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71
“저 둘을 이어주지 않을까요?”
똑똑한 답이었다.
“맞습니다. 딱 맞아요.”
나는 마지막 꼭짓점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관계’
“인간 내면과 외부 세계 간의 관계. 이 관계는 삼각형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내면이라는 것도 결국 내부의 영향을 받게 되고, 외부 세계 역시 개인의 내면이 모여 만들어 낸 결과물이거든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저의 작품들은- 이 삼각형으로 세상을 바라본 결과값입니다.”
나는 다시 단상으로 돌아왔다.
“창작은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재해석해야만 하죠. 그리고 그 시선을 우리는 ‘작가의 작품 세계’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이 비로소 필기를 시작한다.
삼각형을 따라 그리는 학생들도 있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 학생들도 있었다.
자신만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거겠지.
난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 예를 들었다.
저번 학기 특강보다는 심도 있는 내용.
학생들은 잘 따라와 주었다.
2학기 첫 번째 특강은, 그렇게 끝났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질문을 빠르게 해결하고, 단상에서 내려을 때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차 조교가 다가와 말했다.
“고생했어요. 근무 시간도 끝났을 텐데 어서 퇴근해요.”
“네. 아, 저… 방금 신-문학에 이런 글이 올라왔는데요.”
차 조교가 내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 안에는 한 편의 글이 떠있었다.
오진우 평론가의 비평이었다.
<이상의 시 작품론 – 삼각형의 눈>
“방금 작가님께서 해주신 강의 내용과 비슷해서요. 오 평론가님이랑 함께 얘길 나누신 건가요?”
“…아니요. 이 글은 제가 결제해서 볼게요. 고마워요.”
나는 차 조교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한국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 들어온 후.
시동을 켜는 대신 휴대폰으로 신-문학에 접속했다.
그리고 바로 오진우 평론가의 글을 결제했다.
그 비평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이상이 발표한 세 개의 시. 그것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다를 바 없다. 이 세 개의 시는 따로 보면 각자 다른 이미지와 형식의 결에서 존재한다. 가장 먼저 발표한 <은은>은 평범한 연애시로 보이며, <무한 설계도>는 디지털 언어를 흉내 내고, <입>은 ‘먹다’라는 같은 단어가 변주되어 되풀이되는 산문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시를 함께 놓고 보면, 이상의 시 세계가 활짝 열린다. 즉, 그는 이 세 가지 시에 자신의 세상을 모두 담은 것이다.
<무한 설계도>를 보자. 0과 1의 규칙 없는 반복. 우리는 일단 이것이 디지털 세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안에 가끔씩 보이는 공백과 말줄임표(···)다. 디지털 세계이되, 그 안에 들어간 질서 없는 기호화 공백. 말줄임표가 환기하는 끝없이 퍼져나갈 무한성. 이는 이상이 이 디지털 세계를 무한한 가능성과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우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암시적인 이미지는 곧······
<입>은 또 어떤가. ‘먹다’가 반복적으로 활용되며 ‘나’와 ‘너’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때 ‘먹다’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인데, ‘나’는 결국 ‘너’를 먹어버림으로서 ‘나’의 존재를 입증하는 구조로 시상은 전개된다. 즉, ‘나’의 정체성은 ‘먹는 존재’인 가르강튀아, 즉 먹는 ‘입’인 것이다. 이 시의 ‘먹음’은 곧 욕구, 욕망, 욕심의 다른 말이며 이상 내면의 강렬한 삶의 에너지가 된다. 이때의 ‘너’는······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비평가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꼭 맞을 필욘 없다.
작품은 작품이고, 해석은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경우가 달랐다.
나의 의도를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짚어내는 글.
내 시의 미학적 가치를 이렇게까지 즉각적으로 밝혀낸 글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
-그렇다면 <은은>은 무엇일까. <은은>은 가장 처음에 쓰인 시지만, 앞선 두 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일단, ‘은은’이라는 단어를 없애보자. 행 길이의 계산된 비대칭이 그제야 드러난다. 이 절름발이 같은 시의 움직임. 그것은 곧 <무한 설계도>와 <입> 사이의 관계를 증명한다. <무한 설계도>에 드러난 디지털 세계의 확장과 공포 속에서 <입>에서 보이는 욕망 가득한 내면. 이상의 내면은 이 세계의 공포에 떨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은은>은 또 이렇게도 해석된다. ‘은은’이라는 단어를 배제하지 않고 이를 한 편의 연애시로 살펴봤을 때, 이는 에로스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무한 설계도>가 보여준 세계의 무한한 확장과 <입>이 보여준 욕망 가득한 내면. 두 요소는 <은은>을 통해 에로스적으로 뒤섞이며, 얽힌다. 즉, 이상이 이 세상을 욕망하듯, 세계 역시 이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짧지 않은 비평.
그 비평은 내 시를 충실하게 해석해주고 있었다.
“….”
체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진우 평론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의도를 간파 당했단 생각보다는,
이해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여덟 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연락을 할 만한 시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진우 평론가님. 저 이상입니다.”
-아, 예.
그는 말이 없다.
자신의 비평을 잘 봤는지 묻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말 대신, 이렇게 물었다.
“혹시 지금 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또 한참 대답이 없다.
말을 하려다, 삼키는 그 특유의 태도가 눈에 선하다.
잠시 후 대답이 들려왔다.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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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391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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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천재 작가 – (69)
다시 사는 천재 작가 69
종로의 오뎅바.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우린 술집으로 왔다.
테이블 가운데에서 부글부글 끓는 오뎅탕.
가을밤 찬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기는 유리창.
사교성과는 거리가 먼 성인 남자 둘.
어색하고 적막한 분위기.
이렇게 급하게 만나놓고, 우린 말이 없었다.
그저 각자 오뎅을 먹었다.
난 속으로 고민중이었다.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내 시를 해석했냐고?
놀라운 해석에 감탄했다고?
생각 끝에 나는 그냥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요?”
전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
내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거다.
내 ‘시’에만 관심이 있는 거지.
“아니에요.”
나는 그냥 그러고 말았다.
내 칭찬을 받고 싶어 비평을 쓴 게 아님을 알기에.
이 사람은 아마 내 고마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남들이 다 어렵다하는 내 시는 잘도 이해해 놓고선.
비평가에게 고마움을 느낄 일이라.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겠지.
오뎅을 우물거리던 오진우 평론가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작가님의 시, ‘이상’의 시와 닮았습니다.”
나는 막 잡았던 오뎅꼬치를 내려놓았다.
“<오감도>를 쓴 ‘그’ 이상이요?”
“네.”
“어떻게 닮았는데요? 그 사람도 나도 시에 숫자를 써서?”
“아니요. 그런 피상적인 시도는 다른 여러 시인들도 지겹게 해왔던 겁니다. 두 분의 유사점은… 근본적인 데에 있습니다.”
“흥미롭네요. 들어보고 싶은데.”
“‘그’ 이상의 시도 그렇고 작가님의 시도 그렇고, 세상을 수식화해서 바라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자기 주관과 내면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일 겁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듣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럼 차이점은요?”
“흠… 작가님 시의 감정이 더 풍부한 느낌이긴 합니다.”
“이를테면요?”
“단순하게 말하긴 힘든데…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이상도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이상도 모두 시에 숫자나 수식을 쓰길 즐겼습니다. 관건은 그 목적입니다. ‘그’ 이상은 그 수식의 난해함이 보여주는 삶의 미스터리에 집중합니다. 그러다가 내면이 아름답게 침몰되어버린 느낌이에요. 하지만 작가님의 시는 좀 더…”
좀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정적으로.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 이면을 보두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은은>을 통해 불균형한 삶과 에로스적 삶을 모두 드러낸 것처럼요.”
“영광이네요. ‘그’ 이상과 견주어 주시다니.”
“두 분 모두, 어느 쪽도 특별히 영광일 이윤 없을 겁니다.”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에게 나는 등단도 안 한 아마추어 시인이다.
그런데 ‘그’ 이상과 나를 동급으로 생각하다니.
시 앞에선 어떤 이름값도 신경 쓰지 않는 줏대.
무조건 ‘시’만을 보는 맹목성.
…마음에 들었다.
또, 내게서 1930년대의 ‘이상’을 읽어낸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전생에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다.
“오진우 평론가님.”
“네.”
그를 만나러 오는 길.
나는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제게 <내외인>이라는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책이 곧 프랑스 출판사에 소개될 예정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시종 심드렁했다.
정말이지 시 외에는 관심이 없군.
“하지만 그들이 제 작품을 발간해줄 거란 장담은 할 수 없죠. 냉정하게 말해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엔 작품 편수가 빈약하거든요.”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 시도 함께 노출시켜보고자 합니다. SNS를 통해서.”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보았다.
나는 이어 말했다.
“가능하다면, 당신의 비평도 덧붙여서 말입니다. 마치 하나의 ‘짝패’처럼.”
“짝패… 말입니까?”
짝패.
한 마디로 짝을 이루는 두 패를 의미했다.
비평을 문학의 부산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잘 쓴 비평 다르다.
문학과 짝패가 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오진우의 평론이 그런 경우다.
“제 시가 모두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굉장히 아름답지만… 굉장히 난해한 시인 것도 사실입니다. 난해함 속에서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경우죠.”
난해함 속의 아름다움.
그것은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미학을 가졌지만,
그만큼 대중은 다가올 수 없을 테니.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시를 꼭 모두에게 이해시켜야만 합니까?”
“…”
나도 한때는 딱 저런 말을 했다.
내 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일종의 자기합리화랄까.
속으론 그 누구보다도 이해받고, 인정받길 바라면서도.
나는 오진우 평론가에게 말했다.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더 잘 보여주는 겁니다.”
“….”
“문학의 목적은 작가의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지 난해한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흠.”
“물론 오진우 평론가의 글을 제 시에 대한 ‘정답’처럼 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 답 중 하나로 제시하고는 싶어요. 감상의 길을 열어둔다고 해야 할까요.”
시의 감상을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그 의미를 궁금해 할 독자들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할 순 있지.
“어떻습니까? 제 시와 함께 당신의 비평을 프랑스 쪽에 노출시키는 게.”
그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프랑스와 내 시, 그리고 자신의 비평을 열심히 연결해보는 것 같았다.
“확실히 프랑스 문학계가 좋아할 만한 시풍입니다.”
“당신의 비평도 마찬가지죠.”
오진우 평론가가 픽 웃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좋습니다. 번역해서 SNS에 올리는 것 정도는. 단,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뭡니까?”
“시를 계속 써주세요.”
그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남에게 관심 없기로 유명한 오진우 평론가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작가님의 시에 대한 비평을 쓸 때, 머리가 환해지는 걸 느꼈거든요… 그런 기분 아니, 쾌감.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제 시에 대한 비평을 계속 쓰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네. 그런 시를 계속 보고 싶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
한국 문학계의 발전이나 작가의 의무를 운운하며 포장할 법도 한데.
이 사람도 참 나 못지않게 뻔뻔하다.
하지만 그 뻔뻔함에서 어쩐지 솔직함과 듬직함이 느껴졌다.
이런 비평가가 동시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에게 큰 힘이 되지.
“좋습니다. 앞으로도 시를 써보도록 하죠.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는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다.
“다음 작품은 시가 아닙니까?”
“당분간은 단편 소설을 써야 해서요. 그렇지 않아도 산문을 좀 쓰고 싶기도 하고요.”
“그럼 저는 다시 시를 쓸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소설 읽어보겠단 소리는 죽어도 안 하는군.
하지만 강요할 일은 아니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멋대로 살아야 좋은 비평이 나오는 걸지도.
어쨌건 허락은 받은 셈이었다.
어서 나와 그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야겠다.
***
적당한 번역자를 찾는 일.
그건 지훈에게 맡겼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어와 프랑스어는 언어적 특질이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언어적 미학을 극한으로 올리는 ‘시’라는 장르.
최고 수준의 문학 번역가만이 제대로 해낼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훈이 열심히 번역자를 알아봤지만, 좀처럼 구해지지 않았다.
실력이 입증된 사람은 시간이 없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