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35)
35. 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사고뭉치 분대원은 전부 개성이 강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중에서도 라그나는 특별히 더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뿐더러 딱히 신경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대충 배 채우고, 대충 싸우고, 대충 사는.’
그리 대충 살면서 잠도 많다.
그런 라그나인지라, 일전에 정찰대에 대신 지원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며 엔크리드는 내심 놀랐었다.
그 라그나가 정찰을 대신 나가겠다며 나선다고?
우리 게을렀던 분대원이 달라졌나?
그건 아니었다.
라그나는 변덕쟁이에 기분파였다.
그때 당시에 분위기에 취해 나섰지만, 아마도 하루, 아니 반나절도 안 돼서 안 가겠다고 했을 터였다.
애초에 그런 걸 예상했기에 보내지도 않았겠지만.
괜히 사고뭉치 분대에서 귀찮은 임무 대부분을 엔크리드가 처리한 게 아니었다.
라그나는 어찌 보면 엔크리드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매사 의욕이 없는 편이었고, 엔크리드는 시간을 쪼개서 검을 휘두르는 타입이었으니까.
물론 라그나도 가끔은 검을 휘둘렀다.
복귀했을 때 봤던 것처럼 렘과 어울릴 때도 있었고, 전장에서 활약할 때도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라그나는 ‘의도한 건 아닌데’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엔크리드는 그런 라그나를 알기에 그가 자신한테 관심을 보이는 게 신기했다.
‘어쩐 일로?’
정말 드문 일이었다.
때때로 뭘 묻기도 하고 요구도 하지만.
이처럼 며칠 내내 눈으로 주시하며 진득하게 질문을 정리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엔크리드는 제 이마를 긁던 손을 내렸다.
분대원 중 렘이 그나마 활발한 편이지만, 렘 새끼도 일정한 선 밖에서만 사람을 대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게 보였다.
선 안으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 타입이다.
어떻게 보면 라그나 같은 게으름뱅이보다 더 까다로운 타입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렘은 할 말은 한다.
라그나는 필요한 말도 잘 하지 않는 타입이고.
그런 라그나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잠시 라그나의 눈을 바라봤다.
둘 사이에 고요한 침묵이 오갔다.
엔크리드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빤히 보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보였다.
근래 비가 자주 오더니만, 작은 구름조차 없는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절로 가슴이 탁 트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얘가 왜 이러는지, 무슨 이유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자신이 추측한 의도가 맞는지 따위의 생각이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고민 따위 때려치웠다.
물었으니 답한다.
검을 대할 때도, 사람을 대할 때도 매사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언제부터 이런 걸 고민했다고.’
매사 최선을 다해도 원하는 건 아주 멀리 있기에, 언제나 갈구하는 삶을 살았다.
라그나는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아마도 틈날 때마다 검을 휘두르는 걸 말하는 것일 터다.
아마도 매사 어떤 것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일 터다.
아마도 비루한 실력으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묻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엔크리드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만약 내가 검을 잘 썼다면 어땠을까?”
임시로 구축한 진지 외곽.
그늘 하나 없는 곳, 햇볕이 둘을 감싼 가운데 라그나의 시선이 엔크리드의 얼굴에 머문다. 엔크리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뭐가 될 수 있었을까?”
엔크리드의 목소리는 유려했다. 잘 만든 악기 같았다.
적어도 라그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열에 들뜬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낙담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 그리 유유하고 담담했다.
“지금 난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둘러. 그런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거든.”
말과 함께 엔크리드가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밑으로 수직으로.
붕.
날붙이가 공기를 가르며 특유의 향을 퍼트렸다.
쇠 냄새가 섞인 전장의 향이 라그나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엔크리드는 라그나가 옆에 있든 없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검을 수련하는 거다.
위에서 밑으로.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다시 옆으로.
이내 가상의 상대를 두고 바인드, 검과 검을 붙여 당기는 시늉을 하며 뒷날 치기를 했다.
라그라는 대답 없이 그런 분대장을 빤히 바라봤다.
나우릴리아 왕국의 최하급 병사.
라그나는 사고뭉치 분대장의 실력이 고작 최하급에 머무를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수준 높은 검사나 전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용병 업계에 뛰어들어도 잘해야 중간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중급 용병이라면 그리 뛰어난 실력이라 할 수 없다.
라그나는 한때 용병계에 깊게 몸을 담았기에 용병의 수준을 잘 알았다.
검에 관한 것만큼은 프록만큼이나 타고난 통찰력도 있었다.
그는 분대장의 실력을 가늠했고, 그의 한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늦었어.’
시작이 잘못됐다.
검을 쥐었을 때부터 기본기에 충실해야 했다. 재능의 부족함이 그에게서 기회를 앗아 갔다.
지금의 분대장은 어떤가.
그의 말대로였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 그걸 위해 갈고닦은 기술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분대장이 지닌 것 중에 쓸 만한 건 두 개 정도다.
재수는 없어도 실력은 괜찮은 야만족 렘이 가르친 것.
그러곤 갑자기 실력이 늘더니 보인 찌르기.
그 두 개를 제외하고 보면 기본기가 부족해, 항상 편법에 기대는 기술뿐이다.
그 편법이 문제였다.
라그나는 자신의 통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그걸 말해 주는 대신 신경 쓰이는 부분을 물었다.
“검을 잘 쓰게 되면 그럼 그때는 뭘 하실 겁니까?”
엔크리드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췄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주르륵 흘러 턱 끝에 맺히더니 바닥에 똑 떨어졌다.
밟고 선 흙 위로 떨어진 땀이 스르르 흙 안으로 금세 스며들었다.
햇살, 검, 바람, 하늘.
모든 걸 가슴에 품은 채, 엔크리드는 실상 수없이 되뇌었던 꿈을 뱉었다.
“기사, 전장의 끝을 향해 달리는 기사가 되고 싶다.”
“왜요?”
라그나가 되물었다. 그에게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라그나는 길이 보였다.
경험하지 않아도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길이.
그럼 그 길이 즐겁겠는가.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도 딱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다음에야, 그 길을 걸을 의지가 생길 리 없었다.
라그나가 그랬다.
그는 목적지와 길이 보였으나 걷고 싶지 않은, 걸을 수 없는 방랑자였다.
“되고 싶다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이건 로망이다. 낭만이다. 그의 삶이고 지나온 나날이다.
동시에 매료되었던 어린 날의 꿈이기도 했다.
자신의 꿈에 대해 그동안 얼마나 되뇌었던가.
되고 싶다는 것에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저 되고 싶은 거로 끝낼 생각도 없다.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다. 가난하고 병든 이를 위해 검을 들고, 명예를 위해 검을 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검을 들고 싶다.”
기사란 무엇인가.
그저 잘 죽이고 잘 싸우는 살인 병기인가.
흔히 기사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무언가를 죽이는 데 특화된 전투 병기.
하지만 엔크리드가 꿈꿨던 기사가 고작 그런 거였다면 지금까지 검을 휘두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명예와 신의, 검으로 제 뜻을 피력하는 자.
이제는 대부분 찾지 않는 기사도를 품은 검.
엔크리드는 말하며 크랑을 떠올렸다.
그의 말에는 왜 힘이 있었나.
그의 말은 어떻게 모두를 끌어당겼나.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진심, 진정이 담겨 있기에 그렇다.
그게 기본이었다.
그래서 엔크리드도 마음을 다해 말했다.
그게 라그나한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겉으로는 그런 표를 조금도 내지 않았기에 엔크리드는 몰랐지만.
라그나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살고 싶은데 왜 검이 필요한가.
무력이 없다면 자신이 믿는 바를 실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항상 그의 가슴 안에는 공허함이 감돌았다.
그게 그의 무력감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엔크리드와 대화하는 사이, 그의 마음에 무력감 대신 다른 불꽃이 타올랐다.
가슴에서 피기 시작한 불꽃을 품고 라그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예 평원 한쪽에 풀을 깔고 앉았다.
기사란 무엇이고, 검이란 무엇인지.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결론을 내린다.
‘길을 걷지 않고서는 알 수 없겠구나.’
그는 길을 걸어야 할 당위성을 찾았다.
엔크리드는 그를 놔두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침묵 사이로 검과 하늘과 바람만 오갔다.
조금 떨어졌기에 한쪽에서는 진지에 있는 병사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그 외에는 조용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검 배우고 싶습니까?”
라그나가 멍한 시선으로 한쪽 땅에 박힌 뾰족한 돌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팍!
내지른 찌르기와 함께 땀이 허공에 흩날렸다.
엔크리드는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호흡을 고른 채, 검 끝에 그대로 시선을 둔 채 답했다.
“응.”
평이했고 담담한 말투였다.
배움의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는다. 엔크리드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라그나는 자신이 말하고 자신이 말한 내용에 놀랐다.
‘내가 왜?’
그러나 곧 이유를 깨달았다.
저리 발악하는 분대장에게 옳은 길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반.
나머지 반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분대장이 곁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힘껏 움직이게 된다.
엔크리드가 사는 걸 보면 자극을 받는 거다.
라그나에게는 자극이 필요했다. 길고 지루한 길을 걷게 해 줄 자극이.
분대장의 존재가 그에게는 자극이었다.
그가 있다면 어설프게나마 훈련을 하게 된다.
그가 발전하는 걸 본 순간, 전에 없는 활력이 생긴다.
분대장과 대련도 했고, 정찰도 대신 나가려 했으며 렘을 통해 몸을 풀기도 했다.
드문 일이었다.
적어도 라그나 자신한테는 그랬다.
그럼 분대장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타심보다는 이기심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유 따위를 고민하지 않았다.
‘얘 왜 이러지?’
자신이 나서서 뭘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뜻 나서서 검을 알려 준단다.
야수의 심장을 배울 때도 렘을 귀찮게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센에게 뭘 배울 때는 또 어떻고.
전부 자신이 먼저 들이대고 나섰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며칠 자신을 빤히 보더니 대뜸 다가와선 질문 몇 개를 던지더니 검을 가르쳐 주겠단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라그나는 대련할 때도 딱 그때 필요한 움직임 외에 검술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었다.
엔크리드는 검에 관해서 만큼은 굶주린 승냥이와 같았다.
대련 때도 수없이 물었고 더 달려들었으나, 라그나는 답을 회피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대뜸 알려 준단다.
“그럼 일단.”
라그나는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더니, 입술을 우물거렸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엔크리드는 검 끝을 밑으로 떨군 채로 차분히 기다렸다.
기다리는 사이, 그의 머릿속에는 렘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검을 가르치는 건 좀 그렇수다.”
렘은 도끼뿐 아니라 검도 잘 썼다. 엔크리드는 몇 번이고 그가 검으로 적을 썩둑 자르고 푹 찌르는 걸 봤다.
“난 순전히 감으로 휘두르는 건데, 이런 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거요. 그러니까 분대장은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는 게 좋수다.”
정말 가르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기술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런 거였다면 야수의 심장도 안 알려 줬을 테니.
그때는 그러냐고 하고 넘어갔었다.
생각에 잠긴 엔크리드를 두고 라그나가 말했다.
“야만족 놈한테 배운 짐승의 내장인지, 양심인지 하는 거랑.”
……야수의 심장이다. 이게 어떻게 짐승의 내장이 되는 걸까.
렘이 들었다면 당장 도끼를 휘두를 것 같았다.
“찌르기 하나.”
라그나는 이어 말하더니 엔크리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외에는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순간 이해할 수 없었던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한다는 건데, 할 수 있습니까?”
라그나는 검을 가르치고 배움에 다른 방법을 몰랐다.
엔크리드는 순간 수긍하기 어려웠다.
“왜?”
발렌 식 용병검.
남들이 뭐라 해도 훌륭한 기술이고 검이라 생각했다.
“그 용병검을 계속 쓰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을 테니까.”
이후 라그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예시가 조악했고 설명도 명확하지 않았으나, 엔크리드는 금세 알아들었다.
핵심은 하나였다.
현 상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
지금처럼 단련해도 나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더딜 것이고 한계를 넘을 순 없을 것이란다.
이유를 물으니, 너무 잡다한 걸 많이 익혀서 그렇다고 했다.
“요는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은화나 금화 따위를 들고 어디 교습소를 찾아가도 항상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수긍하고 꽤 시간을 투자했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런 얘기를 들을 법도 했다.
매번 돈을 주고 배우는 처지였다.
엔크리드에게 그 시간에 기본기나 다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기본이라 생각되는 베고 찌르는 건 혼자 했다.
그게 문제였다.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엔크리드는 순간적으로 희열이 찾아와 전신을 울렸다.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길이 보였기에.
항상 눈앞을 가로막은 벽과 어둠 너머에 조악하지만, 길이 열렸다.
이 순간의 희열은 삶의 그 어떤 감동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그리 손을 떨고 있으니, 라그나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선택하면 됩니다. 새로 쌓을 건지, 지금에 만족할 건지.”
라그나는 엔크리드가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쌓은 걸 버리고 새로 쌓는다는 건 바닥부터 새로이 올라간다는 거니까.
그럼 용병계에서도 대강 중상 수준의 실력이 다시 하급 수준으로 떨어지리라.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것도 전장 한복판에서 칼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목숨이 여러 개라면 모를까.
하고 싶다고 해도 쉬이 되지도 않을 터였다.
정작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몸에 익은 기술이 나올 테니.
“목숨 몇 개쯤은 걸어야 할 겁니다.”
라그나가 말했다. 투박했지만, 걱정이 담긴 말투였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이 모호해 라그나가 눈으로 묻자, 엔크리드가 마저 입을 열었다.
“새로 쌓지 뭐.”
“정말입니까?”
되레 라그나가 놀랄 대답이었다.
대답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기에.
분명 조금 전까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으면서도.
그게 분노이자, 좌절이자, 절망이라 생각했는데.
엔크리드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응.”
그는 순수하게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