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375)
375. 에이시아
여기에 왜 에이시아가 있지?
엔크리드는 마주한 순간 몇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아서 떠오른 것들이었다.
‘치안관.’
그가 자신에게 온 이유는 무엇인가.
질투심도 이유지만, 적절한 기회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죄가 있으리라 판단한 거다.
그 죄라 할 만한 건 밴트라 자작을 죽인 거였지만, 그 일은 준기사 에이시아가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녀가 막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어났다.
‘에이시아는 막지 않았다.’
에이시아가 자신에게 온 데는 후작의 개입이 있었다.
그럼 옥토의 후작은 누구의 편인가.
아니, 기사단이 돌아선 건가?
그럴 수도 있을까?
기사가 없는 기사단, 에이시아가 수도에 준기사가 몇 명 남았다고 했었지?
몇 가지 복잡한 생각이 연이어 연상되고 아이들이 가지고 논 실타래처럼 아무렇게나 엉켰다.
엔크리드는 그걸 과감하게 썩둑 잘랐다. 자신은 크라이스처럼 굴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답해 줄 사람은 눈앞에 있으니 물으면 그만이었다.
“왜?”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다. 짧지만 굵은 물음이었다.
에이시아는 검을 들었다. 곧게 선 얇은 검신이 어둠과 빛의 경계선에 섰다. 그녀가 답했다.
“여기까지라고 했다. 돌아가라.”
눈에 감정이 없다. 검 한 자루가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저 밖에서 들리는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따위가 멀어진다. 복도라는 무대를 두고 두 명의 배우가 마주친 것 같았다.
엔크리드도 실버를 뽑았다.
스르릉.
끝에 쇠테를 두른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은빛 장검이 제 몸을 자랑하듯 드러냈다.
엔크리드는 검 그립을 양손으로 쥔 뒤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에겐 왼쪽, 에이시아에겐 우측에 있는 창가에서 햇볕이 스며든다. 둘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창문을 통과하며 긴 선을 만들곤 엔크리드와 에이시아 사이를 갈랐다.
“물러가라.”
에이시아가 다시 말했다.
부탁이다.
그렇게 들렸다.
“왜지.”
물으며 생각했다. 당연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뭘 알아내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다. 에이시아도 순순히 답을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웃음기 하나 없이,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에이시아는 살의도 투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정물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복도 한쪽에는 남부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던 진귀한 도자기 따위가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런 도자기와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정물처럼 보였다.
엔크리드는 다시금 검을 고쳐 잡았다.
그걸 본 에이시아가 말했다.
“벌주를 마시는구나.”
“취미야.”
엔크리드는 버릇처럼 말을 받아쳤다.
그 말에도 에이시아의 표정은 깨지지 않았다. 도리어 기세가 달라졌다. 위압이다. 기세가 달라짐과 동시다.
엔크리드의 눈에 에이시아를 중심으로 앞을 가로막은 벽 따위가 보이는 것 같았다.
위압의 형태가 다가오면 목을 베겠다는 의지만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지금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빚어 위압을 보였다.
한없이 단단한 벽이다.
넘기에는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부수기엔 강도가 강철과 같은 그런 벽.
다만, 엔크리드는 그런 벽을 뛰어넘거나 후벼 파는 걸 즐기는 인간이었다.
팅.
엔크리드는 검을 옆으로 길게 들어 벽과의 거리를 쟀다.
실버의 끝이 우측 벽을 때렸다. 회수하고 검 그립을 양손으로 쥔 후에 머리 위로 들었다.
좌우 넓이는 짧지만, 높이는 부족하지 않았다.
이대로 싸우면 벽에 걸린 그림이나 남부식 도자기, 고가의 꽃병 등이 박살 날 것이다.
하지만 그걸 상관할 때는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재차 호흡을 골랐다.
상대가 자신의 호흡을 읽고 있었다.
에이시아도 엔크리드도 누구도 먼저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호흡을 읽고 타이밍을 쟀다.
이제껏 수없이 해 왔던 일이다. 대련만 스무 번을 넘게 했으니.
둘 사이를 가로지른 빛의 선은 점점 길어지는 중이었다.
에이시아와 엔크리드를 중심으로 우측 중앙 벽에는 검 세 자루가 교차한 채 걸려 있었다.
그 위로 태양수의 모양을 본뜬 방패가 올려진 가검 장식이었다.
세 자루 가운데 정중앙에 자리한 검은 땅과 수직을 그리며 붙어 있었기에 검 끝이 바닥과 가장 가까웠다.
빛의 선이 늘어남에 따라 당연하게도 창문을 투과한 빛이 중앙 칼날 끝에 닿았다. 날은 서지 않았으나 잘 닦아 놓은 칼날이 빛을 반사했다.
반짝- 하고 빛이 난 순간, 엔크리드는 땅을 찼다.
펑!
힘을 아낄 수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폭발적으로 달려 나가며 검을 내리그었다.
엔크리드가 다가가는 순간, 에이시아도 반응했다.
그녀의 검이 앞으로 쭉 뻗어 나왔다. 그 어떤 화살보다 빠른 찌르기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에이시아의 칼날과 엔크리드의 실버가 만났다.
깡! 까드드득!
엔크리드는 힘으로 내려치며 벽을 부수려 했고, 에이시아는 손목을 비틀며 내려치는 실버의 궤적을 틀어냈다.
완숙한 흘리기가 엔크리드의 힘을 흘려냈다.
마냥 당할 수는 없기에 엔크리드는 발을 뒤로 빼며 여력을 남겼다. 대신 검은 흐르는 대로 놔뒀다.
언제라도 다시금 힘을 더해 받아칠 준비를 한 거다.
그 결과로 왼쪽 창가 밑에 긴 선이 그어졌다.
벼락을 닮은 내려치기였음에도 흘려냈다.
에이시아는 찌른 검을 바로 들었다. 이후 앞으로 천천히 내리며 엔크리드를 겨눴다.
검 끝 겨누기다.
그녀의 특기이자 장기.
하지만 엔크리드가 알던 것과는 다르기도 했다.
렘이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저게 전부는 아닐 거요.”
감으로 아는 거다.
아니, 무수한 실전과 재능은 상대가 지닌 것의 다른 조각을 보게 한다.
엔크리드는 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문제가 될까.
‘전혀.’
검 끝이 자신을 겨눈다. 세상에 검 끝과 자신만이 남는다. 그게 에이시아의 검 끝 겨누기다.
환검, 기만하는 검이다.
엔크리드는 이미 저 검을 이겨 내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제 앞에서 라그나와 렘이, 작센이 몇 번이고 답을 보여 줬으니 당연했다.
렘은 자신을 겨누는 검 끝을 도끼로 가리고 싸웠다.
라그나는 검 끝을 무시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게 무엇이든 벤다는 의지로 없앴다.
작센은 검 끝 겨누기를 시작하기 전에 계속 검을 쳐 냈다.
세 가지 전부 정답이지만, 세 가지 전부 엔크리드 자신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인 건 아니다.
윌 일부를 몸에 담았을 때부터 느꼈던 거다.
‘내가 풀어야 의미가 있다.’
나아가려면 제대로 걸어야 한다. 길을 밟고 걸어야 한다. 허공에 발을 대면 걸을 수 없다. 제자리에서 발을 뗀다고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과정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게 바로 길에 발을 대고 흙을 즈려밟고 모래를 헤치며 나아가는 길이다.
렘, 라그나, 작센의 방식이 있다면 엔크리드도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단번에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다. 이제는 잘 안다.
“넌 천재다.”
어릴 때 용병이 했던 말은 이제 가슴에 남지 않았다.
대신 검이 남았다. 꿈이 남았다. 찢긴 꿈을 기워 낸 것은 무엇이었나.
검이다.
엔크리드는 일전에 에이시아가 떠난 걸 아쉬워했을 때도 이백 번쯤 더 대련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에이시아가 자신의 앞을 막은 이유? 모른다.
크랑을 구하러 가는 길이니 시간을 끌어서 안 된다는 것? 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조급함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이런 일 하나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이제까지 검을 쥐고 버텨 냈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아니, 아예 지금에 푹 빠져 버렸다.
막는다면 넘는다. 가로막겠다면 부수겠다.
짧디짧은 순간 엔크리드는 생각하며 정리했고, 결론을 내린 뒤엔 방법이란 칼을 꺼내 들었다.
한 번 더 에이시아와 맞붙으면 해 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자신만의 방법이다.
엔크리드는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게 문제라면, 보지 않으면 어떤가.
“……정말 미쳤구나.”
정물처럼 변한 에이시아의 목소리에서 감정 비슷한 게 흘렀다.
이런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벌주에 취미라는 말에는 잘 버텼으나, 이건 버티기 힘들었다.
‘눈을 감아?’
눈을 감고 덤비겠다니. 과연 정상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인가.
눈을 뜨고 싸웠을 때도 에이시아가 이겼다. 목숨 반 개를 걸든 목숨을 걸지 않든, 대련의 승패는 항상 일정했다.
그런데 검 끝이 시야를 가로막는다고 눈을 감아?
“날 얕보는 거냐? 아니면 따로 훈련이라도 한 거냐?”
에이시아가 연이어 말을 뱉었다.
엔크리드는 그 말속에서 그녀가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진정 원해서 이곳에 있다면, 말이 아니라 검부터 휘둘렀을 테니까.
이제까지 그녀와의 대련이 그랬다.
당연히 알 바 아니긴 했다. 엔크리드는 지금을 즐겼다. 이 순간을 만끽했다. 고로 에이시아를 상대하는 것 자체에 신이 나서 미소를 보였다.
그 상태 그대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귀를 눈 대신 삼는다.
“감각 기예를 갈고닦으면 보지 않아도 보입니다.”
작센이 수없이 했던 말이다.
실제 제 휘하 부대원은 그런 재주를 보이곤 했다.
보지도 않고 등 뒤에 선 사람의 동작 따위를 파악하곤 했다.
아우딘은 공기의 파동 따위를 느낀다는 소리를 했고.
“감으로 아는 거요.”
렘은 오롯이 육감이란 말을 했으며.
라그나는 꼭 뒤에서 무슨 동작을 취하는지 알아야 하냐고 되물었다.
검을 휘둘러 베면 그만이라는 소리다.
라그나다웠다.
작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공기의 파동은 촉각으로, 귀로는 소리를 듣습니다.”
미세한 소리를 구분하고 파악하는 건 감각 기예의 기초였다.
다들 비슷하지만, 말하는 방식이 다르고 깨우친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엔크리드도 이제껏 갈고닦아 회피의 감이라는 육감의 칼날까지 가졌다.
그걸 토대로 엔크리드는 눈을 감은 채 움직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눈을 감고 웃던 놈이 먼저 공격까지 하는 격이었다.
“이 미친 새끼.”
에이시아가 씹어 뱉듯 말했다. 그 어투에는 비난이 아닌 경의도 일부 담겨 있었다.
엔크리드는 첫 일격을 기억에 의존했다.
에이시아가 선 위치를 기억했고 그녀의 말소리를 들었다.
그대로 순간의 윌을 발동했다.
꽝!
발밑이 찢어지고 터진다. 카펫 밑으로 돌가루가 터져 올랐다.
엔크리드는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아는 사람이라고 힘을 빼는 일 따윈 없었다.
* * *
에이시아는 엔크리드를 보낼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날 넘어가면 네가 죽어.’
자신이 보내 준다고 해서 엔크리드가 살아날 수는 없다.
그러니 여기서 막는다.
원해서 왔든, 협박을 받아서 왔든,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서게 됐든.
‘그건 나중 일.’
진정을 담아, 전력으로 부딪치는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눈을 감고 순간을 쪼개며 거리를 좁힌다. 엔크리드의 검은 주저 없이 내리꽂혔다.
에이시아는 똑같은 속도로 받아쳤다. 위압을 죽이지도 않은 채다.
어째 눈을 떴을 때보다 배는 빠른 듯한 검격이다.
얇은 검을 수평으로 들고 올려친다. 발목을 틀며 힘을 흩어 낸다. 상대의 검에 실린 힘을 아까와 같이 얇은 레이피어 칼날로 흘렸다. 받아 내면 늦는다. 그러니 부딪치는 순간을 포착하고 비틀어 흐트러트린다.
에이시아는 그렇게 했다.
레이피어가 하늘거리는 천처럼 움직였다.
티리리리링.
내려친 힘에 비해 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웠다. 엔크리드가 내려친 검이 옆으로 흘렀다. 에이시아는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가 다시 주었다.
순간, 팔뚝에 두른 가죽 토시 안쪽 팔 근육이 조여지며 힘을 더한다. 그대로 여력을 모아 앞으로 찔렀다.
훙.
검이 아닌 공기가 먼저 닿았다. 기세와 압력이 먼저 전신 솜털을 우수수 세운다.
엔크리드는 내려친 검을 수습할 틈이 없었다.
그 대신이다. 엔크리드는 어느새 왼손만으로 실버를 쥐고, 오른손으론 우측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거꾸로 쥔 채로 뽑아 막는다. 글라디우스가 에이시아의 검 끝을 막았다.
땅!
정확한 타점과 힘의 조화로 레이피어의 찌르는 힘이 글라디우스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됐다.
엔크리드의 두 발이 잠시 뒤로 뜨며 날았다.
‘근력은 상대가 우위.’
에이시아도 아는 사실이다. 엔크리드의 괴력은 무섭다. 일격만 실패해도 타격이 클 것이다.
하지만 실패는 없다. 저리 무딘 칼날에 맞을 일은 없다.
하물며 눈까지 감고 덤빈 탓에 섬세함이 부족하다.
엔크리드는 물러나며 눈을 떴다. 에이시아는 다시 검을 겨눴다.
그녀는 지금과 같은 싸움을 종일 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싸우는 건 기사단의 심화 훈련 중 하나였다.
그녀는 당연히 그 훈련을 수료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한 번 더.”
웃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