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381)
381. 너무 신나서 미칠 것 같다
엔크리드는 에이시아가 내민 검 끝을 바라봤다.
전과 같다.
에이시아의 몸이 지워지고 칼날만 보이며, 검 끝만 남아 그 점이 시야를 가린다. 거리감이 사라진다. 에이시아가 보이지 않는다.
곧 검 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이건가?
왜?
‘내 말에 자극을 받아서?’
증명해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라앉은 호흡, 죽이지 않고 넘어서야 할 벽, 사공의 말, 흔들리는 검 끝.
흔들리는 점이 나뉜다. 여러 개로 보였다.
그 하나하나를 쳐 내는 상상을 했다.
쳐 내는 자신은 전부 달랐다.
렘이 되었고 라그나가 되었고 작센이 되었다.
그렇게 검 끝 겨누기를 상대하다 보니, 모방한 이들의 특징이 여실히 느껴졌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었으니 당연했다.
렘의 방법은 어울려 노는 거였고.
작센은 판이 깔리기도 전에 치운 뒤에 제 무대에서만 상대하겠다는 거였으며.
라그나는 상대가 보인 의지를 제 의지로 덮은 꼴이었다.
엔크리드는 하나씩 답습했다.
삼백 번이 넘는 오늘 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전부 다른 듯하지만 같다.
렘이나 라그나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이지.’
세밀하고 정밀한 감각을 가졌기에 가능하다.
그게 작센처럼 오감의 형태가 되기도 하고 라그나처럼 검을 쥐었을 때만 발휘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결론은 같았다.
엔크리드는 그 정밀한 감을 키웠다. 그렇게 돌고 돌아 원점이었다.
“이 새끼가?”
에이시아가 입을 연다.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엔크리드의 눈에 점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흐려지듯 없어졌다. 당연했다.
엔크리드는 눈을 감았으니까.
어둠이 찾아왔다. 곧 소리로, 촉감으로, 육감으로 모든 걸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사선으로 비스듬히, 왼발을 축으로 전신 탄력을 실어서 허리를 회전하는 힘을 전달하며 내리친다. 칼날이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나아갔다.
“그게 되겠냐!”
에이시아가 버럭 외치며 검을 당기곤 수비 자세를 취했다. 단순한 사선 베기지만, 검 끝 겨누기로는 못 막는다. 보지 않는 이들에게 검 끝 겨누기는 의미가 없으므로.
한순간 쭉- 하고 늘어나듯 엔크리드의 칼날에 가속이 붙었다.
땅!
공격을 흘리려면 정확한 타점을 포착해야 하는데 속도의 변화는 그걸 어렵게 만들었다.
엔크리드가 그런 변화를 줬으나 에이시아는 순간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검을 튕겨 냈다.
이 정도도 못 막으면 준기사란 이름이, 붉은 망토 기사단이란 이름이 아까웠으리라.
엔크리드는 튕겨 낸 검을 힘으로 끌어당겨 내리쳤다.
훙!
에이시아가 뒤로 물러났다.
엔크리드가 눈을 뜨자, 에이시아가 다시금 검 끝을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깨진 걸 인정하기 싫은 건가?”
검을 내려벤 자세 그대로 엔크리드가 물었다.
“다시 해 봐.”
에이시아가 말했다.
꼭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다. 흐릿한 상만 남겨 두면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검 끝 겨누기는 상대의 집중력을 이용하는 환검이었다.
즉, 이거면 충분했다.
시야의 부족함은 다른 감각으로 대체하면 그만이었다.
땅!
엔크리드는 내려벤 자세에서 손목을 틀곤 위로 올려쳤다. 검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에이시아는 그걸 무시할 수 없어 막았다. 검을 수평으로 들고 막으며, 뒤로 뛰는 거로 엔크리드의 무식한 괴력을 흘렸다.
칼날과 칼날이 만났다가 헤어졌다. 땅- 소리와 함께 둘 사이로 불티가 튀었다.
흘려보냈음에도 전신에 충격을 주는 힘이다. 에이시아는 상대를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엔크리드의 반쯤 흐린 눈이 초점을 찾았다.
“한 번 더?”
그리고 물었다.
“……너 뭐야?”
에이시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다지만, 두 번은?
실상 처음 한 번으로 알았다.
엔크리드는 검 끝 겨누기를 부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건가.
대련 중에는 해법은커녕 상대하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기술의 완성도도 미흡했고, 애초에 이런 류의 기술을 상대한 경험도 부족했다.
그런데 이건 뭔가.
자신의 검만 겨냥해 수백 번은 따로 훈련한 듯했다.
그만큼 맞춰서 들어오는 공격처럼 느껴진다. 그게 에이시아의 마음에 금을 그었다.
‘마음이 흐트러진다.’
깨닫는 순간, 에이시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호흡을 고르게 만들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기세에서 밀린다. 그래서 에이시아는 무시했다. 아니, 이해의 영역까지 마음을 넓혔다.
“좋아. 이게 루아가르네가 말한 말도 안 되는 재능이겠지?”
“운이 좋았지.”
흔히 하는 핑계다. 그게 도발처럼 들렸다. 에이시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너 말하는 거 재수 없다는 말 자주 듣지?”
“가끔?”
“응. 너 재수 없어.”
“칭찬 고맙다.”
말로는 엔크리드를 누를 수 없다. 기사단 중에서도 이 정도로 혀를 놀리는 놈은 흔치 않았다.
에이시아는 검으로 말을, 혀를 대신했다.
자신에게 검 끝 겨누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기술이 깨졌어도 숙련도가 단숨에 올라오진 않아.’
그건 진리다. 하지만 열 번의 합이 지나기도 전에 에이시아의 상식은 흔들리고 금이 갔다.
엔크리드의 기술에서 전에 없는 완성도가 엿보였으니까.
정밀함이 부족했던 검술이 섬세해졌다.
가령 흘리고 곧바로 쳐 내는 기술의 틈이 전보다 줄었다. 이전에는 손목을 과하게 꺾어 상대에게 대비할 여유를 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손목이 꺾이는 각도부터 흘리며 밀어내는 힘의 정도까지, 모든 게 적당했다. 정밀함이 엿보였다.
‘말도 안 돼.’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면 기사단 내부에서 선배라 부르는 이들보다 더한 수준의 재능이다.
에이시아는 제 찌르기를 흘리며 뱀처럼 휘어지는 검을 보곤 발을 놀려 피해야 했다.
전보다 대응도 빨라졌으며 타이밍을 잡는 감도 좋아졌다.
고작 검 끝 겨누기만 부순 게 전부가 아니다.
‘어떻게?’
어디서 좋은 선생을 두고 몇 달 내내 죽어라 검을 휘두르기라도 한 건가.
놀람의 연속이지만, 에이시아는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윌이란 무엇이냐?”
그건 마음이고 신념이고 의지다.
마음에서 무너진 놈이 어떻게 현실에서 이기겠나?
스승의 말을 기준으로 흐트러짐을 다잡는다. 에이시아는 그렇게 했다.
이건 현재 엔크리드의 상황에서도 먹히는 말이었다.
그는 에이시아를 죽이기 싫다는 말을 함으로써 마음을 다잡았으니까.
그걸 에이시아는 실시간으로 해냈다.
과연 준기사의 마음가짐은 다른 법이었다.
“하!”
기합에 잡념을 담아 털어 낸다.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하는 힘을 담아 오른손에 든 검을 찌른다.
위압과 환검에 이은 세 번째 윌의 기술이다.
고속 찌르기.
엔크리드의 순간의 윌과 유사한 기술이다.
기사단의 기본기 중 하나이긴 했다.
속도는 언제나 진리니까.
땅!
엔크리드는 글라디우스 면으로 찌르기를 받아 냈다.
똑같이 순간의 윌을 써서 한 짓이다.
‘이것도.’
이전에 대련할 때는 윌을 쓰더라도 딱딱 하나씩 끊어서 썼다.
분절점이 명확했다. 순간의 윌을 쓸 때는 그걸 위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그게 태가 났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걸 막아?”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더 해 보든가.”
어느새 둘 다 웃는다. 엔크리드는 말하며 검을 내리쳤고, 에이시아는 수평으로 막는 척하다가 휙 하고 피해 버렸다.
검이 길을 잃고 내리치는 사이, 다시 고속 찌르기다.
엔크리드는 몸을 비틀었다.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볼을 스쳤다.
피부 겉이 픽 찢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그리 부딪치고 검을 휘두르며 겨룬다. 엔크리드는 에이시아의 검 끝 겨누기를 넘어섰으나 그녀를 완벽히 제압하는 건 실패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긴 수준이었다.
만약 서로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누구 하나 죽을 수도 있었지만, 둘 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
그렇기에 지치고 상처 입은 채로 끝났다.
엔크리드는 왼팔 상완을 찔려 팔이 올라가지 않았고, 에이시아는 종아리를 크게 베여 기동성이 떨어졌다.
그렇게 몇 걸음 떨어져 잠시 검을 멈췄을 때 에이시아가 물었다.
“너 뭐냐, 진짜.”
묻고 재차 입을 연다. 그녀는 황당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씹, 왜 웃는데.”
에이시아의 시야로 만면에 미소를 띤 엔크리드가 보였다.
그게 못내 황당할 따름이었으니까.
싸움 자체를 즐기는 것도 정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머리통 어딘가가 고장 난 거다.
어느새 해가 지는 중이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사라지며 노을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이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도 엔크리드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싸우다가 미쳐 버렸나?’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그런 에이시아를 보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너무 신나서 죽을 것 같다.”
“뭐?”
뭐라는 건가.
엔크리드의 눈은 사라진 햇볕을 담은 듯했다. 그의 눈에는 열정과 열의로 만들어진 빛이 있었다.
그렇게 그가 입을 마저 열었다.
“더 올라갈 길이 있음에 좋아서 미쳐 버리겠다고.”
진심이다.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그런 순수한 기쁨이다.
엔크리드는 회피의 감, 공격의 감을 넘어 감각에 세밀함을 담았다.
그동안 자신이 익힌 기술이 한 단계씩 발전했음에도 에이시아를 완벽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고 더 단련하고 더 올라갈 길이 있었으며, 보였고 손끝이 닿았기에.
그게 못내 기뻤다.
“미친 새끼가.”
에이시아도 진정을 담아 상대의 정체를 규정했다.
흔히 듣던 말이었다.
* * *
“그건 벽이 아니다.”
사공이 꿈에 나온다. 요즘 전보다 더 한가한 것 같았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꿈이니까. 한순간 스쳐 가는 잔상에 가까우니까.
다만,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잔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공의 말에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그녀를 죽여라.”
누군가가 명령하고, 그걸 지켜야만 할 듯하다.
엔크리드는 상큼하게 모든 걸 무시했다.
“무지하게 좋은 아침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혼잣말을 지껄인 엔크리드가 밖으로 나갔다.
자다 말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렘이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침부터 미쳐 있는 거요?”
어젯밤부터 불온한 공기가 한껏 퍼졌는데 뭐가 좋다는 건가.
렘의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으나, 엔크리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아가 고립의 기법으로 몸을 단련한다. 생각이 절로 차곡차곡 정리되며 귀결됐다.
벽에 관한 것들의 생각이다.
벽은 조건이다.
찌르기 변태를 죽이는 게 조건이라면.
그냥 살아남는 것 자체가 조건일 때도 있었다.
기사의 검을 한 번 받아 내는 것 자체가 조건일 때도 있었다.
그 모든 오늘에서 길은 하나였던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공이 어떻게 말하든, 엔크리드는 하던 대로 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잠시 후 에스터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다녀온다고 하자, 그걸 본 엔크리드가 말했다.
“올 때 멜론.”
멜론은 저기 남부에서 나오는 귀한 과일이다. 이쪽 대륙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거였다.
“하루하루 상태가 심해지는구나.”
에스터는 무심히 말하고 움직였다. 저 인간을 이해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과 함께다.
“왜 그렇게 신난 거요? 막 날아갈 것 같수?”
하루이틀 본 사이가 아니다. 렘은 제 대장이 전에 없이 신난 게 보였다.
작센도 그걸 눈치챘기에 묘한 눈으로 봤다. 둔바켈은 무슨 생각인지 자꾸 눈의 초점이 풀렸고, 라그나야 본래 이런 일에 관심을 두는 인간이 아니었다.
신날 법했다. 당연한 일이다.
마음에 어떤 무거운 추가 달렸었는데 사라졌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있다가 떼면 역으로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법 아니던가.
거기에 나아갈 길이 보이기도 했으며, 그 길을 걷는 게 몹시 즐겁기도 했다.
“아, 누구 하나 때려눕힐 생각 하니까 가슴이 두근거려서.”
엔크리드가 말했다.
렘이야 당연히 못 알아들을 말이지만, 따지지도 않았다.
곧 치안관이 나타나고, 그의 머리를 후려쳐 기절시키는 걸 보며 물었을 뿐이다.
“이 작자를 때려눕히겠다는 거였수?”
치안관이 오는 걸 알고 그런 건가?
렘의 질문에 담긴 의미다.
엔크리드는 웃었다.
“아니.”
그가 때려눕힐 사람은 주황색 머리칼의 여기사였으니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