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377)
377. 검 끝 만나기
출렁이는 검은 강물 위로 보랏빛 램프가 흔들렸다. 나룻배가 흔들리는 것과 함께 그의 몸도 좌우로 움직였다.
엔크리드가 나룻배의 끄트머리에 앉은 채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사공이 재차 말했다.
“아주 쉬운 길이 있다.”
엔크리드는 답하지 않았다. 뱃사공이 연이어 말했다.
“도망가라.”
그의 입술은 달싹이는 정도로만 움직였고, 목소리는 나룻배 위에서 메아리치듯 맴돌았다.
“도망가서 네 죽음을 마주치지 마라. 그러면 내가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엔크리드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머릿속에 무수한 생각이 들어찬 사람 같았다.
사공의 입이 재차 열렸다. 달싹이고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다시금 나룻배 위를 떠돌았다.
“도주가 싫다면 혀를 써라. 상대를 설득하고 그 뒤를 대비하라. 둘이라면 능히 감당하리라.”
에이시아와 엔크리드가 힘을 합치면 그 뒤에 나타날 놈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을 반복하기에 미래를 안다.
반드시 모든 오늘이 똑같은 하루가 되는 건 아니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엔크리드와 싸우느라 에이시아의 체력은 떨어졌고 다쳤다. 그건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부상 없이 체력을 유지한 채로 둘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감당할 상대였다. 역으로 승리를 취할 수도 있을 거다.
목숨을 건 싸움인 데다가 둘이 한 편이라면 확실히 유리할 테니까.
물론 무조건 이기는 싸움은 아닐 것이다.
“벽이 뭔지 정확히 알고 싶나?”
뱃사공의 말은 여느 때와 같이 감정 따위는 없었다. 감정이 아닌 의미를 담은 사실만 연이어 말할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사공의 말을 연신 들으면서도 답이 없었다.
자신이 한 말을 곱씹기 때문일까?
사공은 발끝으로 나룻배 바닥을 찼다.
발 구름에 나룻배가 크게 흔들렸다. 앉아 있던 엔크리드가 균형을 잡느라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멍한 시선, 생각에 빠진 얼굴, 반쯤 벌린 입.
사공의 눈에 보인 것들이다.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되묻는 질문이다.
“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사공은 드물게 감정을 보일 뻔했으나 꾹 참고 되물었다.
엔크리드는 눈을 두 번 깜빡이곤 답했다.
“아, 못 들었습니다.”
진짜였다. 집중하느라 못 들었다. 엔크리드는 언제나 그렇듯 진심과 진정으로 답했다.
“……가라.”
사공의 입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이 새끼의 머릿속에 제 말은 들어가지도 않았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린 게 아니었다. 반항하듯 튕겨 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씹었고 삼켰다.
사공이라도 불쾌할 법했다.
“에?”
어안이 벙벙한 엔크리드가 또 되묻는 모습이 진짜인 걸 알면서도 가증스럽게 보였다.
순수는 때로는 상대의 가슴에 답답함을 선물하는 무기가 되기도 하니까.
“가라고 했다.”
사공은 굳이 화를 내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보내면 그만이었다. 보내는 이유도 있었다.
‘지켜보리라.’
과연 무슨 생각인지, 무슨 짓을 할 작정인지 그런 것은 보면 알게 될 테니.
“아, 네.”
엔크리드는 머쓱해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나룻배 위에서 엔크리드의 모습이 흐려지며 사라졌다. 홀로 남은 사공은 아무 말 없이 어둠을 응시했다.
아마 그는 똑같은 오늘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은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나룻배 위, 어둠 속에서 자신을 만날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공은 반복되는 오늘을 ‘미리’ 본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정해진 일은 정해진 대로 일어난다.
물론 엔크리드란 놈이 몇 번 놀라게 하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다.
하물며 하루 만에 넘을 벽이란 건 없을 테니.
오늘의 반복은 고통이고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저주의 핵심이 그러하니까.
하지만 광증에 걸린 자에게는 통증조차 희열이 되니.
‘미친 자.’
사공의 시선이 흐려졌다. 검은 강물 위가 아니라 생을 반복하게 된 엔크리드를 향해서다.
저주로 인해 그의 모습이 보였다.
사공은 그걸 바라봤다.
그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몸을 단련하고.
치안관을 걷어차는 거로 설득을 대신하고.
외부에서 진격하는 무리에게 라그나란 놈과 둔바켈이란 수인을 보내고.
암살자 무리를 향해 아팠다고, 자기 찔린 것 맞다고 말하는 것으로 제 곁에 선 동료를 부끄럽게 했으며.
왕궁으로 향하더니 제 앞을 막은 악연을 서슴없이 잘라냈다.
베고 죽였다. 긴 대화도 없었다.
“하녀 강간 맞지? 이전에 묻지도 않고 베어 버렸는데.”
“뭐?”
상대의 황당함 따윈 무시한 채였다. 아니, 아예 눈앞에 선 과거 따위 관심도 없었다.
저주의 주인을 죽일 뻔했으니 원한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없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은 다른 것에 꽂혔을 뿐.’
엔크리드는 황당해하는 놈 대신 하녀를 바라봤다.
맞냐고 눈으로 묻자, 덜덜 떨던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엔 휘둘러 베고 죽이는 과정이 있었다.
그렇게 다시금 벽을 마주했다.
주황빛 머리칼의 여기사다.
“거기까지.”
그녀가 앞을 막아섰다. 엔크리드는 검을 들었다.
물음은 없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니 물을 이유가 없다.
아니, 그런 사고 구조로 움직인 게 아니다.
사공은 순간 엔크리드의 마음 일부를 엿봤다. 기대감이 가득 찬 무언가다.
‘저 새끼.’
그는 벽과 겨루고 싶은 이곳에 있다. 저 여기사와 검을 맞대기 위해 달린 거였다.
똑같은 오늘의 반복.
세밀한 부분이 완전히 같진 않아도 비슷한 오늘이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 전이다. 아침에 일어난 뒤, 단련의 과정 중에 있었던 변화다.
“렘, 그거 어떻게 한 거냐?”
오전의 햇볕이 머리 중앙을 지날 때쯤이었다. 중간에 치안관이 와서 뭐라고 떠들든 엔크리드는 렘이란 놈과 말을 나눴다.
“이놈, 이 몸이 친히 왔는데 잡담이라니.”
“잠시 대기.”
엔크리드는 그리 말하고 재차 물었다.
그 앞에서 황당함에 입을 떡 벌린 치안관이란 작자가 있었다.
“검 끝 겨누기. 도끼날로 막았잖아.”
“도끼날 겨누기란 거요.”
눈을 껌뻑이던 렘이란 놈은 짧고 굵게 설명했다.
“잘 가리면 되는 거지.”
기실 더한 설명을 할 수도 없었고, 엔크리드도 더 들을 만한 게 없다고 판단하고선 몸을 돌렸다.
그게 반복된 오늘에서 다른 점이다.
“이노오옴!”
개무시당한 상대는 분노했다.
그게 전부였다.
이후 에이시아란 벽 앞에서 검을 들고 뭔가 수작을 부리더니 비슷한 결과를 맞이했다.
베이고 찔리며 졌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전의 오늘과 다른 점은 또 있다. 사공은 이미 아는 일이다.
엔크리드는 모르는 일.
그의 시선이 에이시아의 뒤를 훑었다.
에이시아가 선배라고 불렀던 작자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이다.
“뒤쪽을 확인하고 오겠다.”
에이시아가 떠났고, 그거로 끝이었다. 시간이 잠시 지나더니 곧바로 암전, 오늘이 한 번 더 끝났다.
사공은 나룻배의 맞은편을 바라봤다.
모래알 같은 파편이 모이고 모인다. 점점이 모인 알갱이는 곧 사람 형태를 이루기 시작하며 변했다.
엔크리드였다.
사공은 호기심이 치솟는 걸 느꼈다. 그걸 참을 필요가 없기에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다.”
“에?”
여전히 멍한 시선의 엔크리드 놈이 그곳에 있었다.
“이전에 뭘 생각하느라 앞에서 말하는 것도 못 들었지?”
엔크리드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감출 게 아니었다. 감출 것도 없었고.
다만, 그건 왜 묻나 싶을 뿐이지.
“검 끝 겨누기를 어떻게 하면 막을까? 하는 생각했습니다.”
그 눈에 어린 열의와 열기를 본바, 사공은 확신했다.
엔크리드란 이 작자는 오롯이 하나에 집중했다고.
그러니까 눈앞에서 검을 든 상대만 본 거다. 벽이고 나발이고 간에, 그것만 보고 그것만 인지하고 거기에 제 신경을 전부 쏟아부었다.
사공은 해 줄 필요가 없는 말이나, 제 권한으로 해 줄 수 있는 말을 뱉었다.
“그걸 벽이라고 보는 건가?”
아니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진짜 벽을 직시하라고 할 참이었다.
“모릅니다.”
그딴 거.
이 말이 생략됐다.
그래서 그게 중요해? 나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이 말도 생략됐다.
혹시 할 말 더 있나? 없으면 나 궁리하게 좀 놔두면 좋겠는데.
이 말 또한 생략됐다.
사공은 감정을 느꼈다. 황당함이다. 당황스럽다. 의도 따위 엿보이지 않는 순수를 맞이했기에 생각을 거듭하여 상대를 농락할 자신의 말들이 허무하게 스러졌다. 어둠에 섞이고 뭉개져 흘러갔다.
“그리하라.”
사공이 속내를 읽고 답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지금 네가 보는 건 벽이 아니니.
이 말을 생략한 답이었다.
엔크리드가 다시금 사라졌다. 흐려지더니 흩어지고 없어졌다.
‘아둔하다.’
하지만 또 이런 걸 바라기도 했으며 이번 벽은 넘더라도 그에게 진한 상흔을 남길 테니까.
쿡쿡.
사공은 웃었다.
그때 괴로워하는 걸 본다면, 그것만큼 즐거운 건 없으리라.
이번 벽을 넘어선다면 그것만으로 그에게 저주와 같은 것이 되리라는 걸 사공은 알았다.
* * *
‘하나는 알겠다.’
렘의 방법도 흉내를 내보는 게 좋다는 것.
비단 렘의 방법뿐 아니라 모두의 것을 한 번씩 해 보는 거다.
모사는 결국 흉내 내는 대상을 이해하는 빠른 수단 중 하나이니까.
‘내 방법은 그다음.’
길이 보이면 걷는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벽은 무엇이고 어디까지일까.
뱃사공에게 물었다면 답을 해 줄 것 같았다. 오늘의 뱃사공은 그런 느낌을 줬다. 하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알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묻는 대신 고심했다.
“아침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세 번째 오늘이다. 새벽 훈련 중에 우두커니 멈춰 생각에 잠기자, 느지막이 일어나서 나온 렘이 묻는다. 엔크리드는 두 번째 오늘보다 더 일찍 핵심 질문을 던졌다.
“도끼날 가리기는 어떻게 한 거냐?”
갑자기 던진 물음에도 렘은 당황하지 않았다. 엔크리드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그래서 답도 곧바로 나왔다.
“에이시아의 검이 나를 겨누고 있잖수. 난 상대의 검 끝을 겨누는 거지, 내 도끼로.”
여전히 설명은 개가 난장을 피운 무대 같았다. 개판이었다. 난해하고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거였으면 애초에 검을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렘은 자신도 제 설명이 어렵다는 걸 인지했다.
“불티를 들고 겨눠 보쇼.”
렘이 긴 자루의 도끼를 꺼내 들며 말했다.
가볍게 들고 있지만 어찌 쓰는지 신기한 무게 중심을 가졌으며, 생각보다 무거운 무기였다.
어쨌든 렘이 들고 있는 것만으로 무게감이 달라졌다.
엔크리드는 불티를 꺼냈다.
팅, 뽑힌 검을 들고 겨눈다. 얇고 가는 칼날이 앞을 겨냥했다.
이렇게 하고 있자니, 모방의 첫 번째 단계는 검 끝 겨누기를 따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위압과 살기를 섞어서.’
어찌 보면 작센의 무살 찌르기와는 완전히 상반된 기술이다.
상대에게 압력을 줌으로써 기만하는 검이니.
엔크리드가 그걸 곧바로 따라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검을 겨누고 있자니.
퉁.
렘이 도끼날로 검 끝을 때렸다. 정확히 말하면 도끼날로 칼날의 뾰족한 부분을 쳤다.
“알겠수?”
엔크리드는 대답 대신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렘이 한 짓을 곱씹었다.
말보다 몸으로 하는 설명이 배는 이해하기 쉬웠다. 홀로 고심하기까지 했다. 엔크리드는 이해했다.
렘은 제 도끼날의 가장 날카로운 선으로 불티의 점, 검 끝을 때렸다.
날과 점이 정확히 만났다.
그건 묘기의 단계를 넘어선 신기였다.
곧 이 행동에는 질문이 담겼다.
평소와 같은 속도와 힘으로 검 끝과 검 끝을 만나게 할 수 있는가.
“아.”
탄성이 나왔다.
“해 보슈. 해 보면 알 거요.”
렘이 한발 물러나고, 엔크리드는 천천히 양손에 검을 나눠 쥐었다. 불티와 글라디우스다.
칼날을 마주치게 하는 건 쉽다.
하지만 점과 점이라면?
날과 점이라면?
느리면 가능하다.
속도를 줄이면 어렵지만 할 수 있다.
절로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이러면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니 동작이 부자연스럽다.
이걸 자연스럽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걸 위해서는 어떤 재주가 필요한가.
“그렇수다. 그런 걸 할 줄 알면 되는 거요.”
렘이 자루가 긴 제 도끼를 허리춤에 끼우며 말했다.
할 말은 다 했다는 투였다.
엔크리드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금세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몰입이다.
렘은 그걸 보고 참 신기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앤드류를 보곤 검지를 들고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쉿-이란 소리도 없지만, 앤드류는 막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렘의 손짓에 뒤로 세 걸음 물러난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뭡니까?”
“오늘 단련은 내가 친히 시켜 주마.”
“……괜찮습니다. 혼자 해도.”
“아니, 안 괜찮다. 대장의 유지를 이어받겠다.”
“아니, 엔크리드 대장이 죽은 건 아니잖습니까.”
“대륙어가 아직 서툴러서 그래.”
뭔 소리인가, 서부 말을 쓰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앤드류가 표정으로 한 말은 묵살됐다.
엔크리드는 주변 소리를 듣고 제 생각 안으로 빠져들었다. 제 안으로 침전해서 궁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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