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189
“나도 잊고 있었는데… 지금쯤 써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음… 하융이 일본으로 가게 되나요?”
“아니요. 하융은 일본으로 가지 않아요.”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절하는 거죠. 일본인이 되는 것을. 대신, 자기가 이뤄 놓은 것을 모두 버려요.”
“…왜요?”
지훈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하융의 입장에선 더 높이 올라갈 곳이 없거든. 적을 잃은 장수는 싸울 곳도 잃어버리는 법이야. 장수라는 허울에 기대어 살 게 아니라면 관복을 벗어 버리는 게 낫지. 하융도 똑같아. 글로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이제는….”
“….”
“세상을 좀 더 배울 차례야. 작가라는 허울을 잠시 내려놓고 떠돌이가 되는 거지. 뭐, 부랑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돈도 있으니까.”
“…형,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전개.”
지훈이 놀랐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어디로 떠도는데요? 앞으로의 전개 말이에요.”
“아, 그게….”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하하…!”
내가 해맑게 이야기하자, 지훈이 황당하다는 듯 나를 봤다.
“…뭐라고요?”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만 확실해. 앞으로 하융이 어떻게 될지는… 이제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볼까 해.”
이건 내 삶과도 연관이 있었다.
지금까지 <지팡이> 1, 2부는 모두 내 삶을 반영한 거울이었다.
그렇게 난 내 삶을 다 털어 버렸고, 3부는 일종의… 내 미래가 되겠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지난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내 욕망을 파악할 필요도 있을 테고.
금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해해요. 가지고 있던 걸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날 보고 싱긋 웃어 주었다.
역시. 금홍은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그녀 역시 자기 기반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번역’이라는 일에 갑자기 뛰어들었으니.
“뭐, 그럼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주세요. 비축분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오늘은 원고에 대해서만 얘길 좀 해 보자.”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논의한 부분은… 역시나 경감의 속마음이었다.
“이 부분, 번역할 때 길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아요. 까딱 잘못하면 경감이 하융의 작품이 일제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출감을 시켜 준 것 같이 보이거든요.”
금홍이 해당 원고에 붉은 동그라미를 치며 말했다.
“그럼 그 부분은 명확하게 잘 살려 주세요. 경감은 하융의 작품을 보고 일종의 충격을 받은 거예요. 특히 이 사람은 예술의 ‘예’ 자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하융의 작품을 보고 예술이라는 게 뭔지 느낀 거죠. 난생처음 느낀 감정이니 혼란스러움도 있었을 테고요. 경감으로서의 자아와 예술 소비자로서의 자아가 맞부딪치다가 결국 후자가 이기게 됐다는걸, 잘 표현해 주셨으면 해요. 저도 그 부분은 더 선명하게 수정을 좀 해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금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를 했다.
“그럼 이 경감과 하융은 어떤 우정 같은 걸 나눈 셈이기도 하겠네요.”
지훈이 말했다.
나로선 생각해 본 적 없는 지점이었다.
“우정?”
“네. 꼭 친구가 되어야만 우정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생겨나는 교감, 저는 그게 우정이라고 생각해요. 딱히 서로에게 호감이 없어도… 교감만으로 가능한, 그런 특별한 관계.”
“…말 되네.”
지훈의 말처럼, 경감과 하융이 나눈 것은 한 마디로 ‘교감’이니.
“그럼 하융의 소설은….”
“교감의 매개체가 되는 거죠.”
“그 내용, 평론으로 써도 괜찮겠다.”
“완결만 나 봐요. <지팡이>로 박사 논문도 쓸 수 있을걸요?”
그 말에 우리는 웃었다.
뭐,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박사 논문을 쓸 수 있는 문학 작품.
그것은 한때 유행한 작품으로는 부족하다.
학계와 문단에서 충분히 인정을 받은 작품만이, ‘박사’라는 학위를 줄 수 있는 토대가 되니까.
그렇게 몇 가지 이야기를 마친 후, 회의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미 막차는 끊겨 버렸고, 결국 지훈과 내가 차로 금홍을 태워다 주기로 했다.
금홍은 택시를 타도 된다고 했지만, 다 늦은 새벽에 혼자 택시를 태워 보내는 것도 좀….
그렇게 한국외대를 향해 지훈은 차를 몰았다.
나는 금홍과 함께 뒷좌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혜경 샘. 이번에도 파티해요? 1부 끝났을 땐 했잖아요.”
“어… 그런 건 생각 못 했는데요. 여러분들이 원하면 하죠.”
“전 원합니다.”
지훈이 득달같이 말했다.
“저도요.”
금홍도 빼지 않았고.
이제 남은 건 피터 한 교수인데….
“그럼 저까지 찬성했다고 치고 다수결로 결정해 버립시다. 파티 열 테니 피터 한 교수님께서도 필참하셔야 한다고 전해 주세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까탈스럽고 분위기 휘어잡는 걸 좋아하는 피터 한.
아마 내 말을 전달받으면 꽤나 황당해할 거다.
그리고 툴툴대면서 음식을 들고 오겠지.
“아, 다 왔다. 저기 내려 주시면 돼요.”
금홍이 대한외대 정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훈은 부드럽게 그 앞에 주차를 했다.
“감사해요, 두 분 다.”
“뭘요. 굿나잇.”
지훈이 손을 살살 흔들어 인사를 했다.
“파티 일정 나오면 알려 줘요.”
“그럼요. 잘 가요.”
나는 금홍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맘 같아선 기숙사 앞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금홍이 간 후, 나는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곤하다. 빨리 가자.”
“넵. 아, 형. 저 할 말 있어요.”
지훈이 다시 차를 슬슬 돌리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래서 나도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뭔데?”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저, 교수 한번 되어 볼까 해요.”
189회
“저 교수 한번 되어 볼까 해요.”
지훈이 말했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지훈의 성격이라면… 혼자서 적잖은 고민을 하고 내린 결론이겠지.
“아버지랑은 얘기해 봤고?”
“네.”
허락하셔?
는 좀 이상하지.
지훈이도 이제 서른 다 되어 가는 성인인데.
“뭐라셔?”
“처음에는 싫어하셨어요. 교수 돈 못 번다고. 하지만 제가 그랬거든요. 전 돈을 벌고 싶다기보단 계속 문학이랑 붙어 있고 싶다고요.”
“….”
“그랬더니, 해 보라세요.”
지훈이 킬킬거렸다.
“어차피 임용 성공할 거란 보장도 없으니, 실패하면 그땐 군말 없이 집안일 하는 조건으로.”
“…상당히 멋진 결론인데?”
무조건 성공을 해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실패해도 뒷길이 있으니 안심하고 해 보라는 조언이였다.
그리고 지훈의 아버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무리하게 배수의 진을 치고 사는 사람보다, 적당히 안정적 ‘보험’이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래서, 계획은?”
“일단 정미현 교수님이 특강 자리 하나 주셨어요. 인수대 학부 신입생 특강인데… 다음 주예요.”
“떨리겠네.”
“안 그래도 죽겠어요. 남 앞에 나서는 거 딱 질색인데.”
지훈은 원래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편이지만… 차이는 있다.
나는 상황이 주어지면 그냥 덮어 놓고 해 버리는 반면.
지훈은 그런 상황 자체를 아예 안 만드는 편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수 없다.
일단 해보는 수밖에.
“강의안 준비해서 연습 한번 해 보든가.”
“어? 도와주시게요?”
“어떻게 하는지 미리 봐줄 수는 있지.”
“좋아요. 그럼 모레까지 한번 준비해 볼게요.”
지훈이 벌써부터 긴장한 듯 말끝을 떨었다.
난 슬쩍 고개를 돌려 지훈을 봤다.
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좀 걱정되는걸?
* * *
조용한 일요일 오후.
나는 칠판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칠판의 왼편부터, 3분의 2가 필기로 꽉 차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오른편의 3분의 1.
바로 3장의 내용이 들어갈 곳이었다.
나는 그 위에다가 썼다.
‘떠돌이’.
사실 ‘떠돌이’란 키워드를 잡은 건, 뚜렷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단… 직감이었다.
내가 만약 하융이라면.
자신의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었다면.
나는 그 자리를 떠날 것 같았다.
그것이 새로운 목표를 얻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떠돌지?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이건 내 삶의 경험이 적어서일지도 모른다.
전생이건 현생이건… 정착하고자 부단히 애를 써 왔으니.
갑자기 가진 걸 모두 버리고 후련하게 떠나 본 적이 없었다.
“흐음….”
칠판의 마지막 빈칸.
그것은… 결국 내가 살고픈 미래일지도 몰랐다.
생각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과거를 되짚는 대신, 미래를 꿈꿀 때가 된 거지.
나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지?
먼저 문학.
항상 함께 할 금홍.
믿을 수 있는 동료들.
더 많은 인정과 더 많은 경험.
…추상적이군.
나는 피식 웃었다.
머리를 싸맨다고 해서 나올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
게다가 미국에 다녀온 후, 집필에 온 힘을 쏟았다.
그 덕에 비축분이 적지 않게 쌓였다.
일주일 정도는 쉬면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또… 2부 마감 파티도 있고 말이다.
그때였다.
디링―
하는 메일 알림 소리가 울렸다.
나는 피시로 가서 메일 수신자를 확인했다.
“오.”
조나단 감독의 메일이었다.
내용은 물론 영어로 쓰여 있었으나, 주말까지 금홍에게 번역을 맡기는 건 미안한 일.
인터넷 번역기를 돌려 보니 알아볼 정도의 수준으로 번역이 됐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참 좋은 세상이란 생각이 든다.
― 이상 작가님, 잘 계시죠? 지금 저의 사무실은 굉장히 바쁩니다. <그 집> 개봉이 하루 남았거든요. 방송국과 언론사를 뛰어다니며 홍보를 하고, 배우들도 토크쇼에 나가서 매력을 뽐내고 있어요.
저는 지금 무척이나 흥분이 됩니다. <그 집>이 미국 스릴러 영화의 한 획을 그을 것 같거든요. 아니, 저는 확신해요. 이건 오스카상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을 작품이거든요!
자기 입으로 오스카상을 받을 것 같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본 티저 영상을 보면, 좀… 기대해도 좋을 것 같기도?
― 해외 판권 부분을 미국 쪽에 일임을 해 주신 대로,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유통사와도 이미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고요. 미국에서 제일 먼저 개봉을 하고, 그다음이 한국입니다. 아마 다음 달 안엔 한국에서도 영화 <그 집>을 영화관에서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다음 달.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영화는 소설 같지 않다.
훨씬 더 많은 제작진과 시간이 투여된다.
그 복잡한 과정이 이제야 다 끝났다니.
이거야말로 감개무량이 아닌가.
― 저는 이미 행운과 성공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부디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 주시길.
메일은 거기까지였다.
요는, 곧 미국에서 <그 집>이 개봉되고, 그다음 순서가 한국이라는 것.
나의 첫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든 영화.
조나단 감독의 저택 지하 작업실에서 그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세계는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기에.
다만, 한국의 관객들이 내 영화를 어떻게 봐 줄지, 나로선 그 점이 관건이다.
* * *
금홍과 나는 우리 집 거실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바로 지훈의 강의 연습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금홍까지 부른 걸 보니 절박하긴 절박한 모양이었다.
지훈이 방에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금홍에게 슬쩍 물었다.
“바쁘지 않아요?”
“안 바쁜 건 아닌데… 너무 절박하게 부르길래, 어쩔 수 없었어요.”
금홍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지간히도 우는소리를 하며 조른 모양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더니, 지훈이 정장을 입고 나왔다.
우리는 그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장까지? 대충 해.”
“맞아요. 연습인데요.”
“아니에요. 진짜 실전처럼 할 거거든요. 이거 받으세요.”
녀석은 마치 로봇처럼 삐걱대며 다가왔다.
그리고 금홍과 내게 각각 종이 뭉치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