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302)
302. 그린펄 부대는 누구의 편인가?
“안 좋다.”
괜찮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이었다.
침대에 누운 그레이엄이 고개만 들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그레이엄은 등을 푹 찔려서 제대로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
즉, 보더 가드 상비군은 지휘관을 잃었다.
성주이자, 대대장이자, 총지휘관이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나 없어도 되잖아.”
그레이엄이 말했다.
부관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 했다. 아니, 부관이 둘 있었는데, 둘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네.”
“아, 아닙니다.”
그레이엄이 한마디 하자 부관이 세로로 끄덕이던 고개를 도리질로 바꿨다.
엔크리드는 한편의 촌극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합니까?”
“아니면 누가 하겠나?”
그레이엄은 새삼 깨달았다.
‘말만 성주지.’
도시의 진짜 영웅은 따로 있지 않냐고.
이번 전투에서 적장을 베고 미치광이 무리를 휘하에 둔 자신도 정상은 아니지만, 아이를 구할 줄 아는 남자다.
그 순간에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
‘쓸모없는 짓이지만.’
그런 사람이기에 믿을 수 있으며.
또 그런 사람이기에 불만이 없다.
당장.
“성주 자리를 넘겨주든가.”
엔크리드가 이리 말한다고 해도 흔쾌히 넘겨줄 것이다.
물론 저자는 그리 말하진 않는다. 환청일 뿐이다.
말만 성주라고 해도 아니꼽지 않다. 묘한 일이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시기 따위의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걸 봐서 그런가?
아니면 손바닥이 터지도록 검을 휘두르는 걸 알기에 그런 걸까.
이제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실력이 늘었음에도 똑같이 손바닥을 혹사하는 남자다.
이런 남자를 시기하는 건, 스스로가 쓰레기이자 병신이라 시인하는 꼴이다.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쓰레기가 되고 싶진 않은 걸지도.’
그레이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궁금한 건 있기에 물었다.
“그 아이는 왜 구했나?”
위험했다. 의미 없었고.
섬광과 폭발, 조금만 방심했어도 죽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남자는 아이를 안고 굴렀다. 등과 어깨 일부 화상을 입으면서도 구했다.
왜? 고작 꼬마애 하나일 뿐인데.
화살 하나로, 또는 나서지 않았다면 자연히 죽었을 아이를 위해 뭔가를 했다.
그 순간에 했던 행동들이 전부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결론은 아이를 구했다는 거다.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무슨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 같았다.
엔크리드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는 태도가 더 인상 깊다.
이 새끼는 정말 대단한 미치광이가 틀림없으니.
그레이엄은 괜히 시비를 걸었다.
“대대장에겐 공손하게 답해라. 중대장. 렘에게 물들었나.”
“그거 모욕입니다. 결투 신청이라도 하라 이겁니까?”
“렘은 실수다.”
“네.”
“이기고 돌아와. 돌아오면 이번 개선에선 내가 앞장서서 반기겠다.”
“미녀도 아니고 다 늙은 남자가 반기는 걸 좋아해야 합니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고, 멍청한 부관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서 수긍을 왜 하나.
“나가.”
그레이엄은 엔크리드와 부관을 같이 내보냈다.
성주로서 도시를 걱정한다.
엔크리드는 그레이엄에게 책임감을 엿봤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이기고 돌아옵니다.”
나가며 엔크리드가 말했다.
그레이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눈에서 우려 따위가 보이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그치고 있었다. 아즈펜이 언제까지 구경만 할지 모르니 곧 나서야 했다.
그린펄의 지원군으로서 말이다.
“눈치 좀 그쳤으면 좋겠는데, 안 그럽니까?”
눈치 없는 부관은 상당히 아둔했다. 눈이 내려서 그나마 쉬는 시간을 벌었다는 걸 모른다.
이 친구는 어떻게 부관까지 간 건가.
“눈치를 좀 키워야겠다.”
엔크리드는 뼈 있는 조언을 하고 돌아섰다.
아이의 어머니를 보았고, 도시에서는 다친 용병 무리를 보았다.
용병은 도시 여관에 머물렀다.
일부는 종군을 약속했고 일부는 용병으로 남겠다고 했다.
재밌는 사람이 꽤 있었다.
개중엔 에딘 몰센도 있었고.
“아버지를 조심해라.”
대뜸 와서 말하기에.
“그 말은 지금 당신을 조심하라는 말이랑 같은 건데 아십니까?”
“경고가 아니라 조언이다.”
“알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다. 지금 중요한 게 몰센 백작일까.
아니지.
일의 선후는 분명했다. 지금 상대는 아즈펜이다. 작정하고 덤비는 아즈펜.
“내 말 잊지 마라.”
에딘 몰센이 거듭 말하기에 엔크리드는 유쾌하게 답했다.
“그런데 이름이?”
“……또 까먹었다고?”
엔크리드는 에딘이 발작하기 전에 발을 재게 놀려 막사로 돌아왔다.
“먹을 거 없수? 먹을 거? 다친 사람은 잘 먹어야 하는 거 모르슈?”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렘이 반겼다.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 같았다. 먹을 걸 더럽게 밝히는.
마침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 참이다.
회복을 위함이기도 했고, 자신을 보고 남아서 싸운 용병들을 둘러볼 겸이었다.
그러니까 손에 빵과 마멀레이드, 양념 육포 따위를 가져오긴 했다.
“먹고 죽으면 그나마 빛깔이 곱다고들 하더라.”
“서쪽 농담인데 용케 아시네?”
렘은 피식 웃으며 입에 빵을 쑤셔 넣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시장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만난 길핀이 떠올랐다.
그 친구 뭔가 좀 이상했지.
“첩자가 여럿 들어왔었고 그 중 몇을 놓쳤습니다.”
대뜸 다가와 하는 말이었다.
“더 철저하게 감시하겠습니다.”
꽉 깨문 어금니에서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긴 했다.
뭐라고 답하진 않았다. 다만, 첩자 색출을 얘들이 왜 하나 싶었을 뿐.
그건 도시 치안대가 할 일 아니냐?
아닌가? 맞는 것 같은데.
어쨌든 길핀은 눈에 불을 켰다. 열정과 열의를 보였다. 이게 마치 제 소명이라는 듯, 신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였다.
크라이스의 명령이 시작이었을테니, 신의 부름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겠지만.
“어, 그래.”
“메엘룬이 칼 좀 쓴다는 놈들이 보이는 족족 손대고 있습니다. 길드원을 늘려서 도시의 밤을 완전히 발아래에 두겠습니다.”
엔크리드는 몰랐지만, 길핀도 전장을 봤다. 전투를 지켜봤다. 특히나 엔크리드를 눈여겨 봤다.
본래도 대단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번 전투에서의 엔크리드는 뭔가 달랐다.
선두에 서서 칼날을 맞이하고.
적장을 마주해 싸운다. 그 또한 놀랍지만, 길핀의 가슴에 깊게 잔상을 남긴 건 아이를 안고 뒹구는 장면이었다.
그 때 봤던 게 며칠이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이를 구할 이유가 있었나?’
없다. 그럼에도 구한다. 그 아이가 납치된 건 자신의 실수였다. 첩자를 색출하고 도시의 밤을 지키기로 했다. 메엘룬이란 프록의 도움도 있었는데도.
‘놓쳤다.’
그날 길핀은 어금니를 너무 꽉 물어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백여 년 전, 홀로 도둑 길드를 통합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도적이 아니라 의적이었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돕는 걸 삶의 기치로 삼았다.
어릴 떄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게 도적질뿐인지라, 그 세계에서 정점에 오른 남자.
대륙 유일의 로그 마스터.
밤의 낭만을 노래한 음유시인.
골목길의 황제, 키우젤라스.
어릴 적 길핀의 꿈은 밤의 수호자였다.
밤의 수호자는 키우젤라스가 만들어 낸 개념이었다.
밤을 지킴으로 사람들의 평온을 노래한다는.
길핀은 주변 이들의 웃음을 보며, 자신은 도적이 아닌 뭔가 다른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나고 자란 도시를 지키는 일에 일조하는 거라 믿었고 행동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다.’
지키자.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킬까.
아이를 놓쳤다. 첩자 몇을 놓쳤다.
길핀의 탓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아이의 어미조차도 그를 탓하지 않겠지만, 길핀은 자신을 탓했다.
‘내 탓이다.’
어쭙잖은 도적 새끼가 사명감을 논하는 거라고비난해도 좋지만.
‘꿈만 꾸는 거라면.’
길핀은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품고 나아가고 싶었다.
그리고그게 산산이 조각나기 직전에 엔크리드가 아이를 구했다.
어미의 감사를 보았다.
그렇게 길핀은 눈앞의 남자에게서 비범함을 엿봤다.
검술 실력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키우젤라스가 이랬을까?
엔크리드는 마음이 다르고 의지가 다른 사람이다. 길핀은 그걸 알아봤다.
“왜 그런 겁니까?”
돌아온 크라이스에게 묻자, 대답도 걸작이지 않았나.
“아니꼬워서 그랬을 겁니다. 적장이란 새끼가 하는 짓이 같잖으니까. 구하면 얼마나 열 받겠어.”
정말 그 이유일까?
아니다. 사람을 구한거다. 구함으로 도시를 지킨 거다.
엔크리드가 한 일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늙은 도적의 마음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길핀은 새삼 결심했다.
‘이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시의 밤을 지킬 것이고, 이 남자가 가는 길에 작은 돌부리를 치우는 역할이라도 감수할 것이다.
크라이스가 신경 쓰고 거뒀음에도 충성은 엉뚱한 쪽에 맹세하는 꼴이지만, 나중에 크라이스가 길핀의 의도와 생각을 전부 알게 됐을 때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럼 그러라지 뭐, 이런 태도다. 덤덤했다.
어차피 할 일만 잘하면 되는 거다. 오히려 미리 말해 주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수틀릴 때 제 뒤통수를 때리진 않겠다는 거니.
엔크리드는 물론 이 모든 걸 몰랐다.
다만, 열의를 보이는 사람을 보는 그 자체가 즐거울 따름이었다.
“응원하지.”
“길가에 놓인 돌부리라도 치우겠습니다.”
이후 이어진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시 골목길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말로이해했다.
잠깐 도시에 들른 것치고는 이런저런 일도 있었고 만난 사람도 꽤 많았다.
오는 길에 그레이엄까지 보고 왔으니.
짧은 상념을 끝으로 시선을 돌리자, 광대뼈가 부은 둔바켈이 보였다. 누가 봐도 처맞은 꼴이었다.
“눈 그치면 출전인데 애를 병신으로 만들면 어떡하냐?”
엔크리드가 나무랐다. 당장 전력이 될 수인이다.
“이 정도면 반나절이면 나을 거요. 내가 뭐 응? 아무 생각도 없이 애를 패는 사람으로 보이슈?”
엔크리드는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나, 잘 참았다. 아까의 눈치 없는 부관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턱이 좀 내려간 것 같은데?”
“눈도 다쳤나 보네.”
무시하고 넘어가니, 하루 푹 자서 피부 미용에 전력을 다한 크라이스가 화로앞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겉만 보면 한가롭게 보내는 것 같지만, 아니다. 머리를 팯팽 굴리는 중인 거다.
그리믿으며 보고 있는데.
츄릅.
크라이스가 침을 흘리다가 도로 회수했다.
“아, 졸았네.”
진짜 한가하게 구르고 있네.
엔크리드는 가서 뒤통수를 한번 갈길까 고민했다.
마침 크라이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왔습니까?”
“그래.”
“생각해 봤는데요.”
“생각해 봤는데?”
저 주둥이에서 쓸데 없는 말이 나오면 일단 한 대 때리고 시작하는 건 어떨까.
엔크리드의 생각을 모르는 크라이스는 평소와 같은 어조로 이어 말했다.
“아즈펜 놈들은 함정 팠을 겁니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은 점점 줄었고, 크라이스는 그 동안 머리를 굴렸다.
‘차라리 뒤를 쳤다면.’
어려운 싸움은 됐을 테지만, 예상해 둔 싸움이었을 거다. 아즈펜은 유리함을 이점으로 삼고 덤벼야 했다.
그런데 안 그랬다.
겨울의 전투는 안 그래도 힘든데, 시간을 끄는 건 어떤 이유인가.
아즈펜은 쳐들어오지 않고 기다렸다.
눈이그치고 있는데도 기습도 없다. 이제야 서서히 부대를 움직일 준비를 한다고 했다.
마치 이쪽 전투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다.
그게 몹시 찝찝하다. 뒤가 구리다. 매우, 매우 안 좋다. 불안감이 다시금 치솟았다.
‘나라면 쳤어.’
싸울 때 뒤통수를 치는 것만큼 쉬운 싸움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아즈펜은 그러지 않았다.
뭔가 있다. 예측이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이란 거다.
거듭된 생각의 결과, 크라이스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검은 칼과 사교도 연합보다 더 힘겨울 겁니다. 어디 기사라도 하나 숨겨 뒀을지도 모르고요. 당장 기사 전력이 나온다고 해도 아군에서 기사급 전력을 보내 줄지는 모르는 상태고요. 병력 일부를 돌려서 도시를 직접 노릴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쟤들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거죠.”
“대응은?”
엔크리드가 묻고 크라이스가 답했다. 화로를 사이에 둔채로 하는 평온하고 평이한 어조였지만, 출전 지휘관관 그 휘하 군사와의 대화나 다름없었다.
왜 아니겠나.
그레이엄은 암살자에게 당해서 드러누었다. 엔크리드에게 전권을 넘긴 채였다.
화로의 불꽃이 크라이스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보이게 했다.
“그린펄에 나가 있는 대대장이란 사람, 잘 압니까?”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마주한 적도 없는 인간이었다. 다만 여기저기서 주워듣길, 기회주의자이며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란 소리가 있었다.
보급과 진지 구축에는 탁월하지만, 전투는 장기가 아니라는 것도.
여러모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최악의 순간, 우리는 적이 두 배로 늘어나는 마법을 직시할 겁니다.”
마법이란 소리에, 옆에서 에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흥.”
오늘은 인간 형태다.
말하는 사이, 눈이 완전히 그쳤다.
눈이 그쳤으니, 전열을 정비하고 출진할 때다.
몸은 반쯤 회복됐다.
그레이엄이 없으니, 엔크리드 자신이 총지휘관으로 앞장 서야 할 것이다.
“그건 확인해 봐야겠지.”
그린펄 부대는 지금 누구의 편인가?
이미 아군으로 뒀기에 아즈펜이 지금까지 미적미적 기다린 건 아닐까?
의심할 법도 했다. 아니, 의심해야 했다.
“출전부터.”
며칠의 단꿈 휴식이 지났다.
늑대 몇 마리를 때려잡았으니, 뒤를 노리는 호랑이를 맞이할 때였다.
출전 준비, 이후 진격.
그린 펄 곳곳의 목책과 망루를 확인하고 안쪽으로들어선 순간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린펄 대대장이 완전히 무장한 채로 엔크리드를 맞이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는 순간, 크라이스는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듯 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