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Knight Who Eternally Regresses RAW novel - Chapter (403)
403.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문을 다루는 이들에게 불길함이란 단순한 세 글자가 아니었다.
감각에서 오는 예측이다.
에스터는 지금 이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것도 주문 세계와 연관된 무언가였다.
에스터 자신에게도 능히 영향을 끼치리라는 직감이 뒤따랐기에, 확인하지 않고 넘어갈 순 없다고 판단했다.
즉, 당장 확인이 필요했다. 그걸 위해서였다. 에스터가 입을 열었다.
“날 지켜라.”
그 말에 막 전장에 뛰어들려던 앤드류가 고개를 돌렸다.
“나보고 한 말입니까?”
“그럼 앞에 나간 엔키라도 불러올까?”
에스터는 친절하고 긴 설명을 통해 상대에게 사실을 주지시키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급했다.
앤드류는 나가려다 주춤하며 멈췄다.
현재 자신의 위치는 어디인가.
엔크리드와 함께하고 있는 바람에 그들 부대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가드너 남작군으로서 부대를 통솔하기에는 애매한 처지이기도 했다.
자신 휘하의 부대원이라고 해 봤자 다섯이 전부 아닌가.
앤드류는 전장을 바라봤다.
압도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아군의 의도대로 상황이 흐르는 듯했다.
앤드류는 발을 멈췄다. 지금은 에스터란 마법사의 요청을 듣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형을.”
그렇게 에스터를 중심으로 앤드류와 수련생 다섯이 원을 그리듯 섰다.
에스터가 그 가운데에 앉았다. 흙바닥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입은 로브가 바닥에 닿고 늘어졌다.
곧 에스터는 주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상대 마법사가 준비한 수작을 찾았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었다.
놈은 숨기고 감추는 대신 드러내고 보여 줬으며.
그리 보여 주고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올렸다.
커다란 위엄이 압력이 되어 에스터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 또한 평범한 마법사가 아님에야.
검은 세계의 불을 다루는 마녀.
싸우며 투쟁하며 세계를 개척하는 마녀.
진리를 불길로 태우며 깨닫는 탐구자.
스스로를 증명하는 주문을 읊고 고개를 든다.
에스터는 적, 정확히는 마법사 몰센 백작이란 놈이 준비한 것을 보고 파헤쳤다.
모든 마법사가 미친 건 아니지만, 뛰어난 마법사는 반드시 광증을 키운다는 말이 있었다.
에스터는 그 말에 동의했다.
지금 개수작을 부리는 상대 또한 이 말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주술과 주문을 섞었다.’
마나의 흐름 사이에 정령의 기운도 흐른다. 기원하는 힘이 일대를 뒤덮어 상대의 의지를 보였다.
어둠이었다.
몰센 백작은 어두운 공간임에도 그보다 더 짙어 보이는 검은 의자에 앉아, 그을음으로 이뤄낸 망토를 두르고 의자와 같은 빛깔의 새까만 지팡이를 쥔 채로 그녀를 노려봤다.
“막겠다고?”
백작의 의지가 말로 변해 전해졌다. 비웃음이 섞였다. 해 볼 테면 해 보라고.
에스터는 상대의 비웃음에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살피고 또 살폈다.
‘마법진.’
전장 전체를 마법진으로 삼았다. 마법진이라 함은 그걸 그려야 할 소재가 필요하다는 거다.
“탁월하게 미쳤구나.”
깨닫는 순간, 에스터가 말했다. 백작은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입을 열었다.
“알았다고 달라질 것 같으냐?”
놈은 전쟁의 참상과 피와 시체를 마법진의 소재로 삼았고, 그걸 통해 주술을 기반으로 한 주문을 그려 냈다.
그 결과는 무엇이 될 것인가.
눈을 반개하고 주문이 완성되면 일어날 일을 미리 추측해 봤다.
에스터 또한 자신의 세계에서 손꼽히는 천재였다. 그렇기에 가능한 재주였다.
새카만 어둠이 전장 전체를 뒤엎는다. 그리 뒤덮인 세상은 빛을 잃고 캄캄한 의지에 잠식되리라.
이건 혐오스럽게 미친 새끼가 제가 가진 주문 세계를 현실과 연결하려는 수작이었다.
특히 이 부분이 혐오스럽다는 거다. 마법사에게 주문 세계란 무엇인가.
그건 자신의 치부이자 은밀한 공간이며, 절대 남에게 보이거나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금기였다.
몰센 백작은 금기를 무시했다.
‘연결하고 망령을 보낸다.’
마법진으로 빛을 가리고 어둠을 토해 내는 건 결국, 제 주문 세계를 똑 떼서 여기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에스터의 눈은 백작이 앉은 의자 뒤에 머무는 검은 덩어리들도 보았다.
망령이다. 주문 세계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망령.
저 무리가 전장에 풀리면?
망령은 인간의 정신을 침식할 수 있으니, 누구는 꼭두각시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칼을 휘두를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지를 상실한 채로 그대로 죽게 될 것이다.
대부분 광증을 보일 수 있었다.
이건 곧 일어날 현실이었다.
상대의 뜻대로 모든 게 이뤄지면 일어날 일.
이게 바로 백작이 노린 거였다.
전쟁에서의 승리? 필요 없었다.
피와 시신, 죽음만이 필요했을 뿐.
그리 자신의 망령으로 전장을 지배할 것이다.
크랑이 안다면 불같이 화를 내도 무방할 만한 짓이었다.
“막아 볼 테냐?”
백작이 물었다.
에스터는 지금 당장 자신의 주문으로 적들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싸우는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방법 따윈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이 지킬 사람만 빼 오는 거다.
그리해야 할까?
불현듯 든 생각이지만, 엔크리드가 그걸 원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묻겠다.’
엔크리드에게 모든 걸 전하는 거다. 그에게 묻는 거다.
주문을 다루는 이들, 그러니까 에스터를 아는 이들이 안다면 상당히 놀랄 만한 선택이었다.
에스터는 제 의지 일부를 유체로 바꿔서 전장 앞에 있을 엔크리드를 향해 날렸다.
그와 한 해가 넘도록 살을 맞대고 붙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 의지를 실은 유체를 누군가에게 보내려면 그만한 관계가 필요했으니까.
다행히도 에스터의 의지는 엔크리드에게 닿았다.
“물어보고.”
에스터는 답했고, 백작은 눈을 깜빡였다.
뭘 묻겠다는 건가 싶었을 터였다.
* * *
육체를 무기로 삼은 거인.
베눅트의 이명이었다.
엔크리드는 오금이 베인 채로 바닥에 쓰러진 거인의 머리통에 박힌 검을 뽑았다.
오른발로 상대 어깨를 누른 채로 쑥하고 뽑힌 검을 따라 핏줄기가 따라왔다.
거인의 투쟁심은 놀랍고 무서웠으나.
‘아우딘에 비하면.’
허약했다.
베눅트는 엔크리드의 옆구리를 한 번 쳤고 발목을 붙들어 비틀기도 했으나.
엔크리드는 복압을 넣고 옆구리 후리기를 버티며 타점을 흘려 버렸고.
발목이 붙들렸을 때는 돌리는 방향으로 몸을 띄워 돌림으로 상대가 한 짓을 무용하게 했다.
그 뒤는 착실하게 한 칼씩 먹였다.
베고 찌르는 걸 반복했다.
실력 차이가 여실했기에 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사로잡는 검을 기반으로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리 베눅트를 죽인 뒤다.
엔크리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공포에 질린 채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병사가 보였다.
거인을 죽이는 걸 보고 혀를 내두르면 물러가는 놈 대신이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이었다.
‘왜?’
의문이 들 정도였다. 눈은 겁을 집어먹었으며. 다리는 후들거렸다. 엔크리드가 위압의 윌을 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려움이 가득한 눈이었다. 등 떠밀려 덤비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정답이었다.
백작이 보낸 피와 시신이 될 희생양이었다. 죽으라고 보낸 무리였다.
등 뒤의 사람을 지키겠다는 건, 눈앞의 무리에게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다.
엔크리드는 그 또한 알았다.
그럼에도.
‘마음에 안 들어.’
사나울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엔크리드는 겁에 질려 흔들리는 창끝을 손등으로 쳐 내고 창대를 잡아채 빼앗았다.
이제 고작 스물이나 됐을 법한 놈이 창을 뺏기며 앞으로 넘어졌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지도 못하고 턱부터 떨어졌다.
“악!”
비명이 울렸다.
엔크리드는 다음 상대의 창대는 검으로 베어 버렸고, 그 뒤에 있는 상대의 턱은 발끝으로 찼다.
빡.
가볍게 찼음에도 턱이 들리고 눈깔이 돌아가 쓰러졌다.
그렇게 열 몇 놈을 쓰러뜨리니 상대도 더는 덤비지 않았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 공포심이 가득한 눈, 그 두 개가 섞여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돌아가는 동공들.
엔크리드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어가는 이들의 피가.
그들의 살점과 뼈가.
이 땅을 물들이며 흐르는 죽음이.
본능에서부터 시작되어 직감으로 완성된 불쾌감이었다.
‘왜?’
이곳은 전장이고, 이제 전장은 익숙한 곳이다.
등 뒤를 지키기 위해 앞에 선 이들에겐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주변을 보며 경계할 때, 파란 연기 같은 것이 엔크리드의 등 뒤로 다가와 닿았다.
에스터의 의지를 담은 유체다.
그녀는 엔크리드에게 보고 듣고 파악한 것을 전했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에스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했으니.
그녀가 전한 말, 백작의 벌이는 개짓거리가 불쾌감의 정체였다.
마법진이 뭔지, 정작 백작이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지만,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새끼가 바라는 걸 방해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장을 자신의 도구로 삼았다고 하니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음은 당연했고.
발길을 돌려 적군 사이를 파고들자, 적병이 길을 텄다.
어지간해야 덤비지 아무리 독전관이 등 뒤에서 칼을 쑤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막 거인을 죽인 뒤다. 붉은 피가 흐르는 마물이라는, 일반 병사가 보기엔 무지막지한 괴물과도 같은 제 지휘관을 죽인 자가 걸어왔다.
겉보기엔 평범한 검사처럼 보이지만 그가 보인 무력이 그를 평범하게 보이지 않게 했다.
그렇게 열린 길이다.
그 반대편으로 리어바르트가 나섰다.
“베눅트도 상대가 되지 않는구나.”
“알면서 보낸 거 아니었나?”
“그랬지.”
“진즉에 나섰어야지.”
엔크리드는 리어바르트를 나무랐다. 어린 학생을 혼내는 투였다. 실제 화가 나기도 했고.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태도이니, 당연히 도발이었다.
리어바르트는 이런 순간에도 자신이 귀족이었다는 사실 탓에 화가 나긴 했다.
본래 말로 상대의 속내를 뒤집는 건 자신의 특기인데도 말이다.
“네놈의 혀는 참…….”
“닥쳐라. 변명 따윈 듣지 않겠다.”
엔크리드는 리어바르트의 말을 잘랐다.
“진짜 개자식이로군.”
리어바르트가 웃음기 하나 없이 말하고, 엔크리드는 검을 들었다.
넘지 않으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때까지도 유체화로 엔크리드의 상황을 보던 에스터는 마음을 통해 엔크리드의 뜻을 읽었다.
물러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의지다.
막는다. 막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에스터에게 닿았다.
그녀는 그 의지를 듣고서 말했다.
“지면 안 되느니.”
여기서 지고 물러나면 백작을 막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엔크리드는 검을 들었다. 실버를 양손으로 쥐고, 검날을 기준으로 상대를 세로로 양분하듯 보았다.
이전의 싸움에 관한 복기는 끝나자마자 종일 했다.
고기를 씹으면서도 자면서도 잠에서 깨서도 싸우면서도 했다.
지루함 따윈 없었다.
오히려 즐거웠다.
넘어서야 할 상대였다. 그러므로 즐겁다. 상대함으로 더 나아갈 기회이므로.
하물며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길 수 있다.’
이제껏 승리를 자신한 경우가 몇 번이나 될까.
그것도 저런 출중한 실력을 갖춘 상대를 두고서 말이다.
오늘의 반복을 염두에 두고 싸운 적은 없으나.
엔크리드는 반복 따윈 없으리라 생각했다.
“부럽군.”
리어바르트는 뜻 모를 말과 함께 검과 방패를 들었다.
방패를 위로 세워 제 입가를 가리곤 눈만 드러냈다.
싸울 준비가 끝났다.
전과 같은 양상의 싸움이 되리라.
지난번에도 둘의 결투를 지켜본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착!
엔크리드는 갑자기 검을 집어넣고 앞으로 뛰었다.
방패를 든 리어바르트가 예상외의 동작에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방패를 몸쪽에 당기고, 검을 든 손까지 숨겼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양손을 뻗었다.
어느새 꺼내 든 휘슬 대거가 소리를 토해 냈다.
삐이익!
두 줄기 빛살이 드러난 눈깔을 향해 날았다.
따당!
리어바르트는 급히 방패를 들어 눈을 가렸다.
‘시야를 가려?’
눈을 가렸다고 해서 적의 움직임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준기사는 감각조차도 예민한 법이니까.
리어바르트의 몸이 뒤로 돌았다. 엔크리드는 어느새 옆으로 우회하며 검을 던졌다.
탄검식이라 불리는 기예였다.
막 리어바르트의 등을 향해 글라디우스가 원반처럼 변해선 날아들고 있었다.
방패로? 그럼 늦는다. 리어바르트는 전신에 두른 갑옷의 튼튼함을 믿었다.
그는 등만 살짝 돌려, 체술의 묘기를 보였다.
갑옷으로 날아온 검의 타점을 흘리는 기술이다.
몸통으로 하는 흘리기다. 엔크리드가 아우딘에게 배운 것과 상통하는 기예였다.
땅!
두 번째 공격도 튕겨 나갔다.
거기서 엔크리드는 위로 뛰어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꽝!
이번에는 방패로 막았음에도 리어바르트는 팔뚝까지 힘의 여파가 전해지는 걸 느꼈다.
몸이 밑으로 푹 꺼지는 것도 같았다.
어찌 된 게, 엔크리드란 놈은 전보다 더 힘이 세진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단검 던지기로 공격 기회를 잡았고 글라디우스로 상대의 동작을 제한했으며, 다시 중검식 회전 종베기를 통해 상대를 두드렸다.
당연히 여기서 멈추지도 않았다.
무호흡 세계다.
일전에 한 번 승기를 잡은 적이 있으니, 곧바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형태의 전장으로 끌고 들어간 거였다.
그게 먹혔다.
본래라면 종일을 싸워도 버틸 수 있을 리어바르트였으나 수십 번의 검격을 교환하며 수비에 치중하다가 호흡이 흐트러졌다.
상대는 그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았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런 몸뚱이를 가졌나 의심이 갈 정도로.
그리 생긴 빈틈에 불티가 비집고 들어가 리어바르트의 배를 헤집었다.
갑옷의 틈새를 노린 찌르기가 내장 일부를 벴다.
리어바르트는 곧바로 방패를 휘둘러 엔크리드를 후려쳤다.
조금 전 찌르기를 위해 엔크리드도 무리한 셈이었기에 피할 수 없었다.
뻑.
방패에 맞은 엔크리드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쿨럭!”
그리고 리어바르트는 피를 토했다.
승패가 갈린 셈이었다.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까맣게 죽은 눈깔, 죽은 생선과 비슷한 눈깔이었다.
“후우, 정말 부럽군.”
리어바르트가 다시금 뜻 모를 말을 뱉었다.
알 바 아니라 생각하고 검을 들 때다.
“어떻게 하면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리어바르트가 물었다.