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79)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79화
경호(4)
펠렌은 곰곰이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모리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나도 최근에 알게 된 녀석이다. 작년에 티그리스와 결투를 벌였다가 양손이 잘려 나간 놈이라고 하더군. 그리프 가문에서도 버려져서 근 몇 개월 동안 거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티그리스를 향한 ‘감정’은 충분하겠군.”
“그건 만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은 높겠지. 일단 쓸 만한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
분노를 깎아내는 자 페이라.
교만을 깎아내는 자 펠렌.
나태를 깎아내는 자 오슬로.
식탐을 깎아내는 자 템페.
색욕을 깎아내는 자 카이라.
이들은 아르펨의 권속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동시에 ‘어떤 대상’의 대적자로 키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본래 약하거나 홀로 성장할 재능이 없는 이들이지만 특정 대상을 향한 강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경우 빠르게 성장이 가능했다.
모리타도 티그리스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특정한 감정을 갖고 있다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당장에 놈을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르펨 님의 몸이 아직 나아지지 않았으니까.”
“알고 있다. 어차피 나도 모리타를 만나봐야 하니 급할 건 없다. 다른 놈을 찾아볼 수도 있는 거고.”
가만히 듣고 있던 템페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펠렌. 네가 직접 티그리스를 처리할 수 없나?”
“내가 직접?”
“그렇다. 이 이상으로 놈이 성장하는 건 위험하다. 대적자를 만드는 과정 없이 네가 직접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레비스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템페를 쳐다봤다.
“가끔 네 답답한 머리통이 짜증이 나는군. 그렇게 쉬운 문제라면 내가 직접 티그리스를 죽였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강도 바스티얀도 그 인퀴지터의 히드라도 죽였겠지.”
현재 로타와 아르펨이 굉장히 유리한 조건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불리하다.
대륙의 땅덩이는 넓고 인구수는 전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이 단합해서 로타와 아르펨에게 대적한다면, 황국을 집어삼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멸지의 마왕이 대륙을 집어삼키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아나? 놈은 자만했기 때문이다. 놈의 실력이 굉장한 것은 맞지. 하지만 페레이라와 같은 천재들이 나타나 멸지의 마왕을 봉인하지 않았나?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게 너무나도 없군.”
로타와 아르펨이 견제하는 것은 티그리스와 같은 개인이 아니다.
루체트 황국이란 이름의 집단이다.
놈들은 위기를 겪으면 언제든지 제2의 티그리스, 제2의 바스티얀 등이 나타나 로타와 아르펨을 압박할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키메라 실험실이 들통나고 황국이 길리온 황국과 룩스교를 견제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우리의 정체가 완벽히 드러난 게 아니다.”
그래서 대적자를 몰래 키우는 것이다.
블랙 마이스터인 베르강은 오슬로가 담당하고.
벨프 가문의 가주였던 콜린은 페이라가 담당하고.
현자 바스티얀은 펠렌이 담당하는 것처럼 대적자를 키운 뒤,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단번에 처리하는 것이다.
덤으로 뜻을 함께할 동지도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 그딴 멍청한 소리를 할 거면 그냥 입을 닥치고 있어라. 알겠나?”
“…….”
템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비스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템페의 의견도 아예 틀린 건 아니네. 티그리스는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게다가 제법 싹수가 괜찮은 제자들을 들여 가르치고 있기도 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지?”
“정체가 들통나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놈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물론 이 문제를 당장에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르펨 님과 다른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만한 주제라는 건 맞지.”
레비스는 펠렌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두 모여야겠군.”
“시기가 시기이니 한 번쯤은 만날 때가 되긴 했지. 연구 성과도 점검도 해볼 겸.”
레비스는 잠시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런데 페이라는 어떻게 할 셈이지? 놈이 올 가능성은 정말 없을 텐데?”
“최근 흑토 지대가 다시 시끄러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흥미를 가질 거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레비스는 템페를 보며 말했다.
“템페. 넌 황국에 잡혀 있는 네 권속들이나 잘 처리해라. 놈들이 피에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정말로 답이 없으니까.”
“알겠다.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레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하고 난 이만 일어나겠다. 듣자 하니 테호가 국경 지역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
“어떻게 할 셈이지?”
“당연히 황국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지. 황국이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 병단을 보낸 것만 봐도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대충 예상이 가니까.”
딱 봐도 수인족들과 평화적인 수교를 맺으려 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정말 일이 복잡해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호가 황국에 올라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다음에 만남 땐 좋은 이야기가 오가길 바라지.”
* * *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바로스 후작령의 수도 할키스에 도착했다.
할키스의 분위기는 황도와 사뭇 달랐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 칙칙한 기분이네요.”
황도 빅토리에가 확실히 황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모던한 도시라면, 할키스는 사방이 성벽으로 꽉 막힌 감옥 같은 느낌의 도시였다.
사방을 둘러싼 높은 탁한 회색빛 성벽은 사람을 갑갑하게 만들었고, 길목마다 놓인 피처럼 붉은 깃발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이 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붉은 글씨로 ‘할키스’라고 써 있는 망토를 걸친 기사들이 지나갈 때면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옆으로 길을 비켰다.
바로스 후작령이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인 이유는 단순했다.
과거부터 바로스 후작은 수인족과 길리온 왕국으로부터 황국을 보호하는 남부 사령관의 직책을 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멸지의 마왕이 있었을 때부터 수인족ㆍ엘프들과 마찰이 잦았던 지역이다 보니, 이 지역의 사람들은 타 종족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했고 군인의 통솔에 따르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다.
트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이곳으로 신혼여행지를 잡는 건 좀 그런가?”
티그리스는 트리샤의 말을 무시하며 앞장섰다.
“따라오지. 오늘하고 내일 묵을 호텔을 구해야 하니까.”
티그리스는 겉보기에 썩 나쁘지 않은 고급 호텔로 향했다.
높이는 7층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른 허름한 여관들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스위트룸이 있나?”
호텔리어는 티그리스와 트리샤의 신분증을 훑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스위트룸은 오직 바로스 후작 가문분들만 예약이 가능합니다.”
“에? 그런 게 어디에 있어……?”
트리샤는 순간 존댓말을 하려다가 귀족처럼 하대로 급하게 바꿨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귀족분들이시라고 하더라도 스위트룸 예약은 불가능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티그리스와 트리샤의 신분은 남작으로 되어 있다.
아무리 가장 낮은 등급의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이 일로 꼬투리를 잡히면 피곤해지는 것을 떠나서 잘못하면 일자리를 잘릴 수 있었기 때문에 호텔리어는 허리를 수차례 숙여 죄송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됐다. 스위트룸 말고 그 아래 등급은 있나?”
호텔리어는 눈을 반짝였다.
“네. 슈페리어 등급의 방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슈페리어 등급을 선택해 주시면 제가 총지배인님께 말씀드려서 스위트룸급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하지.”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텔리어는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티그리스는 팁으로 은화 1개를 넘기며 방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스위트룸은 바로스 후작 가문 사람들만 예약이 가능하다니……. 뭐 이런 게 다 있죠?”
“의외로 지방에, 동떨어진 영지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오직 지역 유지나 귀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시설들이 많지.”
“네? 왜 그런 걸 하는 거죠? 쟤들은 돈 벌기 싫나?”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남을 차별하는 것이니까. 같은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유명하지 않은 귀족 가문 출신은 의외로 이런 수모를 겪는 경우가 많다.”
베이튼처럼 돈이 많은 부르주아들이 괜히 돈을 뿌리고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작도 이러할 진대 평민들은 얼마나 많은 차별을 겪겠는가?
돈이야 귀족들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에겐 평생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은 악착같이 귀족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런 차별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러니 높은 작위를 받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거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티그리스는 601호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스위트룸 정도로 방이 여러 개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드레스 룸과 화장실이 있었다.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서로 말없이 일단 아공간 주머니에서 5서클 마법까지 탐지 가능한 탐지용 아티팩트를 꺼내 방 구석구석을 훑었다.
녹취나 감시용 마법이 걸려 있나 확인한 것이다.
아티팩트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티그리스와 트리샤는 아공간 주머니에 아티팩트를 집어넣었다.
티그리스는 벽걸이 시계를 봤다.
오후 2시였다.
“지금쯤이면 테호 대장로가 출발했겠군.”
“그럼 우리도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네요.”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수인족 자치구 내에서 습격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테호 대장로를 호위하는 건 황금 기사들과 철혈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라 밀림의 수호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으니까.
밀림의 수호자들은 밀림 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전투력을 발휘한다.
수인들은 기본적으로 밀림 속에서 몸을 숨기는 ‘변장 주술’을 사용할 줄 알기 때문에 함부로 테호에게 접근하는 순간 사지가 찢겨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놈들이 노리는 타이밍은 국경을 넘는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국경을 넘은 뒤 바로스 후작이 통치하는 작은 마을들을 거쳐야 하는데, 그 마을이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목에서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테호가 사는 수인족 자치구의 수도 ‘알보르’에서 국경까지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걸어서 대략 4일이고, 국경에서 할키스까지 걸리는 시간은 2일 정도다.
그러니 티그리스와 트리샤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넉넉잡아 2일 정도.
그러니 오늘부터 약 2일간 테호를 노리고 할키스로 들어오는 밀렵꾼들과 용병, 그리고 암살자들을 최대한 많이 처리하고 국경 인근으로 향해야 한다.
“일단 정보를 수집한다. 신상 정보는 모두 암기했나?”
“네. 이 머릿속에 다 있죠.”
보름간의 긴 여행길에서 트리샤는 티그리스가 건네준 신상 정보를 최대한 다 암기했다.
세세한 내용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얼굴만 보면 이름과 출신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암기했다.
“그럼 오늘 저녁 7시까지 정보를 수집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하지.”
* * *
트리샤가 할키스에 온 건 체감상으론 대략 10년 만이고, 실제 시간으로 따지면 4년 만이었다.
그사이 할키스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칙칙하고 딱딱한 군사도시인 것은 여전했지만,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별로 좋질 못했다.
트리샤는 귀를 열어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내란죄로 목이 매달렸다더군.
-그 어린 것이 벽보를 붙이다가 결국…….
-에휴. 젊은 혈기도 좋지만 왜 굳이 그런 짓을 해서 부모 속을 썩이냐는 말이야.
-그런데 그게 진짜일까? 바로스 후작이 키메라 연구를 했다는 게?
-쉿! 이 사람아. 누가 듣겠네.
트리샤는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한가운데엔 목이 매달린 시신 몇 구가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내란’ 또는 ‘선동’이란 죄목이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는데, 까마귀들이 날아와 그들의 시체를 파먹고 있었다.
‘……여기 정말 같은 나라 맞나?’
다스리는 영주의 특색에 따라 도시 분위기가 천차만별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곳처럼 분위기가 최악인 곳은 처음이었다.
빅토리에의 광장에는 사람의 목이 걸리긴커녕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쓰레기 하나 버리는 것도 금지되어 있는데 이곳은 시체가 걸려 있다니…….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휘리리릭-!
그때 트리샤의 귓가로 군경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저놈 잡아라!”
트리샤는 도둑이 빵이라도 훔쳤나 봤지만, 그게 아니라 바로스 후작의 뒷담화가 적힌 벽보를 붙이다가 걸린 사내가 도망치는 것이었다.
사내는 광장을 빠르게 가로질러 골목길로 들어갔고, 군경들은 사내를 쫓아 골목길로 들어가 사라졌다.
만약 저 사내가 잡히면 광장에 매달린 저 시체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시민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빵 사세요. 갓 구운 빵이에요.
-맥주가 쌉니다! 싸요!
트리샤는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잔혹함과 통제에 치를 떨며 광장을 벗어났다.
확실히 신혼여행지로 할키스를 고른 것은 정말 잘못된 선택인 것 같았다.
트리샤는 일단 용병 사무소들이 몰린 ‘베어 타운’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호 대장로를 노리는 용병들이 대놓고 용병 사무소에서 의뢰를 주고받진 않겠지만,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용병 사무소로 모여들었을지 몰랐다.
* * *
용병들이 모여 사는 베어 타운이 가까워질수록 군인들과 기사들이 자주 보였다.
행여나 놈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눈에 힘을 빡 주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용병들은 그런 통제에 익숙하다는 듯이 군인들은 쳐다도 보지 않고 밖에 나와서 낮술을 마시거나 트럼프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트리샤는 귀는 열고 눈은 용병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최근 처음 보는 용병들이 많이 들어왔던데? 들은 이야기 있어?
-처음 보는 용병들이 아니라 예전에 할키스에서 활동했던 베테랑 용병들이야. 흑토 지대나 북쪽 멸지 인근에서 활동하던 놈들이 돌아왔다고 하더군.
-그런 놈들이 뭐 하러 여기까지 왔대?
-그건 나도 모르지. 수인족 장로가 할키스에 오는 것 때문에 그런가?
-설마 수인족 장로를 사냥하겠다고? 차라리 곱게 자살하지 그래?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놈들을 움직일 만한 정보가 있는 모양이지. 한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확실히 베어 타운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베테랑 용병들이 할키스로 모여들자 기존에 있던 용병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그때, 트리샤의 눈에 포착된 한 사내가 있었다.
‘반쯤 까진 대머리, 오른눈에 큰 흉터, 금발 머리…… 블레이크 우드다.’
몰락한 기사 출신으로 돈을 벌기 위해 수인족 사냥을 하다가 걸려서 이름을 통째로 바꾼 케이스였다.
고리 4개에 용병 경력과 기사 경력을 모두 합치면 20년이 넘는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저놈의 뒤를 밟으면 뭔가가 나올 것 같았다.
트리샤는 와인을 병나발로 불며 걷는 블레이크의 뒤를 쫓아갔다.
블레이크는 그렇게 한동안 비틀거리며 걷다가 와인 병을 골목 구석에 던져서 버리고 한 주점에 들어갔다.
[로터스]일단 이름부터 이상했다.
보통 용병들이 드나드는 주점의 이름은 ‘빌리의 잘린 거시기’처럼 상스러운 단어를 조합해 만든다.
그런데 로터스, 연꽃이라니.
귀족들이 다니는 고급 바에나 들어갈 법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투숙을 겸하는지 티그리스와 트리샤가 머물던 호텔처럼 큼직하고 번듯했다.
확실히 용병들이 자주 드나드는 베어 타운에 있을 법한 건물은 아니었다.
‘흠…….’
트리샤는 자신의 복장을 훑었다.
귀족 영애가 입는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제법 질이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코트에 가죽 부츠를 신었다.
이 복장도 저 깨끗한 주점에 들어가기엔 부족함이 없었지만, 블레이크가 잔뜩 해어진 옷을 입고 들어간 것으로 보아 이런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들어가면 튈 것 같았다.
트리샤는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허름한 코트를 꺼내 갈아입고 낡은 부츠도 갈아신었다.
마지막으로 폴리모프 아티팩트를 이용해 얼굴형도 조금 손을 봤다.
‘이만하면 되겠지.’
트리샤는 블레이크가 들어간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 내부는 외부만큼이나 깨끗했다.
종업원들의 옷차림도 제법 깔끔했고, 모르는 사람과 살을 부딪혀 가며 마시는 좁은 테이블도 없었다.
‘새로 산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쓰레기들 같네.’
주점은 말끔했지만 용병들의 옷차림이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곳에 저런 더러운 용병들이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이상했다.
트리샤는 고개를 들어 2층을 봤다.
그곳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래 용병들이 이용하는 곳이 아니군.’
로터스는 베어 타운에 있긴 했지만, 기사들이나 마법사 그리고 할키스를 관리하는 고위직 공무원들이 사는 ‘센터 타운’과 근접해 있었다.
위치로 보아 로터스는 고위직 공무원이나 귀족들이 은밀하게 용병들과 만남을 가질 때 사용되는 공간일 것이 분명했다.
‘다 아는 얼굴이 여기에 있군.’
결정적으로 블레이크를 포함해 인퀴지터들이 건네준 신상 정보에 적힌 용병들의 얼굴들이 죄다 여기에 모여 있었다.
테호 대장로를 노리는 용병들이 이곳에 다 모여 있다는 건 바로스 후작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뜻과 똑같았다.
‘이만하면 됐다. 돌아가자.’
테호 대장로를 노리는 용병 놈들이 다 여기에 모여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여기서 정보를 더 캐는 것은 위험했다.
혹시나 이곳에서 바로스 후작이라도 만나면, 굉장히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때, 종업원 하나가 트리샤에게 다가왔다.
“혹시 누구 소개를 받고 오셨습니까?”
“소개는 아니고, 주점이 깨끗해서 들어왔는데 잘못 들어온 것 같네. 이만 나갈게.”
“잘못 들어왔다고?”
트리샤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쫓아 시선을 돌렸다.
2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붉은 머리칼의 사내.
허리춤에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고급스러운 완드가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였다.
그러나 트리샤의 눈엔 그 완드가 들어오지 않았다.
놈의 가슴팍에는 바로스 후작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매’의 상징이 수놓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상복에 붉은 매를 박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놈은 바로스 후작의 직계혈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