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235)
235. 요정식 농담이 욕탕을 울렸다.
‘미쳤나?’
레이피어 검사로서는 그런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드디어 저 머리통이 제대로 고장 난 건가 하는 생각 말이다.
단시간에 저리 기술의 숙련도를 올린 걸 보면, 고된 시간의 연속에서 행운이 따랐을 터.
그 중첩된 단련과 행운이 저놈의 머리통을 망가뜨린 건가?
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미치셨수?’
반사적으로 손이 떨렸다. 위압에 반항하는 것과 순응하는 데는 많은 차이가 있다.
라그나는 검을 쥐었다.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대로 달려 나가 휘둘러 ‘절단’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상대가 부리는 저 ‘위압’이란 기세를 벨 셈이었다.
아우딘은 신성을 준비했다.
죽지만 않으면 회복은 시켜 줄 수 있으리라.
작센은 검사의 뒤에서 소리 없이 스틸레토를 뽑았다.
찌르고 죽인다. 상대가 무슨 재주를 부리든, 죽일 수 있음이다.
작센은 자신 있었다. 그 상대가 기사든 아니든, 준기사든 뭐든.
모두가 반응하기 직전이었다. 무형의 칼날이 다가와 엔크리드의 몸에 닿기 직전.
찰나의 순간, 엔크리드는 제 안에 자리 잡은 무형의 무언가를 향해 뜻을 보였다.
‘거절한다.’
칼날에 어린 의지는 베겠다는 것.
그럼, 그 너머 위압에 어린 의지는 무엇인가.
‘물러나라.’
엔크리드는 그걸 거절했다. 무형의 압력이 어깨를 누르고 칼날이 자신을 베는 걸 모두 거절했다.
‘윌’은 의지력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
곧 어떤 무형의 힘을 발하는 것.
위압이 그것이라면, 거절도 그것이다.
실제와 비슷한 고통을 준 위압의 압력이 이제는 그저 보이지 않던 기세일 뿐임이 느껴졌기에.
엔크리드는 무시할 수 있었다.
양치기 펠의 검에 베이는 걸 이겨 내는 것보다 이게 더 편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행동이 무리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엔크리드는 그걸 행동으로도 보였다.
날아오는 무형의 칼날이 먼지처럼 흩어진다. 심상으로만 보이던 칼날이었다.
터벅.
엔크리드가 한 걸음 나서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뭐 하냐? 라그나? 작센?”
어느새 다가온 라그나가 옆에서 수직으로 검을 들고 선 채요, 작센은 레이피어 검사의 뒤에 섰다.
놀란 둘이 눈을 깜빡였다.
먼저 반응한 건 작센이었다.
숨소리, 발소리 하나 없이 뒤로 물러났다.
레이피어 검사는 제 뒤에 누가 섰는지도 몰랐을 터다.
라그나는 검을 든 채로 굳었다.
곧 그럴듯한 핑계를 떠올렸는지, 라그나가 말했다.
“검을 들고 있기 좋은 날이라.”
엔크리드가 오늘이 좋은 날이라고 했던 게 퍽 인상적이었던 건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릉 꽈과광 하고 우렛소리가 울리더니,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투두둑.
“……어?”
레이피어 검사는 비가 떨어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엔크리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입을 벌린 채로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실어증이 온 것 같았다.
“어?”
놀란 입에선 의문 가득한 외마디 말만 나올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고 싶은 말이?”
“어?”
검사는 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놀라서 말문이 막히는 사람은 몇 번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상대가 입을 벌린 채 여전히 말을 잇지 못했다.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치유사를 찾아야겠다.”
정신에 폐해를 입은 이들은 쉬이 치료되지 않는다. 치유사가 온다고 해도 고개를 저을지도 몰랐다.
“머리가 고장 난 것 같다.”
엔크리드가 마저 말했다.
“풉.”
그 말에 렘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닌데.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인데.
“어?”
레이피어 검사는 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정말 독하게 놀란 듯했다.
“그 검 비 맞으면 녹슬 텐데, 이런 날이 정말 검을 들고 있기 좋은 날인 건 맞냐?”
엔크리드가 옆을 보고 물었다. 라그나는 제가 한 말이 있는지라 여전히 검을 든 채였으나, 곧 엔크리드의 말에 수긍했다.
“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군요.”
“그래, 칼에 기름 좀 먹이고.”
그냥 놔두면 녹슬 것이다.
“그래야겠습니다.”
라그나는 검을 거두며 물러났고, 그 뒤로 레이피어 검사만큼이나 놀란 인물 셋이 보였다.
다들 입을 벌린 채로 엔크리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중 그나마 멀쩡한 혼혈 거인이 물었다.
“잘.”
엔크리드는 친절히 답했다. 사실 더 해 줄 말도 없었다.
‘윌’이란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므로.
“윌?”
제비칼이 읊조렸다. 질문은 아니었으나, 엔크리드는 흔쾌히 답해 줬다.
“응.”
호위는 미간을 찌푸린 채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 힘들기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쏴아아아, 어느새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그의 머리칼을 푹 적셨다.
당연히 다른 이들의 몸도 적셨고.
“일단 비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엔크리드가 말했다.
“어?”
레이피어 검사가 답했다. 물론 이 작자는 아직 정신이 나가 버린 듯했다.
“누가 좀 챙겨 줘.”
엔크리드가 말하고 돌아섰다. 그 뒤로 렘과 일행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제 대장의 변화가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건 어떤 궤를 넘어섰다.
단순히 검을 잘 쓰고 제 몸을 잘 통제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므로.
“윌입니까?”
절단이란 ‘윌’을 가진 라그나가 물었다.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고 빨랐다. 놀랐다는 말이다.
쏟아지는 빗물 덕에 금발이 축 늘어져 눈 앞을 가린 라그나다.
“너 머리카락 좀 깎아야겠다. 응.”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기쁜 건 기쁜 거고, 즐기는 것 또한 마다하진 않지만, 이게 끝은 아니니까.
이걸 끝으로 보고 달려온 건 아니니까.
실제 기사의 ‘윌’이란 거절이 아니라 자연스레 의지력을 보이는 것.
상대를 기세로 누르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베는 것도 자연스레 하는 것.
일부를 깨닫고 나니 알게 되었다.
에이시아의 위압, 레이피어 검사의 위압.
둘 다 그런 쪽으로 특화되어 발달한 거다.
같은 관점으로 보면 라그나의 절단도 비슷하다.
사자 베기와 강철 베기가 완숙의 경지에 도달해도 그의 ‘절단’은 흉내 낼 수 없다.
결국, ‘윌’을 깨달아야 하는 문제니까.
“뭡니까? 어디서 배운 거요? 아니, 꿈에서 죽을 정도로 훈련이라도 하는 거요?”
렘도 놀란 건 마찬가지.
그가 한 말에 엔크리드는 답했다.
“꿈에는 훈련보다 변태 뱃사공이 주로 나오지.”
“에? 변태 뱃사공? 그건 또 뭐요?”
이건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라, 무시했다.
렘도 어차피 농담 비슷한 거로 취급하리라.
이후 아우딘이 중얼거렸다.
“마치 혼자만 다른 시간을 달리시는 것 같군요. 형제님.”
레이피어 검사와 마찬가지로 안목 하나는 뛰어난, 종교에 심취한 곰탱이다.
그의 말이 정답이었다.
“어디서 시간을 멈춘 채로 단련이라도 하는 겁니까, 형제님?”
생긴 건 둔한데, 날카롭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답했다.
“그런 셈이지.”
아우딘은 대답 대신 조용히 성전을 읊기 시작했다.
그는 엔크리드의 답이 당연히 농담일 거라 생각했다.
누가 의심이라도 할까.
작센은 평소와 같다. 말이 없었다. 대신 그 눈길이 따가웠다. 엔크리드의 전신을 거듭 훑었으니.
“멀쩡하게 단련했고, 약 같은 거 안 했다.”
엔크리드가 말하자, 작센이 드물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약을 했다고 의심한 건 어떻게?”
작센이 물었다.
“너 눈깔에 의심이 가득해.”
평소 약을 다루는 일에 재주가 많으니 그런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물었는데 진짜였다.
“음, 독심술도 익히셨던가.”
독심술까진 아니고 작센이 알려 준 칼날의 감각이 더 예민해진 덕이다.
상대의 의도나 감정이 쉬이 읽히는 편이니.
특히 숨겨 둔 무언가도.
가령 아까 끝내 덤비지 않은 제비칼 같은 경우엔 겉으로는 웃으며 말하긴 했으나.
“난 됐다. 딱 봐도 덤비면 쥐어터지겠네.”
하지만 그 눈깔 안에 숨은 것들, 그건 무엇이었던가.
살의와 악의다.
그 반대도 있었다.
겉으로는 투쟁심과 호승심을 터트리는 혼혈 거인.
내던져진 뒤, 그 여자의 눈에 어린 건 무엇이었나?
그건 아쉬움과 안타까움 같은 거였다.
당연히 엔크리드를 향한 건 아니었다. 자조적인 느낌이었다.
‘뭐, 정확하진 않겠지만.’
대충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숙소로 들어가려다 말고 옷을 벗었다.
장비를 한쪽에 정리해서 처마 밑에 두니, 크라이스가 숙소에서 나왔다.
“장비 물기 좀 닦고 정리해라.”
엔크리드가 시키자, 그 위로 다른 이들도 장비를 쌓았다.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위로 렘이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수고비.”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크라이스 장비손질점!”
금세 태세가 변했다. 렘은 크로나를 막 쓰는 편이니, 주머니에 든 금액이 적진 않았을 거다.
“비 맞은 채로 들어가면 숙소가 엉망이 되잖아. 바로 욕탕 가자.”
엔크리드의 제안이다. 보더 가드 병영에는 좋은 시설이 많았다. 그중 우물가도 있지만, 독립 중대가 된 뒤로 언제든 출입이 가능해진 부대 전용 욕탕도 있었다.
큰 나무 욕조에 물을 받아 둔 곳도 있고, 물을 연신 끓여 주기도 했다.
즉, 뜨끈한 물로 씻을 수 있다는 거다.
우물 하나를 파서 그 위에 지붕을 올리고 만든 곳이라, 물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한쪽에서 연신 물을 끓이고 있어 증기가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갑시다.”
다들 욕탕에 가서 훌렁훌렁 벗어젖히니, 물을 끓이는 식모들이 웃으며 말했다.
“와, 우리 남편 놈만 보다가 이쪽 보니까 여기가 천국이네!”
걸걸한 식모 하나의 말에 다들 왁자지껄 웃었다.
“거, 남편한테 잘하슈. 그 남편도 자기보다 몸집 큰 여자와 사는 게 쉽진 않을 거니까.”
렘이 실실 웃으며 놀리자, 식모가 냅다 찬물을 뿌렸다.
“아, 차갑수다.”
렘이 찬물 따위에 놀라지 않고 묵묵히 웃으며 말하자, 식모도 웃으며 답했다.
“너 회색 머리칼 놈, 혀가 매워.”
서로 아는 사이인 듯 보였다.
나중에 욕탕에 들어가 어찌 아는 사이냐 물어보니.
“둔바켈이 자꾸 기절하고 흙에서 뒹굴기에, 자주 욕탕에 던져 놓다가 얼굴을 익혔수. 호탕한 아줌마요.”
렘과 이리 말을 나누는 것부터가 대단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렘 새끼.’
여자한테는 친절하다.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어도 여자를 쥐어패는 일은 드물고.
‘그럼, 둔바켈은?’
“둔바켈? 걔는 전사지, 여자가 아니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니 렘의 답이 돌아왔다.
“그나저나, 이제 대장이랑 붙으려면 정말 제대로 ‘힘’을 써야 할 것 같수다.”
욕탕 물에 목까지 담근 채로 렘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식모들이 흘깃흘깃 보는 눈길을 무시한 채, 렘을 바라봤다.
그 회색 눈깔에 담긴 건 무엇인가.
렘에게도 호승심과 투쟁심이 자리 잡았음에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다.
아무리 자신이 날뛰어도 렘이 자신에게 저런 감정을 보인 적이 있던가?
저런 기세를 보인 적이 있었던가?
실수로 죽일 것 같아서 힘을 쓰기 어렵다고 한 적은 있었다.
“제대로 하면?”
퉁.
욕탕 물을 튕기며 렘이 답하길.
“재밌을 거요.”
그 말에 엔크리드도 웃었다. 미치광이 훈련광과 미치광이 도끼쟁이의 눈이 마주쳤다.
전에 없는 기세가 서로를 향할 때다. 작센이 그걸 보며 말했다.
“다들 미친 건지.”
아우딘은 평소와 같이 웃었고, 라그나는 말이 없었다.
다만 그 눈이 쉼 없이 흔들림에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게 분명해 보였다.
“윌 맞아요? 정말? 진짜? 거짓말 아니고? 사기 아니고?”
뒤늦게 훌러덩 옷을 벗고 합류한 크라이스가 욕탕에 들어오며 물었다.
왕눈이 또한 몸 단련은 쉬지 않아, 구경할 게 많았다.
식모 몇이 자신의 취향은 오히려 저쪽이라며 떠들었다.
“구경하려면 동화 한 닢씩입니다!”
크라이스의 농담에 식모 몇이 낄낄 웃었다.
여전히 누구와도 사이좋은 태도다. 그리 들어온 크라이스의 질문이다.
김이 솔솔 올라 가득한 증기 사이로 모두의 시선이 엔크리드에게 쏠렸다.
위압을 이겨 냈다고 한다.
소문까진 아니더라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들릴 만한 일이다.
엔크리드는 처음엔 진실을 말했다.
“오늘을 반복해서 같은 하루가 매일 반복되는 거지.”
“소설 말고 다음.”
대답은 작센이 했다. 그만큼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 이거다.
엔크리드는 머리를 긁다가 다시금 말했다.
“운이 좋아서.”
여전한 답이다. 사실 이 말 외엔 적당한 핑계도 없었고.
렘을 비롯한 모두가 말을 삼켰다.
저걸 핑계라고 대는 건가?
사실 이 새끼는 천재였던가?
그럴 리가 없는데.
가르쳐 봤는데, 천재는 무슨 재능이랄 게 없는 인간인데.
모두의 눈에 의문은 있으나 의심은 없긴 했다.
기실 운 외에는 할 말이 없긴 했으니.
“행운의 여신이랑 동침이라도 한 건지.”
렘이 중얼거리는 말이 곧 정답이란 거다.
이어 욕탕 안으로 다른 손님도 들이닥쳤다.
“윌? 맞나? 정말인가?”
평상복 차림의 마커스다.
그의 얼굴이 붉다. 비를 맞았는지 젖은 차림이었다.
“오신 김에 같이 목욕이나?”
엔크리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마커스가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욕탕에 풍덩 하고 들어왔다.
생각보다 단련된 몸이었다. 흉터도 곳곳에 있었고.
물론 엔크리드보다는 흉터가 적긴 했다.
“진짜인가?”
마커스의 눈이 빛났다. 대체 넌 뭐냐, 어디까지 하는 거냐? 그런 질문이 담긴 것도 같았기에.
“네.”
엔크리드는 수긍했다.
기사가 되겠다고 말했고 꿈이라 했으며, 뜻과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크리드가 정말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었을까?
마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엔크리드가 나아가리라 믿었지만, 그 일이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걸 듣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
허탈한 웃음 뒤로.
“약혼자?”
욕탕 안으로 요정 중대장이 쳐들어왔다.
“여긴 남자뿐인데, 자신감도 넘치시네. 같이 들어오실?”
크라이스가 그녀를 반기자, 중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약혼자를 제외한 내 알몸을 본 사람은 눈을 뽑아야 하는데, 괜찮나?”
요정식 농담이 욕탕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