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112)
112. 당장 출진을
단 한 순간이지만.
‘보였다.’
프록을 잡는 방법, 죽이는 법, 이기는 길.
이정표에 글자가 새겨지고 눈앞에 길이 나타나니.
이건 또 흡족한 오늘이 되진 않을까?
반복할 오늘을 대비해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루를 푹 쉬고 왔다.
이제 죽고 다시 오늘을 시작하면 그만인데.
프록의 칼이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살기와 투기는 그대로인데.
칼날이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붙든 것처럼 허공에서 덜컥 멈췄다.
부르륵.
프록이 볼만 부풀리고 가라앉히는 걸 반복했다.
‘왜?’
엔크리드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프록의 시선, 제 팔을 자른 인간의 뒤.
새파란 호수를 담은 것 같은 눈의 표범이 있었다.
레이크 팬서.
어떤 지역에서는 영물로 취급받고 때로는 수호신처럼 추앙받기도 하나.
프록이 그런 걸 신경 쓰는 종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짐승은 짐승일 뿐이다.
즉, 고작 레이크 팬서가 노려봐서 멈춘 건 아니었다.
‘개 같네.’
프록은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그의 맨들맨들한 피부는 땀을 흘리는 대신 그와 비슷한 점액질을 뿜어냈다.
긴장함으로 나타나는 프록의 신체 변화다.
목에 흰 흉터를 가진 프록은 경험이 많았고, 그 경험 중에는 마법사를 상대한 적도 꽤 있었다.
마법사, 주문 세계를 현실에 현현하게 하는 괴이한 존재들.
상대할 때, 까다롭기만 한 것들.
레이크 팬서의 까만 피부와 눈 바깥으로 그런 기운이 느껴졌다.
수없는 경험, 재능 판독자의 시선으로 보기에 보이는 마나의 흔적들.
저 표범 자체가 주문 세계를 쓰든지, 최소한 그와 연관된 무언가란 거다.
프록은 직감했다.
지금 검을 내리치면 이 남자를 죽일 수 있지만.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거지.’
주문 쓰는 표범만 문제도 아니다.
지금 눈앞에 앉은 인간도 만만치 않았다.
끊임없이 심장을 노리더니, 팔을 향해 검을 휘둘러?
마지막에 보인 한 수.
자신의 넓은 칼날을 따라 달리던 검, 칼날, 의지, 투기.
단순한 동작이 아니었다. 발을 움직여 무게를 싣고 순간적이나마 자신의 근력과 비슷한 수준의 힘을 보여 줬다.
자신과 비교하자면 작은 체구다. 그럼 결론은 하나, 근육의 질이 남다르다는 것.
거기에.
‘눈깔하고는.’
눈빛이 죽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을 향한 눈에 투기가 그대로였다.
승산이 조금도 없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의지, 그 두 글자로 빚어 내서 만든 인간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 그런 무언가를 보는 기분이다.
뒤에 선 마법을 부리는 표범 따위를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오롯이 투기만 불태운다.
‘미친 새끼가.’
뿌르륵.
프록의 볼이 더 없이 부풀어 올랐다.
이 상황이 통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저울을 꺼내 무게를 쟀다. 여기서 목숨을 걸고 죽여야 할 놈인가?
아니면 후일을 기약해야 하는가.
어지간하면 죽이고 싶다. 죽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반대쪽 저울에 자신의 목숨이 걸린다면?
생각을 달리 해 봐야 했다.
재능 판독자의 시선이 엔크리드를 살폈다.
꼼꼼하게 계산했다. 싸우고 싶어서 싸우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하는 게 프록의 장기라지만.
제 목숨도 걸렸고, 또 이미 한 곳에 묶인 몸으로 의무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의무도 무시하면서까지 죽여야 하나?
저울의 무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달리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 도시, 보더 가드라는 변방의 요새 도시의 중요성이 그리 높지 않으므로.
곧 프록의 볼이 사그라들었다.
금방이라도 내려치려던 칼날도 도로 내렸다.
투기가 희미해진다.
‘한계.’
프록은 그렇게 판단했다. 눈앞의 인간이 지금보다 나은 실력을 갖추긴 어려울 거라고.
근육의 질이 좋고, 순간적이나마 프록에 버금가는 근력도 좋다.
검술과 개인 전술까지도 훌륭하고 꺾이지 않는 마음은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반은 운이었다.’
마지막 한 수에 팔이 베였지만, 자신도 상대의 오른 손목을 아작 냈다.
상대가 부린 수작이 운에 기댄 거란 소리니.
다음에 만나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만나기만 한다면 그럴 수 있다.
“잊지 마라. 인간, 내 이름은 메엘룬이다.”
그게 끝이었다.
씻은 듯이 투기가 사라지고 프록이 뒤로 물러났다.
메엘룬은 엔크리드의 뒤, 에스터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냥 갈 테니, 너도 물러나라.’
그런 의미의 눈빛을 쏘아 냈다. 에스터는 반응하지 않았다. 묵묵히 호수 같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메엘룬은 바닥에 널브러진 제 망토를 챙겨 뒤로 물러났다.
프록이 유유히 저택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그를 붙들지 않았다.
몇몇 길드원이 눈치를 보긴 했으나.
“눈치 보지 말고 다 비켜. 손님 가신다.”
크라이스가 제지했다. 팔 한쪽을 못 써도 프록은 프록이었다.
그렇게 프록이 떠났다.
* * *
에스터는 엔크리드가 가져온 마도서 덕분에, 몸에 걸린 족쇄를 푸는 꼼수를 찾았다.
당장 인간으로 돌아올 순 없지만, 표범의 몸뚱이로도 주문 세계 일부를 현현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번 할 때마다 고생 좀 하겠지만.’
모아 둔 마나도 써야 하고.
주문 세계 일부가 오염될 수도 있었다.
시체를 사용해 제 주문 세계를 구축하는 미친 새끼의 마도서에 있던 방법이다.
편법 중의 편법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쓸 테니.’
알아 두면 쓸모 있을 것이다. 그리 몸에 익혀 둔 것이었고.
그게 지금이 될 수도 있었다.
에스터는 고요함을 가장한 뒤, 존재감을 보였다. 제가 마법사라는 걸 프록이 의식하게 했다.
눈앞에서 그 칼날을 내리치면 나 또한 네 심장에 무언가를 꽂으리라.
의지란 무엇인가. 의지란 마나가 되기도 하는 법.
한순간 에스터는 자신을 표범이 아니라 마법사 에스터로 보이게 했다.
그 결과다.
메엘룬인지 메롱인지 하는 놈이 물러났다.
에스터 자기 몸이 멀쩡했다면 모를까.
지금 상태에서는 엔크리드와 둘이 작정하고 덤벼도 승산이 반반이었다.
앞뒤 다 따져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지금 상대가 물러간 이유.
‘운이야.’
그렇게밖에 판단이 안 된다.
엔크리드의 실력이 몰라보게 달라진 것? 놀랐다. 에스터도 매우 놀랐으나.
하지만 프록이 물러날 이유로는 부족했다.
물론 운이라 말하기 전, 상황이 뒤틀리긴 했다.
그걸 만든 건 자신의 필요로 인해 곁에 있게 된 남자가 만든 상황이었다.
‘왼팔.’
심장이 아니라 팔.
계속 심장을 노리다가 물러났다면 저 새끼도 계속 버텼겠지만.
왼팔을 반쯤 잘라 버렸다.
저 정도면 도로 붙이는 것보다 잘라서 새로 자라게 하는 게 빠를지도 몰랐다.
팔 하나가 사라진 검사다.
상대해 볼 만해진 거다.
‘빌어먹을.’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에스터는 한숨을 내쉬며, 그동안 쌓은 마나를 한순간 전부 날려 먹게 할 뻔한 놈의 등을 툭 쳤다.
이 자식은 왜 안 일어나는데.
“에스, 우웩!”
엔크리드도 가까스로 버티던 판이었는지.
구역질을 해 댔다.
에스터가 뒤로 폴짝 물러나고.
크라이스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니, 그런데 그, 뭐야, 라그나 찾은 거요. 그, 제 말은 알아들은 거죠?”
“후.”
한 번 토악질을 해 대니 속이 좀 편해졌는지, 엔크리드가 상체를 들며 말했다.
“출전도 안 하고 엿새나 여기 처박혀 있으면서 분대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거냐? 정보를 다루는 새끼가 맞냐? 네가?”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덤덤한 어조였지.
“에?”
크라이스는 그제야 제가 놓친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분대원이야 돌아가면 언제나 보는 얼굴이고.
출전 소식을 듣긴 했지만, 엔크리드 없이 분대원을 누가 데려간단 말인가.
어디 뒤통수에 구멍이 나고 싶은 지휘관이 아니라면야.
상관 살해자에 길치 게으름뱅이, 대답 없이 툭하면 사라지는 병사, 신의 허락 없이는 싸우지 못한다는 종교쟁이까지.
아니, 누가 저런 별종 무리를 데려가겠냐고.
당연히 부대에 남아 분대장을 기다릴 줄 알았지.
오산이었다.
“없다. 전부 출정했어.”
“그건 예상 밖인데, 그럼, 에스터랑 분대장뿐인 겁니까?”
“그래.”
크라이스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엔크리드를 부축해 일으켰다.
“많이 다쳤습니까?”
“오른손만 빼면 뭐, 적당한 수준이라고 본다.”
대답하며 엔크리드는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다고 생각했다.
이후 떠오르는 건 의문이다.
‘왜 그냥 갔지?’
분명 칼질 한 번이면 죽을 목숨이었다. 자신도 크라이스도.
‘왜?’
엔크리드의 시선이 표범, 에스터에게 닿았다.
‘네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정말로? 상대가 프록인데?’
프록이란 두 글자가 주는 무게를 여실히 느끼는 중이다. 저 작고 어린 표범이 뭘 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통 모를 일이었다.
“냐아.”
시선을 느낀 에스터가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로 쓰러져서 되겠냐고 하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모르겠다.’
모르는 걸 붙잡는다고 답이 나오나.
그럴 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모르는 건 모르는 것. 엔크리드는 대신 내일을 위한 경험, 걷기 위한 원동력을 얻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먹혔어.’
뭐라고 해야 하나.
한순간이지만, 프록을 압도하는 기분, 그런 걸 느꼈다.
자신이 짠 판에 프록을 들이고 벴다.
팔을 벴다. 심장이 아니라 팔, 재생하겠지. 재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자신과 싸우는 중에는 아니겠지.
만약 마지막에 오른 손목을 노린 것만 피했다면.
‘그랬다면.’
싸움의 향방은 달라졌을 터였다. 이번 복기는 배울 게 많을 것이다.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크라이스가 부축하고 에스터는 품에 뛰어드는 대신 뒤를 힐끔 보고는 옆에 붙어서 따라왔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 들어가서 쉬려는 참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건가!”
2중대장이었다. 벤젠스 소대장의 상사.
엔크리드를 찾았는지 이마에서 땀이 흥건했다. 무슨 중대장이 전령도 아니고 직접 뛰어다니나.
엔크리드가 그런 생각을 하며 군례를 보이려 할 때.
“당장! 출진을.”
중대장이 먼저 말했다.
“제가 조금 다쳐서.”
여유만 있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쉬었다 가고 싶었다. 전장 자체에 자신 하나가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아닐 테고.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소대장급 병사 하나다.
어떻게 보면 편의를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뭐? 어쩌다가?”
작전 중에 멀쩡하게 돌아온 걸 이미 알 테고.
“왈패랑 시비가 붙어서.”
“이런 시기에 무슨 짓인가?”
중대장은 나무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소대장의 칼솜씨가 필요한 게 아니니, 움직일 수 있다면 당장 가 주길 요청하겠네.”
중대장은 강요하지 않았다. 이건 숫제 부탁 조에 가까웠다.
그게 엔크리드의 귀에는 전방에서 일이 터졌다는 소리로 들렸다.
‘왜?’
엔크리드는 아직 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듣지 못했다.
돌아오자마자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했고.
다음 날인 오늘은 프록이랑 칼싸움 한바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레인져 핀이 동행하기로 했는데, 당장 출발할 수 있겠나?”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합니까?”
가만히 듣던 크라이스가 의문을 표했다. 안면이 있는 사이다. 중대장이 쉽게도 입을 열었다.
“그, 제 소대장을 안 데려오면 더 싸우지 않겠다고…….”
중대장이 말끝을 흐렸으나, 엔크리드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제 소대원들 말입니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출진이라고 봐도 좋다. 후방에서 쉬어도 되니, 전장에만 머물러 주면 된다고 요청이 들어왔다. 네 직속 중대장의 요청이고.”
가긴 가야 할 것 같았다. 손목 좀 삐걱댄다고 쉴 시간은 없어 보였다.
아예 검을 못 쥐는 것도 아니니.
‘렘.’
엔크리드도 얘기를 듣자마자 걱정이 되는 판이었다.
전장 상황 같은 건 가면서 들으면 될 것 같고.
생채기 몇 개에 약만 좀 바르고 가면 되니.
“네.”
엔크리드가 군례를 보였다. 곧바로 출발하겠단 의미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