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290)
290. 의무와 책임 (2)
“의뢰, 의뢰하겠소!”
비는 그쳤지만, 눅눅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눅진하고 진득한 땀 덕에 아침마다 불쾌함을 느끼며 눈을 떠야 했다.
그 불쾌함은 점심나절 쯤 되면 더 했다.
해가 머리 위로 뜨면 눅눅함을 더해 은근한 열기까지 더해졌다.
정오의 눅눅한 햇살, 불쾌함, 땀, 무겁고 진득한 공기를 가르며 촌장은 다급히 외쳤다.
“얼마든지 드리겠소이다!”
두목으로 보이는 도적은 흥하고 비웃었다.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투였다.
용병 대장이 답이 없자, 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제발”
긴장한 마을 사람 중 몇이 간절한 눈빛으로 용병대를 바라봤다.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장은 음- 하고 짧은 침음성을 삼켰다.
‘안 받나?’
엔크리드의 시선도 대장에게 향했다.
본래 의뢰한 일은 오늘 오전에 끝났고, 용병대는 떠나기만 하면 됐다.
그 때 눈 좋은 용병 하나가 시선을 느꼈고, 정찰 나온 도적을 잡았다.
심문할 것도 없이 도적놈은 제 무리의 위치와 숫자를 말했다.
이름을 날리던 놈들은 아니지만, 숫자가 많았다.
얼추 백 명이 넘었으니.
마을 사람 전부와 용병대 전부를 합쳐서 전투원은 잘해야 서른 명이 넘었다.
머릿수 차이가 두 배가 넘었다.
용병대장은 고심했다.
“용병대는 금화에 검을 파는 이들이다. 의뢰도 없이 싸우진 않아. 미리 받은 의뢰도 아니고 이건 의뢰가 아니라 구원이다. 그만한 의리는 없어.”
그는 용병치고는 의리도 있고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용병대장으로서는 정말 그랬다.
그러므로 그의 선택은 타당했다.
목숨 걸고 싸울 이유 따윈 없으므로.
“현명하네.”
도적단 두목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니겠나.
용병대 새끼들이 작정하고 덤비면 도적단도 피해를 감수 해야 했다.
아무리 잘 싸워도 열 놈은 넘게 죽을 거다.
아니, 스무 놈도 넘게 죽는다.
대장 놈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로 보였다.
이기는 것과 별개로 피해가 크다는 거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다 쓸어버렸을 거다.
애초에 정찰로 나선 놈이 걸리지 않았다면 용병대가 떠나고 시작할 일이었다.
“풀어 줘.”
대장의 말에 부하 용병이 잡힌 도적을 풀어 줬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전부 죽이는 일이오!”
“제발!”
“왜!”
“가진 건 전부 주겠소! 보석도 있소!”
마을 주민이 외친다. 그 중 하나는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퍽!
“다가오면 벤다.”
용병 중 하나가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칼질에 주저가 없을 듯 했다.
실상 여기서 도적들이랑 편 먹고 마을 재물을 나눠 먹지 않는 것 만으로도 용병은 의리를 지킨 셈이었다.
용병대장은 현명했다.
“그만, 다가오면 우리도 무기를 뽑을 거요. 다 물러나라.”
대장은 금세 상황을 정리했다.
한쪽으로 용병대를 물리고, 도적단은 그걸 물끄러미 구경하고.
엔크리드는 중간에 낀 채였다.
자신 또한 용병대의 일원으로 왔기에 빠지면 그만이었으나, 무심히 돌린 눈길에 맹랑한 꼬맹이가 들어왔다.
세 해만 지나면 마을을 나서서 약초꾼이 되겠다는 정신나간 꼬마 계집애.
“아저씨, 가요.”
이 얼마나 맹랑한 애인지.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부조갛ㄹ 판에 그 눈은 사방을 살폈고, 와중에 자신을 향해 손등을 보이며 젓기도 했다.
포기한 얼굴이 아니었다. 도망갈 궁리라도 하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도적을 여럿 상대해 봤다.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알았다.
다 죽을 것이다. 제 한 손 보탠다고 변하는 건 없다. 그러면 손을 보태지 말아야 할까?
자신도 외면하고 돌아서야 할까?
제가 지키고자 했던 걸 버려야 하는 건가?
기사란 무엇인가?
‘내가 바라던 건 뭐였나?’
여기서 돌아선다면? 외면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켜보기만 했던 적이 몇 번이었나.
이번에도 그래야 할까?
모르겠다. 이제까지는 외면하기도 했으며 알면서도 눈을 돌렸던 일이, 이번에는 왜 가슴에 턱 하고 걸리는지.
“어이, 가자.”
뒤에서 용병 하나가 어깨를 툭 쳤다. 인상이 더럽지만, 정이 많은 친구였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의 소일거리도 도와주던 그런 친구.
하지만 돌아서는 데 주저는 없다. 그게 이 대륙을 살아가는 칼잡이들의 기본 소양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놈은 참 드물다. 죽을 걸 알면서도 버티는 놈은 정말 멍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금화도 아니고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맹랑한 낭만을 이유로 그런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설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걸음 물러나면 이런 일조차 외면한다면 다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게 느꼈다.
“야.”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행운의 여신이 가엾게 봐 준 탓일까?
하지만 키스까지 받아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기왕 해줄 거면 잔뜩 운을 몰아 줄 것이지.
우스운 생각이다.
투둑, 투둑, 쏴아아아.
다시금 비가 쏟아졌다.
“엔키, 이 새끼가.”
용병대장은 화를 냈다.
이후 그가 한 말이 참 오래 뇌리에 남았다.
“안 죽는다. 놔두고 가도 안 죽는다고. 이만한 무리를 왜 죽이냐? 너 같으면 뭐가 나온다고 사람을 죽여? 변태야? 안죽여. 안 죽인다고 기껏해야 노예 상인한테 팔겠지. 노예로 사는 게 저들한테도 더 좋을 거다!”
늪지 마을의 삶은 산다는 걸 제하고는 그리 풍족한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노예가 더 좋다고는 못하지.
“우리 용병대에 받으려고 했는데, 멍청한 새끼.”
대장은 발을 뺐다.
어쩔 수 없었다. 고집을 꺾겠다고 두들겨 패서라도 데려갈 사이도 아닐뿐더러, 거기까지 오지랖을 부릴 일도 아니다.
더욱이 그저 칼 좀 쓰는 길잡이일 뿐, 대단한 인재도 아니지 않나.
참 멍청한 놈일 뿐이었다.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머저리다.
“왜?”
황당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촌장이 물었다. 고마움보다 앞서, 너무 어이가 없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저기 나선 작자의 왼쪽으로 세 번째에 선 놈 보이시오?”
“음, 보이긴 하는데.”
“내 원수요.”
사실 처음 봤다.
원수란 말에 도적이 눈을 깜빡였다. 엔크리드의 얼굴을 관찰했다. 저렇게 생긴 놈이라면 보고 잊을 것 같진 않은데.
“너 혹시 광산 마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따.
“씹, 거기서 살아남은 새끼가 다 있네.”
여기 말고도 곳곳에서 패악질을 부리고 다니는 놈들인 듯 했다.
그렇다면 다 죽여도 되겠군.
다 죽이기 전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마음을 단단히 의지를 굳건히 세워야 하지 않겠나.
“진짜?”
촌장이 귓가에 속삭이며 물었다.
“가짜, 농담.”
“……미친 거요?”
엔크리드는 피식 웃어 버렸다.
어차피 싸우기로 했는데 이유가 뭐가 중요하다고.
촌장이 얼마나 황당했는지, 떠나는 용병대를 잡을 생각도 못 했다.
“저 새끼는 우리 책임 아니다.”
용병 대장이 말하고,
“쟤 혼자 남는다고?”
도적 두목이 되묻고.
용병대가 물러 갔다.
그 중 용병 둘이 돌아서는 일이 있었다.
“염병, 너 진짜 애가 왜 그러냐?”
“게르?”
“난 남겠수다. 이 새끼가 눈에 밟혀. 수틀리면 데리고 튀기라도 해야지.”
“개자식아, 그럴 거면 내가 남아야지.”
“피트, 너도?”
“동생 같은 놈이라서 마음이 쓰입니다.”
대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도 마음속으로는 남고 싶으나, 그러다간 용병대가 몰살이다.
대장은 둘이 끝이라며 더 남고 싶은 놈은 용병대를 나가라고 했다.
그게 다였따.
게르와 피트.
용병 둘이 남았다.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피트에게 말하니, 눈두덩이가 두껍고 못생겼지만 아이를 좋아하는 칼잡이가 답했다.
“액면가를 보면 내가 한참 형이지.”
그 말에 엔크리드가 낄낄 웃었다.
고작 한 달 내외지만, 엔크리드를 알게 된 용병 둘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이후 검을 뽑은 엔크리드가 도적 앞을 막고.
“아저씨, 미쳤어요?”
노예로 팔려 가면 다행이지만, 아까부터 개 음경 같은 눈으로 아이를 보던 개 같은 새끼들을 봤을 때, 그리 좋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 꼬맹이가 묻기도 했다.
“반했냐. 꼬맹아? 남자의 싸움은 지켜봐 주는 게 예의다.”
아이의 물음에 게르가 나서서 한마디 던졌다.
“뭐래.”
아이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따.
“반쯤.”
엔크리드는 꼬맹이의 미쳤다는 말에 대충 답하고 검을 들었다.
하여간 미친 짓은 맞다.
얘들 지킨다고 얻는 게 있나? 없다.
여기서 이 지랄 떤다고 어디 훈장이라도 나오나? 어림도 없는 소리다.
왕국 귀족들은 여기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거다.
그들이야 제 배를 불리기 바쁘지 않겠나.
엔크리드도 귀족을 알았다.
가까운 영지에게 도적단 토벌을 의뢰한다면 어떤가.
참으로 선한 영주가 있어 그 말을 들어 준다고 치자.
마을 사람 전부가 이미 노예, 시체, 병신이 되어서 여기저기 팔리거나 묻힌 뒤에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대 영주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도적단을 잡겠다고 병사를 보낼 놈도 아니고.
결론, 놔두면 다 죽는다. 엔크리드 자신이 아니면 나설 놈도 없다.
“저것도 팔면 되겠다. 반반하네.”
도적 두목은 오히려 반색했다.
엔크리드는 발악했다.
갖은 수단을 발휘해 세 놈을 베고 네 놈째에 몽둥이에 머리통을 맞아 자세가 무너졌다.
게르와 피트도 미친 듯이 싸웠다. 게르는 한 자루 도끼를 힘 있게 휘둘렀고, 피트는 긴 창을 푹푹 찌르며 도적 몇 놈의 몸에 구멍을 내줬다.
“이대로 잡혀갈 생각이 아니라면 전부 정신 차려라!”
촌장의 용맹한 외침이 있었다.
이후 날아온 투척 도끼에 머리통이 꽂혀 죽었다.
그래도 싸웠다.
주민 일부가 무기를 들었다. 긴 부지깽이를 들고 달려들고 벌목용 도끼를 휘둘렀다.
“던져!”
약초꾼이 꿈인 꼬맹이도 활약했다. 자기보다 어리거나 한 두살 많은 꼬맹이들과 함께 돌을 주워 던졌다.
뭐라도 될 것 같았다. 운이 따른다면 도망갈 기회라도 생길 듯 했다.
용병대장이 마음을 돌려먹고 기습한다면?
그런 일은 없었다.
“쏴.”
피비비비빙!
활잡이 열, 날아온 화살에 피트가 죽었다. 운 나쁘게 화살 하나가 목을 꿰뚫었다.
“끄르륵.”
그 탓에 마지막 인사가 뭔지도 듣지 못했다.
게르와 피트, 이들이라고 죽을 걸 몰랐을까? 알았지만, 반전을 그렸다.
게르는 작전도 세웠다.
싸우기 직전에 틈이 보이면 자기가 도적 두목 놈을 인질로 잡겠다고 했으니까.
용병대에서도 일대일이라면 지는 법이 없던 게르다. 그럴 듯 했다.
피트는 손이 빠르고 발도 빨라 번개처럼 쏘다니며 싸우곤 했다.
하나가 흔들고 하나가 대장을 잡는다. 작전이었다.
그건 실패했다.
두목 놈은 힘도 좋았고 실력도 좋았다.
게르가 틈을 보고 달려들자, 검 하나를 들곤 도끼를 마주 후려쳤다.
깡!
불똥이 튀며 게르의 인상이 구겨졌다.
상대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시발.”
게르는 절망했다. 피트는 버티고 버티다 목덜미에 화살을 꽂고 먼저 갔으니, 희망은 금세 사라졌다.
“이 개새끼들아!”
게르가 마지막 발악으로 달려들었다.
“어딜.”
도적 두목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제 부하들을 움직여 물리고 포위를 풀지 않았다.
도망가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다.
결국, 그렇게 됐다.
도목의 검에 게르의 목이 잘리고.
“이길 줄 알았냐? 대체 뭘 바라고 덤빈 거냐?”
엔크리드는 끝내 반항했으나, 두목이 맨손으로 목을 졸랐다.
어느새 손에서 빠져나간 검이 진흙탕이 된 바닥에 널브러진 게 보였다.
또한, 한쪽에 끝내 덤비다 머리통이 깨져 피를 왈칵 쏟아낸 꼬맹이도 눈에 들어왔다.
“쟤도 죽었네.”
자기도 모르게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고, 두목은 물끄러미 엔크리드의 시선을 따라가곤 답했다.
“반항이 심했다. 손만 대도 깨물고 난리를 부리더라.”
도적의 말투는 태연했다. 죽고 죽이는 세상이다. 이럴 만도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