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320)
320.
극찬 두 번째 오늘의 아침이 밝았다.
엔크리드는 다시금 똑같은 오늘을 반복했다.
회피의 감을 넘어선 불길함의 사슬은 여전히 몸을 옥죄었다.
사지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사이, 죽어 가는 이를 지켜보는 것까지 다르지 않은 오늘이었다.
저녁이 되어 갈 때쯤, 엔크리드는 할 말은 했다.
최소한의 준비다.
“라그나, 검은 쥐고 쉬어라.”
미리 말했으나, 검이 문제가 아니다.
지쳤다.
다쳤다.
최선의 상태가 아니다.
알고 있다고 해서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재앙이었다.
괜히 재앙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기사는 다시금 제 동료 모두를 죽였다.
세 번째의 오늘이 지나가고 네 번째의 오늘이 지나갔다.
반복됐다.
불길함, 옥죄는 사슬, 동료의 죽음, 제 죽음, 통증, 가끔은 강물의 뱃사공을 만났다.
“절망이다.”
사공이 다시금 나와 머릿속에 절망이란 두 글자를 심었다.
엔크리드는 답하지 않았다.
“절망이다.”
열두 번의 오늘이 지나갔다.
똑같은 오늘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렇게 불길함의 사슬에 얽매여 멈춘 채로, 엔크리드는 두 눈에 동료의 죽음을 담았다.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크라이스, 싸우는 재주도 형편없으면서, 굳이 자신의 앞을 막는다.
매일 도주를 이야기한 놈이, 왜 이 순간에 제 앞에 등을 보일까.
이건 저주였다.
그러하기에 무뎌지지 않는다.
육체적 고통도, 내면의 고통도 같다.
항상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항상 모든 걸 지켜봐야 했다.
엔크리드는 애초에 외면할 생각도 없긴 했으나, 고통은 고통이다.
“이게 절망이지.”
가벼운 말투의 뱃사공이 지나치고.
스물두 번째의 오늘이었다.
꿈틀.
시나르의 가슴이 갈라진 직후, 엔크리드의 손가락이 까딱였다.
지난 스물한 번의 오늘과는 조금은 다른 오늘의 반복이었다.
“약혼자.”
그녀는 죽지 않았다.
처음의 오늘에선 죽은 줄 알았는데, 그녀 또한 평범한 실력은 아니었다.
나이들로 검의 궤적을 틀어 내고 상처를 최소화했다.
그 안에는 흘리는 검과 받아 내는 검, 두 개의 검술이 섞였다.
라그나는 어떠한가, 그는 상대의 검격에 속도로 승부를 거는 대신.
제 검을 세워 힘으로 버텨 내는 방식을 썼다.
배울 게 많은 이들이었다.
꿈틀.
라그나, 크라이스, 둔바켈, 에스터.
그들의 죽음을 전부 본 뒤, 엔크리드는 손의 자유를 찾았다.
“이제야 움직이네.”
그리고 단출한 한마디.
“음?”
그럼에도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쥔 칼날은 그대로 심장을 찔렀다.
엔크리드는 또 죽었다.
출렁.
검은 강과 뱃사공이다.
할 일이 없는지 계속 나타났다.
“절망이다.”
뜻을 전한 사공의 초점 없는 시선이 엔크리드를 향했다.
엔크리드는 무심히 사공을 바라봤다.
매번 절망이라고 말하는데 지치거나 지겨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무심히 보던 엔크리드의 몸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오늘을 다시금 살아야 했다.
죽음을 반복하는 오늘로 향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리 몸과 얼굴이 연기처럼 흐려지는 사이다.
사공은 엔크리드를 보았다.
그는, 사공은 표정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은 그 마음속 감정을 일부나마 표현하곤 했다.
지금도 그러했다.
꿈속에서의 시간이 끝나가며 엔크리드의 몸이 흐려지는 중, 사공은 제 감정 일부를 표현했다.
아예 말로 바꿔 뜻을 전했다.
“웃어?”
* * *
강물이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꿈에서 깼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오늘의 시작이었다.
서른두 번째였다.
“꿈자리가 사납네.”
일어나자마자 엔크리드가 중얼거렸다.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이거였다.
지나간 오늘을 꿈으로 치부하는 것.
실상 꿈으로 치부한다기보다는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으로 삼았다고 해야 옳았다.
아무것도 못 하는 오늘이라니.
상당히, 아니 꽤 불쾌하지 않나.
전신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그런 기분도 들었다.
“무슨 꿈입니까?
한쪽 옆에서 눈곱을 떼며 크라이스가 물었다.
“너 죽는 꿈.”
“재수 없게.”
솔직한 엔크리드의 말에 크라이스도 진정성 있게 답했다.
“라그나, 너 죽는 꿈도 같이 꿨다.
검 쥐고 있어라.”
“정말 재수 없는 말이긴 합니다.”
라그나 또한 진정성을 담아 답하니, 참으로 정겨운 아침이었다.
라그나가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대뜸 하는 말이 마음에 걸릴 법도 했다.
하물며 그 말을 하는 게 엔크리드다.
“야만인 놈한테서 헛소리하는 게 옮은 겁니까?”
라그나가 드물게 불평 비슷한 걸 뱉었다.
무심한 말투이긴 했으나, 내용은 영 아니지 않나.
엔크리드는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모욕이냐?
결투 신청이다.”
어디서 렘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섞어서 받아치니, 라그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지나간 여느 오늘보다 몸을 더 활기차게 움직였다.
절망이라니, 그건 쉬이 마음에 닿지 않는 말이었다.
극한 상황인 것도 인정.
상대가 말도 안 되는 괴이한 수준인 것도 인정.
하지만 답은 명료했다.
‘한 번.’
첫 일격을 버텨 내면 물러간다는 것.
그래서 이게 절망인가?
아니다.
만약 피하는 길이 있다고 해도 피하지 않을 판이었다.
상대는 기사였다.
그게 사신이 되어 온다고 해도, 엔크리드는 제 꿈이 다가온 것에 순수하게 기쁨 또한 느꼈다.
고통만큼이나 희열 또한 함께였다.
동료의 죽음은 꿈으로 묻고 다음으로 향하는 것, 엔크리드는 그걸 시작으로 삼았다.
즉, 아무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한 답만 남았을 뿐이다.
‘받아 내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한다.
필요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렇게 한다.
그러면 되는 거였다.
제 동료가 매번 죽는 걸 봐야 한다고?
그게 절망이라면?
‘허술한데.’
그동안 넘어온 오늘이 몇 번인가.
반복하는 오늘을 비트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반복되는 오늘은 반드시 같은 일이 벌어져야 하는가?
이미 아닌 걸 안다.
당장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으니.
엔크리드는 막사 구석에 놓인 제 무장부터 챙겼다.
몸에 붕대 갑옷까지 두를까?
아니, 그건 의미가 없을 거다.
기사의 검을 보지 않았나.
방어구 따위로 막을 수 없다.
시나르의 몸에 두른 것도 보통의 방어구는 아닌데, 그냥 갈렸다.
그 일격에 뭔가 깃들었다는 거다.
그게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윌.’
기사란 ‘윌’을 쓰는 자.
엔크리드는 확실히 인지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은 흘려 볼까?
뱀검이 먹힐까?
제 몸이 엉망인 건 이미 잊은 뒤였다.
비슷한 오늘이 지나가고.
“다들 고생했다.”
엔크리드는 항상 비슷한 말을 했다.
반복된다고 해도 무뎌지지 않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
엔크리드는 그걸 잊지 않았다.
고생한다는 말을 비롯해 시답잖은 말들이 더 오간 뒤다.
“마성이야, 마성.”
크라이스의 말을 끝으로 부욱, 천막이 찢기고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들어왔다.
언제나 같은 시작이었다.
“미안하게 됐다.”
남자는 말하고 엔크리드는 준비를 시작했다.
“한 번이면 그냥 갈 것이다.
그게 내 명예를 그나마 존중하는 일일 테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는 듯한 태도다.
그런데도 한 번의 검격을 막지 못한 거였고.
그가 뭐라고 말하는 사이, 엔크리드가 움직였다.
사실 남자가 한 말 따위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어디 한두 번 들었어야지.
반복되어 무뎌지는 게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 법이다.
기억에 남은 말이야 지겨울 따름이다.
명예고 뭐고 간에, 집중력이 타올랐다.
불길함의 족쇄가 몸을 감싸고 조였으나, 이미 한 번 이겨 내기 시작했기에.
손가락 끝부터 전신 근육에 명령한다.
움직이라고.
엔크리드의 발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몸에 제 의지대로 움직인다.
불길함이 여전히 목을 감싸고 조였으나, 상관없었다.
무시할 만했다.
일단 움직이지 않는가.
남자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걸음을 떼는 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엔크리드에게로 향했다.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나 먼저.”
“약혼자.”
시나르가 말렸으나, 이미 늦었다.
“내가 목표 같은데?
아닌가?”
말하며 발을 마저 뗀다.
맞았다.
그동안의 오늘만으로도 알아낼 만한 건 다 알아냈다.
오늘을 넘어서기 위해선 그 오늘에서 필요한 걸 인지하고 직시해야 하는 거다.
‘저자의 목표는 나.’
거기에 의기를 보이며 나서면 절대 외면하지 않을 성격이다.
상황 복기를 통해 알아낸 걸 말하고 마주했다.
남자, 기사가 검을 들었다.
팅 하고 뽑힌 이 빠진 숏소드, 그게 사신의 무기다.
꿈이라는 사신이 무기를 들었다.
“호쾌하구나.
너.”
그가 검을 휘둘렀다.
퍽.
엔크리드는 막으려 했으나, 상대의 검이 먼저였다.
라이카노스보다 빠른가?
작센의 무살 찌르기와 비슷한 건가?
수없이 봤으나 막는 시도는 처음이었다.
엔크리드는 속도의 차이를 느꼈다.
상대는 발부터 시작해서 힘의 전달 없이 검을 뿌렸다.
그야말로 타이밍을 읽을 수 없는 검이었다.
‘내가 느렸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느렸고 놓쳤으니, 심장이 쪼개지는 건 당연했다.
죽음이 다가온다.
그럼에도 엔크리드는 히죽 웃었다.
원하던 첫 번째 일은 이루지 않았나.
그걸 사신도 봤다.
‘미친놈이군.’
그는 엔크리드의 실체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상대는 정상이 아니었다.
물론 엔크리드로서는 알 바 아닌 일이었다.
그는 그저 꼼수가 먹혔다는 것에 만족했다.
시나르, 라그나, 크라이스, 둔바켈, 에스터까지, 이들이 죽는 걸 보기 싫으면 먼저 나서면 될 일이었다.
눈이 감긴다.
죽음이 다가왔다.
출렁, 검은 강이다.
심상 세계를 열 틈이 아닌데도 잠깐이나마 기어코 세계를 열고 들어온 사공이다.
그는 스쳐 가며 극찬을 남겼다.
“미친놈.”
저런 찬사도 벌써 두 번째였다.
엔크리드도 가까스로 답을 남겼다.
“감사.”
길게 말할 틈은 없었다.
어째 멀어지는 강물 위 나룻배가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모를 일이다.
어쨌든.
‘몸은 움직인다.’
그럼, 이제 받아 낼 일만 남은 거였다.
“후, 좋아.”
“뭐가 좋다는 겁니까?”
깨어나자마자 하는 말에 크라이스가 물었다.
“신경 쓰지 마라.”
엔크리드는 궁리했다.
당장 몸을 회복할 수 있는가?
없다.
생각하며 라그나의 검을 들어 그의 침상 옆에 세워 뒀다.
“……뭡니까?
대련하자고?”
“갖고 있으라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행동이 편하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몸에 열을 올리려면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는 것도 중요했고.
화로 옆에서 근육을 늘리고 재생력에 자극을 주는 동작을 연이어 행했다.
그러면서도 궁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막지?’
여전히 막막했다.
몸만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당장 막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고작 한 번의 칼질 아닌가.
‘아니지.’
고작 한 번의 칼질이 아니다.
기사의 검이다.
‘말도 안 되긴 하네.’
엔크리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전장에서 한 일을 알았다.
제 검은 일반 병사 무리 따위로 막히지 않았다.
칼 좀 쓴다는 용병도 벴으며 휴리어 가문에서 나온 놈도 벴다.
그중 마법사와 주술사도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적 무리에 갇히기도 했다.
감각에 의존해 빠져나오긴 했으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을 반복하는 걸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신기를 넘어선 신비다.
검 한 자루, 정확히는 세 자루지만, 어쨌든 검만 들고 그 험난함을 주파한 것처럼 보이게 했으니.
“마법사였어요?”
크라이스가 대뜸 이렇게 묻는 것도 당연했다.
에스터까지도 혹시나 하는 시선을 보냈다.
당연히 아니다.
주문은 쓸 줄 몰랐다.
다시금 기사의 검을 되새겼다.
이제는 자신이 일반 병사가 된 기분이니.
생각이 이어졌다.
작센이 있었다면 눈치챘을까?
아니, 작센이 있었다면 기사한테도 쉽게 당하지 않았을까?
그가 어떻게든 했을까?
라그나가 다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잡념이었다.
절망이라 이건가.
사공이 머릿속에 쑤셔 넣은 감정의 잔재가 남은 걸까?
엔크리드는 그 모든 걸 굳이 버리거나 지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놔뒀다.
상관없었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바라볼 것이 없기에 희망을 끊고 무너지는 걸 말한다.
스스로 비관하며 무너지는 걸 말한다.
그 모든 건 엔크리드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기사의 일격을 받아 내지 못해 오늘에 갇힐 거라고?
오히려 반갑다.
아무것도 못 하고 어떤 계기도 없이 꾸역꾸역 하루를 버티고 살며 내가 품은 꿈이 스러지고 찢어지며 낡아 가는 걸 보느니.
“오늘 하루도 세차게.”
그리 발악하고 말지, 죽음이 다가온다고?
상관없다.
어찌 됐든 죽기 위해 살진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지나간 오늘이, 뱃사공이 고뇌와 무지라 말했던 것들이, 그 이전에 있었던 무수한 오늘이.
엔크리드의 껍질 하나를 부수고 깼다.
처음 오늘을 맞이했을 때처럼, 정신이 똑바로 곧게 바로 섰다.
그건 작은 깨달음이었다.
또한, 큰 깨달음이기도 했다.
‘오늘을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늑대인간과 마법사를 상대할 때도 이용했고, 스펠 트랩을 뚫어 낼 때도 오늘을 충분히 활용했다.
개념의 확장이다.
발악하되, 반복의 저주를 감내하고 이용한다.
이제껏 몸으로 해 온 일을 머리로 인지한 순간이다.
엔크리드는 눈이 뜨였다.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라그나.”
“……뭡니까?”
자연스레 목소리에 힘이 깃들었다.
라그나는 엔크리드의 태도 변화에 반응했다.
갑자기 또 왜 저래?
“몸이 멀쩡하다는 전제하에.”
엔크리드는 눈을 반짝였다.
뭐랄까 이상하게 흥분되며 신이 난 눈깔이라고 해야 할까?
그 상태로 입을 열고 있으니, 라그나가 말을 끊었다.
“지금도 멀쩡합니다.
대장보다는.”
허세란 어떤 면에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엔크리드의 눈빛만큼이나 라그나의 허세가 빛났다.
엔크리드는 자연스레 말을 받았다.
“내 몸 상태는 열의 아홉이야.”
사실은 다섯이다.
“전 완벽하게 나았습니다.”
“나도 지금 막 다 나았군.”
둘의 대담을 듣던 시나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쟤들 뭐하니?”
“누가 더 바보인가 승부를 내는 중입니다.”
크라이스는 상황을 정리했다.
“난 안 다쳤어.”
둔바켈이 입을 놀렸다.
그녀 또한 다치긴 했다.
물론 아무도 그녀의 말에 반응하진 않았다.
엔크리드와 라그나 또한 주변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엔크리드가 외면하니, 라그나는 자연히 그에 따라왔다.
본론은 이거였다.
“기사의 검을 받아 낼 수 있나?”
그 물음, 그 태도, 말에 실린 무게와 눈빛, 허세와는 별개로 타오르는 무언가.
그 모든 게 자극이었다.
라그나는 질문을 받고 제 세계 안으로 잠시 침잠했다.
이번 싸움은 계기였다.
라그나에게는 길이 보였다.
자신의 재능이 어디로 향할지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만, 길이 보인다고 해서 걸어가 본 건 아니다.
경험은 하지 않았기에 명확히 알 순 없었다.
하지만 빛나는 재능이 미리 길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계기로 인해 깨어난 재능이 다시금 보여 준 길이다.
라그나는 반쯤 확신했다.
이게 바로 기사로 가는 길이라고.
그러니.
“막습니다.”
허세를 제한다면, 그럴 수 있었다.
‘윌’을 담은 절단, 이번에 얻은 것으로 먼저 길을 낸다면, 기사의 검도 막을 수 있다.
어렴풋한 확신이다.
자신감이기도 했다.
적어도 일격에 맥없이 당하진 않는다는 거다.
궁리라는 건 혼자서 대가리 싸매고 병신처럼 군다는 게 아니었다.
또한, 자신의 변화만큼이나 라그나의 변화 또한 은근히 느껴졌음이다.
특히나 기사를 보고 매번 반복되는 오늘에서 라그나의 반응은 조금씩 달랐다.
그 말은 무엇인가.
뭔가 보인다는 건 아닐까?
의심과 의문이다.
엔크리드는 쉽고 편한 길을 봤다.
라그나에게서 답을 구했다.
“어떻게?”
자, 그러면 방법을 말해 봐라.
라그나는 약에 취한 것 같았다.
엔크리드의 목소리와 눈빛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서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는 기사의 검을 상상했고 그려 냈다.
재능만 보자면 가히 대륙 최고라 할 수 있는 남자다.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입은 금세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