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192
그때 나는 인정했다.
내 문장은 ‘시놉시스’와 어울리지 않다는 걸.
뭐… 결과적으로는 스토리보드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나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방향을 틀 수 있는 유연성을 얻었으니.
그랬던 내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니.
그저 고맙다는 말로는 좀 허전한 느낌이다.
― 별말씀을요. 그냥 안부 차 연락을 드린 거였는데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저기, 감독님.”
― 네?
“혹시 오늘 괜찮으시면… 저희끼리 소소하게 축하주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 축하주요?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던 걸까.
“아, 혹시 바쁘시면….”
― 좋지요. 아주 좋습니다.
“정말입니까?”
― 그럼요. 작가님 뵙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시간 내주실 때 봐야지 않겠습니까. 허허….
“아… 제발. 그런 말씀은… 아무튼, 그럼 언제가 편하십니까? 제가 감독님 동네로 가겠습니다.”
― 아예 저녁을 같이하도록 하죠. 저희 집으로 오시겠습니까?
“네, 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 술이야 여기 넘쳐납니다. 제가 눈치가 보여서 못 마시고 있죠. 오늘 작가님 핑계 대고 저도 좀 마시려고요. 하하하….
조인후 감독이 호쾌하게 말했다.
음… 감독님의 부인분에게 미움을 받기 싫으면, 적당히 순한 술로 하나 사 가야겠구나.
* * *
그날 밤.
나는 약속대로 연희동으로 갔다.
식탁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는데, 웬일인지 부인분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네요?”
“아, 안사람은 모임에 갔습니다.”
“아….”
“제겐 정말 최고의 날이죠.”
하고 조인후 감독이 활짝 웃었다.
하여간 유부남들이란 다 비슷한 것 같다.
나중에 나도 가정이 생기면 저렇게 변하려나.
아무튼 우리는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미국에 다녀온 일 하며, 도마크의 <지팡이> 토론 하며… 말하는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별일이 다 있었구나 싶었다.
조인후 감독은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님은 참, 신기하네요.”
“네?”
“작가님의 개인적인 삶이 <지팡이>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게 느껴져요. 미국에서 허무감을 느낀 점이나 일본에 대한 묘한 감정이나… 모두 <지팡이>에서 보여 주셨잖습니까.”
“음… 맞아요. 하융이란 인물을 만들 때, 제 내면을 많이 반영했거든요. 아무래도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요.”
그러자 그가 씩 웃었다.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랍니다.”
“네?”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나… 자신의 삶을 작품에 투영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죠.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자신의 삶과 감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판단력이 필요하죠. 그 부분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일기를 쓰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
일기를 쓰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
확실히 내가 글에 내 삶을 담을 때, 나는 나 자신을 마치 남처럼 보곤 한다.
그렇게 남처럼 봐야 철저한 분석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살아 있는 인물로 탄생시킬 수 있으니까.
“그건 재능입니다, 글 쓰는 것과는 또 다른 재능이죠.”
조인후 감독의 말에 나는 그냥 말없이 웃었다.
재능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난 그저… 나 자신에게 좀 더 냉정한 걸지도.
우리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미리 준비된 마른안주와 함께, 내가 사 온 청주를 마셨다.
술 도수가 약해 조인후 감독은 좀 실망스런 눈치였지만.
우리는 그때까지도 <지팡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특히 앞으로 이어질 3부에 대해.
하융을 떠돌이로 만들겠다고 말하자, 그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건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조선 문학의 정점에 서 있다가 갑자기 모든 걸 버린다….”
그런데 문득 그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작가님. 그런데 하융의 마지막은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이요?”
“네, 그렇게 떠돌이가 된다니… 3부의 마지막엔 어떻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3부의 마지막은 곧 하융의 마지막이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그 마지막을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나는 덤덤하게 그에게 말했다.
“하융은… 죽을 겁니다.”
192회
“하융은… 죽을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지팡이>라는 긴 대장정의 마지막을, 내 입으로 내뱉는 것은….
조인후 감독은 긴장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군요.”
“아쉬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역시 하융의 마지막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해피 엔딩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유행하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삶’이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에서 결정 나곤 하니까.
내 삶을 담은 인물이 하융이라면… 나는 하융의 죽음까지도 책임지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인후 감독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하융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게.
그는 대뜸 술을 한잔 들이켰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게… <지팡이> 때문은 아닙니다.”
…?
그럼 대체 왜?
조인후 감독은 뭔가 울컥한 듯했다.
나는 그가 마음을 추스르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죄송합니다.”
그는 술을 또 한잔 털어 마셨다.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이요?”
“네. 하융이 죽을 거라는 걸 작가님께 확인받으니… 아버님 생각이 났어요.”
조인창 교수?
나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듯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님께서는 작가님을 만나기 몇 달 전에, 이미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덤덤하게 가족을 불러 말씀하셨어요.”
“….”
“나는 곧 죽을 거라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남은 생에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고.”
…조인창 교수였다면 그랬겠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언제나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한 번도 두 발로 걷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런 아버님 앞에 작가님이 나타나신 건… 아버님 입장에서도 행운이셨을 겁니다.”
그는 또 연거푸 한 잔을 들이켰다.
“문학 학자로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열정을 태울 작가를 만나셨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참으로 오랜만에 활기를 띠셨고, 저희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정말 훨씬 더 오래 사셨어요. 저희 가족이 작가님께 항상 감사하는 점이죠.”
“….”
“…사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죽음을 예견된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생각이요. 물론 아버님께 내색하진 않았지만.”
조인후 감독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작가님을 만난 아버님을 보니 그 생각도 바뀌었어요. 죽음이 예견되어 있더라도… 아니,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기에 아버님은 학자로서 마지막 힘을 쏟을 수 있는 거구나. 죽음이,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죽음이 삶의 동력이 된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삶을 후회 없이 충실히 살아온 사람만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남은 삶을 자신의 뜻대로 채울 수 있다.
“아무튼, 그래서 항상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조인후 감독은 조금 취한 것 같았다.
아니, 의도적으로 취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맨 정신에는 하기 힘든 이야기였을지도.
나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취하셨습니다.”
“압니다.”
그는 일부러 그랬다는 듯 씩 웃었다.
평소와 같지 않은 장난기 어린 얼굴.
나는 그가 더 취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전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벌써요?”
“부인분께서 들어오시기라도 하면 절 미워하실 테니까요. 그 전에 도망을 가야죠.”
“작가님, 참 약았군요.”
“네. 하지만 어쩔 수 없답니다.”
나는 그를 부축해 주려 했다.
그러자 그는 만취하진 않았다는 듯 혼자 일어났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으나, 그는 날 대문까지 바래다주었다.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바람을 쐐서 그런지, 그는 금세 술이 깬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비슷한 연배의 강인춘 PD에 비하면, 이건 술주정 축에도 못 들었다.
조인후 감독은 고용인을 불러 운전을 부탁했다.
“대리기사를 부르면 되는데요.”
“제 집에 오신 손님을 그렇게는 못 보내죠.”
…술취한 사람을 이기려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
나는 얌전히 그가 시키는 대로, 차 키를 고용인에게 넘겼다.
그렇게 남이 모는 내 차를 타고 가는 길.
생각지도 못한 호사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조인창 교수 생각이 나서 마음이 조금 숙연해졌다.
죽음을 예견한 삶이라….
나는 그런 삶을 덤덤하게 살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융은?
하융은 과연 자기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소설을 하나의 인생으로 본다면… <지팡이>의 3부는 죽음을 알고 가는 여정이다.
마치… 조인창 교수의 마지막 몇 개월처럼.
그리고 조인후 감독은 말했지.
조인창 교수가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날 만나고 마지막 힘을 쏟을 수 있었다고.
그럼 이런 건 어떨까.
3부를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하융은 죽었다’라고.
그리고 그다음 문장부터, 하융의 마지막 몇 개월에 대해 풀어 내자.
그것이 <지팡이> 3부의 구조가 된다.
물론 독자들은 놀라겠지.
2부에서 모든 것을 이뤘던 하융이 죽는다고?
그리고 안타까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3부를 볼 것이다.
하융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긴장되기도 하겠지.
자칫 2부까지 오면서 루즈해질 수 있는 독자들을,
다시 한번 휘어잡으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거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아이디어다.
중요한 건… 하융이 ‘어떤’ 마지막 시간을 보내느냐는 거다.
그 시간이 내 의도대로 빛날 수 있다면, 하융의 죽음에 대한 독자들의 충격은… 서서히 그의 삶에 대한 감동으로 변할 것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다시금 다짐했다.
어떻게든 3부를 잘 마무리해 보자고.
그리고 당장 집필에 들어가 버리자고.
* * *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지훈은 거실에 있었다.
녀석도 갓 들어왔는지 아직 정장 차림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왜 정장을 입었지?
하고, 빤히 쳐다보다가 깨달았다.
맞다. 송지훈 오늘 첫 강의였지?
“강의 잘했어?”
녀석이 고개를 들고 날 빤히 봤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날 보여 줬다.
“뭔데 그래?”
휴대폰 화면에 있는 것은… 특강의 학생 평가.
― 강의 재밌었어요.
― 선배들한테는 엄청 유하신 강사님이라고 들어서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진짜 카리스마 넘치시고 재밌었어요!
― 와, 진짜 에너지 넘치는 강의. 숨 쉴 틈 없이 몰아쳤어요. 다음에도 또 해주세요. 강추.
― 에너지가 너무 넘쳐서 나중엔 제가 다 힘이 빠지던데요… 강약조절좀….
― 열정적인 강의 좋았습니다. 용기를 많이 얻었어요.
…카리스마?
…에너지?
…열정?
이게 정말 송지훈은 수사하는 단어들이라고?
진짜 피터 한의 ‘카리스마론’이 먹힌 건가?
나는 지훈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강의, 성공적이었나 봐?”
“와, 진짜… 처음에는 진짜 떨렸거든요?”
난 피식 비웃었다.
“내가 준 우황청심환도 안 먹는다더니.”
“우황청심환이요? 저 그거 학교 도착하기도 전에 먹었어요.”
그래.
내가 그럴 줄 알고 준 거다.
“그래, 강의 내용은 어떤 거였는데?”
“원래 거창하게 준비했어요. 현대의 문학에 대해서. 형의 성공 사례에 대해서도… 그런데, 단상 앞에 올라가니까 머릿속이 진짜 새하얘지는 거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