 피를 흡수함으로써 재능 또는 지식을 흡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모두 템페의 권속들이다.’
템페의 권속이 되려면 무조건 자신의 강한 욕망 하나를 버려야 한다.
저들은 살인 충동이나 강간 같은 범죄의 욕망을 버린 대가로 피를 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없을 수밖에.’
가장 큰 욕망을 버렸다고 할지라도 천성이 범죄자 출신인지라 종종 술과 여자로 스트레스를 관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종종 사제들과 성기사들에게 룸살롱을 드나들게 해줬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구장을 압박할 방법은 있다.’
템페의 권속들은 피를 한 달 이상 먹지 않으면 흡혈 본능을 억누르지 못해 난동을 부린다.
프란치스코 교구장이 템페의 권속이라면 한 달간 감금해 두기만 해도 똥줄이 타게 될 것이다.
룩스교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흡혈귀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룩스 교인들이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테니까.
“그럼 놈이 흡혈귀라는 가정하에 한 달간 감금시켜 두면 되겠군.”
나달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와인에서 피 맛이 난다고 하지만 진짜로 피가 섞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조사를 해주게. 그 와인에 피가 정말로 섞여 있는지 안 섞여 있는지.”
“······지금 공조수사를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나?”
나달은 베르강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르강이 인퀴지터에 공조수사를 제안하다니.
요새 베르강이 많이 변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많이 바뀔 줄은 몰랐다.
베르강은 서류를 봉투에 넣어 다시 나달에게 건네줬다.
“고맙군. 덕분에 수사에 도움이 많이 됐어.”
“······정말로 흡혈귀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고대 문헌에 따르면 흡혈귀는 햇빛을 보면 타 죽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이제 중요한 것은 한 달 동안 교구장이 감금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왕이면 사제들과 성기사들도 잡아넣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설마 세금 문제로 모두 잡아 올 생각이십니까?”
“놈들의 목을 칠 칼잡이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다른 것은 못 해도 방패 역할은 해줄 수 있네.”
“그렇게 된다면 재상이야 좋아하겠지만······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정보는 신뢰성이 극히 떨어집니다.”
베르강은 이게 티그리스가 겪어온 답답함이라 생각하니 뭔가 기묘했다.
막상 무언가 일을 진행시키려 해도 증거가 모두 미래에 있으니, 남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전부 내가 책임지겠네. 황제 폐하께도 그리 말씀드릴 테니 그리 알고 있게.”
“뭔가 따로 알고 있는 것이 있군요.”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두게.”
나달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베르강을 쳐다봤다.
“그럼 나중엔 가능한 겁니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네.”
“뭐, 재미있군요. 베르강 경이 확실하지 않은 증거를 갖고 움직이는 성격은 아니시니. 저도 최대한 서포트하겠습니다.”
* * *
티그리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학생들의 눈빛을 보며 말했다.
“이로써 ‘내려치기의 이해와 파훼’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16주 차에 이르는 긴 강의는 서열전 때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기 때문에 6월 3째 주 화요일에 모두 종료되었다.
“평점은 다음 달에 타 과목들과 함께 우편으로 통보될 테니 확인하면 될 것이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나?”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고 말했다.
“교관님! 2학기 땐 어떤 과목을 가르치실 겁니까?!”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같은 과목을 진행할 수도 있고 다른 과목을 만들 수도 있다.”
“혹시 과목 정원은 더 늘리실 생각이 있습니까?”
“필요하다면 늘리겠다.”
“혹시 저희들에게 검술에 관해 조언해 주실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실제 전투에서 지금까지 너희들이 배운 검술을 사용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티그리스의 폭탄 같은 발언에 학생들은 눈을 껌벅였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 그리고 사각에서 들어오는 무기들을 쳐내고 공격하는 데에만 집중해도 벅차다. 그리고 각자 맡은 임무에 신경을 쓰느라 자네들이 배운 검식을 사용하는 일은 한 번 많으면 두 번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이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너희들이 배운 가장 자신 있는 검식으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것. 그것이 유능한 기사냐 아니냐를 판가름 짓게 될 것이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럼 그 경험은 어디에서 쌓으면 됩니까?”
“너희를 찾는 약하고 병든 자들을 구하기 위해 떠나라. 방학 때 수만 번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세상을 더 보고 무엇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면 너희들의 검은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다. 경험은 신념을 낳고 신념은 너희들을 강하게 만들 것이다.”
티그리스는 자신을 보는 수많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했다.
“그럼 이상으로 모든 강의를 마치겠다.”
티그리스는 무덤덤하게 단상을 나왔다.
그 뒤로 트리샤가 따라왔다.
“티그리스 님 마지막 말 좀 멋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험은 신념을 낳고 신념은 너희를 강하게 만들 거라니······ 막 가슴이 두근두근···”
“조용히 해라.”
“넵.”
티그리스는 집무실이 아닌 본동으로 향했다.
“난 바스티얀 학교장님과 면담이 있으니 잠시 대기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바스티얀 학교장의 비서가 학교장실 문을 두들겼다.
“티그리스 교관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하게.
티그리스는 학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스티얀은 평소처럼 난을 관리하고 있었다.
“강의는 잘 끝마쳤는가?”
“예. 그렇습니다.”
“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다고 하더군. 이번 학기에 많은 일을 겪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힘들었을 텐데, 성실하게 가르쳐 줘서 고맙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바스티얀은 헝겊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 학기에도 동일한 수업을 가르칠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새 강의를 만들 생각인가?”
“일단 구상 중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엔 올려치기의 이해와 파훼인가? 아니면 횡 베기의 이해와 파훼?”
“원래는 그것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좀 더 실전적인 전투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최근 느꼈습니다.”
바스티얀은 티그리스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전운을 느끼는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현재 황국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간 상태다.
봄의 궁전 테러 사건이 얼마 전 룩스교의 사제가 저지른 것이라 황실에서 직접 발표하면서 여론전을 벌이고 있었고 길리온 왕국은 룩스교를 배척하기 시작하는 황국의 태도를 보며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고 있었다.
길리온 왕국 측에선 전쟁의 명분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황국 내부의 스파이들이 모두 몰살당하게 생겼으니 딱히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 길리온 왕국의 입장에서도 당장에 전쟁을 치를 수 없다.
길리온 왕국이 성기사와 사제들이 많다곤 하나, 수인족 자치구와 황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벌일 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다.
본래라면 수인족 자치구를 먼저 정리한 뒤에 황국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지만 황국이 너무 일찍 길리온 왕국에 칼을 빼 든 것이다.
길리온 왕국은 현재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바스티얀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와 티그리스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자네에게 직접 내린 명령서네. 나도 열어보지 못했지.”
바스티얀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원래 베르강 경이 직접 전해줘야 하지만 알다시피 최근 베르강 경을 향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자중하고 있는 상태네. 그래서 내가 직접 전해주라고 부탁을 받았네.”
아무리 블랙 마이스터라고 하더라도 종교를 건드리면 비난을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프란치스코 교구장과 관련자들을 현재 6일 정도 감금하고 있을 뿐인데, 베르강은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입니까?”
“얼마 전엔 베르강 경의 집으로 피 묻은 헝겊과 머리카락이 배달 왔다고 하더군. 그 심지 굳은 레이첼이 보고 놀라 울었을 정도라고 하니 사태가 심각한 거겠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아내분을 피신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안 그래도 이틀 전에 봄의 궁전으로 잠시 피신시켰네.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겠지.”
“다행이군요.”
바스티얀은 티그리스의 명령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명령서는 오직 자네만 열어보라고 했네. 학교장실을 떠나 집무실이든 집에서든 읽고 태워 버리게.”
티그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겠네. 그리고 자네도 몸조심하게.”
* * *
티그리스는 학교장실을 벗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트리샤, 잠시 밖에서 대기해라.”
“예. 알겠습니다.”
티그리스는 커튼을 치고 마력등 하나만 켠 채 봉투를 열었다.
[수인족 대장로 테호의 비밀 경호.] [수인족 측 요구 사항 : 대장로 테호의 안전과 비상 상황 발생 시 황국과의 연락 및 무력 지원.] [길리온 왕국의 기습 공격이 예상되는바, 수인족 측과 직접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할 것.] [지원 : S등급.] [임무 진행 방식 : 자유.]······.
티그리스는 명령서를 모두 읽어 암기한 뒤 불을 붙여 쓰레기통에 넣었다.
티그리스는 쓰레기통 안의 명령서가 모조리 재로 변해 타버리는 것을 본 뒤 밖으로 나왔다.
“트리샤.”
“예. 티그리스 님.”
“너와 나는 내일 아침 수인족 자치구로 간다. 열차표를 준비하도록.”
트리샤는 놀란 토끼 눈을 떴다.
“네?! 갑자기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