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236)
236. 기사가 될 수 있는 길
엔크리드의 ‘윌’은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았다.
편린이다. 조각이며, 일부다.
그러함에도 ‘윌’이다.
이게 마커스가 놀라고, 요정 중대장이 출장인지 휴가인지를 갔다가 곧바로 돌아온 이유다.
욕탕에 있으니 눈 호강도 할 겸 왔다는 걸 요정 중대장은 부인하지도 않았다.
“보기 좋군.”
그녀의 말이 곧 인정이었으니.
“따로 할 말이라도?”
“없다.”
말 그대로 위압을 이겨 낸 게 진짜였는지, 그것만 확인하러 온 거다.
묘한 일이네.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했다.
자신이 한 게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이렇게 난리를 칠 일인가?
하물며 엔크리드 자신도 알고 있는바.
고작 일부, 조각일 뿐임을.
물론 그것만으로 자신은 희열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이만한 충족감을 줄 순 없을 터.
충족감을 느끼는 동시에, 다시금 갈망하기도 했다.
‘이게 시작이라면.’
더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
빛바래고 찢긴 꿈이 기워진 걸 넘어서 마법적인 무언가로 하나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다.
‘아니, 실제로 그런 거지.’
볼을 긁으며 하는 생각이다.
오늘을 반복하는 저주가 찢긴 꿈이라는 천을 하나로 기웠다.
엔크리드도 그걸 부인하진 않았다.
“그럼.”
요정 중대장이 돌아섰다. 그녀는 돌아서서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나갔다.
물끄러미 보던 엔크리드는 머리를 한 번 쓸어올렸다.
저 요정도 참 묘한 성격이라는 생각과 함께.
* * *
아무리 날랜 요정이라도 비를 피할 순 없는 노릇이니, 푹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걸으며 시나르는 제 옆구리 상처를 살폈다.
‘아픈데.’
약을 바르고 하루 이틀 푹 쉬면 될 일이긴 하다. 이 정도면 아무렇지 않을 정도는 아니어도 움직일 만은 한 거다.
상처를 여미고 걷던 요정은 엔크리드를 떠올렸다.
욕탕 안에 앉은 채로 자신을 직시하던 파란 눈동자.
얼굴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긴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점 찍은 상대였던가? 아니다. 분명 농담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군침 도는 위인이 되지 않았나.
‘끌어들이면 좋겠으나.’
그게 마음처럼 쉽지는 않으리라.
왕국의 언어를 되찾는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길드의 일을 처리해 주고 온 참이다.
요정은 그게 자신의 미래에, 자신이 바라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을 터.
고로 꽤 험하고 거친 일을 끝내고 온 참이었는데, 돌아오자마자 들린 이야기는 엔크리드가 기절했다는 거였다.
아니, 정확히는 기절했다가 이젠 기절하지 않고 버텨 냈다는 이야기였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으나,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위압.’
‘윌’은 ‘윌’이 아니면 막지 못한다. 그에 준하는 힘이 아니면 반항하는 것도 불가하다.
반항을 넘어 견뎌 냈다면.
‘윌.’
그 남자가, 그 농담의 대상이었던 이가? ‘윌’을?
시나르는 제 상처를 돌보지 못할 만큼 놀랐다.
그럴 만도 하지 않나.
그녀 또한 눈이 있다.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엔크리드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았다.
행운의 벼락을 수차례 맞는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고난이든 위기든, 그는 무엇이 제 앞에 있어도 몇 번이고 넘어서고 일어선다. 그걸 지켜보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고향의 머저리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남자로다.’
제 부모에게 데려가고 싶다는 말이 반은 진심이란 거다.
본래 요정식 농담은 그 안에 진의를 숨겨 넣는 법 아니겠나.
“재밌긴 해.”
시나르가 빨간 입술을 움직여 혼잣말을 뱉었다.
쏴아아아.
쉬이 그치지 않을 비가 세차게 내렸다.
우르르릉 쾅!
우렛소리도 섞여 들렸다.
요정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겹고 괴롭고 그 끝이 암울하지만 해야 할 일.
그런 일을 하면서 웃어 본 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남자 때문에 쉬이 웃질 않나.
그게 퍽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요정은 지금이 만족스러웠다.
그 때문에 진즉에 이곳을 떠나야 함에도 떠나지 않은 걸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그럴지도 몰랐다.
요정, 시나르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통증도, 제가 이루고자 하는 일도 지금은 그녀를 붙들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속으로 축하할 뿐이었다.
엔크리드가 이룩해 낸 무언가를 말이다.
지금은 그거로 충분했다.
* * *
‘다친 것 같은데.’
엔크리드도 눈이 있다. 예민해진 후각이 증기가 뿜어내는 특유의 향 사이에 퍼진 피 냄새를 맡았다.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눈치챘다면 다른 이들도 분명히 알아봤을 테고.
“폭 빠진 것 같수다.”
렘이 입을 연다.
“뭐가?”
“대장에게 말이유. 하긴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마성의 다릿심이구만.”
막 욕탕에서 일어났고, 땀을 비롯한 것들을 물을 끼얹어 씻어 낸 참이다.
그런 상황에서 렘이 엔크리드의 다리 사이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미친 새끼.”
엔크리드가 그 말에 답하자, 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졌수다. 이건 못 이기겠수.”
하여간 정상이 아닌 놈이다.
엔크리드는 렘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렘은 당연히 피했다.
“아파도 보러 온다. 마성이긴 하군요.”
라그나도 한 마디.
“역시 저랑 살롱이나 차려야 할 얼굴인데, 캬, 특히나 그건.”
크라이스도 엔크리드의 다리 사이를 보며 말했다.
“대대장 앞이다.”
엔크리드가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마커스가 옆에서 껄껄 웃었다.
“그건 나도 부럽군.”
뭐가 부럽다는 건지.
그리 전원이 전부 씻고 돌아서는 길이다.
“어지간히도 험한 일을 하고 왔나 봅니다. 그 요정이 다친 걸 보니. 하지만 큰 부상은 아닐 듯하니 약혼자 걱정은 접어 두셔도 됩니다.”
숙소를 코앞에 두고 작센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들을 건 듣고 정정할 건 정정했다.
“약혼자 아니다.”
“네.”
작센이 무료하게 답하며 숙소 문을 열었다. 안쪽에 있던 둔바켈과 에스터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니, 어느새 핀도 돌아와 있었다.
“맞아?”
핀이 물었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향한 물음임을 알았다.
‘윌’이 맞냐고. 위압을 이겨 낸 게 맞냐고. 소문의 진위를 향한 물음일 터.
“운이 좋아서.”
딱히 해 줄 말이 없었음이다.
“와.”
핀은 그저 입을 벌리며 놀람을 표할 뿐이었다.
“그러다 진짜 기사 되는 거 아닌가?”
처음 봤을 때부터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건 진짜, ‘윌’이라니.
핀의 놀람에 엔크리드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가 꿈이요, 그걸 위해 나아간다.
그걸 이룬다거나 이루지 못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기어서라도 나아갈 뿐.
그 나아감이 이젠 결실이 되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들 잠이나 자자며 자리를 잡을 때다.
시답잖은 농담, 둔바켈을 향한 렘의 구박, 어딜 다녀왔냐는 엔크리드의 물음에 핀이 언어에 미친 놈들이랑 어울렸다는 헛소리를 뱉었다.
핀은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고, 딱히 관심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엔크리드도 묻긴 했지만 자세히 듣지도 않았다.
“그럴 거면 왜 묻는 거냐? 너희는 왜 나한테 관심이 없니? 이렇게 어여쁜 미모의 여성이 한 숙소에 있는데?”
핀이 말했다. 머리칼이 좀 푸석하긴 해도 못난 얼굴은 아니다.
오늘의 반복 덕분에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검은 칼의 여자 도적과 비교하면 확실히 핀은 미녀다.
“크릉.”
옆에서 에스터가 콧김을 뿜었다. 누가 들어도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표범도 비웃네. 씻고 잠이나 자라.”
렘이 낄낄 웃으며 핀잔을 주자, 핀이 욕설을 뱉으며 괜히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원망했다.
“지랄맞은 비.”
말과 함께 핀이 씻으러 나가려는 참이었다. 숙소 문을 잡으려는데 작센이 그 손목을 잡았고, 어느새 일어난 에스터가 핀의 발치에 왔으며.
렘과 라그나, 아우딘도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엔크리드가 핀의 앞을 가로막고.
둔바켈 조차 수인 특유의 감이 발동했는지, 자기 자리에서 어깨를 움찔하곤 송곳니를 드러냈다.
“……뭔데요?”
혼자만 아무것도 못 알아챈 크라이스가 묻는 말이다.
“손님.”
엔크리드가 답했다.
이곳은 보더 가드의 병영이다. 도시 내의 여관방도 아니고 불청객이 쉬이 올 수 없는 곳이란 거다.
그런데도 손님이라니.
“잠깐 볼 수 있겠나?”
다들 문을 주시하던 중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엔크리드가 나서며 말했다.
“내 손님이군.”
문을 열자, 그 앞에 폭삭 젖어 비 맞은 생쥐 꼴이 된 중년 남자가 보였다.
레이피어 검사, 한때 로크프리드 상단의 호위로 있던 남자. 오늘 낮에 엔크리드에게 위압을 보이고 거절당한 뒤 너무 놀라 ‘어’라는 외마디만 반복하던 남자다.
“이제 정신을 차리셨나 보네.”
렘이 뒤에서 비아냥거렸다. 저건 종족 특성 같은 걸까.
하여간 혀가 쉬지 않는다. 레이피어 검사는 렘의 말을 무시했다.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해서 무례를 무릅썼다.”
대뜸 제 할 말만 했다. 낮의 일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나.
지금 상태만 봐도 쉬이 알 수 있는 질문이었다.
비에 젖은 것도 젖은 거지만, 눈 밑은 까맸고 볼은 반나절 만에 홀쭉해졌다.
“얼마든지.”
엔크리드는 거절하지 않았다.
“방금 씻었는데 귀찮지도 않아요?”
크라이스가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답했다.
“귀찮을 리가.”
이런 게 귀찮았다면 진즉에 검을 놨어야지.
눈앞의 상대는 귀하다.
위압을 쓸 줄 알고, 본래 실력 또한 상당할 것이라 짐작했다.
안 그래도 내일 검이나 다시 겨뤄 보자고 할 참이었다.
“일이 생겨서 난 오늘 밤에 가야 한다. 미안하군.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이리 찾아왔다.”
밤 중에 몰래 병영의 담을 넘어서 왔다.
당연히 경계 병력의 눈을 피해서 왔다는 거다. 재주도 좋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엔크리드는 휘하 병력의 훈련 강도를 높이리라 마음먹었다.
상대가 이리 쉽게 담을 넘게 해서야 쓰겠나.
그것과 별개로 지금 순간이 내심 기쁘기도 했다.
“또 병 도졌네.”
뒤에서 렘이 뭐라 하든, 겨루기 위해 자신을 찾은 사람이 있다.
조이는 이바른이었던가?
그런 쭉정이도 아니다. 그 쭉정이가 준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에딘 몰센의 이름은 잊었어도 이바른이란 세 글자는 기억에 남았다.
상대는 ‘윌’을 부리는 자,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진정한 준기사란 것과 같은 말이었다.
아직 비가 그치지 않았다. 빗줄기가 옅어지긴 했으나, 젖는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엔크리드는 방금 씻었지만, 다시금 제 몸을 적셨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좀 젖는 게 뭐 어때서?
전용 연무장 앞에 서자, 바닥이 질퍽했다.
흙바닥은 평소에 넘어져도 부상의 위험을 줄여 주지만, 비가 오는 날엔 발을 잡아끌기 마련이었다.
물론 지금 선 둘에게 바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 * *
“혼자 간다.”
엔크리드가 나서며 한 말이다.
다들 대강 수긍하긴 했으나, 작센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걸 불신했다.
‘수틀리면.’
뒤에서 친다. 작센이 숙소에서 홀로 사라진 이유다.
그걸 눈치챈 렘은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에스터는 묘하게 변한 엔크리드의 기세를 느꼈다.
‘뭐지?’
그녀도 무기는 다룰 줄 알지만, 마력에 관련된 게 아니라면 이리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는 게 맞다.
자신의 저주를 흐리게 해 주는 힘이 흐려졌나?
그건 아니다.
태도가 달라졌나? 전과 다를 바 없는 미친 인간이다.
그런데도 에스터는 묘한 변화를 느꼈다. 그렇다고 그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구경할 이유가 되진 않았으니.
에스터는 눈을 감았다. 졸렸다. 근래 인간으로 수차례 변하며 점점 주문 세계를 갈고닦아 놨다.
몇 번의 경험으로 그녀 또한 세상을 배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던 마법사가 아니라, 전장에서 표범이 되어 구른 덕분이다.
그리 깨달은 게 이거다.
사람 일이라는 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그러니 평소에 미리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마법사란 본래 준비하는 족속이기도 하니.
에스터가 제 다리에 머리를 댔다. 엔크리드가 죽을 일은 없을 테니, 신경을 껐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 안으로 침잠했다.
“들고양이가 갔으니 난 잠이나 자야겠수다.”
렘의 말이다.
“어, 진짜네. 작센 금세 사라졌네요?”
뒤늦게 눈치챈 크라이스가 답했다.
그리 숙소에서 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으면서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렘이 몸을 일으켰다.
“심심하긴 하네.”
그 말이 곧 모두의 마음이리라.
핑계를 대서라도 보러 간다는 거다.
* * *
연무장에 마주 서서 엔크리드는 다시금 위압을 거절했다.
“진짜군.”
레이피어 검사가 말했다. 다시금 놀랐음이다. 당연했다. 어느 누가 이리 ‘윌’을 깨닫고 돌아올 줄 알았겠는가.
대신 엔크리드의 코 왼쪽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검보다는 쉽긴 한데.’
그래도 아직 마구잡이로 쓸 정도는 아니다. 다만, 느끼는 건 있었다.
“쓰면 쓸수록 단련될 것이다.”
레이피어 검사가 비에 섞여 옅게 흐르는 코피를 보고 한 말이다.
엔크리드가 느낀 것과 같았다.
쓸수록 단련될 것이다.
그건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참 그리 서로를 보던 둘이다. 빗줄기가 다시금 굵어지고, 레이피어 검사는 파란 눈을 직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인즉슨.
“내 소속을 밝힐 수 없으나, 난 정명한 기사단의 일원이요, 소속이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지만, 혹시 날 따라나설 생각은 없나?”
쏴아아아아 하고 쏟아지던 비가 둘 사이를 채웠다.
우르르르르르! 꽝!
그칠 것 같던 비가 더 쏟아지고 천둥이 쳤다.
새파란 낙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세상을 환하게 비췄다.
레이피어 검사의 눈과 엔크리드의 눈이 마주쳤다.
‘대련이 아니라.’
싸우고 싶어 온 게 아니라, 다시 가늠하고 마음을 얻고자 왔다.
하물며 상대가 말하길 정명한 기사단의 일원이라 했다.
즉, 이 말은.
“기사단으로 들어오라. 그대의 길을 내가 밝혀 주겠다.”
기사가 될 수 있는 길이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