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should be taught by another genius RAW - Chapter (88)
천재는 천재가 가르친다. 88화
질투(1)
“……그의 표정이 보이십니까?”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티그리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모리타를 보며 말했다.
“저를 질시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악의를 품고 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티그리스 경은 모리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티그리스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티그리스는 복잡미묘한 감정 때문에 사실 조금 당황하고 있는 상태였다.
티그리스는 현재 느끼고 있는 복잡한 감정을 세세하게 파고들어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딱 잘라서 표현하기 복잡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굳이 말하자면 미련이 남은 것 같습니다.”
“미련이라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모리타는 저를 모욕했고 정당한 결투의 대가로 모리타의 양팔을 가져갔습니다. 그 점은 후회나 미련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모리타가 어떤 인생의 길을 걷게 될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리타는 명백한 악인이다.
게으르고 책임감이 없으며 남을 폄훼하기 좋아하며 질투심이 강하다.
그런 악인이 티그리스의 검술과 노력을 폄훼한 것에 대한 대가로 양팔을 자른 것이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지만, 티그리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리타를 도발했고 티그리스를 질투하게 만들었으며, 더더욱 미워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모리타가 인류의 배신자가 되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악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결국 모리타는 회귀 전과 회귀 후가 다를 바가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게 조금 미련이 남았다.
“그가 평생 기사가 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뇨. 모리타에겐 그것보다 더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면 더욱 정확하게 점괘를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티그리스는 잠시 생각했다.
모리타와 관련된 이야기를 테호에게 굳이 해야 하는가?
모리타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 누구와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다.
레인로버도 분명 티그리스가 무슨 생각으로 모리타의 양팔을 베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틀렸다기보단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리타를 통해 레비스를 잡아내기만 한다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으니까.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경제적 법칙에 따르면, 모리타의 희생은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도저히 모리타의 희생이 ‘옳았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티그리스는 해답을 찾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변명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입이 열렸다.
“딜레마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나쁜 결과만 나와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중에 트롤리 딜레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테호는 트롤리 딜레마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티그리스가 모두 설명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광차(鑛車)가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 위에선 열 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열 명의 인부들에게 소리쳐서 위험을 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제 옆에 있는 뚱뚱한 인부를 선로로 밀쳐서 광차를 멈추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열 명의 인부를 죽이거나.”
티그리스는 모리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전 그 뚱뚱한 인부를 밀쳤고, 현재 그 뚱뚱한 인부는 선로로 떨어지는 중입니다. 멈출 수 없는 광차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중이죠.”
“……그 뚱뚱한 인부가 모리타라는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딱 떨어지는 명쾌한 비유는 아닙니다. 모리타가 광차를 멈출 수 있을지 없을지 명확하지도 않은 데다가 모리타는 명백한 악인이기 때문에 선로로 밀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모리타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겁니까?”
티그리스는 입 밖으로 모리타 문제를 내뱉으니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모리타를 자꾸 생각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모리타가 변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티그리스는 모리타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때 모리타에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다면, 모리타는 레비스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티그리스는 반강제적으로 모리타가 레비스를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했고, 그것에 대한 미약한 죄책감이 남은 것이다.
“이해했습니다.”
테호는 티그리스란 사람에 대해 한층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티그리스에게서 후회의 냄새가 나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단순히 황제의 명에 따라 검을 휘두르는 기사가 아닌 스스로 판단하여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 고뇌하는 기사.
기사도를 철저하게 따르는 참된 기사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인지라 테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덕분에 점괘 또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미련은 과거에 속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미래에서 과거의 감정이 엮여 있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닙니다. 과거의 미련 때문에 미래의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말은 미련을 털어내라는 뜻입니까?”
“손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손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려고 옷에 손을 문지르고 박수를 쳐도 아주 작은 모래는 손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미련은 그 작은 모래 알갱이와도 같아서, 그리 쉽게 털어낼 수 있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래를 털어낼 땐 물로 씻어내는 것처럼 미련은 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감정으로 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테호는 모리타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려면 일단 모리타를 만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앞서 설명드렸다시피 과거의 감정이 혼합되어 있는 미래는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티그리스 경께서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모리타를 만나 미련을 털어내든지 아니면 모리타가 당신에게 품고 있는 앙심을 풀어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티그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밤 여우가 레비스와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려고 했으나, 중간보고도 들을 겸 밤 여우를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빅토리에로 향하는 길에 현재 모리타가 있는 그리프 자작령을 거쳐 가니까.
테호는 뼛조각과 씨앗들을 회수했다.
“이제 마지막 먼 미래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먼 미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과정일 수도 있으며 당신의 죽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티그리스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가장 먼 미래라고 하면 로타와 아르펨과의 전투가 끝난 후이거나 최종 국면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일 테니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좋은 점괘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호는 다시 뼛조각과 씨앗을 던졌다.
이번에도 뼛조각과 씨앗이 한동안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하나둘씩 뼛조각과 씨앗들이 테이블 위를 탈출하고 있었다.
테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살짝 당황했다.
이윽고 뼛조각들과 씨앗들이 모조리 테이블 위를 벗어났다.
“…….”
주변을 둘러봐도 씨앗들과 뼛조각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테호가 만들어낸 하얀 불꽃의 빛에 닿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어둠에 숨어버린 것 같았다.
테호는 티그리스에게 물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 또한 점괘라는 뜻이었다.
티그리스는 모든 주술에 해박하지 않지만, 그래도 ‘말에 힘이 담긴다’라는 케케묵은 금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티그리스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따라 티그리스의 미래가 바뀌게 될 것이다.
티그리스는 이 테이블에서 무엇이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바를 말하기로 했다.
“적.”
차르르르르-!
티그리스의 말과 함께 주변에 퍼져 있던 씨앗들과 뼛조각들이 테이블 위로 모여들며 어떤 형상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테호는 이 기이한 현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반드시 죽여야 할 원수.”
씨앗들과 뼛조각들은 거대한 옥좌를 만들어냈다.
“우노.”
그 옥좌 한가운데에 있는 큰 눈이 티그리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테호조차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 * *
테호는 홀로 라운지 테이블에 앉아 곰방대를 태웠다.
보통 점괘를 본 사람이 깊은 시름에 빠지지만, 오늘은 테호의 마음이 조금 어지러웠다.
‘그 옥좌가 무엇인지 결국 묻지 못했군.’
티그리스는 그 눈이 달린 옥좌를 보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하면 됐다는 말과 함께 점괘 해설을 듣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테호가 더욱 깊은 시름에 빠진 것이다.
그 옥좌는 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흉흉한 기운이 사방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테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티그리스는 그 옥좌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뭔가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티그리스의 표정 변화가 크게 없었다는 것을 보면, 그것은 굉장히 눈에 띄는 변화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마치 흩어지는 담배 연기처럼 듣는이 없는 질문은 맥없이 사라졌다.
어차피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새벽녘에도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매캐한 담배 향이 라운지를 가득 메울 무렵 한 여인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트리샤였다.
테호는 트리샤를 흘금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제 체감으로는 거의 8년 만에 보는 건데, 여전히 변함이 없으시네요.”
테호는 담뱃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3년 사이에 던전을 몇 번이나 들어갔다 온 거냐.”
“4번인가? 5번인가 그럴 거예요.”
“말레우스가 잔소리를 했겠군.”
“땅딸보 아저씨 잔소리를 들어야 현세에 왔다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말레우스가 장가를 가지 않는 이유를 알겠군. 너 같은 말괄량이를 하나 낳을까 봐 무서운 게야.”
트리샤는 의자에 털썩 앉아 웃으며 말했다.
“저처럼 예쁜 딸 나으면 기분 좋지 나쁠 리가 있겠어요?”
“못 본 사이에 더 능구렁이가 됐구나. 던전의 세월도 세월이란 건가?”
테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티그리스의 기사가 된 지 이제 한 달 정도 됐나?”
“네. 그렇죠.”
“네가 봤을 때 티그리스는 어떤 인물인 것 같나?”
“좋은 사람이에요.”
“그게 끝이냐?”
“네.”
테호는 트리샤의 눈을 보더니 헛웃음을 쳤다.
“티그리스의 사람이 다 됐구나.”
“마음은 아직 리베르에 있긴 한데, 이제 노선을 정할 때가 됐죠.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칠 수 없으니까요. 너무 섭섭하게 굴지 말아요.”
테호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에 봐준 점괘 기억하나?”
“네. 그때, 다른 둥지로 떠나는 새가 그려져 있었죠.”
테호는 당시의 점괘를 보며 트리샤는 결국 수인들의 품을 떠나 인간들과 함께 섞여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트리샤가 티그리스의 기사가 되어 인간 사회에 녹아든 것을 보면 테호의 점괘가 틀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넌 결국 인간들과 섞여 지낼 거다. 그래야 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 트리샤.”
“참나. 제가 아주 떠나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5년 후면 전 자유의 몸이라고요.”
“한번 둥지를 떠난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워할지는 몰라도.”
“뭐, 그건 5년 뒤에 알 일이죠.”
트리샤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제가 이렇게 나온 거는 한 가지 전할 말이 있어서 나온 거예요.”
“뭐지?”
“저랑 티그리스 님은 열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그리프 자작령에 내릴 거예요. 거기에 모리타가 있다고 하네요?”
“결정이 굉장히 빠르군.”
“테호 장로님이 그렇게 조언해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모리타를 직접 만날지 잘 모르겠어요. 네메시스에게 중간보고는 직접 들을 모양인데, 참고만 해두시라고요.”
테호는 꺼진 곰방대를 버릇처럼 물었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오늘 점괘를 보니 더욱 이상하군. 하필 오늘 티그리스의 점괘에 모리타가 나왔는데, 네메시스가 모리타를 감시한다고?”
“네. 그렇죠.”
테호는 마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티그리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 것 같군.”
“무슨 말이요?”
“그 트롤리 딜레마 이야기. 분명 모리타가 선로에 떨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손목이 이미 잘려 기사가 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모리타가 왜 선로에 떨어지는 중이라는 걸까?”
“……글쎄요?”
“거기서 인생이 더 망가질 것이라는 뜻이다. 양팔이 잘린 기사의 인생보다 더 나락이 있을까? 그런데 티그리스는 마치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모리타의 인생이 더욱 바닥으로 치달을 것이라 은연중에 말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거라고 했지.”
테호는 자신이 굉장히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바로스 후작과 빈스모크 백작의 목을 쳐 수천만 명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거대한 운명의 소유자가 작심하고 계획한 것이다.
티그리스가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세상에 얼마나 큰 파란을 일으킬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테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천기(天機)를 읽으러 간다. 남쪽의 흉성(凶星)이 하나 졌는데, 당연히 천기의 흐름 또한 바뀌었겠지.”
테호는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황금 기사들이 테호가 밖으로 나오자 황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하늘을 좀 보려고 나왔습니다.”
테호는 품속에서 호랑이 형상이 음각된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주술을 펼쳤다.
마력으로 작동하는 가로등이 빛을 잃으며 삽시간에 어둠에 잡아먹힌 듯 빛을 잃었다.
황금 기사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테호가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테호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억 개의 별들이 테호를 향해 빛을 내뿜고 있었다.
테호는 그런 압도적인 별들의 관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천기의 흐름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별들이 테호를 향해 관심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티그리스 경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구나.”
테호가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빅토리에로 올라가기로 결정을 한 것, 티그리스가 테호의 경호 업무를 맡기로 한 것, 바로스 후작의 목을 친 것 등과거의 일들이 모두 테호와 티그리스의 만남을 위해 별들이 계획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저 북동쪽의 하늘에서 지독한 흉살(凶殺)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빛을 잃어 죽어가는 별 하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일 티그리스 경과 다시 이야기를 나눠야겠구나.”
* * *
그리프 자작령의 수도 마케돈.
마케돈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원형 투기장에 수많은 관중들이 모여 한 사내를 부르고 있었다.
-수집가!
-수집가!
-수집가!
가슴을 울리는 웅장한 북소리와 술은 관중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이 투기장의 신성(晨星) ‘수집가’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사회자가 확성 아티팩트에 입을 댔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수집가! 수집가! 수집가!
“마케돈 투기장의 떠오르는 신성!”
-수집가! 수집가! 수집가!
“붉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나이!”
-수집가! 수집가! 수집가!
“자신에게 맞는 양팔을 찾기 위해 떠나온 모험가!”
철컹-!
투기장 문이 열렸다.
검은 그림자로 붉은 가면과 함께 두 개의 시퍼런 검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양팔 수집가입니다!”
후욱-
수집가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투가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의 양손에는 특별한 아티팩트로 단단히 고정된 약 1m 길이의 칼날이 들려 있었다.
사내는 주변 관중들의 환호성을 신경도 쓰지 않고 투기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양팔 수집가를 상대하기로 한 상대는 악명 높은 모험가 살인마! 시저입니다!”
반대쪽 투기장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나왔다.
그 사내는 한 손에 대거와 작은 방패를 들고 당당히 걸어왔다.
시저의 신장은 2m가 넘어가서 보기만 해도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웠다.
시저는 붉은 가면의 사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네놈이 그렇게 유명한 수집가라면서? 검투에서 승리하면 목숨 대신 양팔을 잘라 간다던데. 과연 내 팔도 잘라 갈 수 있을까?”
“1분.”
“……뭐?”
“네놈은 1분이면 충분하겠군.”
수집가의 말에 시저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하게 변했다.
“1분? 난 30초 안에 네놈의 양다리를 잘라주마. 사지가 잘려 나간 병신이 투기장에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군.”
사회자는 확성 아티팩트를 입에 대고 말했다.
“준비하시고!”
시저와 수집가는 서로 살짝 떨어진 채 준비 자세를 취했다.
땡-!
“시작!”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저는 방패를 앞세워 수집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수집가를 보며 비웃었다.
‘얼어붙은 모양이군.’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고리 4개짜리 기사가 아닌 한, 이 튼튼한 철제 방패를 뚫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시저의 고리 개수는 무려 3개.
본래라면 이런 검투장에 나오지도 못하고 바로 사형을 당했어야 할 인생이었지만, 그리프 자작이 에빙던 남작에게 은화 50개에 구매를 했다.
그리프 자작은 시저에게 수집가를 이기면 사형에서 노역형 20년으로 바꿔주겠다고 말을 했고, 투기장에서 명성을 얻으면 투기장에서 검투사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놈만 죽이면 된다.’
시저는 수집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수집가는 굉장히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저의 검을 피해냈다.
‘제법?’
시저는 수집가를 향해 검을 내지르고 발을 걸어봤다.
그러나 수집가는 시저의 공격을 모두 읽고 있다는 듯이 피해냈다.
그러자 여유만만했던 시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쥐새끼처럼 도망만 가지 말고 어서 덤벼라!”
시저는 고리 3개를 모두 돌려 폭발적으로 달려들었다.
이대로 방패에 부딪히면 놈은 으깨져 죽을 것이다.
그러나 수집가는 놈의 돌진을 아주 가볍게 피하더니 입을 열었다.
“1분이 거의 다 됐군.”
“……뭐라는 거냐! 이 새끼가!”
시저는 다시 한번 달려들었고 수집가는 시저의 검을 유려하게 피해내더니 시저의 겨드랑이를 향해 검을 꽂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시저의 비명 소리가 투기장을 가득 메웠다.
수집가는 검을 놓친 시저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방패 하나만 믿고 돌진하는 것은 용병 특징인가? 오러 고리를 3개나 얻었으면 머리를 써야지.”
“사…… 살려줘.”
수집가는 그날 자신의 양팔을 베어간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넌 리치가 길다는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 나보다 머리통은 하나가 더 큰 주제에 거리재기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드니 이렇게 당하는 것이다.”
수집가는 계속 설교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시저는 겨드랑이에 박힌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집가는 계속 시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나갔다.
그럴수록 수집가의 허무한 감정이 무언가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 기분이야……. 티그리스 그놈이 이런 기분을 맛본 거였어. 마치 벌레를 가지고 노는 이 기분.”
“……제발 그만해. 제발…….”
“크크크크크!”
눈구멍 사이로 보이는 수집가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시저는 얼어붙었다.
“난 마케돈 투기장의 티그리스다.”
수집가, 아니, 모리타의 눈동자는 시저가 감당할 수 없는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