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238)
238. 인질극
혼혈 거인은 물끄러미 쏟아지는 비를 바라봤다.
물기를 닦고 창가에 앉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자니, 엔크리드란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도?’
오늘이 아닌 내일, 지금이 아닌 미래.
그런 걸 떠올리고 살아도 되는 건가.
그래도 문제가 없나?
그런 질문이 자신의 안에 휘몰아쳤다.
사교도, 마경 성지교의 일원으로서 그녀가 할 일은 명확했다.
“이봐.”
그러니 지금 저 작자의 말에 흔들려야 했다. 마음은 조금도 동하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동의해야 했다.
제비칼이란 작자가 제 방 문틀에 기댄 채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대련 따윈 관심도 없었다. 너도 비슷한 쪽 아니었나?”
제비칼은 눈치도 빨랐고 기억력도 좋았다. 혼혈 거인은 놈과 구면이었다. 즉,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안다. 그렇기에 나오는 제안이다.
사교도가 무슨 무력을 숭상하는 집단도 아니고 이곳까지 왔다면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
“죽이자. 그래야 하잖아?”
그래야 한다. 혼혈 거인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쉬이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고 싶다면 버티고, 살아남고 싶다면 죽여라.’
사교의 가르침이 아직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오롯이 사교도일 뿐, 마경 성지교의 전사일 뿐이니.
그 말 그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제비칼의 제안에 동의했다.
“나한테 작전이 있다.”
제비칼이 한 걸음 다가왔다. 입에서 고약한 썩은 내가 났다. 그 입에서 나온 내용도 똑같이 썩은 내가 났고.
그리 시작된 일이었다.
제비칼은 성문을 서성거리더니 병사 하나를 찾았다.
“이봐, 친구!”
“응?”
기름먹인 망토가 무색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시야가 절로 좁아지는 날이다.
지붕이 있는 곳 밑에서 횃불을 켜도 어두운 날이다.
가시거리가 좁아지는 게 당연했다.
벨은 자신을 부른 작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불빛 밑에 섰다.
상대도 그렇게 했다.
아는 얼굴이긴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해 보니 영지에 들어오는데 이름도 묻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건, 엔크리드의 손님이다. 여관에 머물며 검을 쓰는 손님이자 대련 상대였다.
또한 마커스가 예의 주시하라고 했던 인물이기도 했고.
“무슨 일로?”
제비칼이 빙그레 미소를 보였다. 그 미소가 어째 거슬렸으나, 벨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 좀 있으신가?”
더러운 미소를 가진 놈이 물었다.
벨은 경계 순찰 임무 중이었다.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이건 또 무슨 시답잖은 짓인지.
그리 답하려던 찰나다.
꺽!
갑자기 들린 소리에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뒤쪽에 어느새 커다란 덩치의 전사 하나가 보였다.
혼혈 거인 전사.
이쪽도 아는 얼굴이다. 벨도 수차례 엔크리드의 대련을 구경했으니.
차갑게 굳어진 여자 전사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습격 또는 기습이라고 막 입을 열어 외치려 할 때, 목에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반응할 수 없는 속도였다.
“쉿.”
벨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뭔가가 제 뒤통수를 때렸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양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였다.
전신이 젖은 채였고 벨은 혼자가 아니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바로 옆에서 들린 기도문이다.
눈물범벅인 채로 중얼거린 중년 여성이었다. 양념 육포를 파는, 동료의 모친이다.
그녀뿐 아니라 아는 얼굴이 몇 더 있었다.
“바네사?”
“염병, 이제 일어났냐?”
괄괄한 여관 주인도 있었다. 말투는 여전히 거치나, 눈은 흔들린다. 불안감이 엿보였다.
벨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봤다. 눈이 침침했으나, 사람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을 보니, 자신을 포함해 수십 명이 하나같이 다 묶인 채다.
그리고.
“반항하면 하나씩 죽일 것이다.”
거리감과 함께 들리는 목소리, 벨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오두막 같은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익숙한 것들이 몇 개 눈에 보였다.
가죽으로 만든 낡은 햇빛 가리개, 큼큼한 냄새가 나는 썩은 가죽 몇 장, 몇 년째 불을 피우지 않아 죽어 버린 벽난로.
영지 안쪽이 아니라 성문 바깥 외딴곳에 떨어진 사냥꾼의 오두막이었다. 그러니까 버려진 오두막.
이게 무슨 일인지.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 줄에 묶인 채로 사냥꾼의 오두막에 갇힌 셈이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들어왔다. 옆으로 넘어진 채로 있던 벨이 복근에 힘을 줬다.
“훕!”
몸을 바로 세운 뒤에 창 너머를 바라봤다.
그곳에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놈의 등이 보였다.
‘저 새끼가?’
아직도 머리가 찡하다. 일어날 때 얼굴 옆으로 끈적한 뭔가가 느껴지는 걸 보니 피도 좀 흘린 것 같았다.
죽진 않았지만, 머리통이 깨졌다.
놈의 등 너머, 흐릿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긴 했으나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들리는 목소리로 한 번에 누군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너도 죽을 것 같은데.”
엔크리드의 목소리였다.
벨은 금세 상황을 깨달았다.
인질극이었다.
동시에 벨은 그게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죽이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이 수십이라곤 해도 이들을 위해 엔크리드가 죽어 줄까?
어림도 없는 소리 같은데?
그런데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
벨의 머릿속에 의문이 거듭 이어졌다.
돌아가는 일은 더 지켜봐야 알 터였다.
* * *
제비칼의 수작은 비범하지도, 그렇다고 탁월하지도 않았다.
단순했고 지랄맞았을 뿐.
“다 죽일 거라니까?”
그는 보더 가드에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주변을 살폈다.
관찰했고 파악했다. 그러며 알게 된 것 몇 가지다.
첫째.
‘시발? 대뜸 감시를 붙여?’
자신을 보는 눈이 있다는 거다. 이건 첫날 크라이스 덕에 윗선에 보고한 덕이었다.
그 덕에 마커스가 붙인 눈이다.
그게 제비칼은 못내 불쾌할 뿐이었다.
감시는 그렇다고 치고.
그 뒤 알아낸 것들, 제비칼이 보기에 엔크리드란 놈은 주변 사람과 알게 모르게 가깝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인질로 잡고서 대뜸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콧방귀를 뀔 것이다.
인질이란 상대에게 그만한 가치를 줘야 의미가 있는 거다.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숨겨 둔 자식도 아닌 바에야.
딱 아는 사람. 그 정도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딱 그 정도다. 주변 사람을 물리고 너 혼자만 여기 남는 거.”
그래서다. 제비칼은 상대가 받아들일 법한 조건을 내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혼혈 거인인 저 미친년과 자신이 같이 싸우면 엔크리드를 죽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문제는 무엇인가?
‘저 새끼들이지?’
뒤에서 피식피식 웃으며 도끼를 쓰다듬는 놈부터,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큰 것 같은 곰탱이, 고요한 척 있으나 하는 짓만 보면 언제 어디서 칼질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
“특히 너, 사라지지 마라. 안 보이면 곧바로 이 여자부터 죽일 거다.”
작센을 향한 말이었다.
제비칼은 이미 품에 주민 하나를 안은 채였다. 마멀레이드를 만드는 여자였다. 그녀의 목에 날이 선 나이프가 바짝 붙었다.
곧 주륵 하고 피 한 방울이 흘렀다.
엔크리드는 그녀의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크라이스가 기억했다.
“쥬리의 손끝이라도 건드리면 너 곱게는 못 죽어.”
크라이스가 드물게 진지했다.
저 손으로 훌륭한 마멀레이드를 만드니, 손끝이 특히 중요하긴 하겠지.
쥬리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로 말 한마디 제대로 뱉지 못했다.
전신에 밀랍이라도 부은 것처럼 바짝 굳은 채로 제비칼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다닐 뿐이었다.
그걸 보면서도 엔크리드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제비칼의 얼굴에 더 진한 미소를 그렸다.
‘저 새끼는 하여간 눈깔이 재수가 없어.’
일이 원하는 대로 되면 눈깔부터 파 버리리라.
“내가 말한 게 어렵냐? 아니잖아. 혹시 자신 없어서 그런 거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는데.”
여전히 조악한 도발이다. 제비칼의 조건은 간단했다.
사람을 물려라. 엔크리드 하나만 남겨라. 그 뒤에는?
“혼자서 우리 둘을 차례로 쓰러뜨리면 거기서 끝이라니까?”
그렇게만 하면 인질을 풀어 주겠단다. 분명 개소리이긴 한데, 죽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팔 하나 자르라는 것도 아니다.
들어주지 않으면 주저 없이 사람을 죽일 놈이다. 즉, 애매한 지점이란 거다.
겨우 이런 조건도 못 들어줘?
‘그걸 노린 거겠지.’
냉정하게 보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우군을 물리고 적 둘과 마주하란 소리니까.
저 둘이 동시에 죽이겠다고 덤비면 어쩌겠나?
‘그럼, 뒷일은 감당이 되려나?’
만약 자신이 중상을 입는다면? 뒤로 물린다고 해도 렘을 비롯한 모두는 얌전히 물러나 있을 이들이 아니다.
그럼 곧바로 쫓을 텐데? 또 다른 수단이라도 있는 걸까?
실력이 모자라 머리를 굴려 산 세월이 얼마인가.
눈치만 따지자면 엔크리드도 남 못지않으니.
그는 제비칼의 의도를 읽었다. 읽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너머도 엿봤다.
오감을 넘어서 육감이 말하는 거다.
‘도망갈 수작 외에도, 숨긴 것도 있긴 할 거고.’
그 옆으로 투구를 눌러 쓴 검과 방패를 든 혼혈 거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본래 저 전사 하나를 감당하는 것도 무리였다. 아니, 무리였었다.
이전, 그러니까 양치기 펠과 어울리기 전이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될 것도 같고.’
무덤덤하고 태연하다. 눈빛 또한 같았다.
엔크리드의 눈을 본 제비칼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처음 볼 때부터 재수 없는 웃음이긴 했다.
하지만 숨겨 둔 실력을 엿보고 싶었기에 놔뒀다. 엔크리드는 이게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알겠다고 답하려 할 때다.
“지-라알!”
목소리 한번 우렁차네.
“응? 누가 내 마음의 소리를 훔쳐 들은 거요?”
뒤에서 렘이 헛소리를 뱉었다.
버려진 오두막 안쪽이었다. 벨의 외침이었다.
저러면 먼저 뒈질 텐데? 엔크리드는 내심 걱정하긴 했다.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전부 아는 얼굴이긴 했다.
전장도 아니고 여기서 쿡 찔려 뒈지면 신경 쓰일 법한 이들.
그러니 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했다.
제비칼의 얼굴은 이제 웃음이 아니라, 숫제 무슨 일그러진 가면 같았다.
저 새끼 저렇게 웃으면 얼굴 근육 안 아픈가.
“허허, 재수 없게 웃는 형제님, 그러지 말고 우리 대화를 나눠 봅시다. 성전에서 말하길, 그릇된 길로 가려 하는 자 뒤를 돌아보라 했습니다. 자, 뒤를 보시지요.”
알아먹지 못할 말과 함께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도록 유도한다. 그에 맞춰 작센이 슬쩍 왼발을 들었다. 렘은 왼손을 늘어뜨렸고, 라그나만 하품하며 구경했다.
“개소리 집어치우시고.”
제비칼은 넘어가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결정했다. 어쩌겠나, 목숨을 거는 일도 아니라 생각되니.
“다들 돌아가서 발 닦고 쉬고 있어라.”
“씁, 혼자 하시게?”
“그래도 될 것 같아서.”
예전에도 자주 했던 말이다. 전에 이렇게 말했다면 렘은 신랄하게 비아냥거리곤 했다.
혼자서 뒈지러 가는 거냐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 오기 직전에 대련해 본 결과.
‘씁.’
렘은 할 말을 삼켰다. 늘긴 했다. 이제는 정말 얕볼 수준이 아니다. 거기에 일부요, 조각이지만 ‘윌’도 깨우친 남자다.
당장 왕국 유일의 기사단인 붉은 망토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거다.
뭐, 기사단이라는 게 들어가려면 이런저런 조건을 충족하긴 해야겠지만.
실제 멋모를 기사단에 들어오란 제안도 받았다.
“자, 그래서?”
눈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어진 제비칼을 향해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모두를 뒤로 물렸다. 아예 보이지도 않을 곳까지 멀리까지 보낸 뒤다.
제비칼은 내내 인질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품에 잡힌 쥬리인지, 주리인지만 아니었어도 엔크리드는 진즉에 수작을 부렸을 거다.
아까부터 손등으로 가린 채, 나이프 하나를 쥐고 있음에야.
탄검식이라고 하는 기술을 부릴 준비가 됐다는 거다.
지금 던지면 제비칼은 인질을 방패로 삼을 테니.
‘내 손으로 죽이고 달려들어 벨까?’
인질은 죽지만,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나를 희생하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방법.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그러면 사람이 죽는다. 자신이 만든 일로, 제가 지켜야 할 영지의 주민이 죽는다는 거다.
그거로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진 않을 거다.
이미 일어난 일에서 자학하는 취미는 없으므로.
하지만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으니.
치링.
“보더 가드의 사람을 지킨다고 맹세하진 않았지만, 내 영지에 있는 사람이니.”
엔크리드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냥 두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다.”
비가 그친 하늘이다. 맑게 갠 청명한 하늘 아래, 파랗게 빛나는 하늘 아래.
검을 든 엔크리드가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